비타협의 정신으로 일어나
증 언 자 : 유형근(남)
생년월일 : 1962. 11. 21(당시 나이 18세)
직 업 : 대학생(현재 건축기사)
조사일시 : 1988. 9
개 요
5월 21일 1시 트럭을 타고 도청을 향해 돌진하다 가슴 관통상을 입었다.
1980년 대학에 입학, 입영훈련을 받고 일주일 동안 쉰 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학내외의 계속되는 성토대회에 처음엔 호기심도 있었지만 '박정희 유신정권의 비리, 부마사태, 박정희 음모'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박정희 죽일 놈'이고 유신잔당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민주화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참했다.
5월 14일의 학교행사, 횃불시위 그리고 도청 앞 시위 때는 경찰의 저지도 없었고 시민들의 호응도 좋았으므로 이렇게 전국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가득하다면 민주화는 멀지 않았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15일의 철야농성과 횃불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8일 골목이 막혀서 도청 앞에 가지 못하고 시내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계속하다 3시경 점심 먹으러 집에 들어갔다. 다시 택시를 타고 광주역 쪽으로 가는데 공수부대가 상당수 보였다. 그때부터 집안에서 만류해 삼일간 밖에 나가지 못하여 시민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21일 오전 11시경 집 앞을 지나다니는 시위차량에 합류했다. 30여 명이 화물차에 타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고 난간을 두드리면서 시위했다. 시위 도중 시민들이 김밥, 담배를 나누어준 것이 감사하는 마음과 비장한 결심을 갖게 했다. 절도있고 침울한 마음이 생겨 김밥도 차마 못 먹었다. 모두 광주역 앞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고 도청 앞으로 진격했다. 분수대에서 군용트럭이 불타고 있었다.
계엄군이 도청 분수대 앞에서 막고 있었는데 맨 앞에 장갑차가 가고 그 뒤로 트럭이 줄을 이었다. 장갑차가 밀고 가자 공수부대가 흩어지면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장갑차와 다른 트럭들이 분수대를 돌아 빠져나오는데 총 소리와 총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는 전일빌딩 앞에서 총을 쏘았다. 타고 간 화물차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자 도청으로 진격하려는 군용트럭에 타려고 도로로 뛰어내렸을 때 등에 총을 맞아 쓰러졌다. 바로 그때 시민들이 화물트럭에 실어 대인동 소아과병원으로 옮겨주었다. 병원에 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결국 죽고 말았다. 검진을 하고 X-Ray를 찍으니 총알이 박혀 있었다. 집에 연락이 되어 매형이 업고 기독병원으로 가던 중 트럭이 한 대 와서 그걸 타고 기독병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 곧 죽는다는 생각에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동안 살아온 과정들을 생각해 보니 가족, 형제,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부모님 말씀대로 나오지 말걸하는 후회도 들었다.
수술이 끝나고 분만실에서 회복되어 8병동으로 옮겼다. 그때 시민들이 목장에서 짠 우유를 양동이에 담아다 주기도 했다.
26일 새벽에 총소리가 들리고 계엄군이 들어오면 환자를 모두 죽인다는 소문이 돌아 병원의 불을 모두 끄고 있었다는데 나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헛소리도 했다고 한다. 다음날 계엄군이 병원에 들어와 환자들에게 어떻게 다쳤는가 등을 조사했고 다음엔 형사들이 와서 조사했다. 총상 환자가 여섯 명 정도 있는 병실로 옮겼는데 시위하다 다쳤다고 해버려서 형사들이 누구와 시위를 했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으며 통합병원으로 데려가느니, 폭도라느니, 죽여버리겠다느니 따위의 폭언과 위협을 했다. 그때 어머니가 봉투를 줘서 조사가 좀 완화되었다.
병원에서 3개월 동안 누워만 있었고 그 후에는 물리치료사가 와서 앉거나 서보기도 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 12월 초 퇴원해 집안에서 약 2년간 있었다. 1983년 전남지역개발협의회에서 1천만 원을 보상받았다.
1980년 당시엔 상황이나 학생들의 주장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순히 계엄군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차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내가 왜 다쳤는가? 왜 그들이 총을 쏘았는가 등을 알게 됨으로써 비록 불편한 몸이 되었지만 뭔가 할 일을 찾아 실천하고 있다. 물질적인 보상이 아닌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이 백일하에 밝혀져야 한다.
나는 1982년 복학하여 목발로, 혹은 오토바이를 타고 힘들게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데모를 할 때면 함께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서클생활도 못 했으며 오로지 수업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부상자회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로 처음에는 파출소에서, 동장이, 정보과장이 찾아오고 식구들을 설득했으나 타협하지 않았다.
5·18 이후 생활은 형님들이 막노동 하면서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나는 형님에게 돈을 타다 쓰는 형편이므로 건강해진다면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고 싶다. (조사.정리 박현숙)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 합니다.
행복한 휴일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