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 이세민과 충신 위징(魏徵)

당 태종 이세민(599~649)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다.이세민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이연이 濟世安民(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의 뜻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세민은 부친 이연이 태원유수로 재임(617년) 시 돌궐 토벌전에서 많은 병력을 잃고 수 양제로부터 소환을 당하자 천하를 평정할 욕심을 품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함께 반란을 주도한다.
이연 부자는 618년 5월에 수양제를 살해하고 그의 손자 恭帝를 협박하여 선위를 받아 이연이 황제에 등극하면서 당나라를 건국한다.
626년에 이르러 이세민은 고조 이연의 후계 자리를 놓고 형제들과 암투를 벌이던 중 태자였던 큰형 이건성이 넷째 동생 이원길과 모의하여 자신을 제거하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선수를 친다.
어명을 통해 형제들을 모두 입궐케 하도록 한 뒤, 북문인 현무문에 배치시켰던 복병으로 하여금 태자 이건성과 원길을 살해한다.
이에 고조는 3일 뒤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 퇴위한다. 결국 권력을 잡기 위해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패륜을 범한 것이다.
※ 조선 태종이 태조 이성계가 병석에 눕자 계비 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방번, 방석 형제를 제거했던 1차 왕자의 난과 비슷하다.
형제의 난을 통해 황제가 된 당 태종은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나누어주는 조용조 제도로 세금을 걷고, 유학에 바탕을 둔 문치를 내세우며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징병제를 채택한다.
또한 즉위 이전의 부하들이 자신들의 지위가 건성이나 원길의 부하였던 자 보다 낮은 경우가 생기는데 불만을 표하자, ‘군왕은 至公無私해야만 천하의 민심을 얻을 수 있다. 능력이야말로 관리를 등용하는 기초가 되어야 하며, 군주와 신하의 신구인연이 관직의 상하를 결정해서는 안된다’며 설득한다.
정치의 요체는 오로지 인재를 얻는데 있다는 爲政之惟在得人을 갈파한 것이다.
이후 23년간 정관의 치를 이뤄 당나라(290년)는 물론, 중국 4,000년 역사의 가장 영명한 군주라는 역사가들의 평가를 받는다.
위징(580~643)은 수나라 하북성 곡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가족을 모두 잃고 출가하여 도사가 되었다고 한다.
수나라 말기 이 밀의 부하가 된 뒤, ‘역사를 아는 자는 무너지는 담장 밑에 서지 않는다’며 당 고조 이연에게 귀순했다.
621년 위징은 고조의 장자인 이건성의 태자세마가 된 뒤 황제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던 이세민의 축출을 도모한 일이 있었다.
황태자와 형제들을 살해하고 즉위한 이세민으로부터 그 때의 일을 추궁받은 위징은 ‘황태자께서 신의 말을 따랐더라면 오늘과 같은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하가 주군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고 답변한다.
이에, 이세민은 위징의 소신과 용기, 직간 할 줄 아는 점을 높이 사 간의대부(감사원장)를 거쳐 재상으로 중용한다.
※ 진나라 義士 예양 :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이후 위징은 당태종 이세민의 충신이 된다.
위징은 신하가 간언을 안 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간하면 자신이 위태롭다는 교훈을 잘 알고 있었고, 당태종 또한 평소 위징에 대해 ‘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고 인덕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짐의 거울이다’고 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운 관계로 발전한다.
위징은 태종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원리는 민심을 얻는 데 있다고 끊임없이 역설하는 한편,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한다는 居安思危를 인용하여 스스로 경계를 촉구한다.
※ 공자 : 식량과 군사는 바로 해결할 수 있지만, 한번 흩어진 민심은 좀처럼 다시 얻기 어려운 법이다.
※ 맹자 :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면서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을 얻어야 하고, 백성을 얻으려면 민심을 얻어야 하며, 민심을 얻으려면 백성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고 싫어하는 일을 적극 피해야 한다.
※ 순자 :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하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 있다. 민심을 잃으면 천하도 잃게 된다.
또한, 良臣과 忠臣의 차이를 묻는 당 태종에게 ‘양신은 군신이 합심해서 천하를 태평성대로 이끌고 그 자신은 후세에 추앙 받으며 군주는 성군칭호를 얻게 되나, 충신은 군주의 잘못을 간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일족이 주살 당하고 군주는 폭군으로 떨어지고 나라는 멸망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 공자는 공자가어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는 방법을 5가지로 분류하면서 풍간을 가장 이상적인 간언으로 보았다.
譎諫(휼간)은 궤변으로군주를 깨닫게 하는 것
戇諫(당간)은 어리석으나 꾸밈없이 간하는 것
降諫(항간)은 자신을 낮추면서 간하는 것
直諫(직간)은 거리낌 없이 간하는 것
諷諫(풍간)은 완곡한 표현으로 빗대어 풍자해 간하는 것.
어쨌든 당 태종은 200여 차례에 걸쳐 위징의 목숨을 건 간언을 모두 받아 들인다.
재위 16년이 되던 해에 당태종은 위징에게 신하들의 간언이 뜸해진 이유를 묻자 위징은 “즉위 초기에는 신하가 혹 바른 말로 꾸짖어 주지 않을까 걱정하시어 간언을 올릴 기회를 많이 주셨고, 또 누가 간언을 올리면 폐하를 비판하는 데도 불구하고 기뻐하셨다. 그러나 몇 년 뒤부터는 간언을 받아들이기는 해도 기뻐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내심 억지로 받아들이며 내심 불쾌해 했다.”고 고한다.
또한, “의지가 약한 자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다. 측근이 아닌 자는 신임 여부를 몰라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지위에 연연해 하는 자는 말을 실수해서 지위를 잃지 않을까 하여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위징과 함께 당태종을 성군으로 만든 사람을 장손황후로 꼽늗다.
한 번은 위징의 직언에 노한 당 태종이 장손황후에게 위징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말하자 장손황후는 조복(예복)으로 갈아 입은 뒤 편전에 들어와 태종에게 넙죽 절을 하면서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 하였으니, 위징이 곧은 것을 보니 폐하의 밝음이 드러나는지라 경하드린다’고 하여 위징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다.
장손황후 또한 역대 왕조에서 내조의 공이 가장 큰 현처로 손꼽히나, 36세에 요절하고 만다.
당 태종은 위징 이외에도 충신들을 아끼는데 남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돌궐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충신 이적이 병들었을 때 수염을 태운 재를 먹으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수염을 잘라줄 정도였다고 한다.
위징이 죽은 뒤에 당 태종은 5일간이나 조회를 열지 않고 친필로 비문을 써 주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이지만, 간신배들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위징의 비를 넘어뜨리고 만다.
위징 사망 2년 후인 645년에 당태종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수 천 리를 행군한 끝에 안시성에서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맞아 60일 만에 패주하는 신세가 되는데 이 일은 정관의 치에서 유일한 오점으로 기록된다. 그럼에도 양만춘 장군에게 비단 100필을 건네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심을 치하했다고 한다.
안시성에서 패배하고 돌아오던 당 태종은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고구려 침공을 말렸을 것’이라고 탄식하면서 위징의 비를 다시 세우고 처자들에게 하사품을 내렸다. 649년 이질을 앓던 당 태종은 5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당 태종의 제왕학을 요약하면,
첫째, 자신에게 아첨하는 자가 적이라는 순자의 가르침을 평생 간직하며 신하의 간언에 귀 기울였다는 것,
둘째, 군주가 솔선하여 자신의 자세를 바르게 하면 신하도 그것을 배워서 옷깃을 여민다는 솔선수범,
셋째,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적까지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는 위대한 포용력과 공과에 따른 엄정한 신상필벌,
넷째, 백성은 군주가 도가 있을 때 섬기지만, 무도하면 버리고 쓰지 않으므로 백성을 먼저 온전하게 해야한다는 왕도정치와 민본정치,
다섯째, 군주가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無爲政治이다.
유럽의 명장 시이저나 나폴레옹이 말년에 실패하고 만 것은 주위에 간하는 측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율곡 이이는 국가 경영의 근본은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의 세가지라며, 병과 약의 상관관계로 풀이한다.
경장이란 높은 식견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임금과 신하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렵다.
수성을 해야 할 때인데 경장에 힘쓰면 병은 없는데 약을 먹는 격이어서 없던 병이 생기게 되고, 경장을 해야 하는데, 수성에 힘쓰면 이는 병이 걸렸는데 약을 물리치고 누워서 죽기를 기다리는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