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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선평화학교 벽보 |
민통선. 군 작전지역으로 민간인들은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2011년 10월, 나는 민통선 안에 세워진 ‘DMZ평화문화광장’ 준공식에 앉아서, 이 멋진 빌딩이 평화학교로 쓰이길 기도했다. 민간인들이 자유로이 드나들기 어려운 군 작전지역 안에서 평화학교 운동이라니, 어림없는 일 같지만 기도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랴. 소이산에 오를 때마다 멀리 민통선 안 남방한계선 옆에 세워진 이 멋진 센터 건물을 평화학교로 사용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평화학교 예비교실을 하면서 커리큘럼과 교수진을 마련하고 개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 강원도청 DMZ 담당 공무원들이 찾아왔다. “DMZ평화문화광장을 평화학교로 사용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몸에 전율이 왔다. ‘아,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아무것도 없이, 사전 조사도, 준비도, 살 집도 없이, 오직 ‘가라’는 음성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들어 온 철원에서 나는 한 조각 땅도 없이 평화학교를 열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피스메이커를 육성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낯선 땅, 맨손이었지만 가슴은 뜨거웠다. 찾아오는 친구들은 여러 가지 일로 염려했다. 이때 나는 가슴 속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곤 했다.
― 이 일은 내 일이니 네가 염려할 거 없다.
늘 든든했다. 과연 그랬다. 최신식 멋진 건물, 남북한 분단의 현장 민통선 최전방 안에 평화통일을 준비하는 평화학교를 열게 되었으니, 감격이었다. 잔칫상은 마련했는데 학생은 얼마나 올까? 열 명이면 감당할 만한 시작이라 믿었다. 딱 열 명이 왔다. 피스메이커들.
처음 걷는 길. 어떤 내용으로 공부하고 훈련해야 하는가? 우리 분단 상황에 적합한 훈련과정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길을 찾았다. 어느 길이든 처음 그 길을 걸은 사람이 있었다. 평화학입문, 남북한평화, 평화구호 봉사실천, 평화운동 영어, 평화현장 순례. 하나씩 하나씩 길을 만들어본다. 3년은 같이 가야 한다. 그래야 동지가 될 수 있다. 아, 예수님의 제자 교육 기간도 3년이구나.
학교 가는 길은 군인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공부를 마치면 다시 검문소를 거쳐 마을로 나온다. 검문소 군인들은 우리를 통과시키며 “북상” “남하”라고 외친다. 북상하고 남하하는 길이 어느덧 5년째이다. 처음보다는 훨씬 익숙하다.
민통선 지역 안에서 남북한 평화의 꿈 이야기를 들은 유태인 신학자는 말했다. “미친 상상(crazy imagination)이다.”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군 작전지역 안에서 평화의 꿈을 이뤄보려는 모습이 도무지 제정신 같아 보이지 않았던가 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그이도 마찬가지. 그 또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의 꿈을 꾸면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편에 가담하고 있는 유태인이 아닌가. 미친 꿈에서 우리는 서로 통함을 느낀다. 예수님도 그런 분이 아니었던가(막 3:21).
지금 남한의 최북단 마을, 철원 땅에는 취직의 보장도 없고 평화통일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제 발로 찾아 들어오는 미친 상상의 사람들이 있다.
믿음,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1.
친구가 노가다를 하러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얼마전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하고 한동안 허무감에 시달리더니,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용접 학원을 다녔다. 그러더니 천안으로 몇 주간 노가다 일하러 간단다. 나이 육십이 낼 모레인데 억척스레 일하러 가는 친구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노가다 나가는 친구의 소식을 들으면서 철원 생활을 더 잘해야겠다 결심한다. 노가다 하듯 온몸으로 기도해야겠다. 노가다 하듯 남북평화통일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국경선평화학교 일도 노가다 일 못지않게 열심히 땀흘리며 해야 할 것이다. 친구가 나를 다시 세워일으킨다. 오늘 밤 노가다 일 나가는 친구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2.
오늘도 변함 없이 소이산을 향해 사무실을 나선다. 몇 가지 이메일 답신을 처리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가 있다.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하루 빠질까 싶은 마음이 스친다. 아니지, 날이 밝은 한 가야지.
소이산 가는 길은 마을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길이다. 그 길을 앞서 두 사람이 걷고 있다. 일본에서 온 승려다. 노란 승복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매일 철원 마을길을 목탁 치며 걷는다. 3년 동안 변함없이 오전에는 마을 안으로, 오후에는 북쪽 민통선 노동당사 길을 걷는다. 일본에 있는 스승이 한반도가 분단된 것은 일본 사람들의 책임이므로 가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남북한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매일 걸으라고 했다 한다.
젊은 승려 이름은 이꼬.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어머니가 와서 같이 걷는다. 아들을 따라 한국 땅 분단의 마을에서 매일 목탁을 치면서 걷고 있다. 오늘도 이들은 걷고 있다. 가슴이 뭉클 한다. 타국 땅, 한국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받는 최북단 춥고 가난한 전방 마을에서 매일 평화를 기원하고, 통일을 기원한다.
아픈 날을 제외하곤 하루도 빠짐없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이기에 저리 신비한 삶의 모습을 만드는가. 그이들은 믿을 것이다. 그이들이 목탁을 치고 걸을 때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온다고. 매일 꾸준하다. 고맙다. 저들 국가가 잘못한 것을 저들이 저렇게 회개하고 그 죄값을 씻고자 하는구나.
오늘 소이산을 오르는 길은 콩고와 아이티에서 온 학생, 아르센과 엘나와 함께다. 다른 한국 친구들은 집에 가고 출타 중이다. 엘나는 오후 낮잠을 잔 듯 졸린 눈이다. 집에서 쉬라고 해도, 아니란다, 같이 가겠다 한다. 함께 가겠다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
꾸준하게 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얼굴이다. 믿음은 꾸준함이다. 날씨에 따라, 감정에 따라, 일상 생활 조건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꾸준하게 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실체이다.
소이산 기도 1
― 초심을 간직하라. 그날, 처음 소이산을 오르던 때와 마음이 여전한가? 지금이나 그때나 같으냐?
엄중한 물음이다. 주님께 감사한다. 깊이 기도한다. 평화통일, 민족 치유, 재식 인천 윤자 드보라 선민 정오의 치유를 위해기도한다.
소이산 오르는 길에 대포소리, 사격 훈련 총소리가 들린다. 쉬이~~펑, 바람을 가르는 저 쇳소리는 작년 그날, 안개 낀 어느 겨울날 철원문화복지센터 앞 마당에서 처음 들었던 그 소리다. 나의 기도는 더욱 뜨거워지고 간절해져야 한다
소이산정에서 보니 환한 햇살이 북녘 땅에 쏟아져 내린다. 민통선 철원 들판과 비무장지대와 북녘 평강고원, 고암산으로 짙은 구름 사이로 빗살처럼 내리비취는 햇살이 신비하다. 마치 북녘 땅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내리 비치는 듯하여 일어서서 기도한다.
‘주님 북녘 땅을 축복하소서. 북녘의 사람들 모두 축복하소서. 남녘 사람들 같이, 아이들에서 노인들까지 임산부들과 태중에 있는 아기들까지 모두 축복하소서. 남녘-북녘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소서. 공산주의자들이든지 자본가들이든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 아닙니까. 똑같이 축복하소서. 저 산속에 있는 젊은 병사들, 남쪽 병사들이든지 북쪽 병사들이든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 축복하소서.’
기도를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조용히 앉는다. 앉아서 주님 음성을 기다린다. 바람소리, 멀리 사람소리, 산밑으로 달리는 자동차 소리, 대포 훈련 소리가 섞여 들린다.
더 조용하게, 마음을 조용하게 집중한다. 주님 음성 듣고자 마음을 모아 귀 기울인다. 나뭇가지에 부딪치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조용한 가운데 주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지켜본다.
문득, 엘리야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그이도 이렇게 주님 소리에 귀 울이고자 했던 것이구나, 엘리야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나님에게 붙잡혀 산 사람들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예언자들이란 이렇게 산 사람들이었구나, 깨달음이 새롭다.
그렇게들 살다 간 것이구나. 문자로 읽고 듣던 성서의 예언자들, 예언자적 영성이란 말의 속뜻을 깨닫고 체험한다.
정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