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線과 禪의 사이-미학: 고월 이장희의 시
김상환
1.
고월 이장희(1900~1920) 시인이 1926년「겨울의 暮景」(『新民』9호),「봄하늘에 눈물이 돌다」(『黎明』7호),「夏日小景」(『新民』16호),「들에서」,「눈」(『新民』19호)을 발표한지 올해로 백년을 맞이한다. 전차와 백화점이 고속철과 이커머스로 바뀐 지금, 시간의 흐름과 사물의 변화는 무상한 우주의 비밀이며, 운행(運行)으로서 시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아름다움은 객관과 주관, 이성과 감성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사건, 즉 존재사건(Ereignis)이 일으킨 빛의 파문이다. 하여 변화무쌍한 존재를 드러내는 최고의 방식이 포이에시스(Poiesis, 고정된 정의를 거부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창작 일반. 퓌시스Physis는 가장 높은 의미의 포이에시스)라면, 시는 지상의 인간이 고안해 낸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마음의 무늬와 결이자 행역(行易)이다.“내가 古月, 尙火의 시를 유달리 사랑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내가 걸어갈 시의 미래를 보고, 花郞의 피가 숨어 흐르기 때문이다. 고월의 시에는 아가씨와 우물과 나귀와 목동과 국화 향기 속에 파묻힌 옹달샘이 있다. 고독의 저 언덕 넘어로 푸른 바다 같이 넘실거리는 상상의 바다가 있다.” 고월과 그의 시가 남긴 자취엔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2.
고월은 스물 아홉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시의 감각과 언어를 선취한 바 있는 ‘시도(詩道)의 퓨리턴’이다. 담담여수(淡淡如水)한 생활을 즐기며 두보와 추원삭태랑, 예이츠와 변영로의 시를 좋아하고,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를 즐기며, 서화에도 능한 고월의 시와 예술은 오직 아는 자라야 알 것이다. (백기만의 말처럼) 그는 로맨티스트도 리얼리스트도 휴머니스트도 아니며, 그렇다고 데아볼리스트도 아니다. 인상파도 표현파도 아니며, 데카단도 다다도 아니다. 그는 어떠한 유파에도 구애되지 않는 독자적인 상징 시인이요 환상의 시인이다. 그런가하면,「봄은 고양이로다」의 시인으로만 우리가 고월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인 이해가 될 수 있다. 영원한 신비와 유현(幽玄) 속에서 미와 안식을 구하던 고월(의 문학활동)은 1924년『금성』5월호에「실바람 지나간 뒤」,「새 한 마리」,「불놀이」,「무대舞臺」,「봄은 고양이로다」등 5편의 시와 톨스토이 원작의 번역소설「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 비롯된다. 그는 1918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 조선시에 부족한 것은 정서가 아니라 지성과 감각이라고 믿으며, 유학을 통해 얻은 미학적 도구를 통해 식민지 조선 지식인-시인의 슬픔과 허무를 드러낸다. 이후 근대적 전통을 기반으로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고월은 김영랑, 정지용, 이상과 함께 한국근대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와 영역을 확보한다. 애닯고 쓸쓸하고 고요한, 스플린(spleen)하고 멜랑콜리(melancholy)한, 도회적이고 환상적인 시의 감각과 방법은 고월 이전엔 미처 경험하지 못한 미답의 영역이다. 백금사(白金絲)같은 신경(神經)과 메쓰 같은 良心의 소유자인 고월에게“시는 푸라치나線이라야 한다. 광채 없고 탄력성 없고 자극성 없는 굵다란 철사선은 시가 아니다.” 라는 특유의 백금-선의 시론을 펼친다. 흰빛의 유연하면서도 초감각적인 백금의 선(線), 그리고 명상적인 선(禪)의 미학도 그렇거니와, 그는 또한 박연(博淵)의 시인이기도 하다. 널리 배우고(博) 깊이 성찰하는(淵) 마음으로서 글과 인격의 넓이와 깊이를 도모하는 방법 이전의 태도를 문제삼은 고월의 다음 시편을 보자.
고요한 이 한밤에/ 이웃의 늙은이는/ 고담책을 읽는고야.// 이따금 개구리는/ 앞내서 우는고야/ 개골개골 우는고야.// 잠 못 이루는 나는/ 흰 벽을 바라보며/ 옛생각에 잠기나니. (「적은 노래」전문) ① (제해만 편,『이장희 전집-봄과 고양이』, 문장, 1982. 이하 같음)
밤마다 울던 저 벌레는/ 오늘도 마루 밑에서 울고 있네// 저녁에 빛나는 냇물같이/ 벌레 우는 소리는 차고도 쓸쓸하여라// 밤마다 마루 밑에서 우는 벌레 소리에/ 내 마음 한없이 이끌리나니 (「벌레 우는 소리」전문) ②
①,②는 모두 소리의 심상이 주가 되어 있다. 개구리 소리나 귀뚜라미 같은 미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장면은 과거 한시에서도 두루 산견된다. ①에서는 고담책을 읽는 노인이나 옛 생각에 잠긴 모습, 인간과 자연의 조화(노인의 독송과 개구리의 울음소리), 밤의 혼돈(잠 못 이루는 나) 속에서 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특히‘흰’의 사유와‘벽’의 경계는 시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더하는데, 특히 벽은 야기 세이이치에 의하면, 프론트(Front)로서 나누고 잇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프론트 구조에서 즉(卽)이 발생한다. 즉은 이다[is]와 아니다[is not]를 동시에 의미한다.(A卽非A)그랬을 때 옛날은 더 이상 옛날이 아니며, 적은-작은 노래 역시 적은-작은 노래가 아니다. ②에서 울음은 하나의 울림으로 다가온다.저녁에 빛나는 냇물때문이다. 밤이면 밤마다 화자인 내가마루 밑에서 우는 벌레 소리에 마음(이) 한없이 이끌리는 것도 검은빛 때문. 그 빛의 소리, 소리의 빛은 중묘지문(衆妙之門)으로서 현(玄)이다. 아름답고 깊은 것은 밝은 어둠으로서 묘하게 겹쳐져 있다.
3.
큰 거리는 저물은 연기에 젖어 動靜이 몽롱하고
녹슬은 무쇠 같은 鈍重한 냄새가 잠겨 흐른다
그러나 가다가는 앓는 소리 은은한 電車가
물오른 풀잎 같은 뾰죽한 神經을 드러내고
때아닌 푸른 꽃을 虛空에 날리기도 한다
길바닥은 얼어서 죽은 구렁이같이 뻗으러졌고
그 위를 세찬 바람이 돛을 달고 달아나면
야릇한 군소리가 눈물에 떨어 그윽히 들린다
잘 지절대고 하이칼라인 제비의 幽靈이
불룩한 검정 外套를 휘감고 비틀거리는 사이에 있어서
흐린 銀결같이 희스름한 옷 그림자가 고요히 움직인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너머로 핏줄 선 눈알같이 불그레함은
마지막으로 넘어가는 날볕의 얼굴이 숨어 있음이라
이들 눈에 드는 모든 것이 저마다 김을 뿜어서
그는 幻燈의 映寫膜이며 沈鬱한 뎃상을 보는 듯하다
-「겨울의 暮景-都會詩篇」전문 (『新民』1926.1)
고월의 시에는 춘하추동의 사계(四季)가 골고루 드러나 있다. 겨울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겨울밤」(“눈비는 개었으나/ 흰 바람은 보이듯 하고/ 싸늘한 등불은 거리에 흘러/ 거리는 푸르른 琉璃廠/ 검은 銳角이 미끄러 간다.”~)과「겨울의 暮景-都會詩篇」이 특징적이다. 전자의 경우 도회의 겨울밤은 유무(有無)가 겹쳐진 색채의 복합 감각이 우선 돋보인다. 그리고 어둡고 깊고 서늘한 자아의 분열은‘검은 예각’을 통해 두드러져 있어 일종의 퀄리아(qualia, 감각질)를 엿보게 한다. 후자의 시는 도회의 겨울밤 풍경이 하나의 뎃생처럼 그려져 있으며, 이렇다할 감정의 개입 없이 응시와 관조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환(幻)의 세계와 자아는 침울하고 몽롱하며, 흐리고 희스름한 옷 그림자처럼 숨어 있다. 녹슨 전차가 앓는 소리를 내고,“물오른 풀잎 같은 뾰죽한 神經”을 드러내며,“푸른 꽃을 虛空에 날(린다)”이 고통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는가?‘제비의 유령(幽靈)’이 갖는 사이의 사유와 이미지는“저녁의 공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며 허공을 지배한다.” 근대 도시인의 불안을 첨예한 감각으로 표출한 이 시는 해질 무렵, 언 땅과 차가운 금속성의 전차에서, 그리고 한 해의 끝에서 주어진다는 사실. 이 겨울 저녁의 묵시록적 풍경은 희미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시간이며, 실존과 현실을 잇는‘세련된 슬픔’이자 그의‘삶 전체’이며, 백년 전 한 지식인(시인)의 내면 풍경이다. 다음 시편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雲母같이 빛나는 서늘한 테이블.
부드러운 얼음, 설탕, 牛乳.
피보다 무르녹은 딸기를 담은 琉璃盞.
얇은 옷을 입은 저윽히 고달픈 새악시는
기름한 속눈썹을 깔아메치며
가냘픈 손에 들은 銀사슬로
琉璃盞의 살찐 딸기를 부수노라면
淡紅色의 淸凉劑가 꽃물같이 흔들린다.
銀사슬에 옮기인 꽃물은
새악시의 고요한 입술을 앵도보다 곱게도 물들인다.
새악시는 달콤한 꿈을 마시는 듯
그 얼굴은 푸른 잎사귀같이 빛나고
콧마루의 水銀 같은 땀은 벌써 사라졌다.
그것은 밝은 하늘을 비추인 작은 못 가운데서
거울같이 피어난 蓮꽃의 이슬을
헤엄치는 白鳥가 삼키는 듯하다.
-「夏日小景」전문 (『新民』1926.8)
인용시에는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에 피보다 진한 딸기가 담겨 있고, 새악시는 그것을 부수어 먹는다. 고월의 여름은 이렇듯 온전히 신체로 경험되는 계절이다. 이 감각의 복원과 신체가 갖는 현재성은 어떠한 외부적 정황도 개입시키지 않고 있다. 하여 배경으로부터의 절연이 이 작품의 묘사를 더욱 투명하고 구체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 시에 동원된 사물들은“雲母, 얼음, 설탕, 牛乳, 琉璃盞. 銀사실, 水-銀, 이슬, 白鳥”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푸라치나 선의 흰빛-은빛을 지니고 있다. 화이트(white)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와 몽상의 길로 인도하는 빛과 색이다. 이 시의 후반부(“밝은 하늘을 비추인 작은 못 가운데서/ 거울같이 피어난 蓮꽃의 이슬”)에서 보면, 이는 고월의 선(線, 禪)의 미학과 세계를 방불케 한다.“李君은 詩作에 있어 禪機로 날을 삼고 俳味로 씨를 삼았다”는 공초 오상순의 지적이 바로 그것. 여기서 선기(禪機)와 배미(俳味)의 결합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기품과 운치와 음영이 있는 동양의 예술과 문학(특히, 선시나 하이쿠)에서 절묘하게 결합된다. 즉 억지스러운 진리 추구(禪機)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여유와 유머(俳味)를 곁들일 때 진정한 깨달음과 예술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못과 거울의 이미지로서‘심인(心印)’은 연꽃에 맺힌 이슬과도 같이, 그 이슬을 삼키는 백조와도 같이 절대의 흰-마음을 드러낸다.
경(景)의 유무를 통해 명암의 대비를 드러낸「겨울의 暮景-都會詩篇」과「夏日小景」이외에도 작품 발표 100년을 맞이한 시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과 동경(憧憬)을 노래한「봄하늘에 눈물이 돌다」, 성속(聖俗)의 대비와 자기 성찰의 시「눈」, 그리고 들과 하늘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며 푸른 빛의 변화를 묘사한「들에서」가 있다. 여기서 블루의 이미지는 고월의 시에 다양하고 유니크한 이미지로 드러나 있다.(“푸른 달-빛, 푸른 하늘, 푸른 꽃, 푸른 고양이, 푸른 잎사귀, 푸른 유리창, 푸른 손가락”등). 고월의 블루는 중력과 은총을 나타내는 선(線)과 선(禪)의 사이-미학으로서 사물과 마음 사이를 넘나드는 하나의 구멍이며, 부재의 현존이자 감각적 실체에 해당한다.
4.
고월은 대구 부호의 아들로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시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시인의 운명과 삶을 선택하였다. 죽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시의 영원한 청년이다. 유월 하늘에 눈물이 돈다. 고월이 추구한 선(線)과 선(禪)의 사이-미학과 새로운 전통은 한국 근대시의 영혼과 형식에 새로운 기틀로 작용한다. 선(線)의 예각과 감수성은 물론, 선기(禪機)와 배미(俳味)의 조화는 그의 시의 두 축을 형성한다. 이것이 고월의 시가 아름다운 본래와 면목이다. 삼십 이후를 살아본 적 없는 고월의 이십은 (랭보가 그런 것처럼) 그의 삶 전부였다. 지극한 말과 삶이 시라면, 그의 아름다운 우울은 인간의 근원적 정서로서 파토스(pathos)다. 광휘다.
1926년 시「夏日小景」과「겨울의 暮景-都會詩篇」을 발표한 이후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름과 겨울 사이엔 무엇이 있는가? 빛과 그림자,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아니 생사가 심연처럼 가로놓여 있다면. 고월의 시가 현금에도 여전히 퇴색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시가 갖는 풍경과 상처의 색채 미학과 감각의 형이상학이 갖는 에너지와 상상 때문이다. 景은 經이다.
고월은 얼굴(Visage)이 없다. 소외된 자, 타자(The Other)로서 그의 얼굴은 오직 목소리로만 전해진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그의 미학적 시선과 저항은 우리가 고월의 시를 다시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노력이란 것이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처럼 단순한 스펙쌓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유형의 자산에 비해 고월처럼 무형의 자산으로 자신을 새롭고 풍요롭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름다운 것은 위험한 법. 고월의 인간과 문학은 사회적 개인, 시대고(時代苦)와 희생, 생활세계의 주체로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시와 삶의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멜랑콜리와 니힐(nihil)은 단순한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식민지 근대를 살아간 지식인-시인의 실존적 고통을 담고 있다, 그런 불안과 소외 심리는 시대 사회를 초월하여 주어지는 정서적 공명이다. 우리는 고금을 막론하고 한 인간에 대한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 대상과의 깊은 심리적 연대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시라는 ‘진리가 도래하는 유일한 장소로서 엑스타시’(알랭 바디우,『조건들』)에 해당한다.
고월은 감각과 지성, 근대적 전통의 시인이다. 시혼과 음영이 잘 교직되어 있고, 線과 禪의 사이-미학이 크게 돋보인다. 마음과 사물의 미려한 무늬와 흐름을 감각적으로 포획한 그의 시는 몸으로 세계를 감각하는 것이 얼마나 근원적인 경험인지를 환기한다. 이는 AI와 스크린에 일방적으로 빠져드는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닌게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nunc stans) 경험하는 것, 그것만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면 고월의 시는 아름답고 깊고 멀다.
★ 김상환 약력 - 1981년 8월《월간문학》신인작품상 시부문 당선으로 데뷔.
1993년 여름호《문화비평》지에「한 내면주의자에 대한 비망록적 글쓰기-이가림론」을 발표함으로써 비평활동 시작.
제4회 이윤수문학상 제33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시집『영혼의 닻』,『왜왜』. 미학에세이집『느낌의 생명』평론집『현玄의 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