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라는 길목에서
김 진 영
오늘따라 내비게이션은 자꾸만 새로운 길을 안내해 주다가, 돌아가라고 한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남자 친구는 다른 지역 운전에 긴장한 모양이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애매하게 갈라진 도로와 한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오랜 시간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표정은 점차 굳어갔다. 길을 잘못 들어서 돌아가는 것은 상관이 없다. 남자 친구에게는 목적지를 돌아가는 것도 괜찮다며, 서두르다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길은 어디로나 통하니까 잠시 둘러 가는 것이라며, 이렇게 가다가 더 좋은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도 했다. 빙글빙글 도는 것에도 둘은 웃음보가 터졌다.
이왕 대구에 온 거 여러 가지 볼일을 한 번에 다 보자는 생각에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쉬고 싶어서 주차장이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갔다. 카페 주차장에는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맞은 편 유료 주차장에 주차하고 차 문을 나서는 순간 베이커리 카페가 보였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손님의 손에는 빵 봉지가 들려 있었다.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에 ‘저긴 맛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옳은 선택이었다. 그곳은 제과제빵 명인이 매일 빵은 굽는 곳이었다. 가볍게 먹으려던 생각은 접고, 빵돌이와 빵순이는 그곳에서 빵으로 식사를 마친 후 추가로 빵을 더 사기까지 했다. 계산할 때, 구미에서 왔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말하니, 직원이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한다. 일주일 뒤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우리를 기억한다며, 커피를 서비스로 주었다. 주차할 곳이 없어서 다른 곳에 주차했는데 우연히 발견한 가게가 우리의 맛집 리스트에 들어갔다.
예전에 친구들과 습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늦은 봄바람에 싱그럽게 휘날리는 풀들과 꽃이 신비롭기도 하고 예뻐서 남자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주소는 알고 있지만, 습지가 넓어서 지난번에 내려갔던 입구가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 그곳 같고, 그곳이 이곳처럼 보였다. 30분 넘게 그 주변을 돌고 돌았다. 그렇게 돌고 도는 동안 지인에게 연락해서 어디인지 물어보니 상세하게도 GPS 지도에 선으로 표시한 사진을 보내 주었다. 지쳤던 탓에 식사를 먼저하고 길을 찾기로 했다. 식사하면서도 보지 못한 풍경의 아름다움을 재잘거렸다.
식사를 마친 후 해가 떨어질 때쯤 그곳에 도착했다. 노을 질 때는 더 예쁘다고 해서 이른 오후에 나서서 주변을 마음껏 구경한 다음 돌아올 때 그 풍경을 보기로 일정을 정했지만, 길치인 여자 친구 탓에 그제야 도착한 것이다. 그곳은 며칠 사이에 꽃들이 시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 찬란한 빛깔이 나지 않았다. 서서히 어두워지려는 밤 풍경에 꽃이 소슬하기까지 했다.
고요한 길을 걷는데 수풀에서 ‘탓’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고라니가 습지 수풀을 통통 뛰어다녔다. 놀란 가슴을 토닥이며 조금 더 길을 걸었다. 남자 친구는 괜찮냐고 물으며 되돌아가도 된다고 했지만, 그때의 넓은 수풀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며 노래를 부르는 듯한 풍경을 함께 보고 싶은 마음에 더 걷고 싶다고 했다. 노을 질 때는 유염하던 풍경이 더 아름답게 물들기를 기대했다. 더 걷다 보니, 길 한복판에 밧줄 같은 것이 있다. 밧줄이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뱀이었다. 뱀은 피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우리를 경계하는 듯했다. 뱀을 피해서 조금 더 걸었는데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자꾸만 얼굴에 달라붙는다. 가면 갈수록 점차 무서워져서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습지 데이트는 그걸로 끝났다. 아쉬운 마음에 일주일이 지난 시간을 탓하며 그때의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보고 싶었노라며 투덜거렸다. 그 말에 슬며시 미소 짓는 옆모습을 보니 마음에 고요가 드리운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따뜻하게 물든 노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붉은 태양을 물에 녹인 듯한 잔잔한 풍경에 가슴이 설렜다. 그날 봤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우리는 우연이라는 길목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것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연이란 단어로 기억에 남을 한 조각의 에피소드가 되는 것만 같다. 정해진 곳만 바라보고 갔다면 새롭게 발견하지 못했을 맛집, 투덜거리기만 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그때의 그 미관이 그러하다.
우연이라는 길목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건 ‘여유’이지 않을까 싶다. 잘하려는 마음은 여유라는 공간을 좁혀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변을 살필 겨를 없이 정해진 장소로 돌진하기도 한다. 잘하려는 마음에 지나간 일에 신경을 쓰며 마음을 두어서, 정작 눈앞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잘하려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여유’라는 조그만 틈을 만들어 두는 것 또한 필요할 것 같다.
내 모습 그대로를 편안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서 조그만 여유가 생기는 듯하다. 그 틈은 몽실한 구름처럼 내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주며 보드라움을 선사해 준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무척 흐뭇하며 행복할 것 같다. 나 역시 또바기 여유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