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8. 11. 4.~5.(무박2일)
●산행지: 한양도성(사적 제10호)-북한산성(사적 제162호) 연계종주
●산행코스: 동대문-낙산-혜화문-말바위-숙정문-팔각정-창의문-인왕산-돈의문터-소덕문터-숭례문-남산-국립극장-반얀트리-광희문-동대문-보신각-조계사-건춘문-신무문-자하문-세검정-탕춘대능선-비봉능선-청수동암문-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동장대지-용암문-노적봉삼거리-백운문-백운봉-대동사-상운사-북문-원효봉-서암문-수문지-의상봉-가사당암문-부왕동암문-청수동암문-대성암-산영루-중성문-대서문-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준비물: 찰떡1, 사과2, 귤5, 자유시간4, 샌드1, 감귤쥬스1500cc, 막걸리1, 편육1
●거리: 약 55.51Km
●소요시간: 약 19:44h
●누구랑: 나랑
●날씨: 7~20도, 약간의 미세먼지
●시간경과:
- 15:05 동대문 출발 (만두국)
- 15:45 말바위
- 17:34 인왕산
- 18:11 돈의문터
- 18:32 남대문
- 19:05 남산
- 20:17 동대문 (짜장면)
- 21:11 보신각
- 21:39 신무문
- 21:59 자하문
- 22:45~23:55 구기동편의점 (막걸리, 편육)
- 01:43 청수동암문
- 02:28 대동문
- 03:49 백운대
- 04:45 북문
- 06:05 북한산성탐방센터
- 07:35 가사당암문
- 08:10 부왕동암문
- 08:56 청수동암문
- 09:40 산영루
- 10:39 북한산성입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한번에 끝내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저보고 이 연계코스 가이드를 하라시면 다리보다 입이 아파 제시간에 끝내지 못할 것입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넘 많은 장소이기 때문이죠.
몇해 전부터 이 그림을 갖고 싶었습니다.
J3클럽에서 익스트림 무박산행을 익힌 덕분으로 어렵지않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고관절 염증으로 많이 쉬다가 오랜만에 출조하여 밤새워 건져올린 그림입니다. 맘에 드실지?
곳곳에 숨어있는 많은 사연들을 모두 다 건져올릴 수는 없습니다만, 2018. 5. 21일 반대로 종주한 한양도성 성곽종주기를 참고하여 후기를 올려보기로 하였습니다.
동대문역에서 물품보관함에 배낭을 보관해놓고 도성을 돌아볼까 쭈뼛거리다 괜히 시간만 소비하고 늦을거 같아 말바위까지 열라 뛰었는데 11월부터 15시까지 입장이랍니다.ㅠㅠ 할 수 없이 숙정문과 1.21사태때 총맞은 소나무, 그리고 북악산 정상을 생략하고 북악스카이웨이로 창의문에 다다랐습니다. ㅋ
보신각에서 구기동까지는 다양한 코스를 잡아 이동할 수 있습니다. 광화문사거리에서 사직단 국궁장을 걸쳐 다시 인왕산으로 올라 기차바위를 타고 세검정에 내려설 수도 있고요.
자하문을 넘어 상명대 앞 홍지천으로 내려가는 길에 흥선대원군 별서 석파정을 지납니다.
병자호란에 청나라에 끌려간 60만명 중 50만 명이 공녀였다지요. 그들이 환국하자 세검정에서 흘러내리는 이곳 홍지문 앞에서 목욕을 시켜 정절을 회복시키는 의식을 갖췄는데 여기서 환향녀, 호로(오랑캐 혹은 오랑캐의 포로)새끼 라는 말이 유래가 됩니다.
세검정에서 구기터널로 올라가야는데 북악터널로 알바~ 삼거리엔 횡단보도도 없고, 육교도 없고 ㅠㅠ 예술고등학교 지나다 도로에 110번이 다니길래 퍼뜩! 알바임을 알아채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동대문에서 짜장면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구기동에서 야식으로 고기라도 구울까 싶었는데 구기동 샤보이호텔 삼거리 근처는 늦게까지 하는 음식점이 없네요. 할 수 없이 편의점에서 편육에 막걸리 한병으로 야식을 챙겼고요.
둘레길을 따라 구기터널 위에서 탕춘대능선을 타고 향로봉을 지나 비봉능선으로 갈아타고 북한산 청수동암문에 올라 14성문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청수동은 이곳 청수동암문과 문수봉 사이 골짜기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와 임금이 마시고 약을 끓이는 물로 사용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문 밖으로는 삼천사골이 시작되기도 하고요.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는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화장실만 이용하고 그대로 패스, 의상봉에 올라 해돋이를 감상하고, 의상능선을 다시 올라탈 때가 제일 힘들었지만 점점 끝나간다는, 오르막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지요.
자! 그럼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의 옛날 이야기로 함 들어가볼까 합니다.^^
아시는 바대로 북한산성은 고구려에서는 북한산군 남평양성이라 불렀습니다. 백조 온조조에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숙종이 수도방위의 필요성으로 축조를 하였다지만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인조대 이괄의난이었습니다. 지방 민란으로 왕이 공주로 피난을 가는....
수도서울을 방위하기 위해 북쪽에 총융청을 두고, 도성에는 어영청을 남쪽에는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두었습니다.
축성과정은 화엄사주지 계파 성능스님이 집필한 북한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 6개월만에 공사를 완료하고 승병 375명, 중앙군(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 1,000명이 경계를 섰습니다.
승병 총영은 중흥사였고요. 팔도도총섭 성능스님이 설계 총 책임을 맡아 수비에 필요한 12개의 사찰을 새로 지었지요.
중앙군(5군영) 총대장은 총융청의 총융사(종2품=관찰사)였습니다. 중흥사 아래 산영루 옆에 비석거리는 총융사들의 공덕비입니다.
억불숭유정책이 엄격히 시행되던 조선조였으니 승려는 백정과 같은 하층계급이었고, 유사시 산성 방어목적으로 배치된 12개의 사찰은 전국에서 올라온 승도들에게 최고의 도량지였습니다.
훈련도감은 수문지에서 용암문까지, 금위영은 용암문에서 보현봉까지 어영청은 보현봉에서 수문지까지 관리하였다지요.
1894년 갑오경장에 신분개혁으로 북한산성을 수비하던 승군들이 흩어지고 1910년 을사늑약에 중앙군까지 흩어졌습니다.
이후 쇠잔해져가는 산성은 독립운동 은신처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행궁지에 일제 헌병이 상주해 지켰으며 6.25에는 1.4후퇴에 중공군과 북한군이 숨어들어 연합군의 공중공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과거의 북한산은 지금처럼 산림이 우거진 모습이 아니라 헐벗어 산사태에 취약한 바위만 있는 민둥산의 모습이었답니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서울 도성 정동(正東)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른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霓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인지문 [Heunginjimun Gate, 興仁之門] (두산백과)
선초3대청백리 하정공 류관선생 비우당, 그의 외손자 지봉 이수광이 어린시절을 보낸 곳
쌍용2차아파트 정류장 남쪽 비탈에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 직전에 3칸짜리 초가가 있다.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위글씨와 샘이 있다.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류씨 집안이던 하정공 류관(柳寬. 세종조우의정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성, 황희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류재상의 우산'이란 뜻의 류상수산(柳相手傘)이다.(현재 서울시공무원을 대상으로 매년 하정청백리상을 시상한다)
류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외손자 이희검, 그의 아들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류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자지동천,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염색을 들여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샘터입니다.
한양도성 낙산공원에서 500m가량 동쪽으로 가면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해석하면 '자줏빛 풀의 계곡에 있는 샘물'이라는 뜻이다.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우물터가 바로 그 샘물이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그리며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살았던 곳이다. 생활이 곤궁해 옷감에 염색하는 일을 했는데 이 근처에는 자줏빛 색을 들일 풀이 많았다고 한다. 송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1457년으로 한양도성이 건설된 지 60여년이 지난 후였다. 조선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전) 왕비가 도성 밖에 살아도 괜찮은 시기였던 것이다. 자지동천은 한양도성 성곽 밖에 있는 조선 초기 유적 가운데 하나다.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는 조선 6대 왕 단종(1441~1457)의 비(妃)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죽임을 당하자 조선 최고의 여인에서 노비로 신분이 강등되는 비운의 삶을 살았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는 노비 신분으로 65년 세월을 홀로 살아간 여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 다리라 부른답니다. (중략) 당신과 내가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부른답니다. (중략) 문자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 하여 영도교(永渡橋)라고 하더이다. 영이별 다리, 영영 이별 다리… 이름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설움이 복받치는 낮고 초라한 다리." (김별아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 중에서)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에 있는 영도교는 단종비 송씨가 단종을 영월로 떠나보낸 이별의 다리다. 남편과 생이별했을 때 그녀는 18세. 아직 소녀 티도 벗지 못한 나이였다. 그녀는 날마다 단종을 그리워하며 64년을 홀로 살다 82세로 숨을 거뒀다. 목숨이 모질고도 길어서 더 애달픈 삶이었다.
단종 2년(1454년) 1월 1일 수양대군, 양녕대군, 정인지 등이 왕비 간택에 착수했다. 최종 후보 3명에 풍정창부사 송현수, 예원군수 김사우, 전사정 권완의 딸이 올랐고, 이 중 송현수의 딸이 간택됐다. 모든 것이 수양대군의 뜻이었다. 1월 25일 14세의 단종과 15세의 송씨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듬해 6월 신하들이 왕권강화를 도모하다 유배에 처하자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단종비도 대비로 물러났다. 1456년 단종 복위 사건이 벌어졌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대비도 대군부인으로 떨어졌다. 이듬해 6월 창덕궁을 나온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돼 물길이 휘돌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청령포에 갇혔다. 단종비는 낙산 자락의 정업원(淨業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영도교에는 이렇듯 혼인한 지 2년 만에 이별한 단종과 단종비의 애틋함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
비우당 뒤편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고 바위에 '紫芝洞泉'(자지동천)이 새겨져 있다. '자주동샘'이라 불리는 이곳은 단종비가 시녀들과 함께 샘에 지초(芝草) 뿌리를 풀어 저고리 옷고름이나 댕기에 자주색 물감을 들이는 일을 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단종비를 돕기 위해 여인시장 상인들이 옷감을 염색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비우당 옆으로는 단종의 넋을 기리는 원각사가 있다. 현재 원각사는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단종비는 1521년 6월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자신을 왕비로 간택했지만 남편에게 사약을 내리고 영원히 이별하게 한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 덕종,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세조 자손의 죽음도 지켜봤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대군부인의 예로 해주 정씨 사가의 묘역에 조영(造營)하도록 했다. 숙종은 1698년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숭해 종묘 영녕전에 들였다. 이때 '어그러짐이 없고 화합하라'는 뜻에서 시호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평생 단종을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 해서 능의 이름을 사릉(思陵)이라 지었다. 사릉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 진건읍에 있다.
낙산공원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타산입니다.
뒤쪽으로 북악산 줄기가 좌청룡으로 흐르는 줄기와 서울의 주산 북한산이 받쳐주고 있습니다.
낙산공원에서 내려가다 장수마을에서 언덕을 넘어 삼선공원에 있는 총무당, 원래 정부청사 자리에 있던 것을 옮겨왔습니다.
삼군부 총무당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서울유형문화재 제37호) 구포도청사
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 三軍府) 청사의 중심이 되는 본전(本殿)으로 원래는 지금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政府綜合廳舍) 자리에 있었는데 1930년에 성북구 돈암동 자리로 옮겨왔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이고주칠량(二高柱七樑) 팔작기와집이다. 총무당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이 집권한 뒤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과 함께 1868년(고종5)에 세워졌다. 총무당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조선말 신헌(申櫶)의 글씨이다.
1880년 고종 재위 17년 삼군부가 없어지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으로 통합되어 청사로 사용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조선보병대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총무당 양쪽 옆에 덕의당· 청헌당이 있었는데, 총무당만 이곳으로 옮기고 덕의당은 그당시에 없어졌으며, 삼군부 청헌당은 1967년에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교정으로 옮겼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관아 건물 양식이다. 1978년에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군부총무당 [三軍府總武堂] (두산백과)
동소문의 원래 이름은 혜화문으로 1992년 복원되었습니다.
혜화문 (동소문)
1397년(태조 5)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쌓을 때 도성의 북동방에 설치한 문으로 동소문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말년 거처 심우장을 다녀옵니다. 방 두칸짜리 단출한 기와집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은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였다. 본명은 정옥(貞玉)이며 용운은 법명(法名)이고 만해는 법호(法號)이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그는 14세에 결혼하였으나 16세에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으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관심이 깊어 시베리아와 만주를 오랫동안 떠돌다 27세에 다시 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등 불교의 대중화에 주력하였다. 32세 때인 1910년에는 유명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저술하였으며, 1914년에는 『불교대전』(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41세 때 3·1만세운동이 있었는데, 그는 백용성(白龍城)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만해는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두고 최남선과 의견이 충돌했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어서 자신이 직접 선언서를 작성하겠다고 자청하였으나, 선언서는 이미 최남선에 의해 기초가 마무리된 단계여서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3·1만세운동 이후 33인의 민족대표 대부분이 탄압과 회유에 넘어가 변절하였으나 그는 지조를 꿋꿋이 지켜 당시 조선 청년들의 존경을 받았다. 3·1만세운동의 주모자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옥하는 날, 환영나온 지난날의 동지들에게 환영하러 나올 것이 아니라 환영받는 사람이 되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48세 때인 1926년에는 근대 한국 시의 기념비적 저작인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49세 때에는 항일민족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겸직하였다. 또 52세 때에는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해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불교 홍포에 정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55세 때 부인 유씨와 다시 결합하였으며, 60세 때에는 그가 직접 지도하던 불교계열 민족투쟁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이 발각되는 사건이 터져 고초를 겪었다. 이렇듯 평생 글을 쓰고 민족운동에 매진하고 불교의 혁신을 위해 애를 쓰던 그는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동지들에 의해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만해가 만년에 거처하다가 임종한 심우장은 1933년에 지어진 정면 4칸 측면 1칸의 자그마한 목조 골기와집이다. 굳이 집 이름인 ‘尋牛莊’을 풀이하자면 ‘소 찾는 집’ 정도가 되겠는데, 불교에서는 대개 소가 마음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이므로 대충 이름에 담긴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집은 응달진 언덕에 북향하고 있는데, 만해가 남쪽에 있는 조선총독부가 꼴 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는 말이 전한다. 구조는 단출하여 왼편 끝 칸이 사랑방에 해당하고 가운데 2칸은 안방으로 꾸미면서 앞에는 툇마루를 내었으며 오른쪽 끝 칸은 부엌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사랑방과 안방에 만해와 관련된 몇몇 자료를 비치해두고 있으나 소략하고 초라하여 서글픈 심사만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우리가 오래되지도, 볼품이 번듯하지도 않은 심우장을 그래도 찾아야 하는 까닭은 평생 매운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만해의 인격을 사모해서일 뿐 그밖에 다른 의미는 별반 찾을 수 없는 곳이 지금의 심우장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하였다.
서울과학고 정문에 맛있는 돈까스집이 많습니다. 1만냥 짜리 돈까스 정식....
와룡공원에서 말바위에 오르면 삼청공원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는데 순성돌기는 여기서 북악산 방향 상단부 매표소로 가야합니다.
삼청각[三淸閣]
1972년 건립된 1970년~1980년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표되던 곳이다.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과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바꾸고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99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1999년 말 건물과 부지를 인수한 화엄건설(주)이 고급빌라를 짓기 위해 관할 성북구청에 건축허가를 신청하였으나 문화재 보존여부에 대한 판단문제로 건축허가 결정이 유보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 5월 22일 서울특별시가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청각 [三淸閣] (두산백과)
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평창동 사람들 여기까지 아침에 핫둘핫둘! 구보를 하였다는 북악팔각정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백사실계곡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사면의 백사실계곡에 위치한 조선시대 별서이다. 1800년대 도성 가까이에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별서정원의 유구와 바위에 암각된 각자, 동천 경역 내의 지형과 산림이 잘 보존되어 있는 명승이다. 2005년에 사적 제46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에 명승 제31호로 재분류되었다.
백석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흰 돌이 많은 백악산을 백석산에 비견한 지명이라고 한다. 세검정 위쪽의 홍제천을 건너 이 하천의 지류가 거대한 암반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동천의 입구이다. 암반을 흘러내리는 계류는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었으나 현재는 암반의 양측으로 건물이 들어서 있어 계류 부분만 좁고 길게 노출되어 있다.
계류 근처에 육각정자의 주초석과 연못이 있고, 연못 위로 약 4m 정도의 높은 대지에 건물지가 있다. 건물지에는 사랑채와 정자의 기초·담장·석축 일부만 남아 있다. 건물지 위쪽 바위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 등이 각자된 바위가 위치한다.
별서정원의 대부분은 산수가 수려한 경승지에 위치하며 세상으로부터의 은둔과 은일을 위해 마을과는 일정한 격리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백석동천은 도시화가 많이 이루어진 서울에 위치하고 있는 별서임에도 불구하고, 고정원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춘 격조 높은 전통별서정원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付巖洞白石洞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창의문(자하문) = 북소문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며 서울의 4대 소문(小門)에 속한다고 하여서 북소문(北小門)이라고도 한다. 2015년 12월 2일 문화재청이 보물 1881호로 지정하였다. 북문(北門)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북한(北漢)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21대 왕 영조 때 들어서 왜란 때 소실되었던 문루가 복원되었으며 산 속에 있었던 영향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때 수난을 어렵게 면하였고 1958년 보수공사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 온전하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21사태 때에는 김신조 일당이 이 곳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그때 공비의 총격에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가 근처에 세워져 있다.
한양의 남서쪽 출입문이었던 소의문이 원래 이름인 소의문 대신 이명인 서소문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비슷하게 창의문 역시 원래 이름인 창의문보다 자하문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일단 창의문을 지나는 큰 도로의 이름부터가 자하문로이고 해당 도로가 지나는 터널 이름도 자하문터널이다. 창의문로는 경복고등학교 뒷편의 길인데 주요 도로가 아니다보니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른다. 참고로 나무위키에도 자하문로 항목은 있지만 창의문로 항목은 없다. 인근 상명대학교에도 자하관이라는 강의동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 교지의 이름도 자하(紫霞)이고, 축제의 이름도 자하제이다.
사실 자하(紫霞)라는 명칭은 개성의 명승 자하동(紫霞洞)에서 따온 것이고, 이후 창의문 일대가 '자핫골'이라 불리면서 창의문도 자하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의문 [彰義門] (두산백과)
창의문에는 인조반정에 가담한 반정공신들을 적어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서인과 남인들이 연합해 대북파를 쓸어버린 정치적 혁명사건인데요. 여기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이괄장군이 북방에서 부하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도성을 점령하는 이괄의난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지만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변방의 장수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성안에 틀어박혀 싸우는 수성전을 벗어나 공세적인 훈련으로 군사를 조련하는데 조정에서 이를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모함하여 외아들이 국문을 당하고자 소환을 받습니다. 여기서 작심을 하게 된것이지요.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자하문에서 인왕산 오름에 윤동주시인이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 친구와 같이 올랐던 곳이라 하여 기념물을 건립하였습니다.
탕춘대능선의 시작 인왕산을 빠져나가 세검정으로 내려가는 기차바위, 뒤쪽 뾰족한 북한산 봉우리는 보현봉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악산
무악재 서대문형무소 옆에 독립문이 있죠.
원래는 중국사신을 영접하는 외교부 독립청 격인 영은문이 있던 자리입니다.
조선은 중국을 큰나라로 섬겼습니다.
국사당(國師堂)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 1동(棟).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에 위치하고 있으나, 원래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따라서 그 연혁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의 역사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년 5월, 9년 7월)고 하며,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년, 2월).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라는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가을에 초제[醮祭: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국사당이라는 명칭과 무신도(巫神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사당의 전신이다. 1972년 당시 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엽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고,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 한다.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다스리는 기록]의 기록으로도 뒷받침 된다.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의 명산과 당·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국사당은 1925년 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도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재 당의 평면은 전면 3칸에 측면 2칸의 주간(柱間)이고, 기둥간 사이는 전면 어간(御間) 약 2.6m에 협간(夾間)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이다. 따라서 내부의 넓이는 도합 11평이고,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좌우 일부와 뒷면 및 전면에는 무신도가 걸려 있고, 평면 전체가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민간의 일반 건물들보다 단순한 구조이지만 규모는 더 큰 편이며, 기둥 위의 구조나 지붕형태 등 전체적인 구성이 견실과 간소를 위주로 하면서도 방주[方柱:네모진 기둥]의 실귀[糸刻:가늘게 귀접이한 재목]나 분합문의 긴 형태, 문살의 새김 등과 같은 드러나지 않는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도의 세련된 장식요소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아울러 대들보의 후림이나 연목의 배흘림,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정조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한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단골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참배객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연중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고 그 다음이 2월·3월·9월의 순이다. 이 당에서 행하는 굿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이고, 둘째는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셋째는 흔히 부모의 사령(死靈)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기굿이다. 그러나 몇 가지 동기가 복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굿이 1년에 평균 100여 회 치러진다. 서울 시내에도 이러한 굿당이 몇 군데 있는데, 최근 10∼20년 사이에 남산 밑 회현동의 노인성당과 불광동의 할미당, 자하문의 서낭당 등이 없어졌지만, 국사당은 1973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왕산 국사당 [仁旺山國師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스토리가 얽힌 인왕산 선바위(禪巖)
선바위는 인왕산 남쪽 자락에 독특한 형상으로 솟은 기암이다. 검은 빛깔을 띤 두 개의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는데 스님들이 장삼을 걸친 채 참선을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한 눈에 봐도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바위에는 조선 건국에 얽힌,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그 유명한 일화가 깃들어 있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사람 등 이 바위에 찾아와서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바위에서는 조망이 매우 시원하다. 발아래로는 무악동 동네가 두루 보이고 멀리로는 남산과 한강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보이는 서울 성곽을 따라 오르면 인왕산 등반도 즐길 수 있다.
선바위에는 조선 건국 당시를 배경으로 한 일화가 전해져온다.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포함시킬 것인가, 성 밖으로 둘 것인가(안산을 포함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두고 왕사인 무학대사와 문신인 정도전 사이에 의견이 대립했다. 성 안으로 두면 불교가 흥하고 유교가 힘을 잃을 것이며 성 밖에 두면 불교가 쇠퇴할 것이라고 두 사람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태조 이성계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 꿈에 선바위를 품지 않고 쌓은 성의 안쪽 자리만 눈이 녹아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선바위를 성곽 밖에 두었다. 그 뒤로부터 무학대사는 ‘이제 중이 선비의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며 탄식을 쏟아냈다고 하고 한양 도성(서울 성곽)은 설성(雪城)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 내외인 선바위는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이라고도 하고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고도 하는 전설이 전해진다. 생김새가 스님이 참선을 하는 모습이라 선바위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이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선바위 아래에 아무런 시설물이 없었으나 지금은 바위 아래에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어놓아 기도장으로 활용된다. 일반인들은 사월 초파일이나 칠월칠석날 이곳에 찾아와서 제수를 차린 뒤 절을 하며 득남이나 소원성취를 비는 기도를 올린다. 대개 방향을 바꿔가며 3배와 반절을 한다.
일제치하 수많은(어림잡아 700여) 애국지사들이 고문받고 죽어간 인왕산 선바위 위에서 내려다본 서대문형무소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0번지 1908년 일제는 서대문 밖에 수용인원 500명의 경성감옥을 세운다.
이 블로그를 방문하세요 http://iayns.blog.me/60177164782
임진왜란에 행주대첩(幸州大捷)을 거둔 도원수 권율(1537~ 1599) 장군 집터
권율장군은 인접한 필운동12번지 현재의 배화대학교 자리에 살다가 사위인 이항복대감에게 물려주고 인근인 행촌동으로 이사한 것이라고 한다. 권율장군 집터 표석 바로 옆에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권율장군 집 안에 있었다고 하며 은행나무로 인해 이곳을 은행동 혹은 은행나무골이라고 하였다.
권율은 중종32년(1537) 태어났는데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이며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언신(彦愼)이며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이다. 늦은 나이인 선조15년(158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예조좌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 등을 지내고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으로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서울 수복을 위해 북진했으나 같이 갔던 조선군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권율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하였다. 다시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북진, 전주로 들어 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소조천융경)의 정예 부대를 맞아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워 왜병을 격퇴시키고 호남을 지켜냈다. 그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그 뒤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서울 근교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해 행주산성을 택했다. 조경에게 명해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한 뒤 군사들을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이때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 1,000명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 병력은 수천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왜군은 1593년 2월 12일 도성에 있던 전 병력 3만명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왜군은 7대로 나누어 맹렬한 공격을 가해 왔지만 권율의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싸운 덕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옷· 칼·창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다. 그 뒤 권율은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다가 명나라와 일본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다가 한성부판윤·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주둔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사망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조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권율장군과 이항복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은 포천출신으로 19세에 권율의 딸과 결혼했다. 권율장군의 옆집에 살던 이항복을 권율의 아버지 권철이 손녀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그 사연은 이항복의 집에서 자라던 감나무 가지가 자신의 집으로 휘어지자, 권철은 자기집 소유라면서 그 감을 따먹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권철의 방문에 주먹을 찔러넣고 “그럼 이 주먹은 누구 것이냐”고 추궁했고, 결국 미안하다는 권철의 승복을 얻어냈다. 언제의 일화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런 기지를 높이 산 권철이 그를 손녀사위로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광해군때 대북파가 주도한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어 북청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었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에 묘가 있다. 경기기념물 제24호.
1919년 3ㆍ1운동 독립선언서를 외신으로 처음 보도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의 가옥 딜쿠샤
1919년 3ㆍ1운동 독립선언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외신으로 처음 보도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년~1948년)의 가옥이다. 당시 AP통신사의 한국 특파원이었던 앨버트는 1923년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에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양옥을 지었다. 앨버트는 항일 독립운동을 돕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후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딜쿠샤라는 이름은 앨버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인도의 딜쿠샤 궁전에서 따와 작명한 것으로 힌디어로 ‘이상향, 기쁨’을 의미한다.
붉은 벽돌, 아치형 창문 등 양옥 중에서도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고 벽돌을 쌓은 방식이 매우 특이해 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 영국과 미국의 주택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일제 강점기 근대 건축 양식으로도 연구 가치가 있다. 1963년 국가 소유가 되었으나 정부의 방치로 일반인의 입주가 일어난 탓에 건물 곳곳에 금이 가 있고 누수 현상이 일어나는 등 훼손이 심하게 진행됐으며, 2015년 정밀안전진단 결과 D등급을 받은 바 있다.
2016년 2월 서울시가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종로구와 딜쿠샤 보존과 관리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딜쿠샤를 문화유산으로 복원하는 데 합의했고, 그후 2017년 8월 8일에 딜쿠샤가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시는 3ㆍ1운동 100주년인 2019년까지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한 후 민간에 개방할 예정이다
한편, 딜쿠샤의 잔류 거주민과의 소유권 소송이 장기화되며 2019년 3월에 3ㆍ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딜쿠샤를 개방하기로 했던 계획은 2019년 광복절을 기준으로 연기되었다. 캠코는 2017년 2월부터 마지막 남은 한 가구에 명도소송을 제기해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딜쿠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홍난파 가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16번지에 있다.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1930년 독일계통 선교사 주택으로 지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은 서양식 건물로 홍난파(1898~1941)가 6년간 말년을 보낸 집이다. 거실과 안방으로 사용하던 지상 1층에 음향시설 등을 설치하여 50명 정도 수용 규모 공연장으로 만들어 2007년 9월 소공연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문화재청 서울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90호
서대문(돈의문)터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때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선인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 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으며, 인근의 새문안로(신문로)나 `새문안교회` 등은 여기에서 따온 말이다.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 의(義)를 넣어 만든 것이다. 1915년 철거되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제강점기 1915년 전차가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 김구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당한 현장...
◆ 판문점과 경교장 두 역사 현장의 연결고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755
◆ 삼성에 짓눌린 남북정상회담의 근원 ‘경교장’
소의문(서소문)터 (현 중앙일보 사옥 야외주차장 부근 추정)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고 한다. 숭례문(崇禮門)과 돈의문(敦義門) 사이, 즉 지금 서소문동 큰길에 위치하였던 서남간문으로 일반적인 통행로가 되었고,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성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이 문의 창건 당시인 1396년(태조 5) 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이 부근은 지대가 낮아서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1422년(세종 4)에 이것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으로 미루어 소덕문으로 고쳐서 지었으리라 믿어지나 확실한 기록이 없다.
《경성부사 京城府史》에 1472년(성종 3)에 예종비(睿宗妃) 한씨(韓氏)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 한 까닭에 이것을 피하여 문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1472년에 ‘소의’로 고쳤다는 것이 통설로 되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1738년(영조 14)에 문루(門樓)를 건축하였는데, 석문을 개축할 때 왕이 문명(門名)을 고치라는 명을 내리고, 1744년에 문루를 건축한 뒤 문명을 소의로 고쳤다는 것이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문 이름이 소의로 고쳐진 것은 1472년이 아니라 영조 때였음이 확실하다.
남아 있는 사진을 통하여 그 모습을 대략이나마 살펴보면, 광희문과 마찬가지로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石築)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虹霓門) 하나를 내어 통로를 마련하였다. 석축 위 4면에 나지막하게 벽돌로 쌓은 담을 두르고 양옆에 출입문을 세워 문루로 드나들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구조의 그 상세함은 알 수 없으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 위 용마루에는 용두(龍頭), 내림마루에는 여러 상(像)을 각각 장식하여 건물에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1974년에 복원된 광희문과 비슷한 형식이었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문은 1914년 일제강점기 경성도시계획에 따라 그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어 그 형태는 사진으로 겨우 전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의문 [昭義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동공원에 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에서 왼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덕수궁 돌담길입니다. 정동길이라고도 하죠.
이화학당 정문에 "대소인원계하마" 하마비가 있습니다. 길 맞은편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정동근린공원에 도착합니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음으로써 문호를 개방합니다. 1882년에는 미국, 1883년에는 영국과 독일, 1884년에는 이탈리아와 러시아, 1886년에는 프랑스와도 수교를 하게 되죠. 따라서 빠르게 개화정책이 실시되는데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발생하죠. 신식군대를 양성하면서 구식군대를 차별했기 때문이죠. 그러자 개화정책은 주춤하게 되고 이때 급진개화파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나라는 어수선해집니다. 서구열강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형국이었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과 청나라가 개입합니다.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죠. 청일전쟁은 일본이 승리하고 랴오둥반도를 배상금으로 받습니다.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간섭을 합니다. 이것이 1895년의 삼국간섭입니다.
이때 조선은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친러파 인사를 등용하고 반일정책을 강화하는데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되죠. 1895년의 을미사변입니다. 이에 전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는 등 나라가 혼란스럽자 불안감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이것이 1896년에 일어난 아관파천입니다. 아관(俄館)=러시아공사관,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을 피함
구 러시아 공사관은 고종이 세자 순종과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이듬해까지 머문 곳입니다. 원래 덕수궁 영역이었던 이곳 정동 언덕에 러시아 공사관이 들어서게 된 것은 주변에 공사관을 두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측의 정략적인 입지선정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885년 한러수호조약 체결 후에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하고 건물이 착공되어 1890년에 완공되었는데 원래 건물은 벽돌로 된 2층 구조였습니다. 한쪽에는 탑을 세웠고 입구에는 개선문 형식의 아치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탑과 지하 2층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에 탑 부분만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입니다. 석재와 회색벽돌로 이루어져 있던 탑은 복원 과정에서 지금처럼 흰색 칠로 마감되었지요. 당시 고종은 공사관에서 제일 좋은 방에서 머물렀는데 내부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고 합니다.
1981년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에서 공동 발굴을 한 적이 있는데 탑의 동북쪽에서 밀실과 비밀통로가 확인되었다죠. 이것이 덕수궁까지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국력이 약하여 외세에 의존하려고 했던 고종의 판단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아관파천 시절부터 조선은 열강의 이권침탈이 가속화되고 나라의 위상은 많은 손상을 입었지요. 결국 독립협회 등의 강력한 요구로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만에 환궁을 합니다.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의 나라임을 천하에 공포하죠.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1905년에는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조약까지 맺는 지경에 이르고 마니까요. 지금의 구 러시아공사관은 사적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출처] 구 러시아 공사관 - 저건 뭐하는 건물이야?|작성자 썩어도준치
사연도 많고 한도 많고...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의 체결장소. 서울시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지 721평, 연건평 227평(1층 121평, 2층 106평) 규모이다. 1983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 중명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 건물이기도 하다. 외교사절단 연회장으로 쓰였으며,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이 3년 동안 기거하기도 했다. 애초 덕수궁 경내에 있었으나 덕수궁 석조전 사이로 길이 나면서 궁궐 밖에 나앉은 모양새가 됐다. 여기서 일제는 1905년 고종을 협박하며 을사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국에 알리려 헤이그밀사 파견을 숙의하기도 한 장소이다. 1906년 이토오 히로부미가 이곳에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부임하기도 했다.
중명전은 1935년 3월 12일 일어난 화재로 외벽만 남고 다 타버린 후 재건되어 외국인구락부로 쓰였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클럽(SEOUL CLUB)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을 1963년 11살 때 일본으로 인질로 잡혀간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영구귀국하면서 1974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중명전이 사기업체의 소유로 각종 사무실 등으로 쓰이고 있자 2002년 서울시가 근·현대사 자료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물·토지 감정평가를 마치고 시의회의 매입 승인까지 얻었지만 이 계획을 취소해 각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2007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0년에 일반 개방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 성종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화재 이후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 시대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남산공원
숭례문에서 잠깐 올라 힐튼호텔 뒤에서부터 시작하여 국립극장까지가 남산공원 코스입니다.
나에게 소원을 묻지 말라....!! 백범광장 김구선생 동상
바로 옆에 백사 이항복의 10대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든 우당 이시영선생 동상도 있습니다.
남산 안중근의사 기념관
일제강점기 1927년 일본 신사가 지어졌던 장소입니다.
이익을 앞에 두고는 정의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한다는 논어편 말씀....
목멱산이 멀리서 보면 누애모형이랍니다. 그 머리부분 잠두봉 전망대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목멱산 봉수대
전국이 봉화산에서 올라오는 봉화의 최종 목적지, 남산에 모두 다섯 군데가 있었다는데 이곳 한 곳만 우선 복원
서울 도심의 높은 건물이 다 북악산 아래 청와대를 바라보고 있네요.^^
남산 팔각정
YTN 서울타워
사랑의 열쇠
남산에서 국립극장으로 내려서는 길에 반대로 남산으로 올라가는 성벽
한양도성은 이렇게 팔도 지방에서 올려진 징정들에 의해 구획을 정해 완성했습니다.
태조 때 도성을 축조(1396), 세종 때 도성 축조(1422), 숙종 때 도성 축조(1704~), 순조 때 도성 축조(1800~)
후대로 오면서 계속 정비하고 새로 보수하고 쌓았기 때문에 성돌크기와 축조방식이 다름...
태조 때 전국의 장정 11만8천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농번기에 돌려보냈다가 그해 가을 8만 명을 동원합니다.
세종 때에는 전국에서 32만2천의 일꾼이 부역에 동원됩니다. 당시 한양 도성의 인구가 10만이었다니... 성을 쌓다 죽은 인원이 877명 전국의 군단위로 소집하여 책임구역을 할당하여 축성을 독려하였으나 먹을거라도 제대로 주었을지... 그나마 세종때 동원된게 다행인지... 부역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 죽은 인원도 많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무혈입성으로 함락되어 숙종 때 다시 대대적인 수축을 합니다.
1915년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경성시구역개수계획이란걸 만들어 성문과 성벽을 허물었습니다.
1973년 7월 완공 신축한 국립극장, 1974년 8.15경축사에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이 있었던 장소
1950년 4월 29일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설립되었다. 설립과 동시에 국립극단을 창단하고, 1950년 4월 30일 창단공연으로 연극 원술랑과 뇌우를 무대에 올렸다. 6.25전쟁 당시 대구로 이전하였다가 1957년 6월 1일 다시 서울로 이관하고, 1962년 1월 15일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오페라단 등의 전속단체를 창단하였다. 1969년 3월 8일 KBS로부터 교향악단을 인수하여 국립교향악단으로 개칭하고, 1973년 5월 국립발레단과 국립합창단을 창단하였다. 1973년 10월 17일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국립극장을 개관하고 1981년 8월 1일 국립교향악단을 KBS로 이관하였다. 1982년 5월 15일 야외놀이마당을 개장하고 1991년 국립중앙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5년 1월 1일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으며 2000년 2월 1일 국립발레단,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하였다. 대극장인 해오름극장과 소극장인 달오름극장, 공연 성격에 따라 무대가 바뀌는 별오름극장, 원형 야외무대인 하늘극장 등으로 이루어졌다. 해오름극장은 1,563석, 달오름극장은 427석, 별오름극장 80-100석, 하늘극장 600석 규모이다. 해오름극장에서는 스페인의 마리아 로사 발레단, 미국의 워싱턴 발레단, 일본의 가부키 극단과 뮤지컬 극단 사계 등의 유명 예술단체가 내한하여 공연하였고, 달오름극장에서는 완창판소리, 일요상설무대등 전통 상설무대와 해설이 있는 발레, 소극장 오페라축제, 대학연극축제 등 다양한 장르의 고정 기획물이 무대에 오른다. 2005년 현재 행정지원과, 공연운영과, 무대예술과 등 3개 과로 구성되었고, 국립극단,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 등 4개 전속단체를 거느리고 있다.
약수동 성곽마루 정자... 한강 관악산 쪽으로도 북한산 쪽으로도 남북으로 전망이 다 좋습니다.
이후 성벽을 따라 신라호텔까지 쭈욱 내려갑니다.
필리핀의 원조로 세워진 장충체육관이 현대식 건물로 말끔하게 새단장을 했군요.
대지 1만 865㎡. 건평 7,755㎡. 돔식(式). 수용인원 8000명.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실내경기장으로 1963년 2월 1일에 개관하였는데, 원래 육군체육관으로 사용하던 것을 본격적인 경기장으로 개보수한 것이다. 1,000kW 수은등 40개, 1,500kW 자연등 40개가 장치되어 있으며 전자식 스코어보드도 설치되어 있다. 농구·배구·핸드볼 등의 구기와 복싱·레슬링·역도·씨름 등 개인경기의 국내외 시합이 거행되며, 체육경기 외에도 각종 공개행사가 개최된다. 1988년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 때에는 유도와 태권도 경기가 열렸다.
신당동 성벽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여긴 그나마 성벽이라도 남아있는데... 부잣집 들어선 곳은 성벽을 통째로 들어냈다는...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희문 [光熙門] (두산백과)
예전에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답니다. 신당동쪽이 공동묘지??? 그래서 무당집이 많았는지도....
배에서 꼬로록~ 떡복이 냄새가 난다면 여기서 신당동떡복이 골목이 아주 가깝다는 겁니다.^^ ㅋㅋ
혹시 여기서 나신분 계실까요? 예전에 서산부인과였다는데 1965년 지어진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으로 근대 건축미의 걸작으로 평가를 받는다죠
을지로6가 18번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한다.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간수문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LED장미 아래에 이간수문을 복원....
서울특별시 동대문에서 중구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으로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중구 을지로(乙支路)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오간수문은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수문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다. 이 때문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복원하였다.
그후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이유로 수문을 헐고, 이듬해 3월에는 동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었다. 대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것이다.
오간수교는 1926년 다시 확장·건설되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간수문 [五間水門] (두산백과)
청계천을 복원하며 오간수교 아래에 오간수문을 예쁘고 앙증맞게 만들어 놓았네요. ㅋㅋ
한바퀴 돌아 동대문 원점으로.....
종로3가 종묘 앞에 삼봉 정도전 시비를 찾아보고 조선을 떠받친 오상의 근간 인의예지신 중 마지막 신(信) 보신각을 찾으러 갑니다. 예전에는 정도전 시비가 있는 장소에 정도전의 앉아있는 동상이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삼봉 정도전 대단한 인물이지요.
경북 봉화 출신 봉화정씨입니다. 외가인 단양 도담삼봉 근처에서 자라 호를 삼봉이라 했답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업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한양도성 설계를 담당합니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선시대 내내 역적으로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다가 고종때에 흥선군이 복권시켰습니다.
다행히 삼족을 멸하지는 않아 후손은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무덤도 가까스로 기록에 의존해 양재역 12번 출구 양재고등학교 정문옆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죠.
보신각 주변 풍경입니다.
건너편 서린동에 조선시대 옥사가 있던 곳,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부하의 밀고로 사로잡힌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한 장소입니다. 북쪽으로는 화신백화점자리에 삼성의 건물이 높이 세워져 있네요.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앞을 지납니다.
동십자각에서 삼청로로 경복궁의 담을 타고 갑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네요.
건춘문의 반대편은 영추문입니다.
청와대 정문 앞에 있는 경복궁의 북문에 해당하는 신무문입니다.
중종대 정암 조광조 기묘사화와 관련있는 신무문, 그래서 기묘사화를 신무의 난이라고도 한다고요.
이제 무궁화동산-칠궁-경복고등학교-청운중학교를 지나 부암동 자하문을 넘어갑니다.
세검정[洗劒亭]
1976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정자로 이것을 중심으로 한 일대(부암동·홍지동·신영동·평창동)를 통틀어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인다.
일찍이 연산군이 수각(水閣)과 탕춘대(蕩春臺) 등을 짓고 놀았다고도 하는데, 숙종 때에 북한산성·탕춘대성을 쌓고 부근을 서울의 북방 관문으로 삼으면서 주둔 군인들의 위락장소로 변하였으며, 시인·묵객 등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거사 동지인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이 광해군 폐위 문제를 의논하고 칼을 씻은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북악산(北岳山)·남장대(南將臺)·비봉(碑峯) 등에 둘러싸이고 사천(沙川)이 계곡을 흐르는 풍치지구(風致地區)이다.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후 간장 담그는 기술자와 창호지 만드는 기술자를 상주케 하여 ‘메주가마골’이라는 별칭도 생겨났으며 장판지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 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한말에는 이곳에 신식 군영(軍營)을 설치하였고, 또한 광목을 바래던 표백서(漂白署)도 있었다. 8·15광복 전부터 앵두·능금·자두 등의 산지였으나 근년에는 택지가 조성되어 많은 주택이 들어섰고 평창동∼정릉(貞陵)을 연결하는 북악터널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검정터 [洗劒亭] (두산백과)
탕춘대(蕩春臺)
종로구 신영동 136번지에 있던 돈대로서, 연산군 11년(1505) 이곳에 탕춘대를 마련하고 앞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영조 27년(1751) 가을에 영조는 탕춘대에 거둥하여 활쏘기로 무사를 뽑고, 29년(1753)에 탕춘중성(蕩春中城)을 새로 쌓고, 30년(1754)에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라 하고 홍상서(洪尙書)를 시켜 신영동 172번지 세검정 위 길가에 있는 바위에 ‘연융대(鍊戎臺)’ 석자를 새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탕춘대
탕춘대성과 홍지문
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다.
탕춘대성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하여 세운 성곽으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부터 향로봉까지 이어진 4㎞정도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북한산성을 축성하였으나 북한산성이 높아서 군량 운반이 어렵자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 일대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하여 이 성을 축성하기로 했다. 원래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산주(漢山州)로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홍지문(弘智門)은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한다.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축대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로 평면이 40㎡ 정도이다. 성문에 이어 성벽을 연결하여 만든 오간수문(五間水門)은 도성의 물길을 고려하여 높이 5.23m의 홍예문을 5개 내어 홍제천의 물을 흐르게 한 시설로, 조선시대 치수정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1921년에는 문루가 내려앉고 오간수문도 장마로 떠내려가 황폐해졌다. 그 뒤 1977년에 탕춘대성의 성벽을 보수하고 오간수문, 홍지문을 복원하였다. 1976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종로구에서 관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지문 및 탕춘대성 [弘智門─蕩春臺城] (두산백과)
궁궐의 연회를 집행하는 흥청이 설치되었겠지요. 여기서 흥청망청이 유래되었답니다.
비봉능선을 오르다 야경을 잡았는데 북악산 인왕산 안산순입니다.
북악산을 오르는 한양도성 가로등이 금테를 두른듯 보입니다.
청수동암문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지만 이곳 청수동암문에서 대성암 내려가는 곳에 맑은 물이 흐릅니다. 이를 이름하여 청수동이라 했는데, 북한지에는 청수동암문 일대 산봉을 가사봉(袈裟峰)이라 했고 그 아래 당집이 있어 청수동암문을 가사당암문이라 불렀다는군요.
옆으로 문수봉이고 청수동암문에서 서울시내를 내려다본 야경입니다.
공사가 완료된 모습의 대성문입니다.
숙종임금이 한양도성에서 숙정문으로 나와 형제봉줄기를 타고 이곳 대성문을 통해 행궁에 이르렀던 한양도성에서 최단거리로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보국문입니다. 이 또한 원래는 동암문(東暗門)이라 불리웠답니다.
성밖으로는 정릉 청수장으로 내리고, 성안쪽 보국사에서 수비를 담당하였기에 보국문으로 바뀌었다지요.
금위영에서 관리한 대동문으로 1993년 복원된 것입니다.
지형이 바람이 많이 불어 금위영을 보광사 옆으로 이전하고 이건기비를 세웁니다.
우이동 소귀천, 솔밭공원에서도 오르고 아카데미하우스와 백련사를 입구로 진달래능선으로 오르는 대동문의 높이는 해발 430m입니다.
산성을 수비한 12개 사찰 중 하나 용암사가 있던 자리 용암사지 대피소입니다.
용암사 터에 있던 갖가지 유물들을 한 곳으로 모아두었습니다.
북한산 정상 백운봉에 올라 일출을 본다는 계획이었는데 청수동암문에서 백운봉까지 2시간이면 가능했습니다.
청수동암문에 올라 쉬기도 마땅치 않고, 백운봉에서 일출을 기다리기도 어렵고 해서 그냥 지나칩니다.
무엇보다 다리에 힘이 있으니 굳이 쉴 필요를 느끼지 못했네요.
효자리에서 올라오는 문루와 누대가 없는 북문입니다. 단단하게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모습인데요.
수문지 좌우로 지대가 낮고 북쪽을 담당하는 곳이라 성벽을 두텁게 쌓았습니다.
방위를 대표하는 네 개 문중에 북문만 `대(大)`자를 붙이지 않은 이유는 관습상 북쪽 방위를 홀대한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북문은 훈련도감과 상운사에서 관리하였는데 상운사는 해방정국 이승만대통령과 연분이 있습니다.
홍예석이 걸쳐진 T자 모양의 서암문입니다.
이곳의 경비를 담당한 12개 사찰 중 하나인 수문지 옆 서암사도 복원계획이 있습니다.
산성을 축성하는 도중 사망자가 발생하면 이곳을 통해 밖으로 나가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립니다.
효자동에 국사당 옆에 부암도 있는데 북한산성 축조당시와 관련성이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여튼 부암이란 시체를 화장하고 그 유골을 뿌린 바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원래 `시구문 밖`이라 하면 서울 중구 광희동에 있는 광희문을 가리킵니다.
서문안마을 중흥동은 고려 우왕때는 요동정벌을 준비하는 최영장군 병력이 유영했던 곳입니다.
중흥사 서쪽 장군봉(용학사 뒤쪽)은 최영장군이 자리했던 장소인지라 아직도 장군봉이라 불리고 있답니다.
서암문에서 산성을 따라 촘촘하게 배치된 성랑지를 지나 아래로 내려오면 수문지가 나옵니다.
1915년 8월 대홍수에 완전히 유실되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대서문에서 이곳 수문지까지 성벽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습니다.
북한산성탐방지원소에 도착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편의점은 고사하고 사람 하나 찾아 볼 수 없어 준비한 찰떡을 아침으로 대용하고 그대로 진행하기로 합니다.
의상봉을 지나 국녕사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시단봉 동장대쪽으로 아침해가 떠오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동문쪽이네요.
한달음에 가사당암문을 지나 용출봉-용혈봉-증취봉을 넘어 식당바위에 내려섰습니다.
현재의 가사당암문은 원래 국녕사암문으로 불리웠답니다.
성랑지로 이용한 바위인데 시루를 뒤집어 놓은 형상의 증취봉아래 있어서 일명 식당바위라 합니다.
밥먹기 좋게 5~60명 정도가 둘러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터가 있습니다.
부왕동암문 사진이 올라오지 않았네요.
원래는 소남문(小南門)이라 불리웠답니다.
부왕동암문은 삼천사와 부왕사를 연결하는 암문입니다. 예전에는 원각사라는 절이 있어 `원각사암문`으로 불렸답니다.
성안으로 내려가다 오른쪽에 부왕사터가 나오고 이 계곡을 `부왕동`으로 불렀답니다. 계속 아래로 내려가면 산영루와 만납니다.
이 사진은 북한산성 치성인 나한봉에서 북한산 삼각 봉우리를 조망한 모습입니다.
산성을 한바퀴 돌아 다시 해발 694m 청수동암문에 섰습니다. 한바퀴 도는데 약 7시간 걸렸어요.
빠르지는 않지만 지체하거나 쉰 곳이 없이 꾸준히 걸었습니다.
청수동암문에서 그대로 대성암으로 내려섭니다.
어영청유영지- 보광사 자리- 대동문 근처에 있다가 옮겨온 금위영 유영지를 차례로 지납니다.
보국사 자리에서 보국문까지는 0.4km, 대동문까지는 0.5km입니다.
행궁지 삼거리도 지나 태고사-중흥사를 지나면 이곳 비석거리 옆에 산영루에 도착합니다.
산영루(山映樓): 산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곳
북한산 산영루는 중성문을 지나 대동문으로 향하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 용학사 갈림길에서 태고사 방향으로 오르다 만나게 된다. 중흥사지 비석거리 맞은편 넓은 암반위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찾았던 누각이며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1786-1856) 등 당대 많은 지식인이 이곳을 방문하여 북한산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시(詩)를 남겼다.1902년까지 누각이 존재했으나 안타깝게도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2015년 고양시의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산영루를 복원하였다.
- 다산이 산영루를 노래한 시 한 수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숲 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 꽃을 피우는데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구름 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
[네이버 지식백과] 북한산 산영루 [北漢山 山映樓] (두산백과)
숙종임금의 어명으로 북한동을 보강하고자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 기린봉 아래 중흥사를 통해 행궁에 이르는 중요 길목에 수문을 포함한 겹성을 하나 더 두어 어영청이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대서문(大西門)
대서문은 북한산성에 있는 성문이다.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11척, 넓이 13척이며, 홍예문으로 만들었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대동문(현 대성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문이 대서문이다. 대서문은 의상봉과 수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성내부로 통하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9m, 높이 6m, 문지폭 7.9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3m 이다.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육축은 3단의 기초석을 쌓아 평지를 조성한 후 8단을 석축하였으며, 그 위로 미석을 한줄로 놓고 여장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하나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20×30cm의 총안이 하나씩 뚫려있다. 육축부의 서쪽에는 성벽을 약간 밖으로 내어 쌓았다. 현재의 문루는 195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한산 대서문 [北漢山 대서문] (두산백과)
첫댓글 이코스는 지방에 계신분들이 서울갈때 원가뺴먹기 딱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방에도 끝내는군요.. 갈림길이 몰라서 촌늠들은 뱅뱅 돌다가 끝날듯합니다
"아마도 저보고 이 연계코스 가이드를 하라시면 다리보다 입이 아파 제시간에 끝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말씀에 빵터졌네요..
항상 즐거운산행되시고요.. 아프지마시고 산행되시기를
대충 정리만 하는데도 점심이 훌쩍 지났네요. 일단 밥부터~^^
코스 좋네요.
마지막 의상봉 오름은 좀 힘들었겠군요.
한여름 낮에 오르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총대장님! 숨은 역사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코스입니다. 재미있게 다녀왔네요.^^
한 편의 역사의 서사시입니다.
아~ 놀랍습니다. 산행거리 그것도 대단한데~ 구비구비 산행의 뒤안길 역사의 바른길을 찾아서
정리하고 글로쓴 그 마음 그 정성이 말로 표현키 어렵습니다.
그 길 저도 가고픈데 멀리서 대신합니다.
산행기는 태반이 가져다 옮겼을 뿐입니다.^^
다만 그냥 걷느냐 알고 걷느냐의 차이랄까요.
1대간 12정맥 12기맥 162지맥도 기왕이면 그리 찾아보고 걷고싶네요~ 감사합니다.^^
@퐁라라 사실 저도 산행기를 쓰는 한 사람입니다만,
산행기를 쓸려면 우선 산행을 하면서 꼭 필요중요한 지점 역사문물을 산행현장에서 사진찍고(인터넷 다운로드 가능하지만 내가 찍은 것이 더 마음에 끌리니~),
그리고 역사 문물 현장 안내판 설명을 참조하면서도, 인터넷에서 필요한 부분을 태반 가져다 붙여넣기^^하면서 편집 조정하는 것이 필수이지요.
그나 더 중요한 것은
본인이 거쳐온 그 곳 역사 문물의 현장이라면 더욱 소중하니,
그 곳에 대한 연역 해설 설명 그리고 느낌을 적어서 요약하고 정리해서 글을 올리면 참 뿌듯합니다.
다음에 또 갈 수 있을 지 사실 장담하기 어렵지요,
한편의 산행기는
나의 삶과 어울어진 산행현장입니다.
@이산50 이심전심 텔레파시 찌익~ 맞습니다.^^
가기 전에 공부하고 직접 확인하고 다녀와서 보강하는게 산행기입니다. 이는 자랑질보다는 후답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는 목적이지요.^^
역시 해 본 사람이 그 심정 압니다. 미투 ^^
산행기 자료가 참좋습니다..
그만큼 애정이 있으면 자료를 찾고 하나의 다큐가 되는것을 공감합니다..
서울가면 이코스 꼭가보고싶네요 또다른 산행기를 기대해봅니다
넵! 광-청-인-대-구-우 종주하고 마지막 관악산11국기봉 마무리 하는 코스를 생각중입니다.^^
@퐁라라 토요일 새벽부터 안하시는가봅니다...
@지맥 하루에 어려우니 오후에 출발해 무박으로 잡을듯 합니다. 요일은 제 싸이클에 맞춰 쉬는 요일로~^^
퐁라라님의 노고로 인해 한양지식 두루두루 섭렵합니다. 한양도성 축조가 지역 할당제였다는거 첨 알았네요 ^^
문화해설사님 같으신 박식한 설명과 프로페셔날포토그래퍼의 작품 같으신 사진이랑 이짝저짝 즐감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
네~ 전국구 전임 지부장님!^^
저는 거반 길에서 주운 잡지식입니다.
전문가 수준으로 고서적을 독파하고 산행기를 써내려가는 현오선배님에 비한다면 아마츄어입니다.^^
사진과 설명으로 공부 열심히 하고 갑니다..
대장님! 제가 더 걱정돼요~^^
머리에서 김나는거 아닙니꽈~^^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