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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
연 도 |
관 직 |
품 계 |
비고 |
42 |
선조6(1573) |
권지성균관 학유 |
종9품 |
예조 |
44 |
선조8(1575) |
경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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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 |
진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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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 | ||
45 |
선조9(1576) |
성균관 학록 |
정9품 |
상동 |
46 |
선조10(1577) |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
상동 |
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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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 대교 |
정8품 |
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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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 봉교 |
정7품 |
상동 |
50 |
선조14(1581) |
성균관 전적 |
정6품 |
상동 |
장원서 장원 |
상동 |
공조 | ||
병조 좌랑 |
상동 |
병조 | ||
51 |
선조15(1582) |
영변통판 겸 춘추관직 |
종5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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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선조18(1585) |
예조좌랑 |
정6품 |
예조 |
회시에 감찰관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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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 정언 지제교 |
정6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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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 지평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사관 |
정5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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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정랑 지제교 |
정5품 |
호조 | ||
선조18년 7월 |
사헌부 지평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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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18 |
공조정랑 지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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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조 | |
선조18 10월 9일 |
한양의 여저(旅邸)에서 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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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19(1586) 2월 20일 |
대구 수성현 파잠리 선영하에 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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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22(1589) |
통선랑 수홍문관 응교에 추증됨 |
정4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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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를 살펴보면 전경창은 13년의 관직생활 중에서 주로 내직에 근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직에 나가 있었던 기간은 경주와 진주 교수(1년), 영변통판(2년)의 기간을 합하여 3년에 불과하였다. 또 그는 주로 문필을 담당하는 예조에서 근무하였는데 이것은 조정에서도 그가 학문이 깊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종년에는 대간직(臺諫職)인 정언과 지평으로 있으면서 많은 활약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타계하기 직전에 여러 관직으로 바꾸어 제수한 것은 병으로 사임하였기 때문이다.
전경창이 관직에 있을 때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일반사신이 겸하여 행하던 것을 전임사신을 파견하게 한 것이다. 종계변무란 국계변무(國系辨誣)라고도 하는데 고려 말 이성계의 정적(政敵)이었던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주하여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무고(誣告)하여 이것이 명(明)의 『황명조훈(皇明祖訓)』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재된 것을 정정하려고 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태조 선조의 세계(世系)가 잘못 기록된 것을 정정하려고 한 것이다. 이 일은 태종 때부터 명나라에 사신이 갈 때마다 정정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매번 시정하겠다는 약속은 받았으나 정정하여 간행한 책자를 보지 못하였다.
그 이후 조선에서는 지속적으로 이것을 정정하고자 하였으나 200여년이 지나 선조대에 이르러 성취되었다. 이것은 전경창이 선조(宣祖)께 상소하여 종래에 일반사신이 겸하여 행하던 것을 전임사신을 파견하여 행하게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전경창은 이 일이 이루어지기 4년 전에 타계하였다. 1589년에 참판 윤근수(尹根壽)가 성절사로 가서 신종황제로부터 정정된 책을 받아옴으로 이 일은 마무리되었다. 전경창은 이 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되고 홍문관 응교(應敎)에 추증되었다.
10) 타계(他界) 및 만․제문(挽․祭文)
전경창은 선조 18년(1585년) 10월 9일 한양의 여저(旅邸)에서 병으로 타계하였는데 향년 54세였다. 전경창은 타계하기 1년 전에 고향을 방문하고 2월 28일에 동화사에서 문인들과 전별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五梅亭 孫處約의 「제문」) 그리고 타계한 해 가을에 문인 태암(苔巖) 이주(李輈)가 한양으로 올라왔을 때 만나 사제지간의 회포를 나누었다. 이때 그의 병은 이미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상황을 이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난 가을에 한양에서 오랫동안 옛 일을 이야기 할 때, 귀밑이 쇠하여 희고 살이 빠져 수척하셨네. 약을 쓰지 않아도 나아서 장수를 누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어찌 알았으랴? 재앙이 내려 지위가 덕에 미치지 못할 줄을!(『태암문집』)
전경창이 타계하자 선조께서 부의(賻儀)를 내리시고 판서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과 판서 약포(藥圃) 정탁(鄭琢), 판서 윤국형(尹國馨), 판서 권협실(權鋏實)에게 명하여 상여(喪輿)를 호송하게 하여 고향으로 운구하게 하였다. 전경창의 상여는 눈 내리는 겨울의 빙판 길을 거쳐 천리의 먼 길을 와서 그 다음해 1586년 2월 20일에 대구 수성현 파잠리 무동 선영하에 안장하였다.
전경창이 한양에서의 관직생활과 고향에서 행한 인품과 덕행은 당시 조정의 관리와 고향의 사우들이 한 만사 33수와 제문 14편에 잘 나타나 있다.
●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8]
3. 좌우명과 가헌․가령
1) 좌우명(座右銘)
옛 선비들은 대체로 1, 2개의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잠(箴), 명(銘)이라고 하는데 계동 전경창은 잠(箴)이나 명(銘)으로 명명하지는 아니하였으나 그의 가헌(家憲)과 가령(家令)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글들이 모두 잠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전경창은 ‘근근성실(勤謹誠實)’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 말을 풀이해 보면 ‘부지런하고, 삼가하고, 정성을 다하고, 진실하게 행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네 글자의 정신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경창은 이 네 글자를 실천하는 지침으로 48자의 한자로 나타내고 있다.
“衣冠嚴整, 謂之外修, 行誼純潔, 謂之內修. 內外俱修, 何人不求? 衣冠不整, 謂之外惰, 行誼不潔, 謂之內惰. 內外俱惰, 何人不唾?
(의관을 엄정히 하는 것은 외면을 닦는 것이요, 행의를 순결하게 하는 것은 내면을 닦는 것이니 내면과 외면을 함께 닦는다면 어느 사람인들 찾지 않으리오? 의관을 바르게 하지 않는 것은 외면을 게으르게 하는 것이요, 행의를 순결하게 하지 않는 것은 내면을 게으르게 하는 것이니 내면과 외면이 모두 게으르다면 어느 사람인들 침 뱉지 않으리오?)”
전경창은 위의 글로서 자신을 검속(檢束)하고 내면과 외면, 즉 마음과 행위를 경(敬)으로 바르게 하였다. 그는 이 글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였다. 영조 때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경상도 대구 인물조」에는 “전경창은 옥산인인데 학행으로 세상에 일컬어졌다. 공은 일찍이 48자(字)로 스스로 경계하였다. … 저술한 가헌과 가령이 세상에 행해졌다.”라고 하고 위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2) 가헌(家憲)․가령(家令)
전경창은 또 가헌(家憲) 25조와 가령(家令) 14조를 지었는데 모두 가정을 경영하는 지침으로 타인도 교훈으로 삼을 만하였다. 가헌이란 ‘잡안의 법도’인 규범을 말하고, 가령이란 ‘잡안의 명령’으로 실천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의미는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가헌의 몇 조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부지런하고 삼가함[勤謹]을 가정의 법도로 삼고, 검소하고 후덕함을 가풍(家風)으로 삼는다.
2. 효도하고 공경함을 돈돈히 하고, 제사를 근엄하게 드린다.
3. 내외를 엄격히 구분하고, 장유(長幼)를 분별한다.
4. 공부방에는 책과 거문고, 활과 화살 외에 다른 물건은 두지 말라.
5. 자기의 덕을 이루려고 하거든 남의 옳고 그른 것을 말하지 말라.
6. 전답(田畓)과 호구(戶口)는 책에다 기록하여 두고, 관청에 세금 내는 것과 사공(私貢)으로부터 받는 것은 또한 가족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좋다.
7. 술은 많이 마시지 말라.
8. 바둑과 장기를 즐기지 말라.
9. 매와 사냥개를 기르지 말라.
10. 세상 사람은 두 종류의 형태가 있다. 뜻을 독실이 하여 배움을 행하고, 성실근근[誠實勤謹]하는 것은 남자의 일상적인 사업이니 모름지기 백가지 천가지의 공력을 더하면 집안을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다행함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공도 세우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을 면할 수 없다. 그 하는 일이 또한 말단의 잡다한 일을 면하지 못하여 일정한 직업이 없고 인하여 일정한 마음이 없어[無恒産, 因無恒心] 자신을 잃고 집을 망하게 한다. 오직 마땅히 농사일에 힘쓰고 검소함으로써 사용에 풍족하게 하는 것이 천번 만번 지당한 법이다. 만약에 이 두 가지를 잃는다면 가히 말할 필요가 없다. 가히 말할 필요가 없다.
가령의 몇 조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집을 다스리는 도는 일체 근검으로 근본을 삼는다.
2. 위로 가장으로부터 아래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다 일찍 일어나서 자기의 일을 하여야 한다.
3. 노역을 고르게 시키고 상벌을 명확하게 하여야 한다.
4. 내일 할일은 내외(內外)와 노복(奴僕)이 다 오늘 저녁에 듣고 지시를 받는다.
5. 농사를 지을 시기에는 토목의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
위의 가헌과 가령은 대체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것으로 가정을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는 효제(孝悌)로부터 제사, 세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위의 가헌과 가령은 김종권이 편저한 『한국인의 명언』(일지사, 1985년 발행, 2004년 중간)의 ‘근검(勤儉)편’에 발췌되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대 선인들 375인이 남긴 명언을 효도, 충성, 화목, 입지, 학습, 수신, 처세, 근검 등의 18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엮은 책이다.
또 경제 칼럼니스트인 김송본은 한국산업은행의 사보(私報)인 『산은소식』(2007년 6월호)에 위에서 제시한 가헌의 10번째 조항을 발췌하여 <가난보다 게으름을 두려워 하라: 움직이면 가난은 면한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보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한 글들이 있다. 먼저 퇴계 이황의 제자인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전경창(全慶昌, 1532~1585)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첫째, 뜻을 착실하게 가지고 배우고 실행하는 태도가 성실하고 근면하고 삼가는 사람은 항상 모든 일을 떳떳하게 처리하여 반드시 백 가지 천 가지를 성공해서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둘째, 배워도 성공하지 못하고 용렬한 사람은 하는 일이 사리에 벗어나 불량하고 놀고먹는 잡된 사람이 되어 재산은 없어지고 생활할 마음도 없어져 자신의 몸과 가정을 망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위의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전경창의 가헌과 가령이 전근대적인 요소가 일부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그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도 교훈이 될 만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9]
4. 계동 전경창의 학문(1)
계동 전경창(1532∼1585, 字는 季賀)의 학문을 논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전경창의 저술이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경창의 문집인 『계동집』에는 낙엽부(落葉賦) 1편과 시(詩) 2제(題) 4수(首), 만사 1수, 청참보우소(請斬普雨疏) 3편, 잡저(雜著)인 가헌(家憲)·가령(家令)이 수록되어 있다. 나머지는 모두 부록으로 행록(行錄), 만(挽)·제문(祭文) 등 후인의 저술이다.
최근에 필자는 전경창과 교유하였던 분들의 문집에서 그가 지은 시와 그에게 준 시 등을 확인하였는데 이숙량의 『매암집(梅巖集)』에 ‘영모당 차운(永慕堂次韻, 계동 作)’ 1수, 황응규의『송간집(松澗集)』에 ‘차전계하 혜시(次全季賀惠詩)와 ‘유전계하경창 부득서일절(留全季賀慶昌不得書一絶)’ 각1수, 권호문의 『송암집(松巖集)』과 『속집(續集)』에 ‘여전정자계하 이정자공보 화호선(與全正字季賀李正字共甫話湖船, 1576년 作 계동 45세)’ 2수, 김부륜의 『설월당집(雪月堂集)』에 ‘직야 차계동전내한계하경창(直夜次溪東全內翰季賀慶昌, 1577년 作 계동 46세)’과 ‘송전판관계하 부영변막(送全判官季賀赴寧邊幕, 1582년 作 계동 51세)’ 각1수, 임재의 『임백호집(林白湖集)』에 ‘차운 증전통판계하선생(次韻贈全通判季賀先生, 1582)’ 2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모당집』에 있는 시 3수는 『계동집』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전경창이 당시에 교유하던 사람들과 주고받은 시, 서간 등 저술이 상당히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집에 전하는 것은 매우 소략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전경창의 외우(畏友)이자 대구지역의 향장(鄕長)으로 불려졌던 송담 채응린 역시 저술이 거의 전하지 아니하는데 송담의 후손 채병국 어른의 말씀에 의하면 채응린이 강학하였던 “소유정(小有亭)과 압로정(狎鷺亭)에 많은 저술과 서적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임진란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고 전해 들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전경창의 유고(遺稿) 역시 이때 거의 대부분 유실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대구지역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범하던 길목으로 여타의 지역보다 더욱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전경창의 저술은 임진란 후 그의 제자인 모당 손처눌에 의하여 1차적으로 수집되었는데 이때 손처눌은 앞에서 열거한 것 중 청참보우소는 수집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疏)는 그의 외손가(사위 낙포 이종문의 후예)에서 보존하여 왔다고 한다.(『계동집』 「발문」)
필자는 본고에서 전경창의 몇 저술과 후인들의 기록을 활용하여 그의 학문을 구성하여 보고자 한다.
1) 전경창 학문의 성격 및 문체
전경창의 학문은 한마디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유자(儒者)들이 과거를 보아 벼슬에 나아가고자 한 치인(治人)에 치중하였다면 그는 존양성찰(存養省察)을 바탕으로 인격을 함양하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향리의 후학인 서사원이 과거공부에서 벗어나 위기(爲己)에 뜻을 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그대는 이 학문(성리학)을 할 만하다고 칭찬한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손처눌은 전경창이 만년에 출사한 것에 대하여 “붓을 꺾고 직언을 하여 당세의 일을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絶筆直伸當世事)”고 하였다.(손처눌의 「만사」) 이것은 그가 수기와 치인을 병행하고자 한 것을 말한 것이다.
전경창이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한 4년 후 46세(선조 10, 1577) 때에 손처눌은 스승인 계동에게 시를 지어 올렸는데 여기에 답한 시 「차손수재처눌운(次孫秀才處訥韻) 3수(三首) 정축(丁丑)」3수가 전하고 있다.
문장의 체제는 평이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그런 연후에 바야흐로 나라 선비의 지식을 논할 수 있다네. 뜻 붙임은 먼저 맥락을 찾아야 하고/ 문장의 구사는 모름지기 주된 근기(根基)를 세워야 하네. 학문의 오묘함 찾음에 깊기가 바다같이 하고/ 언어의 정미함에 이르기를 가는 실과 같이 하게. 노자의 광언(狂言)은 큰 요행을 바라는 것이니/ 장차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이한 말을 짓지 말게나.(文章體格貴平夷, 然後方論國士知. 命意必先尋脉絡, 措辭須主立根基. 學求妙奧深如海. 語到精微細入絲, 老子狂言深望幸, 莫將驚世騁奇詞) (「계동집」)
위의 시는 3수 중 첫째 수인데 이 1수 중에서도 그가 추구한 학문의 전체를 볼 수 있다. 위 시에서 전경창은 ‘문장의 체제는 평이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퇴계가 추구한 학문의 방향과 일치된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함에 평실(平實)할 것을 강조하였고 기이한 이론이나 주장을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시의 끝에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짓는다는 뜻과 비슷하다. 세상 사람들은 문장을 과신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병이 있는 까닭으로 원컨대 그 요약하는 공부를 하라.(貴作似. 有誇多鬪靡之病故, 願其做要約工夫.)”라는 글을 덧붙이고 있다. 모당의 「연보」에는 이 시에 대하여 위기(爲己)의 공부를 할 것을 당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전경창은 벼슬길에 올라 관부(官府)에 나아갔으나 그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인격수양을 위한 위기지학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노자(老子) 등의 도교적인 학문을 배격하고 유가의 평실한 학문을 추구할 것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10]
4. 계동 전경창의 학문(2)
2) 경전을 공부하는 과정 및 방법
계동 전경창의 경전공부 과정에 대한 것은 그의 문인인 모당 손처눌이 지은 「행록」에 나타나는데 그는『소학』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그는 “『소학』1책은 옛 사람이 ‘사람이 되게 하는 기본’으로 여겼는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리석게 살다가 죽으면서 이 책을 공부하지 않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권함에 먼저 『소학(小學)』을 공부하게 하여 근본을 세우게 하고, 그 다음에 여러 경전으로 나아가게 하고,『역전(易傳)』으로 마무리하게 하였다.
위의 글은 전경창이 제시한 경전공부의 과정을 대단히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주자가 제시한 일반적인 경전공부의 과정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자는 사서(四書)의 공부과정을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으로 제시하고 있다.(『대학』의 經 1장 앞 小註) 그리고 전경창은 역학(易學), 즉 『주역』으로써 경전공부의 과정을 마무리 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주역』을 대단히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전(易傳)』이란 『주역』에 해설을 붙인 것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주역』의 통행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책은 원문아래 한 자(一字)를 낮추어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易傳』과 주자가 지은 『本義』를 함께 편집한 것으로 당시에 사람들은 『역경(易經)』이라 부르기보다 『역전(易傳)』이라고 하였다.
전경창은 위의 경전 외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심경』은 송나라 주자의 문인인 서산(西山) 진덕수(眞德修: 1178~1235)가 『서경』, 『시경』, 『주역』, 『논어』, 『맹자』, 『예기』, 『대학』, 『중용』 중에서 심성(心性)을 바르게 하는 즉 수양에 관계되는 글들을 뽑아 간략하게 주석을 붙이고, 여기에 주렴계, 정이천, 주자의 잠명(箴銘)을 첨부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명나라 황돈(篁墩) 정민정(程敏政: ? ∼1499)에 의하여 주석이 더욱 첨가되었다. 그래서 『心經附註』라 부르기도 한다. 『근사록』은 주자가 그의 벗인 여조겸(呂祖謙, 1137~1181)과 더불어 주렴계,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의 저술 중에서 성리학과 관련되는 주요한 구절을 발췌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심경』과 더불어 성리학의 안내서 내지는 지침서로 조선조에 선비들이 매우 중시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을 향리의 후학인 서사원과 곽재겸, 문인인 이주에게 주어 공부하게 하였다. 그는 경주(東都)교수로 있을 때 이곳 향교에서 『근사록』을 강의하기도 하였다.(奉事 閔應祺의 「挽詞」)
전경창은 주자서(朱子書)를 대단히 좋아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종질 진사 전춘년(全春年: 1552∼1592)은 “그가 주자서를 편애하였다.(編愛晦菴文)”고 말하였다.(「만사」) 그는 30세에 정사철의 연화재를 방문하여 주자서를 강론하였다. 이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주자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에 대한 그의 저술이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이기론(理氣論)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54세 봄에 이주(30세)가 한양에 올라와 회시(會試)를 보았을 때 그에게 써준 ‘소서(小序)’에 ‘주자의 심법(心法)’에 대한 글귀가 남아 있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이때 이주는 과거에서 강경(講經)의 시험을 보았는데 경문(經文)을 차례로 두루 외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에 이르러 갑자기 의심되는 곳이 있어서 외우기를 멈추고 생각을 하였다. 전경창은 이때 시험을 감찰하는 일로 장막밖에 있었다. 이를 지켜본 전경창은 손톱으로 가죽신에 끍어서 글자를 써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주는 의연히 돌아보지 아니하고 곧바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이에 전경창은 이주에게 “앞서 강석(講席)에서 내가 가리켜 보인 것은 실로 과방(科榜) 가운데서 인재를 얻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잃게 되었다.”고 하니, 이주는 “임금의 섬김을 구하고자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일을 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이를 허여(許與)하고 다음과 같은 ‘소서’를 지어 보내었다.
“옛날에 주자가 말하기를 ‘과거가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과거에 구속된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말하기를 ‘과거가 어찌 그대를 구속하리오? 그대는 과거에 구속되지 않는다.’라고 하리라. 아! 주자의 천년 심법(心法)을 그대를 얻어서 전하게 되었구나.”(『태암문집』)
라고 하고 심경 1부를 주었다. 위의 글에서 전경창이 주자의 저술을 깊이 공부한 학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공부한 방법을 살펴보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연구하고 또 하나는 사색하는 것이다. 이것을 손처눌은 전경창이 가야산에서 공부하였을 때 ‘머리 숙여 읽고 우러러 생각하였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역학도설(易學圖說)』과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얻어 손수 필사하여 깊은 이치를 탐색하며 완미하는 즐거움을 두셨다.”고 하였다. 공자는 “배우기만하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올바른 지식이 되지를 못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지식이 위험하다.(學而不思則罔하고 思而不學則殆니라.).”고 하였다.(『논어』「爲政」) 위의 글에 의거할 때 전경창은 주자의 심법뿐만이 아니라 성인의 심법을 잘 터득한 학자로 그의 후학들에게 전한 것을 알 수 있다.
●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11]
4. 계동 전경창의 학문(3)
3) 역학연구와 성리학 그리고 시문(詩文)의 공부①
전경창은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역학(易學)의 연구를 통하여 경전의 공부를 마무리하게 하였다. 『주역(周易)』은 공자를 비롯한 복희, 문왕, 주공 4성인의 소작(所作)으로 「계사전(繫辭傳)」에서는 후생에 대한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인하여 지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원리를 밝히고 인간사의 진퇴존망(進退存亡)을 길흉(吉凶)으로 나타내어 그 길잡이를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주역』은 64괘와 그 괘상을 풀이한 경(經)과 전(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은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로 구성되어 있고 전(傳)은 십익(十翼)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경창의 역학연구는 그의 타계 후 100여년이 지나 예천에 살았던 어주(漁洲) 전오륜(全五倫: 1631~1720)이 대구의 전경창의 외손가인 하목정(霞鶩亭)을 방문하여 지은 시에서 그 대체를 알 수 있다. 시제(詩題)는 ‘차 이진사 익전 제 전계동 역도후(次李進士益전, 題全溪東易圖後)’로 ‘진사 이익전이 계동선생이 그린 역도(易圖)의 뒤에 쓴 시를 보고 차운(次韻)하다’이다.
천지의 가운데 일만 가지 형상이 나타나니/ 무궁한 변화는 현근(玄根: 태극)으로부터 일어나네. 괘(卦)는 기수(奇數)와 우수(耦數)로 나뉘어 강함과 부드러움을 체(體)로 하고/ 효(爻)로 확대되니 보존함과 망함, 나아감과 물러남을 알려주네. 이치(理)를 지극히 정밀하게 분석한 선조를 공경하여/ 그림(易圖) 뒤에 시를 지은 어진 외손이 있었네. 인생사(百年)의 현달과 은거가 다 운기(數)로 인하는데/ 누가 옥 같은 글을 이어 지극한 논설을 찬미하리오.(天地中間萬象紛, 無窮變化自玄根. 卦分竒耦剛柔體, 爻演存亡進退言. 理析毫端欽乃祖, 詩題圖後有贒孫. 百年顯晦皆由數, 誰繼瓊詞賛至論.『어주문집』, 1896년 간행)
이익전(李益香+全, 1657~1727)은 진사로 사위 이종문의 현손(전경창의 외 5대손)이다. 전오륜의 본관이 용궁이다. 위의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전경창이 역학을 연구하여 역의 원리를 도(圖)로서 설명한 그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상(圖象)이 그의 외 5대손에 이르기까지 전하여진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 도(圖)를 구하여 보고자 하목정의 후손을 통하여 알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위의 시에서 전경창이 그린 역도(易圖)는 태극에서 8괘와 64괘로 괘상이 확대되는 과정을 통하여 만물이 생성되는 무궁한 변화를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태극이 음양으로 양분되는 과정을 기수와 우수로서 설명하고, 강유(剛柔)를 체(體)로 하여 괘효(卦爻)를 형성하고 용사(用事)하여 인간사의 진퇴존망을 길흉으로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치(理)를 지극히 정밀하게 분석하였다’는 ‘이석호단(理析豪端)’이라는 글귀이다. 이것은 그의 역학연구가 궁극적으로는 ‘성즉리(性卽理)의 이(理)’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퇴계의 『계몽전의』를 손수 필사하여 연구를 하였다. 『계몽전의』는 퇴계의 저술로 주자가 상수역을 연구한 『역학계몽』을 연구한 연구서로 그 미비점을 보완한 것이다. 퇴계는 이 연구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이(理)의 원리를 더욱 정밀하게 알고자 하였다. 퇴계는 “상수(象數)도 몸 밖의 일이 아니다.”고 하여 상수에 관한 연구도 궁극적으로는 의리역의 의리를 알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였다.(『퇴계집』 권26「答鄭子中」)
퇴계 성리학의 핵심은 이와 기는 결단코 이물(決是二物)로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는 없으나(不相離) 서로 섞이지 않는다(不相雜)’는 것이다. 이것은 이(理)는 기(氣) 안에 내재되어 있으나 이는 이(理自理)이고 기는 기(氣自氣)로서 이(理)는 기(氣)를 명령하고 거느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극존무대(極尊無對)한 이(理)의 독자성을 확립하기 위한 퇴계의 이(理) 우위론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인 것이다.(『퇴계집』권41 非理氣爲一物辨證 등 참조) 이러한 측면에서 전경창의 역학연구 또한 성리학의 이(理: 의리)를 알기 위한 것으로 퇴계의 성리학을 계승한 것이다.
전경창의 의리탐구에 대한 치밀성과 엄격함은 “공부방에는 도서와 가야금(거문고), 활과 화살 이외의 잡다한 물건은 두지 마라.(文房, 圖書 琴瑟 弓矢 外, 勿置雜具. 『계동집』「家憲」)”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자세로 학문에 임하고 진리를 탐구해 나간 성리학자로 필자는 그를 ‘활을 찬 선비’라고 칭하고자 한다.
이즈음에 『주역』과 관련된 필자의 이야기 조금 해 보고자 한다. 해가 바뀌어 필자는 금년 경인년에 지천명(知天命)에 하나를 더한(加一) 나이가 되었다. 필자는 가학(家學)을 이어 17, 8세에 도학(道學)에 뜻을 두었는데 대학의 철학과에 진학하여 여러 종류의 서적을 공부하였다. 『논어』도 공부해 보았고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서적도 공부해 보았다. 또 서양의 철학서도 공부해 보았다. 그러나 진리탐구에 대한 필자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다.
1987년에 영신고등학교에 직장을 잡고 2년 후 나이 30에 인산(仁山) 이진수 선생을 만나 『주역』을 공부하였는데 이 『주역』을 공부하고 난 이후부터 필자의 학문적 방황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필자는 『주역』을 공부하면서 세 차례 감탄을 하였는데 첫 번째는 하도와 낙서, 복희와 문왕의 팔괘도를 배웠을 때였고, 두 번째는 건(乾)․곤괘(坤卦)를 공부하였을 때였고, 세 번째는 「계사전」을 공부하였을 때였다. 이후로 필자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20여년간 학문에 정진하게 한 힘은 역(易)이었다. 역은 위대하다.
●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12]
4. 계동 전경창의 학문(4)
3) 역학연구와 성리학 그리고 시문(詩文)의 공부②
전경창은 성리학에 관한 연구와 더불어 시문을 공부하였는데 그는 두보(杜甫)와 소강절(邵康節)의 시를 좋아하여 즐겨 읽고 읊었다. 정사철은 전경창의 “시는 맑고, 고상하고 고아하기가 두보의 시와 같았다.(淸詩高古杜陵詩)”고 하였다. 소강절의 시는『성리대전』권70에 보이는데 이 시들은 역학(易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정사철과 전춘년의 「만․제문」)
또 전경창은 매화와 대나무(梅竹)를 심고 달 밝고 바람이 맑은 밤이면 빈방에 홀로 앉아 거문고(無弦琴)를 어루만지며 유유자적하였다. 곽재겸은 「제문」에서 “머리를 돌려 황원(荒園)을 바라보니 매화와 대나무가 있네. 백년동안 남긴 자취가 오직 이 이물(二物)밖에 없구나.(回首荒園, 有梅有竹. 百年陳跡, 惟此二物)”라고 말하였다.
5. 세심정(洗心亭)(1)
세심정은 전경창의 형 응창이 창건하였는데 대구 북구 무태 금호강의 북쪽에 있었다.(『대구읍지』) 세심정은 전응창의 호(號)이다. 전응창 또한 문과에 합격하여 충청도사와 함안군수를 역임하였는데 중년에 파잠(동)에서 무태 동변으로 이주하였다. 전경창은 파동의 계동정사에서 강학하였는데 서사원의 시에 의하면 전경창도 그의 형과 더불어 이 정자에서 강학한 것을 알 수 있다. 서사원은 ‘전의보 한의 세심정에 적다.(題全毅甫, 洗心亭, 僩: 의보는 전한의 字임)’라는 시에서 “계동의 고아한 전범(典範)을 잘 전하라.(溪東雅範是堪傳)”라고 말하고 있다.(『낙재집』)
세심(洗心)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수양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잘 보존하여 바른 심성을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주역』의 「계사전」에 보인다.
“그러므로 시초(蓍)의 덕은 원만하면서도 신비롭고 괘(卦)의 덕은 정확하게 알려주고 6효의 의미는 변화를 알려주는 것이다. 성인이 이로써(占으로써) 마음을 씻게(洗心) 하여 물러나 있어도 은미한 곳까지 알게 하였다. 그래서 길(吉)과 흉(凶)에 백성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 하여 오는 일(未來事)을 신비롭게 알게 하고 지나간 일(過去事)을 지혜롭게 갈무리하게 하였으니 그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하리오. 옛날에 총명하고 예지가 있고 무예가 신묘하면서 (백성들을) 죽게 하지 않는 분이신저!”(「계사전」상 11장)
위의 글은 점(占)의 효용성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점을 통하여 길흉의 결과를 얻을 때에는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과 자세를 간직하여야 한다. 따라서 성인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재계(齋戒)하여 세심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전응창이 위의 글에서 세심이라는 말을 자신의 호로 삼고 정자의 명칭으로 명명한 것을 보면 그 또한 조신하는 선비임을 알 수 있다.
세심정은 임진란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는데 전응창의 중자(仲子)인 전한(全僩: 1570년생, 호는 湖菴)이 종전 5년이 되는 1603년(선조 36)에 중건하였다. 낙재 서사원은 이 해 5월 10일에 선사재(仙査齋)에서 배를 타고 세심정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그 다음 날 연경서원에 들렀다가 저녁에 하향리(도동) 곽재겸의 집으로 가서 묵었다. 12일에 다시 배를 타고 세심정에 도착하여 묵고 다음날 13일에 무태의 여러 친구들과 더불어 유(遊)하고 이날 저녁에 선사재로 돌아갔다.(『낙재집』) 이때 무태 서변의 살고 있었던 태암 이주가 와서 함께 하였다.(『태암집』, ‘癸卯天中節, 與徐樂齋 郭槐軒 全洗心亭僩, 乘小舟遊花潭’)
세심정은 당시에 대구의 선비들이 연경서원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에 있었다. 당시에는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무태지역을 가로질러 금호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동화천이 지금의 서변지역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세심정에서 동변의 마을 앞을 지나 연경으로 들어갔다.
모당 손처눌이 1604년(선조 37)에 수성에서 연경서원으로 갈 때의 과정을 기록한 것을 살펴보자.
“8월 16일: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서원으로 향하였다. 강을 건너 잠시 세심정에 올랐다. 유호(柳湖(瑚))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 이슬을 맞으며 저녁 때가 되어서 서원에 들어갔다. 제군들이 와서 모여 있었다.”(『모당일기』)
손처눌은 8월 17일 아침에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강독(通講)을 하였다. 오후에 서원에서 곽재겸의 집으로 가서 류요신과 함께 유숙을 하고 19일에 배를 타고 금단(琴壇)을 거쳐 다시 세심정에 도착하여 시 1수를 짓고 저녁에 서원으로 갔다. 그리고 8월 20일에는 서원에서 세심정에 이르러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갔다.
세심정에 관한 시로는 괴헌 곽재겸과 손처눌, 역락재(亦樂齋) 김치관(金致寬: 1569∼1661) 등의 시가 있다. 곽재겸은 ‘제전의보 세심정(題全毅甫 洗心亭)’이라는 시에서 “주인의 심사가 강물처럼 맑고/ 구름이 걷히니 고정(孤亭)에 달 또한 밝네. 병을 낮게 하고자 할진데 마음을 깨끗하게 할지니/ 이 티끌 진 세상사를 경영함에 비웃노라.(主人心事與水淸, 雲擁孤亭月又明. 病欲蘇時心欲洗, 笑他塵世事經營)”라고 하였고, 손처눌은 “하늘은 비고 구름 걷히니 참마음(高明)이 나타나고/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잔잔하니 (마음의) 본체를 볼(存) 수 있네.(天空雲盡高明見, 風靜波恬本體存)”라고 하였다.(『괴헌집』, 『모당집』)
위의 시는 세심정의 재호(齋號)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의미에 의거하여 지은 시이다. 김치관은 대구 전의보 강정 차벽상운(大丘 全毅甫 江亭 次壁上韻)에서 “층층 벽에는 대나무가 덤성덤성 늘어져 있고/ 굽이굽이 흐르는 강 모래톱엔 많은 물새가 보이네.(依依踈竹層層壁, 汎汎沙鷗曲曲江)”라고 하여 강정(江亭)인 세심정 주변의 경관에 대하여 읊고 있다. (『역락재집』)
●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13]
5. 세심정(洗心亭)(2)
앞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세심정은 연경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던 관계로 많은 선비들이 방문하였다. 1606년(선조 39) 2월 26일에는 대구판관으로 선사재 강학에 참여한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이 서사원과 함께 배를 타고 세심정에 이르러 편안히 학문을 논하고 술자리를 가졌다.(「낙재연보」) 1622년(광해 14) 3월에는 한강선생을 연경서원에 봉안한 후 그 다음 날 투암 채몽연(1561~1638), 양직당 도성유(1571∼1649), 취애 도응유(1574~1639) 서재 도여유(1574~1640), 수월당 이지영(1585∼1639), 도곡 박종우(1587∼1654) 등이 세심정에서 배를 빌려 금호강 하류까지 뱃놀이를 하며 시를 읊었다.(『양직문집』, ‘西湖舟行賦’)
한편 1609년(광해 1년)에 송담 채응린의 중자(仲子)인 채선길(1569∼1646)이 임진란으로 소실된 압로정(押鷺亭)을 중건함으로 선비들이 배를 타고 세심정과 압로정을 오가며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사이에 있는 화담(花潭)은 금호강의 절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여 시를 읊기도 하였다. 그래서 금호강의 북쪽에는 세심정이 있고 남쪽에는 압로정이 있다는 말이 세인에게 회자(膾炙)되었다. 또 이 지역에는 이주의 환성정(喚惺亭)과 구회신(具懷愼: 1564~1634) 후예의 화수정(花樹亭)이 있어 세심정, 압로정과 더불어 금호강 동쪽(東湖)의 대표적인 4정자로 불린다. 그리고 금호강 서쪽(西湖)의 선사재(仙査齋), 이락서당(伊洛書堂), 아금정(牙琴亭), 영벽정(暎碧亭), 하목정(霞鶩亭) 등과 더불어 금호강 누정(樓亭) 문화의 꽃을 피웠다.
지금 세심정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조선 고종조에 임재 서찬규 선생은 “내가 매양 운곡(雲谷)과 한천(寒泉: 냉천)을 갈 때에 선생의 옛 유허지(遺墟地)를 지나갔는데 풍운(風韻)이 아득하여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맑은 것 같아 더욱 (선생에 대한) 경앙(景仰)의 회포를 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계동집』「발문」) 지금 파동 선생의 유적지에는 무동재(武洞齋)가 건립되어 있고 지난해 2009년에는 선생의 유적비를 세웠다. 필자는 나의 세거지인 무태지역을 갈 때에 세심정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는데 유지(遺址)를 바라보니 금호강은 옛일을 잊고 강물만이 유유히 흐를 뿐이었다.
화담에 대한 시 한 수(首)를 소개한다. 이 시는 나의 고조부(琴愚 具然雨: 1843∼1914)께서 1894년(고종 31년) 10월에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이듬해 초봄에 지역의 선비들과 이곳에서 시회를 하면서 지은 시이다. 제목은 ‘화담에 적다.(題花潭)’이다.
소[潭, 沼] 위에 층층바위, 바위 위에 산이 있네/ 엇 그제 핀 꽃[花]은 이미 지고 그 사이에 풀이 돋았네.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관찰하며 세상사를 잊고자 아득히 응시하며 바라보네/ 한잔 술이 시흥을 도우니 또한 얼굴에 취기가 오르네. 물새는 높이 날아 노래하며 스스로 즐기고/ 갈매기는 모래톱에서 안온하게 잠이 들어 꿈속보다 오히려 한가롭네. 아래에 굽이굽이 흐르는 물 맑기가 저와 같으니/ 가슴 속의 티끌 씻어버리고 갔던 길로 돌아오네.(潭上層巖巖上山, 昔花已盡草其間. 魚觀取適(주①)遙舒眼, 酒政助詩亦醉顔. 水鳥飛高歌自樂, 沙鷗眠穩夢猶閒. 下流曲曲淸如彼, 滌去塵襟訪道還.)(『금우집』)
위의 시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이 화담의 모습과 그 주변의 정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관찰하며 세상사를 잊고자 한다’는 말과, 또 ‘굽이굽이 흐르는 금호강의 맑은 물에 가슴 속의 티끌을 씻어버리고 싶다’고 한 것은 한양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금우공께서 조선말의 어지러운 왕정(王政)을 걱정하는 우국(憂國)의 심정이 담겨져 있다.
주①: 取適非取魚: 낚시하는 참뜻이 고기를 잡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를 잊고자 하는데 있다는 의미.
6. 연경서원(硏經書院) 향현사(鄕賢祠) 봉안(1)
연경서원은 매암 이숙량과 전경창 등 대구유림에 의하여 1564년(명종 13)에 건립되었다. 이 서원은 퇴계선생의 서원십영(書院十詠)에 언급되어 있는 9개의 서원에 포함되어 있는데(주②) 처음에는 사당이 없는 서원이었다. 이것은 서원이 건립된 초기 형태로 서당과 서원의 중간 단계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연경서원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1602년에 대구지역의 유림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1609년에 사당 건립을 논의하여 1613년(광해 5)에 퇴계선생을 봉안함으로 서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622년(광해 14)에는 한강선생(1543~1620)을 배향하였다.
전경창은 타계 50년 후 1635년(인조 13)에 대구지역 최고의 향현(鄕賢)으로 연경서원의 방묘(傍廟)인 향현사(鄕賢祠)에 봉안되었다. 또 1707년(숙종 33)에는 이숙량을 추배(追配)하였다. 전경창의 향선사(鄕先祠) 혹은 향현사(鄕賢祠) 봉안에 대한 논의는 1620년 4월 27일에 낙재 서사원의 배향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모당일기』) 그러나 그가 연경서원에 배향되기까지 사당의 건립 장소, 위차(位次) 등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에 손처눌을 제외한 문인들이 모두 타계함으로서 그의 학문과 조정에서의 공적에 대하여 아는 이가 적었기 때문이다.
주②: 서원 10영에 언급된 서원은 풍기의 죽계(백운동)서원, 영천의 임고서원, 해주의 문헌서원, 성주의 영봉(천곡)서원, 강릉의 구산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영주의 이산서원, 경주의 서악정사, 대구의 화암(연경)서원이다.
●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14]
6. 연경서원(硏經書院) 향현사(鄕賢祠) 봉안(2)
계동 전경창의 사당 건립[立祀]에 관한 것은 1620년(경신)에 손처눌의 제기로 인하여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해 4월 27일은 낙재의 문인들이 낙재 서사원의 사당 건립을 위하여 선사(仙査)에 모인 날이었다. 손처눌은 편지를 보내어 낙재와 계동선생을 함께 병향[並立]할 것을 요청하였다. 저녁에 답서가 왔는데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후일에 다시 논의하여 정하기로 하였다고 하였다.(『모당일기』)
그러나 이후 이 일에 대한 논의는 14년간 지속되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손처눌이 타계(1634년 6월)한 후 전경창은 그 다음해인 1635년 봄에 연경서원의 방묘에 봉안되었고, 서사원은 그 4년 후 1639년 10월에 이강서원(伊江書院)에 봉안되었다.(주①)
이와 같이 오랫동안 논의를 하였으나 합일되지 못하고 두 분이 별도로 봉안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사당의 건립 장소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 것과 둘째로는 위차(位次)에 대한 불일치 때문이다.
이때 연경서원은 대구의 유일한 서원이었다. 손처눌은 이 서원에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계동과 낙재를 함께 봉안을 할 것을 생각한 반면에, 서사원의 문인들은 선사재에 별도로 낙재의 사당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낙재의 문인들은 또 위차(位次)의 문제를 제기하여 낙재를 계동의 상위에 둘 것을 주장하였다.(『모당일기』 1621년 12월 1일)
양직당 도성유(1571~1649)는 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하자 이 두 문제에 대하여 사월당 류시번(1569~1640)에게 편지를 보내어 질의하였다.(『양직문집』「與柳沙月堂衛仲 時藩」) 이에 대하여 류시번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前略) 우리 고을에 불행히 사당 건립이 지연되게 된 것은 비록 우리들이 민첩하지 못한 책임이 있으나 실은 논의가 일치하지 못한데 연유한 것입니다. 논의가 일치하는 것을 기약할 수 없고 각자 세우자는 논의도 실로 편의에 의한 것입니다. 또 선사에 건립하게 되면 반드시 계동(주②)에도 건립하게 될 것이니 작은 우리 고을에 선사와 계동(溪東)에 각각 사당을 세운다면 연경서원과 합하여 세 곳에 사당이 있게 됩니다. 한 고을에 세 곳에 나누어져 있으면 높이 받드는 정성이 혹시나 전일하지 못할까 두렵고, 전일하지 못하면 곧 장구(長久)한 계책이 아닌 듯합니다. 다른 날에 사람들이 기롱하고 비웃음이 없지 아니할 것입니다.
두 선생님을 일실(一室)에 함께 모신다면 봄과 가을의 향사 때 입재(入齋)하는 선비들이 이곳을 버리고 저곳을 취하는 근심이 없을 것이며 높이 받드는 정성이 한결 같을 것 같은 데 갑(甲)은 말하기를 ‘낙재선생과 계동선생의 학문에 높고 낮음이 있어서 한 방에 함께 향사함은 불가하다’고 말하고 을(乙)은 말하기를 ‘높은 분은 깎아서 낮출 수가 없고 낮은 분은 저항할 수 없으니 비록 일실(一室)에서 함께 향사를 지내나 높은 분이 어찌 낮은 분에 손해가 될 수 있으며 낮은 분이 어찌 높은 분에 해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두 말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여러 형들의 절충가부(折衷可否)에 있으리니 어리석은 내가 어찌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下略)”(『사월당집』「答都廷彦(聖兪) 朴君錫(宗祐) 趙文甫)
위의 글은 당시에 제기하였던 문제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글이다. 이 글에 의하면 류시번은 낙재의 문인들이 선사재에 사당을 세우려는 것에 반대를 하고 그 이유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 그 위차에 대하여도 직접적으로는 언급하지 아니하였지만 이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손처눌은 위차(位次)의 문제가 제기되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어 변증을 하였다.
“(前略) 향현사는 곧 한 고을의 사론(士論)이니 국학의 일과는 크게 다른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명백한 것입니다. … 향당에는 ‘나이만한 것이 없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어길 수 없습니다. … 낙재와 계동과는 다만 작위(爵位)를 견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서로 공경하고 사랑함이 마치 스승과 제자 같았고 하물며 생가 양가의 부친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여 간담을 토로하는 것을 나도 곁에서 본 적이 많습니다. … 전년에 낙재 형 사당을 세우려는 의논을 한강선생(1543~1620)이 천천히 하라고 한 까닭으로 비록 중지하였으나 오늘 향현사의 의논이 이미 나왔으니 마땅히 기한을 정하여 완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공연히 어렵지 않는 위차에 의심을 가지고 세월을 끄니 매우 한스럽습니다.(下略)(『모당집』「與黌舍文會論溪樂坐次書」) ”
손처눌은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과 논의하였는데 문탄 손린(1566~1628)은 손처눌의 의견에 동의하였다.(『모당일기』 1620년 4월 29일) 1624년에는 연경서원에서 여헌 장현광(1554~1637)과 함께 유숙을 하게 되었는데 장현광 역시 손처눌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손처눌은 장현광과 한 대화를 “의리로서 논의하니 비로소 서로 다름이 없음을 알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낙재의 문인들이 사사로운 정에 빠져 사리를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장현광은 당시의 사람들이 전경창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점이 있으니 행장을 저술할 것을 권하였다.(모당일기 1624년 8월 10일)
주① 선사(재)는 금호강 하류의 북쪽 이천(伊川)에 있던 서재이다. 일찍이 고운 최치원이 가야산에 들어가기 전에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임하 정사철이 처음으로 이곳에 서재를 짓고 강학하였는데 임진란으로 소실이 되었다. 난 후에 서사원이 다시 이곳에 서재를 건립하고 강학하였다. 이강서원은 선사재(仙査齋)에 사당을 건립한 후 칭한 제호(題號)이다. 이강서원은 1636년에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으로 이때 봉안하였다.
주② 여기서 말하는 계동은 지역의 명칭으로 파동 전경창의 태생지를 말한다.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15]
6. 연경서원(硏經書院) 향현사(鄕賢祠) 봉안(3)
모당 손처눌은 이후 계동 전경창의 행록(行錄)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1625년(天啓 3년, 인조 3년 乙丑, 모당 73세) 3월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수정 한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4월 1일에는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1561~1638, 字는 靜應)이 방문하였는데 손처눌은 이때 채몽연과 계동의 행록에 대하여 논의하였다.(『모당일기』) 그리고 2년 후 1627년에 또 한 차례 수정을 하였다.(『모당일기』 8월 11일) 이것으로 보아 손처눌은 계동의 행록을 찬(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손처눌은 이 행록에서 “장여헌(張旅軒)이 또한 말하기를 ‘계동의 실제 이력을 후생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은 문헌을 징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어찌 또한 한 두가지를 추술(追述)하여 뭇 의혹을 열어주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였고 또 “오직 깊이 덕을 감추기에 힘쓰고 드러내지 않았던 까닭으로 당시에 선생이 진실로 도가 있는 사람임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에 그 실마리를 찾으려 한즉 또한 확실하게 근거할 만한 곳이 없는 까닭으로 말만 일삼는 무리들의 한가한 이야기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깊이 탄식하지 않겠는가?”(「계동행록」)라고 하였다. 위의 말은 당시에 서원의 봉안과 관련하여 의견이 합일되지 못한 것을 말한 것이다.
손처눌은 1626년 5월 17일에 연경서원 향사(享祀)에 참례하기 위하여 왕림한 대구부사[城主]에게 계동의 행록과 제문, 만사를 보였는데 “부사가 일독(一讀) 하고 난 이후에 칭송이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모당일기』)
손처눌은 처음에는 장현광에게 계동의 행장(行狀)을 저술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계동의 행록을 장현광에게 보내어 행장을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장현광은 “형의 행록이 곧 행장인데 어찌 반드시 군더더기의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행록 끝에 스승을 애모하는 형의 뜻을 펼까 했는데 병이 줄곧 이어져 이룰 수 없습니다.”(『모당집』 「與張德晦(顯光)」, 「附旅軒答書」)라고 답하고, 이듬해 1626년 11월 동지 3일전에 ‘행록 뒤에 쓰다(書全溪東慶昌行錄後)’라는 「발문(跋文)」을 보내어 왔는데 그 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가헌(家憲)과 가령(家令)을 보니 집안을 바르게 하고 세속에 모범이 되는 좋은 규범이다. 향당에서 존경받고 조정에서 중히 여김을 받은 것이 진실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여러 사람들이 공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그 선행을 사모한 것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니, 이 어찌 모두 지나치게 찬미하고 과장한 글이겠는가?(만제문의 내용을 지칭한 것임) 나는 생각컨데 조신(操身)이 있는 지킴과 독실한 행실은 미칠 수 없는 바가 많았던 것이다. 무릇 후인이 앞 사람을 논함에 혹 추켜세우는 것이 지나치지 아니하면 너무 폄하하는데 치우치니 이것이 사람을 논평하는 병통이 아님이 없다. 지금의 사람들은 임진란 이후에 성장하여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고을의 부로(父老)들에게 바른 말씀을 듣지 못한 자들이다. 나의 보고 들은 것이 미치지 못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선배를 망령되이 경솔히 폄하하니 어찌 독실하고 두텁게 선(善)을 숭상하는 뜻이겠는가?”(『여헌전서』)
위의 말은 장현광이 낙재의 문도(門徒)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말이다. 이 「발문」은 『대구읍지』에 연경서원 ‘방묘양현사적(傍廟兩賢事蹟)’ 뒤에 ‘행록발(行錄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장현광의 이러한 논평에도 불구하고 끝내 의견이 합일되지 아니하여 손처눌이 타계하기 이전에는 두 분 다 서원에 봉안되지 못하였다. 손처눌이 타계한 후 전경창은 연경서원에, 낙재 서사원은 이강서원에 봉안되었다.
위의 두 선생의 봉안에 관하여 필자가 고찰한 바에 의하면 낙재의 문인들은 처음부터 서사원의 강학소였던 선사(仙査)에 사당을 건립할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경서원의 병향(幷享)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 연경서원은 매암 이숙량과 전경창이 창건한 이후 307년간 이어져 왔는데 1871년(고종 8년, 신미)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7. 문집의 편집과 간행
전경창의 문집은 그의 문인인 손처눌에 의하여 처음으로 편집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손처눌이 수집한 계동의 유고(遺稿)는 대단히 소략하다. 이것은 전경창이 한양의 여저(旅邸)에서 타계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대다수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손처눌이 수집한 자료는 낙엽부(落葉賦)와 계동이 자신에게 준 시 3수와 계동이 손처눌의 장인인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에게 한 만사 1수, 가헌(家憲)과 가령(家令)이 전부이다. 그러나 계동이 타계한 후 당시에 교유하였던 조정의 관리와 향리의 우인(友人)이 한 만사 33편과 제문 14편은 거의 완벽하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손처눌이 편집한 필사본 문집은 233년간 전하여져 오다가 1858년(철종 9)에 형 응창의 후손인 전치현(全致賢)의 주도로 대구 무태 동변동에서 판각되어 간행되었다. 임재 서찬규의 「발문」에 의하면 이때 “하당(霞堂)의 이씨 외손가에서 소(疏) 3편을 얻어 함께 판각하였다.(近得疏三篇於霞堂李氏之爲先生彌甥家)”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소는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청참보우소’를 말하고 하당의 이씨란 하목정(霞鶩亭) 즉 사위인 낙포 이종문의 후손가를 말한다.
필자가 『계동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자료를 발굴한 것은 이미 본 연제에서 언급하였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전경창이 올린 소(疏)는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3편 외에 성주의 이인박(李仁博)과 함께 지은 1편이 더 있었다.(華南公遺墨 ,『請斬普雨日記) 『계동집』의 목판은 모두 28매(문집 56장)인데 2005년에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소장하였다.(『경북지역의 목판자료 Ⅱ』)
옥산전씨 문집․실기
파계실기(문평공 전백영), 계동문집(전경창), 파수실기(전계신)
●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16]
◎ 계동선생 연재를 마치며
지금까지 계동 전경창 선생의 생애, 좌우명, 학문, 세심정, 연경서원의 봉안, 문집의 간행 등을 중심으로 15회에 걸쳐 연재를 하였다. 필자는 본 연재를 통하여 대구지역의 유학, 즉 성리학은 전경창에 의하여 정립되었고 그의 문인(門人)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옥산전씨는 대구지역의 토성(土姓)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조에 득성(得姓)하였는데 경산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경상도 관찰사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문평공 전백영이 대구의 파잠(파동)으로 이거하여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전씨와의 혼인으로 인하여 여러 성씨가 대구로 입향하게 되었다. 그 외에 고려조부터 대구에 거주한 성씨는 인천채씨와 달성서씨, 달성하씨 등이 있다. 우리 구씨 역시 전씨와의 혼인(인척)관계가 있는데(도사공 사위의 사위) 이로 인하여 대구에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나의 선대는 계동의 형인 도사 전응창의 후예와 이웃하여 400여년간 북구 무태(동․서변동)에 세거하여 왔다. 전경창은 전백영의 5대손이다.
필자가 계동선생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구의 유학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필자는 수년간 대구유학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하였는데 그 결과 대구지역의 유학은 전경창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문헌이 부족하여 연구를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는 문헌이 문집으로 간행되어 있었다. 이 문집은 손처눌이 편집한 초고를 바탕으로 조선말에 목판으로 판각되었다. 전경창의 학문과 덕행을 전하는데에는 그의 문인인 손처눌의 공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손처눌이 보인 스승에 대한 존경과 흠모(欽慕)의 정신은 후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필자는 본 연재를 하면서 당시에 전경창과 교유하였던 인사의 문집이나 기록에서 다수의 문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의 문헌에는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만제문(挽祭文)과 같이 한결같이 전경창의 도학(道學)과 청덕(淸德)을 칭송하고 있었다.
대구지역은 임진란 이후 경상감영이 옮겨오면서 영남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계동이후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학자들이 배출된 곳이다. 이것은 경상감영에서 실시한 낙육재(樂育齋) 재생시(齋生試)의 합격자 명단에서도 확인된다.(장인진의 「嶺南樂育齋攷」에 의하면 합격자 244명 중 대구지역의 합격자 수는 77명으로 31.5%임) 그러나 이 지역 유학에 대한 현대적 연구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물론 그 동안 향내문중을 중심으로 문집의 영인 및 번역 사업은 왕성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제는 사승관계(師承)를 비롯한 생애와 사상, 시문(詩文) 등 학술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대구지역의 유학은 퇴계학을 계승한 것이다. 이것은 전경창에 의하여 주도 된 것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여기에는 그의 우인(友人)인 송담(松潭) 채응린과 임하(林下) 정사철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위 세 사람은 대구 유학의 제1세대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문인들은 대구지역의 유학을 하나의 학단(學團)으로 발전시켰는데 연경서원과 선사재, 영모당 강학이 그 대표적이다. 연경서원의 강학은 처음에는 매암 이숙량과 전경창이 주도하였으나 임진란 이후에는 서사원, 손처눌, 이주, 곽재겸, 류요신 등이 계승하였으며 선사재 강학은 정사철, 정광천, 도원결, 서사원, 손처눌, 영모당 강학은 서사원의 사후 손처눌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이들을 제2세대라 할 수 있다. 제3세대는 위 강학에 참여한 사람들로 『통강록(通講錄)』(서사원의 통강록),「연경서원강학록(硏經書院講學錄)」,「선사강록(仙査講錄)」(채선수의 『달서재집』 소재)과 『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諸子錄)』(손처눌의 통강록)에 의하면 200여명이 넘는다. 이들의 후예들이 조선조 후기를 거치면서 대구지역의 주요 문중을 형성하여 대구지역의 유학을 발전시켜 왔다.
지금까지 언급한 대구유학의 계보(系譜)를 간략하게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대구지역 유학의 제2세대는 모두 계동의 문인들이다. 채응린은 전경창보다 3살이 위인데 계동이 퇴계의 문인인 연유로 그에게 집지를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에 대구유학에서 전경창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전경창의 사승관계 및 대구지역유학의 계보에 관하여는 구본욱, 「계동 전경창 선생의 연보작성을 위한 시론」, 『명륜』제13집, 대구향교, 2009를 참조할 것) 그리고 또 언급하여야 할 것은 전경창의 타계 후 그의 문인들과 후학들은 한강(寒岡) 정구에게 집지하여 대구지역의 유학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 역시 앞으로 행하여져야 할 부분이다.
최근 2009년에는 방손(傍孫)이자 대구향교의 원로위원이신 전광섭 옹과 영수, 병걸, 봉진, 현수 등이 선생의 묘소가 있는 산하 무동재(武洞齋) 곁에 선생의 유적비를 세웠다.(불행하게도 선생은 후사가 없다.) 지난 주말(6월 5일)에 전광섭, 병걸 두 어른과 진호 인형(仁兄)과 함께 사진촬영도 할 겸 계동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2년 전 겨울에 처음으로 찾은 바가 있었는데 이날(5일)에는 푸른 풀이 돋아있었고 주변에는 초여름의 녹음이 우거지고 있었다. 묘소에는 오래된 묘비가 서 있었다.(끝)
계동선생묘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파잠) 무동재 후산
[출처] http://cafe.daum.net/jung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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