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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치적
김국광(22세). 김겸광(22세), 김정광(22세), 김경감(22세)
김백겸(21세), 김달전(21세), 김수(22세), 김여석(23세),
김 면(22세),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 찬탈의
부당성으로 민심을 잃 었으나 임금으로는 치적이 많았다.
세조 12년에(1467) 함길도 사람 이시애가 난을 일으킨 것도
왕위 찬탈 부당성 명분의 하나였다.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차례로 장악해 나가며
왕권 강화에 힘을 썼다.
집현전과 경연과 의정부 서사제를 없에고 6조직 계제를 단행하였다.
대간의 기능이 강약되고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 기능이 강화되었다.
동국통감과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해 통치법칙을 세우려고 하였다
(성종조에서 완성됨.)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고 억압정책을 완화하여 도성안에 원각사를 짓고
불경도 많이 출판하는 등(월인석등 간행) 불교 보호정책을 폈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강화에는 기여했으나, 문치와 대화정치는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정치를 구현했다.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적개공신으로
광산 김씨에서 2등공신 3명이 책록되었다.
22세 김국광 (문정공파, 의정공)
1455(태종16)-1480(성종12)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훈신. 자는 관경. 호는 서석.
아버지는 증 영의정 철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
1438(세종21) 생원시 합격. 1441(세종24) 문과 병과 7인으로 급제, 승문원 정자
세종 28년 황해도 도사 승진. 1447년 사헌부 감찰, 성균관 주부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1457(세조3) 사헌부 지평이 되어 다음해 함안 사람 최옥산의 옥사를 잘 다스렸다.
임금이 “김국광이 아니었다면 무죄한 백성을 죽일 뻔했다.”고 격려.
성균관 사예를 제수 받고 「경국대전」편찬에 착수,
부승지 참의를 거쳤다.
1461년 병조참판에 승진되자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내리어 포상하고 문무전제라 칭찬하였다
세조 10년 호조판서 1466 병조판서 다음해 우찬성에 승진되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총사령관)을 겸한다.
우찬성과 도승지가 되었을 때, 길주의적 이시애가
백성을 선동하여 감사, 절도사, 수령을 다 죽이고 반역하자,이를 평정한 공으로
「정충 출기 적개 2등 공신」에 오르고 좌찬성에 승진되다.
예종 2년 우의정에 승진되고 편집중인 「경국대전」을 집대성하였다.
1470(성종 2년) 좌의정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1년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1등공신」에 녹선 되고
「광선부원군」에 봉해지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공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여섯 왕조를 섬겼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 광성부원군 국광 신도비명
공은 나면서부터 골격이 준수하였고, 장성함에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였다.
사람을 사귀되 가려서 하고 함부로 화를 내거나 실언을 하지 아니하며,
글을 읽음에 대의를 통하하고, 대처를 알아들어 제배들이 추증하였다.
성균관생으로 뽑혔을 때 황희 정승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김생을 “작게 될 사람이 아니다.”하며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뒤에라야 공을 보았다.
무오년 사마과에 합격하고 신유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무인년 함안 사람 최옥산이 아비를 죽였다는 옥사가 있어
본도에서 축핵하여 상계하되
“시역은 인륜의 대변이라 죄를 주되 마땅히 적부를 살필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릇 됨이 있다면 이는 도리어
명교에 손상이 된다.”하고 공을 보내어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공이 원통한 잘못을 발견하니 상감이 놀라서 말씀하되
“만약 김국광이 아니었다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일 뻔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야인 낭보애한이 다른 뜻을 품고 국경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지라
상감이 생각하되 오랑캐의 간사함을 측량키 어려우니,
그 실상을 탐지해 본 뒤에 처치해야 할 것인데
사신으로 보낼만한 사람을 물색하기가 어려웠다.
임금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김국광만한 사람이 없다.”며
공을 사신으로 보냈다. 오랑캐의 반란한 진상을 얻어 아뢰오니
상감이 크게 노하여 신숙주 등을 보내어
적을 소탕하는데 공의 책략이 가장 많았다.
상감이 칭찬하여 말씀하시되
“국광 같은 사람은 참으로 문무를 겸전한 재사로다.”하며 총애하였다.
하루는 상감이 편전에서 수라를 공에게 나누어주며 먹게 하고
날이 저물도록 공의 얼굴을 가까이 대하여 일을 논의하였다.
금상이 왕위에 올라 노성한 재상들에게 맡겨 경연을 열게 하고
공으로 고문으로 삼으니 존경하는 예가 심히 중후하였다.
명하여 가로되,
광산에 모인 정기 대대로 호걸과 영웅이 나는 도다.
공이 이에 큰 영걸이로다. 그 소리를 크게 떨쳤도다.
공은 경제 포부를 가졌고 공이 국책을 시설코자 하였도다.
광묘를 만났으니 천년 만에 한번 있는 뜻한 기회로다.
은대에 뽑혔고 사마에 어른이로다.
서정을 조치함이 모두 다 적당하니 어디를 간들 옮지 않으리오.
계책을 임금께 아뢰오니 오히려 군진의 벗이요.
유악에서 운주하니 장자방 같은 사람이라.
깊숙한 상부도 드높은 기린각에 단청이 빛나고 신홀이 엄연하다.
충성과 근면이요, 공훈과 인덕이로다.
백성은 귀서같이 생각하고 나라에선 주석같이 믿었도다.
하늘이 돕지 아니하여 거연히 불행하였도다.
한나라 개국공신 같은 공은 남았으나 위징 같은 명감은 둘 수 없네.
당저 슬퍼하여 부의와 제물을 내리었네.
웅진강이 희고 계룡산은 푸르도다, 연산의 한 언덕이 공의 현담이다.
풍성한 비석이 서있으니 영원토록 빛나리라.
나의 명이 아첨함이 아니라 후세에 계고함이로다.
달성군 양관대제학 서거정 찬
광산김씨사.
22세 청백리 휘 겸광 (양간공파‧ 공안공파)
1419(세종2)-1490(성종2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위경. 호는 서정. 청백리.
아버지는 증 영의정 철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
1441년(세종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3년 식년시 문과 23인으로 급제하고 예문관 한림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460년(세조6) 북쪽 오랑캐 낭이승합이 변방을 침략할 때
체찰사(난리가 났을 때 재상이 임금을 대신하여 겸임하던 군직의 하나)
신숙주의 종사관으로 오랑캐 진압에 공을 세웠다.
또 건주위 이만주의 도당을 토벌하는데
공을 크게 세워 통훈대부에 승진되고 군기감정에 임명되다.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오르니 그 때 형 국광이 호조판서로
세조의 은총이 두터웠는데 임금이 모자를 벗기고 꽃을 꽂아주었다.
“그대의 벼슬은 형보다 낮으나 현량한 것은 형보다 났다.”
하고 술을 권할 만큼 총애를 받았다.
세조 9년 우승지 1465년 호조참판 이듬해 평안절도사, 개성부윤,
1467년 예조판서 겸 의금부 부사가 되고
1468년 상시관이 되어 인재를 많이 뽑았고
1471년 임금을 보필한 공으로
순성명량좌리 공신에 녹선 되고 광성군에 녹봉 되었다.
성종7년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우참찬, 좌참찬, 세자 좌우빈객을 지냈다.
청백리에 녹선 되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공안공이며 불천위에 올랐다.
공안공 겸광 휘 신도비명
공의 휘는 겸광이요, 자는 위경이니 광산인이다.
영락 세종 기해년 9월 정미일에 태어났다.
1460년 북쪽 오랑캐 낭이승합이 왕화를 거스름으로, 세조가
고령부원군 신숙주를 명하여 원수로 삼고,
공으로 종사관을 삼아 가서 정벌하였는데 곧 평정되었다.
명을 받고 건위주 이만주족을 토벌하여 개선해 돌아오니
그 공훈으로 5계급 뛰어 넘어 군기감정이 되었다.
그 때 공의 형 국광이 호조판서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상감께서 공의 사모를 벗기고 꽃을 꽂아주며 이르기를,
“그대가 형보다 벼슬은 낮으나 형보다 현명하다”. 하고
술을 권하니 그 총애함이 이와 같았다.
병술년에 평안도 절도사가 겸임이 되자 조정에서 물색하던 중
개성 부윤으로 있는 공을 불러서
평안도 절도사를 보직하고, 가정대부 품계를 내렸다.
이 해 겨울에 정경부인이 병환 중에 있었는데 상감이 하서 하되,
“이제 농사도 마쳤고 강물도 아직 얼지 않아서
군무도 여가 있으니 경은 가서 간병하라” 하였다.
공이 돌아와 곧 복명하니 예조판서 겸 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공의 성품이 순근하고 지조가 독후하여
윗사람을 섬김에 충성을 다 하고 아랫사람을 대접함에
공손하여 효도하고 우애하여 간격이 없었다.
친구와 사귐에 신의로 하고 일에 임하여 직책을 다 하여
확실하게 지켰다. 변방의 변란을 방비함에 틈이 없고,
모든 일에 치밀하여 옳지 아니함이 없으니,
능히 여러 임금을 보필하여 마침내 공명과 은덕으로 일생을 마쳤고
남은 경사가 자손에 미쳤으니 이를 가히 명 할 만하다.
명 하노니,
거룩한 성조시여 품식을 더하고 주위를 곽청하니
우리 성상이 받들어 계승하며 진작하였네.
우리가 태평을 누리고 예악이 빛나도다.
누가 함께 도왔던고, 거룩한 우리 동덕일세 드높은 광성군이여!
몸은 하나로되 쓰이기는 백 가지나 되 듯, 안과 밖으로
남북으로 돌아오면 재상이요, 나가면은 장수로다.
왕이 공에게 하문하여 아뢰노니 아름다운 술수로다.
임금의 수족 되어 선후로 알아 분주하며 포부를 펴 아뢰도다.
이에 공을 신료 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네.
능운대와 응연각은 공의 집이요, 단서철권은 공의 훈련이로다.
공이 절하고 머리 숙여 아뢰는 일은 싫어하지 아니하네.
자손에게 끼친 음덕 길이 무궁하리.
내명이 아첨이 아니라 오직 실적을 적었노라.
성균관 대사성 홍귀달 찬약
광산김씨사.
김정광(廷光 :22세)은 겸광의 아우로 제용감 첨정으로 출사하였다.
김경광(景光 :22세)은
위로 어머니 안동김씨의 양대 정경부인의
봉양과 거상을 마치니 그의 나이 53세다
성종 식년시 문과에 급제니,
통정대부 군기시정 겸 판 관 판교(정3품)로 근무하였으나,
뜻을 펴보짇 못하고 한성 임지에서 일생를 마쳤다.
21세 광원군 휘 백겸 (양간공파, 전리판서공파)
1428(세종11)-1506(중종1) 조선 전기의 무신이며 훈신. 자는 자양. 시호 양호공.
아버지는 증 판서 혁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주 곽씨이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힘이 뛰어나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더니
1460(세종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관이 되었다.
이때 북쪽 오랑캐가 변방을 소란케 함으로
임금이 상낭군 김질에게 명하여 진압하라 명하였다.
선전관으로 김질을 도와전공을 세웠다. 또 상장군 한명회를 따라
적을 진압하는데 공로가 많았으므로 여러 번 승진되었다.
1467(세조14)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절충출기적개공신
2등으로 책록되고 광원군에 봉해 졌다.
절충장군 겸 첨지중추부사에 제수 되었다.
뒤에 임금이 문무를 겸전한 인재를 등용 할 때
공조참의에 제수 되었는데,
이때 건위주의 이만주가 의주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조정에서는 치안을 염려하여 수령과 목사를 여러 번 교체하다가 ,
공으로 의주 목사를 삼으니,
이만주의 일당은 도망가고 노략질은 없어졌다.
병으로 퇴임으로 청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는 오랑캐들이
침범하는 땅이니, 덕망 있는 당상관을 임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임금이 도리어 평안병사로 임명하였다.
1478(성종10) 황주 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대궐로 몰려가서
한 번 더 연임토록 간청하니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1485(성종17) 평안 절도사가 되고 도총부총관이 되었다가
가정대부로 승진하였다. 늙어서 향리로 돌아와 쉬려하니
임금이 훈구신으로 우대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부조(불천위)의 은전을 받았다.시호는 양호(襄胡)다.
광원군 시 양호공 백겸 묘갈명
공의 휘는 백겸이요 전리판서공 광리의 현손이니
공이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힘이 뛰어나 강한 활을 당기며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더니
경진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때 북쪽 오랑캐가 변경을 소란케 하거늘
임금께서 상낙군 김질로 명하여 진압하라 하니
공은 재주와 무용이 있었으므로 종행하였고여러 번 공을 세워 승진하였다.
정해년에 이시애가 모반함에 임금이 공을 명하여 가서 토벌하라 하니
기묘한 전술로서 적을 섬멸하고 개선하였다.
적개공신 호를 주고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도적을 평정 한 후에, 임금이 더욱 무략에 주력하여 문무 겸전한
재목을 생각하여 무신을 모아 놓고 친히 경사를 강의할 때
공이 그 뜻을 받아 드리니 특별히 공조참의에 제수 하였다.
건주의 추장 이만주가 의주에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니
조정에서 치안을 염려하여 공으로 하여금 의주목사로 삼으니
그 후로 변경에 우환이 그쳤다.
태감 정동과 김좌가 사신으로 본국에 오면서 의주를 들려
공을 보고 경복하였다.
임금이 서쪽 변경의 사세가 중함을 알고 공으로 평안 우후로 삼았다.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광원군에 봉하고
1474년에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삼았다.
황주 목사가 되어 세금의 공평과 명령이 간략하니 백성이 태평하였다.
만기가 되어 돌아오니 백성들이 상소하여 한기만 더
유임할 것을 간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1485년에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가 교체되어 돌아오니
가정대부로 승진되었다. 공이 연로하여 향리에 돌아가 휴양하려 하니
임금께서 훈구신으로 우대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공은 비록 무인이나 은근함이 서생 같았고 항상 공손했으며,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어서 능히 공과 명예로 일생을 마치니,
명하여 이르되!
열렬한 장부여! 왕국의 기둥이로다.!
대대로 아름다운 덕은 공이 그 향기를 풍겼도다.
하늘이 내린 특이한 자질은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이 높았네.
굳세고 강한 그 무용은 나라의 방패요, 성이로다.
적신이 역심을 품고 북변을 소란케하니
공이 의열을 떨침에 나라가 있을 뿐 내 몸은 없도다.
왕명으로 정벌하여 사나운 오랑캐 효수했네.
금궤에 감춘 맹약 공의 훈업은 정벌이다.
두 고을의 착한 명예와 두 번 절도사의 영화로서
우리나라 변경을 지켰고 백성을 편안케 하였네.
오직 겸손하고 근신하여 공덕을 이루었네.
고종하니 하늘의 도움이라.
이 비석에 새기니 영원토록 전하리라.
모재 김안국 찬
21세 달전 達全 (양간공파, 퇴촌공파)
조선초기 문관. 아버지증 참의 퇴촌공 열.어머니는 증 숙부인 삼척 진씨.
세조때 사헌부 지평이 되어 부역의 공정성 차출을 상소하였다.
세조 6년(1460년)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됐다.
세조 9년에 사헌부 집의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충청도 부여 석성지방에 곪주린 백성이 많아 경차관으로 나가 구제에 공이 많았다.
묘는 실전되고 합천군 용주 손목 화곡사에 향사한다.
21세 도호부사 휘 수洙 (양간공파‧ 퇴촌공파)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 의금부사 행 강화 도호부사 김공 휘 수 묘지문.
삼가 아뢰옵건대 공의 휘는 수이시니 그 선대는 광산인이라.
고조 휘는 정이시니 고려조에 입사하사 추성 보리공신 증
대광 광성군이시다. 증조 휘는 약채이시니, 이조에 입사하사
증 정헌대부 예조판서 행 충청도 관찰사요.
조조 휘는 열이시니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행 형조도관좌랑에 호는 퇴촌이요.
고조 휘는 달손이시니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이니
진사 송공 모의 녀를 취하사 공을 낳으시니 세종 7년이다.
공이 태어나시니 타고난 품질이 영민하시고
관후장자(寬厚長子)의 풍도가 계셨다.
공이 강화 현직에서 병이 위독하시매
임금님이 약과 의원을 보내셨으나 도착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임금의 특명으로 부물을 내리시니 이때가 성종 21년이며 향년 65세이다.
묘소는 양평군 양세면 부용리이니
전 양근군 용진면 사직동 간좌원에 뫼시다.
배위는 증 정부인 안동 권씨이니 집의공 항의 따님이시며
묘는 합부하시다.
4남을 낳으시니 장자 여석은 충청, 경상, 강원
, 삼도 관찰사에 사헌부, 대사헌, 부제학, 형조와‧
이조 판서를 역임하셨다.
이석(以石)은 공조 정랑이요,
용석(담암공)은 성균진사요, 다음이 인석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500년의 오랜 세월에 사적의 비가 없음을 한탄하였,
경인년 육이오 전란을 당하여 문관석이 전쟁 포화에 파괴되었다.
경향종족이 성루에 모여 공의(公議)가 같으므로 다시 관석(官石)을 세우매
시말(始末)을 펴고 써 묘의(墓儀)를 표(表) 하나이다.
1980 경신 8월 17대손 용류 근찬,
퇴촌공파족보.
23세 충목공 휘 여석 유사(양간공파, 퇴촌공파)
신도 비문에 「정충 출기포의 적개공신 자헌대부 행 이조판서
광산부원군 충목공 휘 여석」공의 휘는 여석이요,
자는 은경이며 조선조 문신으로서 시호는 충목공이다.
김종직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소년시에 국학에 오르시었다.
키는 오 척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나 학문을 시험하면 동학중(同學中)에
늘 우두머리를 차지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아버지 강화 부상공 휘 수는 사예 권황의 따님을 취하시어
여석(충목공, 이조판서), 이석(공조좌랑),
용석(담암공․진사), 인석 4형제분을 두셨다.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그 해 세조께서 궐내에서
선비의 자제를 친히 책문(策問)하시고 3인을 택하니 공이 둘째로 뽑혔다.
세조께서 책문을(구술시험) 하시고 과히 영재라 일컬으시고
내전에 불러 친절하시며 “큰 그릇은 다르구나(深器異).” 하시었다.
세조께서 이르시길 “네 아비는 이제부터 네 아비가 아니고 내가 네 아비가 될 것이다”
(汝父非汝父我實汝父) 하시고,
“네가 추우면 내가 옷을 입혀 주고, 네가 굶주리면 내가 먹여
줄 것이니. 그러므로 네가 곧 네 아비이니라”
.(汝寒我衣之 汝飢我食之我實汝父) 하셨다.
다시 물으시길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활도 쏠 줄 아느냐”하시니,
“ 책은 읽고 있지만 활 쏘는 법은 모르옵니다”하고 아뢰었다.
세조께서 웃으시며 “나는 이미 15세에 큰 활을 당길 수 있었다.”고 하시었다.
동궁을 불러 들게 하시고 중전께서 술잔을 올리게 하시면서 이르시길
이는 후일에 좋은 보좌역이 될 재목이라 하셨다.
방(榜)을 발표하는 날에 임금이 시제일장(時題一章)을 써서
삼인에게 背上深鐫 화답해 올리게 하니,
공의 시의 한 구(句)에 『배상심전 충의자(忠義字)』라 하니
임금께 칭찬하시길 마지않았다.
일방(一榜)에 유가 4일(遊街四日)을 특허 하시고 예문관에서
잔치를 베푸니 이것은 공을 끔찍이도 귀중히 여기신 까닭이다.
세조께서 나이가 어리고 재주 있는 문사를 뽑아서 예문관의 직책을 맡기시니
공이 그 중에서 먼저 선발되어 입궁하여 시강(時講)하였다.
세조가 공을 보고 이르시길 “술은 사람을 보고 미치게 하니
너는 그것을 행여 즐기지 말고, 교만은 사람을 거만하게 하니
너는 매사에 교만하지 말 것이며, 욕심을 부려서도
아니 되니 너는 모름지기 참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몸을 보전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으니
너는 나의 말을 명심해야 하느니라.”하셨다.
영성군 최항에게 명하여
무기욕(毋嗜欲), 무기음(毋嗜飮), 무교금(毋驕衿),
아홉 글자를 쓰게 하여
어새를 눌러 하사하니, 그 총애하고 우대함이 매양 이와 같았다.
성균관 학유에서 군자감 주부로 전직되고 이조와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
병조에 계실 때에 공이 맡으신 일은 유독 공무가 번잡해서 남들은
공이 이 일을 능히 해낼까 근심하였다.
공은 잘 처리 결재하여 막히고 지체함이 없으므로 군사들이
우러러 펴는 자가 천 백인이었다.
공이 사람을 한번 보시고 이름을 묻고는 다음에 그 사람이 지나가면,
이름을 기억해 부르시고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다하니,
사람들은 그의 총명하심을 탄복함으로 공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
병조정랑 자리가 비어있어 판서가 특천으로 승진시키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병조에 참된 정랑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 뒤 의금부 검상에 옮기고 사인에 오르시고 성균관 사예로 전보되었다.
명나라 헌종이 건주의 난에 우리나라에 청병 해 옴에 우의정 윤필상을 원수로 삼고,
공을 종사군으로 삼아 군대의 중요한 업무를 맡겼다.
공이 기무에 능하고 공급을 민첩하게 하니 일이 극진하고
합당하게 처리되어 쉽게 오랑캐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여
공을 아뢰오니 황제가 칭찬하고 상을 후히 주었다.
곧 사간이 되어 직언을 많이 하시고 다시 사복시정에 오르시니
세상에서 사복시정에 바른 사람을 얻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 무렵 남쪽 지방에 도적이 창궐하여 잡아서 치죄를 하는데
관원이 잘못을 가리지 못함에 성종께서 공을 파견하시어 일을 보게 했다.
도적들은 익히 공의 이름을 들은지라 감히 그 실정을 숨기지 못하고
이미 죄로 갇힌 사람 또한 원망치 못하였다.
세조 30년(1467)에 이시애가 난을 일으켜 길주로 부터 군사를 풀어
여러 고을 함락하자 조정이 크게 놀라 당황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토벌을 명하시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기 위해 영상 조문석과 함께 토벌하여 죽이고,
잡은 도적은 일만 명이 넘었다.
난을 토벌하자 『정충출기포의 적개공신 일등』 8명 중에 드셨다.
동부승지가 되고 우승지를 거쳐 뛰어 도승지에 제수되었고,
시종 형방을 맡게 된 것은 공이 어디를 보아도 형정에 밝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강화공(수)께서 임지에서 병환이 위독하시매
임금께서 약과 전의를 보내어 병세를 살피게 하였다.
전의가 이르기도 전에 돌아가시니,
임금께서는 특명으로 부의를 보내시며 이르시길
“승지로서 상을 당하는 자는 많지만 유독 충성되고
또한
어진 것이 남보다 특이한 고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하셨다.
공이 상을 마치고 이조 참의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얼마 후에
한 직급을 올리시며 글을 내려 이르되
“경이 일찍 후설(喉舌)의 직책을 맡아 출납을 오직 진실하게 하고
이제 지방의 안찰사로 나가 정사를 함이 적합하기 때문에
가자(加資)하는 것이다.”하셨다.
공께서 중임을 맡으신 후 피로와 수고로움을 잊고 밤과 낮으로
직책을 다하매 피로가 얼굴에 나타나
사람들이 “좀 쉬어야 합니다. 병환이 나실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으셨다.
과로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슬퍼하시며
“무슨 병을 얻었기에 갑자기 죽었느냐” 하시고
공을 위해
조회와 저자를 3일간 거두시고 『충목공』이라는 시호를 내리셨다.
공의 총명함이 다름 사람보다 뛰어나고,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삼족에게 인자하고 집을 잘 다스렸다.
나라의 근심을 내 집같이 하고,
남이 청하는 바를 곧 바로 허락하고,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 언제나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데 표리가 없는 고로
사람들이 모두 부형과 같이 믿었다.
사람이 죽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지성으로 구휼하고
오히려 미치지 못하신가 저어하시니 대개 공의 천성이 그러하였다.
세종 27년(1445)에 태어나시고 성종 25년(1494)에 돌아가시니 향년 49세다.
성천부사 김익령의 따님을 취하시
장남 상은 전생서 참봉이고, 차남 장은 부사직이고, 삼남 장이다.
3남 2년을 두셨다.
맏딸은 판서 유계경의 아드님 진사임에게 출가하시고
둘째는 대사헌 허침의 아들 진사 관용에게 출가했다.
이조 판서 부계 홍귀달께서는 공을 이렇게 비문에 읊어 새겼다.
하늘이 사람에게 성품을 주시니 공의 성품은 순수하였다.
총명하고 영특 호협하니 무리 중에 빼어났다.
일찍이 조정에서 벼슬을 할 때 기특한 기국을 발휘하고
백일 같은 붉은 마음 충(忠)과 의(義) 두자뿐이네
임금께서 친히 보시고 찬찬하여 마지 않으셨다.
호랑이는 바람을 타고 용은 구름을 타니 이로움
은 주역의 괘효 52에 보고 바쁜 나날의 항적에도 오히려 넉넉함을 얻었다.
삼대에 임금을 받들 때 그 뜻을 더욱 돈독히 하여 지위는 날로 높아
마침내 형조의 장이 되고 구요(咎요)와 짝이 되었다.
삼정승을 눈앞에 두고 이루지 못했으니 ,
주역에 대들보와 서까래가 부러짐을 슬퍼하고,
시경에 시들어 병듦을 노래하였다.
사람들은 비록 돌아갔다고 하나 명성은 길이 남을 것이다.
돌보다 더 굳음이 없고 지석(誌石)보다 수명이 오래일 수 없다.
홍치(성종) 7년 계축 12월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 오위도총관 부계 홍귀달 근찬
퇴촌공파 파보.
22세 장도공 휘 면(沔)(양간공파 ‧총제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직장 유장이며
어머니는 안인 평산 신씨이다. 통례문 판관을 지냈다.
1467년(세조13년)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워 정충 출기포의
적개공신에 책록 되었다.
광천군에 책봉되었으며 경원 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장도공이다.
광산김씨 약사, 광산김씨 퇴촌공파보. 2023년 6월.
대구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