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양정무 지음, 사회평론출판사
현재 6권까지 발간된 것 같다.
서양미술사 조각 맞추기의 심정으로... 통사로 쭉 정리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 마침 동네 도서관에 있길래 1권부터 6권까지 읽었다. 아니, 보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그림 자료들이 친절하게 배치되어 있어 눈이 즐겁다. 덕분에 두툼한 두께에도 가독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시리즈를 저술하게 된 목적에 대한 저자의 말이다.
" 미술의 역사는 그 자체가 인류의 역사라고 할 만큼 길고도 복잡한 길을 걸어왔기에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단순해 보이는 미술에도 역사의 무게가 담겨 있고, 새롭다는 미술에도 역사적 맥락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미술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낳은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말이며, 그 시대의 영광뿐 아니라 고민과 도전까지도 목격한다는 뜻입니다. 미술 속에 담긴 인류의 지혜, 원초적인 힘, 감동과 교훈을 읽어내고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높이를 높이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소명입니다.
...
그간 많은 미술품을 보아왔지만 나의 질문은 언제나 '인간에게 미술은 무엇일까'였습니다."
서문에서 던진 이 질문이 맘에 들어왔다. 이 책을 읽으면 그걸 알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놓치지 않고 6권까지 읽어내려가다 보니 대략... 자연과 신에 대한 경배, 권력의 업적 과시, 영원성에 대한 소망(재생에 대한 기원), 문자를 대신한 종교적 교리의 이미지화, 합리적 시각에 대한 과학적 탐구, 객관적 현실에 대한 재현, 개인성의 표현... 6권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여기까지 왔다. 6권이 초기 자본주의와 르네상스의 확산까지를 다루었으니까.
근대에 들어서서 과학이 발전하고 종교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사진기가 발명되고 나면 그 다음 인간 세계에서 미술의 자리는 어떻게 될까? 넘쳐나는 과잉 이미지의 세계에서 미술의 정의는? 모더니즘의 세계, 대량 복제의 세계, 아우라의 파괴, 형상의 파괴, 철학과 미술의 교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과 겨뤄 회화가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찾아 방황하면서 회화 자체의 정의를 내리는 사유의 실험으로 내달리는 현대미술...
미술의 자기 정체성 모색의 지난한 실험은 전문가 한테 맡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단순하게 그리고 있다. 사진 이미지가 넘쳐나는 중에도 굳이 형상을 모방하고 변형하고, 배치하고 손을 통해 보려고 한다. 여전히 본능적으로 즐겁다.
7권부터가 더 흥미진지할 것 같아 기다려진다. 더구나 현학적 담론에 기대지 않고 친절한 자료와 스토리테링을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대신하는 난처한 군과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런 글쓰기는 현장에 있는 듯 잘 스며든다. 이런 글쓰기로 그야말로 미술사에서 난처한 시절인 근대 이후를 어떻게 풀어줄지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에 인간에게 미술은 무엇인가를 저자는 어떻게 답해줄 것인가?
이 책은 서문에서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서양의 역사를 미술의 관점에서 쉽게,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어 역사를 읽어내는 재미가 크다. 특히 중세의 유럽 역사와 미술은 어딘지 뚝뚝, 단절된 공백으로 인해 쭉 내달려지지 않았는데 그 빈틈을 잘 매워주어 좋았다.
서양 미술관 순례를 꿈꾸었지만 펜데믹의 시절이 시작되었고 그칠만하면 변이들이 속출하여 갑갑증이 차오르던 이 즈음, 이 책을 읽다보면 너무 너무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진다. 이 책이 이끄는 여정대로 그저 가벼운 가방 하나 메고 몇 년을 떠돌아 다니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피렌체의 낯선 골목길을 헤메던 시절의 대기의 촉감이 되살아나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다시 그 곳에 있고 싶다. 이런 시절에 이 책을 만났기에 지식의 습득보다 책으로 대신 하는 세계여행의 설렘에 더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고 3 시절, 대학 진학을 위해 원서를 작성하면서 선택학과의 지망란을 놓고 고심하던 내게 우연히 편람에서 본 '고미술사학과'라는 이름이 묘하게 끌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 가난한 집, 형제 많은 집, 공부잘하는 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 국립대학 사범대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듣고 자랐다. 선생님들도 모두 내 적성이나 희망에 관심은 없었다. 성적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지방의 작은 학교에서 서울대 진학생을 배출하는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단 한 분, 고주리 선생님, 고 2 미술을 지도하던 선생님만은 내게 미대로 진학해보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조언을 주셨다. 나는 그 말에 가슴 설렜지만, 화가는 그저 가난한 환쟁이 밖에 상상할 여유가 없었던 엄마를 설득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감사한 칭찬으로만 간직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선택할 길은 당시 수업료가 면제였기에 등록금 부담이 적고 의무 발령제도로 인해 취업이 보장된 국립사범대 밖에 없었다. 대신 나는 좁은 동네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 서울로 탈출하기 위해 선택지를 포기하지 않으려 기를 쓰고 공부했다. 그런 처지의 나였으니 고미술사학과는 무지개 같은 저 먼 세계의 이름이었다. 아쉬움에 3지망에 그 이름을 써넣으며 내 인생에서 스쳐 보냈다. 그랬다면 어땠을까? 고미술사학과에 갔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까? 이 저자처럼 살았을까?
사물화된 그림들 속을 기행하는 일이 살아있는 생명체, 생기 그 자체인 아이들과 살아가는 일에 비해 더 견딜만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여행하고 방랑할 수 있었을건 분명하다.
...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건 오늘까지 도서관에 반납해야 하는 6권 밖에 없다. 이 책의 주 개념은 자본과 개인이다. 개성적 존재로, 창조하는 신의 아들 예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한 최초의 화가 뒤러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라 그 부분을 인용해 본다.
6권, 초기 자본주의와 르네상스의 확산 p. 395~~
28살의 자화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뒤러가 뭔가를 고민하는 것을 보다 정확히 짚어낼 수 있어요. 뒤러의 머리카락을 다시 보세요. 얼핏 좌우로 잘 정리된 듯 보이지만 이마 쪽 머리는 많이 헝클어져 있습니다. 눈은 며칠 잠을 안 잔 듯 퀭해 보이고요. 여기에 정면을 강하게 응시하는 눈빛이 더해져 저돌적인 느낌을 줍니다. 정말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죠.
특히 이 눈빛은 얀 반 에이크의 도전적인 눈빛과도 비교해 볼만 합니다. 결국 자화상이라는 회화 장르가 탄생한 순간 우리는 북유럽 화가들이 지닌 강렬한 자의식을 목격하게 되는 거예요.
... 뒤러는 알프스 이북 출신 화가였습니다. 뒤러가 태어나고 활동한 뉘른베르크는 당시의 문화 지형으로 보면 변방에 가까운 곳이었어요. 그런 곳에서 살다가 이탈리아로 두 차례 긴 여행을 떠났죠.
뒤러는 이때 굉장한 번영을 누리던 이탈리아의 미술을 직접 보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뎠던 주면부 출신 미술가로서 정체성의 혼란도 겪고요.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지만 우물안 개구리였구나! 세상은 넓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구나." 이런 깨달음도 있었을 겁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유럽 안에서도 이렇게 문화 차이가 컸어요. 뒤러는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깊이 고민합니다. 특히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1596년에는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여기서 신사로 지내지만 고향에서는 한낱 식객에 지나지 않는다네"라고 적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예술가가 대접받는데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은 현실을 한탄한 거죠. ... 뒤러와 윤두서의 자화상은 시공간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비슷하게 자기를 드러낸다는 점이 제게는 아주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뒤러의 자화상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정말 큽니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그 맥이 이어져요. 21세기를 열었던 전설적인 기업가의 이미지에서도 그 영향력을 볼 수 있으니까요.
스티브 잡스의 전기 표지로 쓰인 사진을 보죠. 이 사진은 잡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공식 초상 사진입니다. 그런데 정면의 자세부터 손의 위치까지 뒤러의 자화상과 많이 비슷해요.
손의 자세만 놓고 보면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바로 그 순간을 보여주는 것 같죠. 물론 잡스의 초상은 그림이 아닌 사진이지만 조명이나 기타 여러 효과를 섬세하게 조절해 뒤러의 자화상처럼 얼굴의 디테일을 실감 나게 담아냈습니다.
나름 대로 카리스마가 느껴지네요. 하지만 이 사진만 봤을 때는 세계적인 기업을 세운 기업가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전체 구도를 뒤러에게 빌린 덕분에 기업인보다는 예술가처럼 다가오지요. 혁신을 주장하는 현대 기업인이 500년 전 화가의 이미지를 흉내 내고 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더 재미있는 건 뒤러도 누군가를 흉내내고 있다는 거예요.
사실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뒤러는 예수를 그릴 자리에 자기 얼굴을 집어넣은 겁니다. 아래에서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디시가 그린 예수 얼굴과 뒤러의 자화상을 비교해보세요. 정면상이라는 점 그리고 손의 위치가 많이 비슷하죠.
정말 비슷하네요. 뒤러가 이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을 베낀 건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그리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시기부터 내내 존재해왔습니다. 왼쪽 그림을 한번 보세요. 6세기에 그려진 예수의 얼굴입니다
거의 최초로 그려진 본격적인 예수 이미지죠. 이 그림도 뒤러의 자화상과 비슷한 분위기가 나요. 말씀드렸듯이 예수의 얼굴을 이렇게 표현하는 건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전통이었어요. 그러니까 뒤러는 이런 전통을 정확히 알고 자신을 여기에 넣은 거예요.
뒤러는 예수를 베낀 셈이네요. 스티브 잡스는 그런 뒤러를 베낀 거고요. 그럼 결국 스티브 잡스가 예수를 베낀 게 되겠네요.
맞습니다. 서로서로 베낀 셈이지요. 일이 아주 재미있어졌어요. 절대자인 신의 얼굴이 들어갈 자리에 자기 얼굴을 집어넣었으니 뒤러의 자화상은 신성 모독으로 보이기도 할 만큼 대범해요.
뒤러는 왜 자신을 신처럼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당시 화가들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해봐야 합니다. 뒤러가 활동하던 시대에 화가들은 사횡에서 여전히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그냥 다른 허드렛일과 별로 다르지 않게 여겨지던 시대였죠.
여기서 왜 갑자기 화가의 신분 이야기를 꺼내시는 건가요?
이 점을 고려해야만 뒤러가 왜 스스로를 신과 같은 존재로 그려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뒤러는 여러 여행을 통해 예술가가 사회에서 해야 하는 역할에 눈뜨게 됩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보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대다수는 '예술가는 좀 이상한 존재야'라고 생각하곤 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술가에게 존경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 순간이 언제일까요?
글쎄요. 예술가들 중에는 별난 사람들이 많아 좀 독특해 보이는 게 사실이죠. 뭔가를 만들거나 새로운 창작을 할 때는 멋있어 보이기도 해요.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죠. 뭔가를 만들거나 새로운 창작을 할 때 예술가는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뒤러도 바로 그 점을 고민한 것 같아요. 뒤러가 자기 얼굴을 신처럼 그린 건 화가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창작을 하는 순간에는 자신도 신과 닮았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정리하자면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화가가 지닌 사회에 대한 의무, 즉 자신이 무언가를 창작해내는 자임을 새롭게 인식한 결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뒤러의 삶과 예술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여기서 잘 연결되죠.
결국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화가의 사회적 가치를 자각한 모습으로 일종의 '화가의 독립선언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