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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빌립보서 2 : 5 - 8
제목: 이 마음을 품으라
일시: 2010. 10. 10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지난달인가 딸아이 학교 엘테른 아벤트(학부모들 회의)가 있어 참석했다. 우리에게 그러한 회의는 회의가 아니요 독일어 독해반이다. 특히 그날은 테마를 알지 못하고 갔기에 더더욱 논의되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좌절까지 생겼다. 그러다가 유럽생활 20년이 된 이건욱집사님에게 “집사님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자신도 안 들리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 말에 얼마나 용기가 되는지 모른다. 혹 우리 교우들 가운데 아직도 독일어가 잘 안 들리고 입이 안 떨어지는 이가 있다면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권목사도 10년 되었는데도 이 정도니 말이다. 정말 독일어를 잘 해서 말이 잘 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다시 한번 반문한다. 그런데 과연 독일 말을 잘하면 정말 시원하게 말이 통해서 서로 이해하고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 말을 못해도 답답하지만, 한국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끼리도 얼마나 답답한 경우가 허다한가!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해도 부부간이나 친구지간, 우리의 지체들 사이에서도 오해와 의견충돌이 있고 종종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히려 서툰 독일말로 해도 독일친구나 외국친구들과 말이 더 잘 통하기도 한다. 서로 웃는다. 여간해서 싸우는 일이 없다. O2회사 퀸디궁할 때만 빼고. 왜 그럴까?
II. 먼저 마음이 통해야 한다.
함께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대화를 하든지 간에 서로 조화하고 통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같아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이라는 함께 하는 공통의 마음이 없으면 갈등과 싸움이 일어난다. 2절을 보라.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문법, Grammatic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일을 해도 일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맞지 않아 팀웍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 먼저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동역자들과 온 교우들이 바로 이 마음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고 일해나가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한국의 어느 교회는 교회교육자료로 칠판을 구입하는데 black board 로 할 것이냐 white board 로 할 것이냐를 가지고 싸웠다고 한다. 한쪽은 black board 로 쓰면 백묵가루 먼지 날리는데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한쪽은 white board를 쓰면 형광등 빛이 반사해서 눈이 부시는데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랙이냐 화이트를 가지고 교회가 깨어질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블랙이든 화이트든 다 문제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맘이 안맞는 것이 문제이다. 어떤 교회는 좋은 그랜드 피아노를 구입해서 교회본당에 놓게 되었다. 그것을 왼쪽에 두냐 오른쪽에 두냐를 가지고 그렇게 갈등을 했다고 한다. 이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교회가 갈라지게 생겼다나? 왜 그랬을까? 그 교회에 영향력 있는 장로님 두 분이 쌍벽을 이루어 서로 앙숙관계에 있었는데, 한분이 왼쪽에 피아노를 놓자고 하니 다른 분이 오른쪽에 놔야 한다는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두 분들은 서로 누가 어떤 의견을 내 놔도 일단 태클을 걸고 보는 분들이었다. 일의 타당성과 진위를 떠나 이 양반이 이렇게 하고자 하면 저 양반은 무조건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한쪽을 지정하여 놓고 매주 몇 센티미터씩 옮겼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말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분열과 부조화와 무질서이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리의 공동체가 불화하고 깨어지기를 바란다. 그는 우리의 팀웍이 깨어지기를 바란다. 서로 원수로 만들고 상종치 못하도록 한다. 사탄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깨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를 조장한 것도 그였다.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도 무질서와 불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목의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우리가 같은 마음을 품도록 하셨다. 이제 다시 우리는 화목하고 조화롭고 질서가 잡힌 피조물이 되었다. 가정에서의 삶이나 직장에서의 삶,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도 어려운 것이 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좋으면 어떠한 어려운 것도 이겨낼 수 있고 감당할 수 있지만, 마음이 맞지 않아 늘 불편한 관계에 있으면 아무리 쉬운 일도 사사건건 걸리게 된다. 인생의 행복은 바로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다.
III. 이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사사기에는 삼손 입다 기드온 드보라 등과 같은 영웅들이 나온다. 하지만, 사사기를 기록한 사무엘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떠했는지를 사사기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각기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다. 서로 옳다고 하기에 거기에는 답이 없다. 인간 사이에는 절대적인 권위가 없고 상대적인 관계이기에 서로 주장하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 각각 자기 소견에 좋은 자기 주장과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겹치는 부분은 함께 할 수 있어도 다른 부분에는 의견의 불일치와 갈등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섬 가지고 주변 나라들이 말이 많다. 독도는 우리 것이라고 하지만, 일본은 다케시마라고 한다. 그래서 맞불 작전으로 한국 일각에서는 대마도가 한국 것이라는 연구를 하지만 일본은 쓰시마섬이라고 한다. 일본과 중국이 섬 가지고 갈등한다. 총 6.3평방km의 섬 다섯 개를 일본은 센가쿠열도라고 하지만 중국은 댜오위다오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영토라고 한다. 센가쿠 열도의 원소유주는 누구인가? 사실 답은 없다. 그저 힘으로 답을 대신하고 있다. 얼마전에 일어난 센가쿠열도의 갈등은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가? 중국이 힘으로 밀어 붙여 이겼다고 한다. 전기자동차나 하이테크닉산업에 꼭 필요하다는 산업의 비타민 희토류 수출 중단으로 일본이 손을 들고야 말았다.
절대적인 권위가 없는 인간 동네에서 누가 이기는가? 목소리크면 이긴다. 힘이 세면 이긴다. 고집부리고 끝까지 버티면 이긴다.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각기 자기 생각에 옳다는 소견대로 행하기에 분쟁의 소지가 있고 갈등이 일어난다. 과거나 오늘이나 영원히 인간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다. 우리의 마음은 “그래도”의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도”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아와 자신의 고집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실컷 설명해 주니 머리를 끄덕이고 이해는 한다. 하지만, 수용은 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알지만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의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고 내 생각을 접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가 아니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과 친구들의 신앙이다. 그들은 야웨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렬한 풀무불에 던지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리라 확신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들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다르다면 나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길로 인도하실지라도 그리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헌신의 모습이고 그것이 순종의 모습이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마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화목과 조화가 있다. 예수의 심장이 우리에게 뛰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기질과 성품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우리의 스타일은 예수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그래서 빌리그래함목사님은 언제나 Bible says를 말씀하셨다. 아무리 우리의 경험과 말을 붙인다 해도 성경이 말하면 그것으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IV.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인가? 낮아진 자의 마음이요 섬기는 마음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낮아지고 종의 형체를 가진 섬기는 마음을 가진 이는 상대방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수고스럽지만 내가 먼저 나가주는 것이다. 100을 관계라고 할 때 상대가 30오면 내가 70나가주면 되는 것이다. 상대가 50오면 내가 50을 나가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나가 주지 아니한다. 여기까지 오라고 손가락만 까딱 하는 것이다. 주님은 100까지 다 나와 주셨다. 낮추시데,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심까지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은 약자의 모습이 아니라, 강자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도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지경까지 낮아진 것은 “낮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낮춘 것”이다. 낮은 자와 낮아진 자와는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낮은 자는 무기력하고 약한 자이지만, 낮아진 자는 강한 에너지가 있는 자이다. 낮은 자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사형당한 것이다. 그러나 낮아진 자가 죽은 그 십자가의 죽음은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의도는 파워이다. 친구를 방문할 때 어차피 여기에 무슨 일로 왔다가 온 김에 들렸다고 하면 영양가가 좀 떨어진다. 그러나 일부러 너를 보기 위해서 이 먼 길을 왔다고 하면 그것은 귀한 것이고 파워이다. 종종 지체들의 부탁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 “안 바빠요” 라고 말하지 않고 “예 바쁜데 그럼에도 왔습니다”라고 말한다. 한가한 사람이 와서 돕는 것보다 바쁜 사람이 와서 도우면 그것이 더 파워 있는 것이고 귀하고 영향력 있는 것이다. 주님은 보좌를 버리고 의도적으로 오셨지 어떻게 미끄러져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 즉, 낮아지고 섬기는 그 겸손의 마음을 가지면 손해 볼 것 없다. 처음부터 착 바닥을 겨라! 처음부터 마음을 비고 시작하면 언제나 흑자이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하지 말라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마음을 비우고 있으면 비운 마음에 채울 것 밖에 없다. 다른 도시에 살고 온 사람들은 다 라이프찌히를 다 좋아한다. 저는 “생각보다 좋다”라는 것을 안다. 라이프찌히 하면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기어라! 큰 것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이들에게는 작다고 말하라. 그러면 그들은 “작지 않은데” 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큰 것을 가지고 있어도 크다고 말하면 뭘 크냐고 할 것이다. 아이들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을 만날 때도 아예 긴다. 아직도 좀 부족하지요? 좀 산만하지요? 잘 못하지요? 이렇게 말해보라. 그러면 선생님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포지티브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가 잘하지요 라고 말을 하면 결코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하는 거냐라고 핀잔을 줄 것이다. 낮아져라. 손해 볼 것 없다. 자신을 비워라. 손해 볼 것 없다. 채울 것 밖에 없는 것이다.
혜주가 지난 여름 한국에 갈 때 한국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친척들에게 미리 예방주사를 맞추었다. 보면 놀랠 거라고. 비록 혜주는 그러한 전화에 대해 싫어했지만,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모든 이들로부터 평가를 들을 때 아빠의 그 깊은 의도를 알게 되었다. 다들 볼만한데, 괜찮은데, 그래도 날씬한데 등의 평가였다. 바닥부터 겨라.
자신을 열악한 쪽으로 몰고 가라. 손해 볼 것 없다. 축구할 때 잘하는 선수는 우리 편에 오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선수들이 다 훌륭하고 잘해서 우리 편이 이기면 잘해야 본전이다. 오늘도 우리 편에 함께 하는 선수는 그저 그렇고 상대편에 있는 선수는 잘하는 선수임을 알라. 음악전공 안하는 사람이 노래를 하면 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전공한 사람이 잘하면 그러려니 한다. 독일어 비전공자가 잘하면 잘한다고 하지만, 전공자가 잘하면 당연시 한다. 그래서 독일어 전공한 사람이 독일어 부탁을 받으면 가장 부담스러워한다. 열악한 환경일수록 더욱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그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는 것이다.
V.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이 마음을 가질 때 내 삶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우리의 삶이 변화한다.
지난 주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귀한 만남의 축복이 있기를 원했다. 그 만남 속에서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인 같은 마음이다. 그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낮아진 자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있을 때 화목하게 되며 이해와 용서와 평화가 있게 된다.
갈등과 싸움은 마음속에 자기의 옳은 소견이 있고 자기의 마음으로 고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 된 지체는 주 안에서 동역이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팀웍이 생길 것이다. 우리는 채우는 작업보다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낮아진 이 마음을 가진 자가 성숙한 자이다. 낮아진 사람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요 알고 보면 강한 사람이다. 낮아질 수 있는 자는 알고 보면 지금은 높아 있다는 말이기에 축복된 사람이다. 낮아진 자는 손해 보는 사람이 아니요 알고 보면 실속이 있고 흑자를 보는 사람들이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 주님께서 그 빈 그릇에 채워주시는 축복을 경험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