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은 달라도 분명 우린 한 뿌리죠”
양천허씨대종회 허찬 회장의 ‘뿌리찾기교육’
재한중국양천허씨종친회 현판식 참여

“양천허씨는 20여만이 안되는 작은 인구이지만, 고려시대에는 11분의 정승급 관직을 가진 분을 배출하고 조선시대에는 5분의 정승을 배출한 가문이고, 그밖에 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낸 분들도 많고 역사에 기록된 걸출한 문인, 화가, 의원 등이 나온 양반의 가문입니다. 이런 가문의 역사를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열심히 생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2월 26일 오전 11시에 동포세계신문사에서 열린 재한중국양천허씨종친회 첫모임에 참석한 양천허씨대종회 허찬 회장은 중국동포들에게“양천허씨의 내력과 뿌리찾기 교육”을 30분간 실시하였다.
허씨는 서기 48년 16세때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을 가야국의 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하면서 시작되었다. 수로왕의 30세손 허선문(許宣文)이 양천허씨 시조로 현재 서울 양천구와 김포일대에서 대부농으로 있을 때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 공신으로 공적을 받았다. 이후 양천허씨는 동주사공, 판도좌랑공, 대제학공 삼계파(三系派)로 나뉘어졌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정승 16인 중추원사 6인 학사 9인 호당과 청맥리 각 6인 공신 9인 봉군 36인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고려 태조는 개국공신 허선문을 공암(현재 김포)촌주로 추대하고 가부(양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이 양천허씨의 시작이 되었다. 이에 양천허씨는 매년 4월 8일 김포에서 시제를 지낸다.
양천허씨는 고려말 조선초기 정권이 바뀔 무렵, 1392년 두 왕을 섬길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 결의로 이성계에 항거한 72인 중 허징(고려 충정왕 사위)은 함경도 길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동생 허손은 제주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길주로 간 허징은 용진공파의 시조이다.
중국 동북3성에 양천허씨들이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 허찬 회장은 “대부분 용진공파 후손들로 고려말 조선개국 초 현재 함경북도 길주로 이주한 용진공(허징)의 후손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대륙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양천허씨는 북으로는 함경도 길주와 회령, 평안도 구성으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남으로는 파주, 연천, 포천, 용인에 많이 살고 있다. 제주도와 진도에도 양천허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정권의 변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학문에만 매진하며 살기를 바라거나,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이 주요원인이라 한다. 이만큼 양천허씨는 출중한 가문이지만 그만큼 시련도 많았음을 보여준다.
허찬 회장은 조선시대때 임금이 특별히 집을 지어주는 예우를 받게 된 3명중 한명인 미수공(眉叟公, 허목)의 직계손으로 숙종임금이 지어주었다는 집(은거당, 연천군 강서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6.25전쟁통에 집이 소실되고 남북분단으로 고향집이 현재는 군사분계선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허 회장은 고향집을 떠나 남한에서 살게된 실향민의 아픔을 안고 있었다.
허찬 회장은 중국동포들이 종친회 모임을 결성한다는 말을 듣고 높은 관심을 갖고 참석해 뿌리찾기교육까지 해준 것이다. 허 회장은 “중국동포 허씨 일가들을 만나게 되어 기쁘고 종친회까지 구성하여 활동을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 “우리는 자랑스런 가문을 갖고 있는 후손들이며 모두 다 한 가족이다. 서로 도우며 살자”고 소감을 밝혔다.
정리=김경록 기자
사진=김상률 기자
@동포세계신문 제264호 2012년 3월 1일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