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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사 대웅전. 사천성 시방시에 위치한 나한사는 마조 스님의 출가 사찰이다. |
마조(馬祖, 709~788) 스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고향인 사천성을 방문했다. 마을 입구에서 일하고 있던 할머니가 마조를 보고 외쳤다.
“어 마 씨네 키쟁이 코흘리개가 지나가네.”
마조가 이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출가해 나이 들어서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
예수도 성인이 된 후, 고향에 갔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당한 곤욕이 있어 제자들에게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 이 말은 나도 실감하는 바이다. 형제가 다섯인데 부모님 이외에는 형제들이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다. 그러니 형제들이 내게 예우를 갖추어야 하는 줄은 알지만 서로 주제 삼을 대화거리도 없으니 점차 멀어져가는 감이 있다. 이외 친척들을 만나도 어릴 때 본 내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시고 카필라성에 돌아가 라훌라를 비롯해 사촌 형제들을 출가시켰고 일가친척들을 제도시켰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 하지만 이것은 내 관념일 뿐, 같은 서울 땅에 사는데도 부모님 이외에는 형제 친척 간에 내왕이 거의 없다. 누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수다.
이 ‘마 씨네 키쟁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마조 스님이 태어나고 출가했던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가끔 여행에서 일정이 빡빡한 날이 있고, 느긋한 날이 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일정이 빠듯할 것 같다. 며칠 만에 이 사천성 성도를 떠난다. 물론 성도로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왠지 시골로 빨리 향하고 싶은 마음이다. 성도 북부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마조의 고향 시방(什防)시에 있는 나한사(羅漢寺)와 마조사(馬祖寺)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마조사는 마조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고향에 있는 사찰이요, 나한사는 마조가 처음으로 출가했던 사찰이다.
시방시로 가는 버스는 20인승의 작은 버스인데다 에어컨도 되지 않았다. 한국이라면 폐차장에서도 받지 않을 낡은 버스다. 모두가 한 가족처럼 대화를 나누어 마치 다함께 소풍가는 기분이다. 이 사천성이 옛날로 치면 중국 변방 지역일 텐데, 버스가 성도시내를 빠져나가는 데도 길이 많이 막힌다.
중국에 선종이 융성했던 시기는 8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종이 발전했던 이 시기를 조사선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조사선의 개조(開祖)요, 선종을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마조도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조에 의해서 사회적, 교단적으로 선종이 발전하게 되었음은 물론, 마조가 이루어 놓은 선사상은 1000여 년이 흐른 지금에까지 미치고 있다.
나한사 나한, 친근한 얼굴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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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사 나한전. 맨 오른쪽이 무상 대사다. |
또한 고대 신라 때 수많은 구법승들이 당나라로 들어가 교학을 배우고 수행하였다. 이 구법승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신라 땅에 세운 9곳 선종사찰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하는데, 이들 가운데 일곱 산문이 마조계 사상이다. 또한 그 이외 많은 구법승들이 마조 문하에서 수행하였고, 그의 선사상을 신라에 심었다. 고대의 구산선문이 조계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현 한국불교에 마조의 선사상이 용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마조의 법맥 문제가 거론되어 오다가 마침 중국 돈황 지역에서 선종과 관련된 돈황 문서가 발견됨으로서 마조가 신라 무상(無相) 스님의 제자라는 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마조는 무상대사의 스승인 처적 선사에게서 삭발하였다. 이 점은 마조의 탑명(塔銘)을 비롯해 모든 전기와 일치한다.
버스를 탄지 대략 3시간 30분 정도 걸려 시방시에 도착했다. 다시 인력거를 타고 나한사를 찾아갔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마조는 20세 무렵 자신의 고향 부근에 위치한 나한사에 처음으로 출가했다. 마조가 열반한지 3년 뒤인 791년 무렵 나한사 도량에 마조의 사리탑과 마조상을 모셨다. 나한사에 도착해 도량 안에 들어서니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노스님 한 분이 공양간에 가서 점심을 먹으라고 재촉하신다.
가끔 중국 사찰에서 연세가 지긋한 노스님을 만나곤 하는데, 이들 중에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문화대혁명(1967~1976)을 거치는 동안에도 꿋꿋이 승려로서 견뎌온 이들도 있다. 어떤 경우의 노스님이든 마치 한국에서 만난 어른처럼 정겹고 연민이 앞선다.
학위 논문 주제였던 마조의 출가 사찰을 찾아왔는데도 점심부터 먹으라는 소리에 먼저 공양간으로 향했다. 일단 여행 중에는 기회만 닿으면 배를 채워야 하는 법이다. 타지에서 배고프면 서러운 법이요, 한편으로는 시간과 경제를 아낄 수 있는 전략에서 나온 나만의 비법이다. 공양간에서 국수를 준비해주는 동안 포대화상을 살펴보니 포대화상의 웃는 모습이 기막히게도 천진스럽다.
중국의 어느 사찰이나 공양간 중심에는 포대화상이 모셔져 있고, 사천왕문에는 포대화상을 모셔 놓는다. 이 포대화상은 9~10세기 무렵의 절강성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睍) 출신의 계차(契此) 스님이다. 후대에 이 화상의 출생지였던 봉화에서 미륵교가 발생했고, 이 지역 사람이 포대화상을 미륵의 화신으로 섬기면서부터 중국 사람들은 미륵부처님이라고 칭한다. 뚱뚱한 몸집에 큰 배를 내밀고, 늘 웃음을 띠고 있으며 등에 포대를 짊어지고 있는데 중생들이 원하는 것은 다 준다고 하는 중국인들의 염원이 담긴 부처님이다.
30여 명의 승려가 상주하는 나한사 도량 중심축은 관음전, 승가육화(僧家六和, 아미타불이 주불이며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신다), 대웅전이다. 더불어 다관을 겸하고 있었다. 보본당(報本堂)이라는 당우 안에는 마조의 상이 모셔져 있고, 관음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에 들어가 보니 이제까지 친견했던 나한님의 상호가 아니었다. 위엄이나 권위가 사라진 익살스럽고 천진한 표정들이었으며,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호탕한 대륙기질의 상호였다. 부처님과 나한님 상호도 이렇게 친근감이 들어야 하지 않나 싶다.
마조에 관한 기록에서 ‘마조는 소처럼 걷고 호랑이처럼 사람들을 바라보았으며, 혀를 내밀어 콧등을 덮을 수 있었고 발에는 두 개의 바퀴무늬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런 말들은 위대한 사람의 형상을 표현할 때 쓰이는 언구들인데 나한님의 상호에서 마조의 자유로운 풍모, 호방한 심성, 사상의 자유로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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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시에 위치한 마조사. |
두어 시간 도량을 참배하는 동안 보살님 한 분이 안내를 해주었고, 지극 정성으로 대해주었다. 찻집에서 차를 한잔 사서 차를 마시는데 보살님께서는 찻잔에 물이 조금만 비어도 뜨거운 물을 연신 부어댄다. 여름이라 해가 긴데다가 마조의 출생지에 위치한 마조사로 가기 위해 나한사를 나오려고 하니, 몇몇 보살님들이 ‘마조사를 참배하고 다시 나한사로 와서 하루 묵으라’고 간곡한 청한다.
가끔 사찰에서 만나는 불교신자들의 지극함은 한국의 보살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외국 승려인데도 마치 부처님을 대하듯 하여서 마음이 숙연할 정도이다. 참! 이틀 전에도 대자사 앞에서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한 보살님이 내리면서 내 택시 값을 놓고 내렸다. 이런 때마다 생각해본다. 과연 한국의 보살님들도 외국 승려에게 이렇게 극진하게 대하는지 궁금하다.
고향 사람들 소실된 마조사 재건
나한사 산문 앞에서 택시를 타고 20여분 달리다 보니, 도로 지명에 ‘마조 고향의 유원지(馬祖故里風景區)’라는 지명이 나온다. 마조가 태어난 시방시 양로구진(兩路口鎭)은 현재 마조의 이름을 따서 ‘마조진’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마조라는 인물과 사상을 부각시켜 마조 출생지인 고향을 유적지 및 유원지로 만들었으며, 앞으로도 유원지로서의 다른 연계 발전을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조가 열반한 후 마조의 고향 사람들은 마조사를 창건하고, 마조상을 모셨다. 『관현지(灌縣志)』에 의하면 마조가 입적한 후 관현에 마조사를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문화혁명(1967~1976)을 거치는 동안 나한사의 마조상과 탑, 마조사까지 모두 파괴되었다. 1993년 마조의 고향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마조사를 다시 세우고 마조상을 모셨다.
또한 2005년 이곳에서 마조문화제를 개최하고, 학술토론회를 여는 등 마조 현창운동을 하였다. 사천성 시방 주민들이 대외운동을 하면서까지 자랑스러운 승려로서 부각시키는 점을 볼 때 마조에 대한 관심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중국 불교에서 그가 이룩해 놓은 업적이 어떠한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한편 사천성에는 고대로부터 ‘마조’라는 이름을 딴 사찰이 여러 곳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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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사 보본당에 모셔진 마조상. |
마조사에 도착해보니 도량 내에 불사를 하기 위한 청사진이 걸려 있다. 대웅전과 관음전, 요사채만 있는 초라한 작은 사찰에 다섯 분의 승려가 상주한다. 대웅전 안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고, 마조를 비롯해 혜능, 선휘(禪輝), 보안(普安), 달마 네 분의 상이 모셔져 있다.
마조사를 나와 해가 어스름히 질 때까지 혼자 느긋하게 마조의 고향을 거닐었다. 마조 풍경구 중심부에 큰 호수가 있는데 사람들의 낚시터였고, 찻집, 마조서원(書院), 마조선연구소 등이 있으며 곳곳마다 달마와 혜능의 행적, 마조의 행적지, 선종 법맥도, 마조와 제자들의 법거량을 표현한 글들을 간판화시켜 세워 놓았다. 또한 마조의 옛집을 복원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한 인간이 이룩해 놓은 사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제될 수 있는 밑거름이요, 1000여 년이 지나서도 그의 인물됨이 존중된다니 참으로 위대한 행적이다. 그의 족적을 보면서 참으로 왜소한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든다. 나 같은 사람은 마조 스님과 같은 분이 이룩한 업적과 사상 덕에 승려로서 살아가는 것 같다. 마조스님께 귀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