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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3일 월요일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 또는
[백] 성 안스가리오 주교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언자들은 약속된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군대라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자 사람들은 겁이 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한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32-40
형제 여러분,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타,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벗어났으며,
약하였지만 강해졌고 전쟁 때에 용맹한 전사가 되었으며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38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39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비참함과, 그에게서 풀려나 제정신으로 돌아온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극적 과정으로 매우 뚜렷하게 보여 줍니다. 그 과정에 예수님께서 지니신 절대적 권능이 마귀에게 작용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신앙 고백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5,7)라며 그분의 권능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던 더러운 영들은 결국 자기들이 살길을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사람을 살리시려고 그 청을 들어주십니다. 사실 악령은 인간에 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대로 주님께서는 ‘전적으로 당신 소유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을 제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시어 그를 해방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소유인 인간의 해방을 위하여 돼지 이천 마리를 잃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머물러 계셔야 하는 사람 안에 더러운 영이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고 그 영을 내보내십니다. 사실 사람 안에 악령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는 어떤 것이 머무른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에게 육신을 마련해 주시고 그 안에 머무르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 몸은 그분의 몫이니 다른 어떤 영도 우리 몸을 소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이든 돈과 허영과 탐욕이라는 세속의 영이든 말입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악령이 활개를 치는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다가왔습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무덤은 ‘악령의 집’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이 수시로 활개를 치니 한 인간으로의 기본적인 삶은 끝났다고 보면 정답입니다.
충혈된 눈, 온 몸의 상처, 기괴한 몰골, 엄청난 파괴력, 음산한 분위기...사람들은 다들 그를 보면 무서워서 줄행랑을 치곤했습니다. 왕따도 그런 왕따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그의 거처는 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 속 토굴이었습니다.
악령의 괴롭힘으로 고통 받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악령에게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주 특별한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제 이름은 군대(軍隊)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마르 5,9)
악령의 이름은 독특하게도 ‘군대’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 군대는 6100명의 사병과 726명의 기병, 합해서 총 6826명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표현은 그 사람 안에 수많은 악령이 활개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아니라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악령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 군대라는 표현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
악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그 이면에 깃들어진 죽음의 문화가 곧 악령들입니다. 극단적 이원화, 부익부빈익빈의 현실,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왕따 현상, 마약, 자살에의 유혹...
이 모든 악령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힘입어 하루 빨리 사라지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군대라는 악령 집단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인간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끝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도 악의 세력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활개를 치면서 한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부재(不在)하실 때입니다. 내 삶에서 성령께서 부재하시는 순간이 곧 악령이 활동하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비하신 하느님 현존 체험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그분과 나 사이의 가느다란 끈을 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여겨지는 부재 체험 가운데서도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서 내 곁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여기가 끝인가 보다 느껴질 때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법: 시험에 들어보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마르코복음 5장에 나오는 게라사 지방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자, 수천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몰살당했는데, 그 광경을 본 주민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자기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왜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예수님을 배척해야만 했을까요? 바로 손에 잡히는 재산(돼지 떼)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구원과 은총을 놓고 저울질했을 때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자주 반복됩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제공하는 그럴싸한 유혹이 너무 익숙하고 실체감 있어 보이기에, 영원한 가치를 제시하는 성령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가, 욕망에 빠져 이를 스스로 내려놓고 만 인물들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먼저 사울을 살펴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서 기름부음을 받고 출발했지만(1사무 10장 참조), 점차 자신의 권력에 도취 되어 교만해집니다.
1사무 13장과 15장에 보면, 그가 사제로서의 권한도 아닌데 마음대로 제사를 집전하고, 주님의 명령을 어겨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왕이니 이 정도쯤이야”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주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습니다.”(1사무 15,26)라고 선언할 정도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사명을 사울이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사울의 교만한 행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과도 닮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유럽을 호령하며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점차 자신의 절대 권력에 빠져 무리한 원정(특히 러시아 침공)을 감행함으로써 결국은 파멸로 치달았습니다.
겸손히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을 절대화하면, 하느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의 그릇이 거꾸로 뒤집혀 버리는 것이지요. 그는 교회에 의해 씌워지던 황제의 왕관을 자신이 직접 쓴 최초의 황제가 됨으로써 교회에서 오는 은총을 스스로 단절해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을 떠올려 봅시다. “당신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1사무 13,14 참조)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하느님께 사랑받던 임금이었지만, 2사무 11장에서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간음죄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야까지 제거해 버렸습니다. 한순간의 육체적 욕망이, 하느님께 받은 뛰어난 은총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가지만, 가정사에서부터 정치적 분열까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도 흡사합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 문제(육체적 욕망과 후계 문제 등)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과 불화를 일으키고, 결국 영국 국교회를 분리시키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든 인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교황에게 있지만, 성공회를 교황과 단절되게 함으로써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교황한테서 오는 성령의 은총을 단절시켰습니다.
솔로몬 역시 지혜의 왕으로 불릴 만큼 은총을 받았으나, 재물과 쾌락에 집착하다가 영적 중심을 잃어버립니다(1열왕 11장).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치와 이방 아내들이 늘어가면서,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 신까지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이것이 훗날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몰락은 영화 「월 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잘 드러납니다. 1980년대 뉴욕 증권가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젊은 주식중개인 버드 폭스(Bud Fox)는 부와 성공을 좇다가, ‘탐욕은 선(Greed is good)’을 외치는 대부 격인 고든 게코(Gordon Gekko)의 꾐에 빠져 불법과 비리를 저지릅니다.
처음에는 급격히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모든 진실이 폭로되면서 재산과 명예를 잃고, 스스로도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돈이 곧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착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얼마나 영혼의 평화와 정직을 포기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교만, 육체적 욕망, 재물에 대한 집착이 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은총보다 눈앞의 돼지 떼가 훨씬 더 커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체험해 보니, 이 벽은 ‘한 번도 내려놓아 보지 않았을 때’ 더욱 견고하게 느껴질 뿐, 막상 용기를 내어 내려놓으면 정말 큰 자유와 기쁨이 찾아옴을 알게 됩니다.
저 자신도 세속을 이기기 위해 처음 십일조를 결심할 때 “이러다 생활이 힘들어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처럼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를 실제로 해 보니, 오히려 돈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사제로서 여자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지만, 그 길 위에서 오히려 더 폭넓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체감했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거나 사랑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술 역시 “피부병 때문에 안 마셔야 한다.”라고 결심하고 한 달을 안 마시고 살아 보니, 몸도 좋아졌을 뿐 아니라 “왜 그동안 술의 즐거움에 애써 의존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결국에는 ‘해 보기 전에는 두렵고, 한번 내려놓아 보면 예상치 못한 은총이 열린다.’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게라사인들이 돼지 떼를 지키려 예수님을 내쫓은 사건은, 결국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 3,10)라고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며칠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다면 분명 더 성령의 열매, 곧 기쁨과 평화가 샘솟아 행복해짐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서두르고 시험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분명 세.육.마.를 이기는 만큼 내 안에 들어와 나에게 은총의 성물을 주십니다. 그런데 세.육.마.를 이기는 방법은 한 번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행복해지는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해 보고 안 되면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물리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십일조부터 1년 동안 시험해 봅시다. 돈도 넉넉해지고 성령도 자신 안에 넉넉해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징어 게임 시즌 2를 보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오징어 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도 보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습니다. 넷플릭스 상영 순위 1위를 기록하며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한국 사람에게 친숙한 게임을 보여주었고, 인간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한없이 약하다는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이라는 이기적인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게임에는 자비와 양심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했던 것은 그 게임이 현실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 2는 오징어 게임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오징어 게임을 만든 사람을 찾아가서 그 게임을 더 이상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실패하면서 주인공은 다시 오징어 게임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이 게임은 비인간적인 게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게임을 하면 단 한 사람만 남고 모두가 죽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받게 될 상금은 옆에 있는 사람의 목숨값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게임을 중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인공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성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고 신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서 빌어먹던 라자로는 세상에서 종기투성이로 배고프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아브라함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생명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청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라자로와 같은 거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알려주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가서 이야기해도 듣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욕망의 덫에 걸리면, 열등감의 덫에 걸리면, 게으름의 덫에 걸리면 영원한 생명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포도원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돌보면서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시간이 가도 오지 않았고, 소작인들은 포도원이 이제 자기들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때가 되어도 소작료를 보내지 않자, 하인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겁도 없이 주인이 보낸 하인을 때리고, 쫓아냈습니다. 주인은 아들은 알아볼 거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영원히 자기들의 것이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죽여버렸습니다.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소작인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소작인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소작료는 무엇인가요? 겸손과 인내입니다.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이아 (Ia)
활동년도 : +5세기경
신분 : 동정녀
지역 : 콜월(Cornwall)
같은 이름 : 아이브스
중세 후기의 전설에 의하면 성 에르쿠스(Ercus)의 자매인 성녀 이아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선교를 위해 성 핀가르(Fingar)와 성녀 피알라(Piala) 그리고 많은 수의 동료들과 함께 영국 남서부 콘월에 도착하여 헤일(Hayle) 강어귀에 정착하였다.
그녀가 바다를 건너 콘월에 도착하게 된 전설적인 내용에 따르면 그녀가 동료들과 함께 가려고 출항 지점에 당도해보니 그들은 이미 출항한 후였다.
슬픔에 빠진 그녀는 하느님께 애원하며 도움을 간구하고는 물 위에 떠다니는 나뭇잎 하나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잎이 점점 커져서 그녀를 능히 태울 수 있게끔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의 도우심에 감사드리며 그분께 더욱 굳은 신뢰심을 드리면서 기도하던 중 다른 일행이 당도한 해안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무사히 도착한 그녀는 그곳에 작은 은둔소를 짓고 여생을 고행과 기도 속에서 지냈다.
그래서 그곳을 후세 사람들은 포트 이아(Port Ia)라고 부르다가 16세기 후부터는 세인트 아이브스(Saint Ives)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전설은 또한 헤일 강어귀에서 순교한 콘월의 순교자들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콘월 지방에서는 그녀를 순교자로서 공경하고 있다.
성녀 베르부르가 (Werburga)
활동년도 : +700년경
신분 : 수녀원장
지역 : 체스터(Chester)
같은 이름: 베르브르가,워부르가,워브르가
성녀 베르부르가는 영국 머시아(Mercia)의 국왕 울프헤레(Wulfhere)와 성녀 에르멘질다(Ermengilda, 2월 13일)의 딸이다.
그녀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 지방의 여러 수도원과 관련이 있고, 링컨셔(Lincolnshire)의 트렉킹햄(Threckingham)에 있는 어느 수녀원에서 운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늘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덴마크인의 침략 때에는 그녀의 유해를 체스터(Chester)로 옮겨 이 지역이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헨리 8세 왕이 이를 파괴해버렸다고 한다.
성 안스카리오(Anschar)
신분 : 대주교, 선교사
활동지역 : 브레멘-함부르크(Bremen-Hamburg)
활동연도 : 801-865년
같은이름 : 안스가르, 안스가리오, 안스가리우스, 안스카르, 안스카리우스
프랑스 아미앵(Amiens) 근교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성 안스카리우스(Anscharius, 또는 안스카리오)는 5세 때 어머니의 사망으로 수도원에서 자랐으며, 814년경 피카르디(Picardie)의 옛 코르비(Corbie) 수도원(베네딕토회)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826년에 그는 선교사로서 덴마크에 갔으나 스웨덴에 관한 관심이 더 커서 3년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829년에 스웨덴으로 갔다가 1년 만에 다시 돌아와 새로운 코르비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832년에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Gregorius IV)에 의해 함부르크의 주교로 축성되었고, 스칸디나비아 백성들과 슬라브인들을 돌보라는 교황의 명을 받았다. 845년에는 바이킹(Viking)의 침입으로 13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해오던 함부르크가 파괴되어 큰 좌절을 겪었고, 848년에는 브레멘 교구와 파괴된 함부르크 교구의 합병으로 브레멘-함부르크 대교구가 설립되면서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에 의해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다시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놀라운 정열로 선교 활동을 재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같은 성공의 그의 뛰어난 설교력, 엄격하고 거룩한 생활 그리고 수많은 기적의 힘이었다. 그러나 성 안스카리우스는 865년 2월 3일 브레멘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후 그 모든 선교 사업들이 중단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아직 그리스도교가 뿌리 내릴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 안스카리우스는 '북유럽의 사도'로 불리며, 스칸디나비아의 선교사이자 사도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안스가리우스(Ansgarius)로도 불린다.
복자 오도리코 (Odoric)
활동년도 : 1285-1331년
신분 : 수사
지역 : 포르데노네(Pordenone)
같은 이름 : 오데리코, 오데리쿠스, 오도리꼬, 오도리꾸스, 오도리쿠스, 오도리크, 오도릭
오도리쿠스(Odoricus, 또는 오도리코)는 이탈리아의 프리울리(Friuli)에서 태어나 15세 때에 우디네(Udine)에서 작은 형제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서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사명을 느낀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우디네로 돌아와서 주민들에게 설교했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다닐 정도로 그의 설교는 성공적이었다.
1321년경에 그는 서 인도에 상륙했고, 1322년과 1328년에는 중국 북부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331년에 우디네에서 선종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서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망 때문에 이곳저곳을 다녔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75년에 승인되었다. 그는 오데리쿠스(Odericus)로도 불린다.
복자 스테파노 벨레시니 (Stephen Bellesini)
활동년도 : 1774-1840년
신분 : 수사
지역같은 이름 :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이탈리아 트렌티노(Trentino) 지방의 트렌토(Trento) 출신으로 16세 되던 해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Roma)와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하던 중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여 그의 공동체가 뿔뿔히 흩어지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 개인적인 신심생활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어린이들의 종교교육에 정성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는 트렌티노 지방 모든 학교의 장학관으로 임명되어,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가 교황령에 의해 공동체 생활을 재개할 때까지 오로지 이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가 장학관의 직무을 떠날 때 거의 모든 시의원들이 극구 반대했지만, 자신의 성소에 따라 볼로냐로 가서 형제들과 재회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 수도원의 수련장 등을 역임하였다.
몇 년 후 그는 제나차노(Genazzano)에 있는 유명한 착한 의견의 어머니 성당의 주임사제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콜레라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그 병에 전염되어 선종하고 말았다.
그는 1904년 12월 27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