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1956년 9월 28일 낮, 제2차 민주당 전당대회가 막 끝나갈 무렵 대회장인 서울 명동 시공관(지금의 예술극장) 복도에서 ‘탕!’
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독재 정권이 보낸 저격수 김상붕(金相鵬)이 쏜 권총에 부통령 장면이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왼손에 관통상을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의 급서(急逝) 열흘 후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ㆍ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을 20만 표 차이로 물리치고 부통령에 당선된 장면이 목숨 걸고 선거 운동에 힘써준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단상에서 내려간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통령에 대한 살해 위협이 있어 전당대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가 “꼭 뵙고 싶다”는 부산 대표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갔다가 실제로 저격을 당한 것이다. 대회장은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장면이 벌떡 일어나 단상으로 다시 올라갔다.
“동지들,
내가 건재하니 안심하십시오.”
담대한 장면의 모습에 당원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범인 김상붕과
공범 최훈(崔勳), 이덕신(李德信, 당시 서울 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은 그 자리에서 당원들에게 붙잡혀 이듬해 11월 1일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장면은 바로 그 다음 날 대통령에게 범인들을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내고,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된 뒤인 1960년 10월
1일 직접 무기형으로 감형해 주었다.
그해 12월 12일에는 정부 수반의 신분으로 감옥으로 찾아가 따뜻한 털옷을 입혀주며 위로하기까지 했다.
훗날 개신교 목사가 된
김상붕은 1987년 장면의 아들 장익 주교를 만나 한없이 넓고 깊은 장면의 인품을 회고한 뒤
“저에게 저격을 사주했던 사람들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 당당한 위치’에 있던 내무부 장관과 치안국장, 일선 경찰서
사찰계장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고 고백했다.
그 배후의 정점에는 이기붕이 있었음도 암시했다. 독재 권력의 하수인들은 “앞으로 3년 정도 살 것”이라는 주치의의 진단이 내려진 노(老)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가진 장면에 대해 부통령 당선 직후부터 끊임없이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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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12월 12일 제2공화국 내각 수반 장면이 4년 전 자신을 저격한
범인들을 찾아가 털옷을 주며 위로하고 있다. 장면은 그 한 달 전인 11월 2일 사형이 확정된 범인들을 무기로 감형해 줘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었다. |
그러나 장면은 달랐다. 저격당하는 순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사들을 보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극한 상황에서도 장면은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야당 출신 부통령으로 온갖 수모와 탄압을 받았을 때는 물론, 급기야 5ㆍ16
군사쿠데타로 실각했을 때도 장면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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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 조금 지난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제2차
전당대회장인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암살 지령을 받은 김상붕의 저격을 받고 서울 명륜동 자택으로 옮겨져 누워있는 장면과 문병객들. 장면은 이날
아침 암살 음모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회장에 안 가기로 당론으로 결정했으나 “보고 싶다”는 당원들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
잠시 몇 해 전으로 거슬러가 보면,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키며 직선제 개헌으로 지지 세력이 열세였던 국회를 피해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금지조항을 삭제해 종신집권을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요동치는 정국은
장면을 정치 일선으로 다시 불러내고 말았다.
1955년 초 민주국민당(민국당) 계열과 무소속 의원 60여 명으로 원내 교섭단체인
‘호헌동지회’가 결성되더니, 그해 9월 19일 민주당이 탄생했다. 민주당은 이때 신파와 구파로 대별되는 양대 세력으로 균형을 잡아나갔다.
흥사단 계열과 원내 자유당계, 자유당 탈당파, 신진 재야인사들이 신파에 속했고, 구파는 해방 직후 창당한 한국민주당 출신의 재산가와 구미
유학파들이 주축이 된 민국당 계열을 일컫는다.
장면은 신파의 중심인물이었고 구파의 핵심은 신익희와 조병옥이었다. 신익희 대표
최고위원과 함께 조병옥, 신파의 장면, 곽상훈(郭尙勳, 1896~1980), 박순천(朴順天, 1898~1983)으로 최고위원회를 구성했다.
독재 타도를 위해 정파를 떠나 하나로 뭉쳤다. 정강 제1조에 ‘일체의 독재 정치를 배제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한다’고 못 박았다. 독재
정치 청산이 가장 큰 사명임을 천명한 것이다.
장면의 창당 기념 연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 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이며,
관료 정치에 반대하고 관권의 남용을 경계하는 것이며, 관권에 의한 경제권의 침해와 이에 수반되는 모든 부패를
배격한다.”
민주당 창당 당시의 정신과 각오를 설명하는 이 연설 내용은 5년 후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의 정강ㆍ정책으로 되살아난다.
독재와 궁핍에 시달리던 국민의 지지가 하늘을 찔렀다. 국민들은 “비로소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정책 대결에 의한 정권 교체가 가능해졌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장면은 스스로 밝혔듯이 “이때부터 진정한 야당 인사가 되어 정부를 견제하고 부정부패를 저지하는 일선에 서게” 되었다. 그만큼 박해와 모함,
수모와 생명을 빼앗길 위험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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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8월 15일 광복절에 취임식을 갖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장면.
이승만은 다른 참석자는 모두 소개하면서 정작 그날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장면은 소개하지
않았다. |
1956년 3월 25일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제3대 정ㆍ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신익희와 장면이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뽑혔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고달픈 국민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선거 유세가 시작되자 가는 곳마다 청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집권 자유당의 불안과 긴장이 역력했다. 과연 정권 교체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5월 4일, 사상 최대의 인파인 20만, 또는 30만이라고도 집계한 시민들이 서울 한강 백사장에
운집한 가운데 유세를 마친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호남 유세를 위해 야간열차를 타고
이리(지금의 익산)역에 도착하기 10분 전인 5일 새벽 심장마비로 갑자기 쓰러져 끝내 숨진 것이다. 함께 갔던 장면과 민주당원들은 물론 온
국민의 비통함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10일 후인 5월 15일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되었다.
러닝메이트를 잃은 장면은 “100만 표는 도둑맞았다”는 그 선거에서 41.9%(4,012,654표)를 얻어 39.6%(3,805,502표)를
얻은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이긴 것이다.
5월 23일 국민장을 거행한 신익희에 대한 추모 투표도 쏟아져 150만 표의 유령표가 나왔다. 장면과 민주당에 대한 독재자의 탄압은 그
순간부터 시작돼 결국 제2차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장면의 심장을 향해 총알이 날아든 것이다.
장면은 4년 후인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러닝메이트로 나선 대통령 후보 조병옥을 잃고 혼자 선거를 치러야 했다.
위장병 수술을 받으러 미국으로 간 조병옥이 선거 한 달을 앞둔 2월 15일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숨져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장면은 1959년 10월 26일 열린 민주당 정ㆍ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494 대 491, 불과 3표 차로 자신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조병옥이 후보 지명 수락을 거부하자 그에게 다가가 “한 표가 더 많아도 조 박사가 다수결로 지명받았으니 수락해야 됩니다.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협력해서 일합시다”며 손을 끌어 단상에 오르게 했다. ‘타협과 양보’라는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여준 장면에게
당원들은 열광했고, 갈라지려던 신ㆍ구파의 틈새도 봉합되었다.
장면은 부통령 후보 겸 대표 최고위원에 뽑혀 또 한 번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의 호기를 맞았으나 하늘은 허락하지 않았다.
3ㆍ15 선거는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였다. 4ㆍ19 혁명을 불러일으켰고 독재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독재 배제’를 으뜸 사명으로 세우고
창당한 민주당의 굴하지 않은 투쟁과 민중의 분노가 더 이상 일당 독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1956년 8월 15일 취임식을 거행하면서
엄연히 부통령도 함께 취임하는 마당에 정부는 ‘제3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기념식’이란 현판을 내걸었고, 이승만은 부통령 장면에 대해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남산에 지으려던 국회의사당 기공식 때는 초청을 하고도 정작 자리를 마련하지 않아 당혹스럽게 했다. 순화동 부통령 공관은 24시간 감시의
대상이었으며, 출입자를 일일이 검문하는 비열함을 보였다.
골수 신앙인 장면조차 “나의 부통령 4년은 죄 없는 죄인의 세월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였으니 그 감시의 눈길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 순화동 공관이 민주화 투쟁의 본부였고, ‘다원화된 시민 사회의 확립’, ‘효율적인 관료 제도의 정착’, ‘민간
주도형 경제 건설’,
‘한일 국교 정상화’를 비롯한 ‘국제 사회와의 교류 확대’라는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정책의 산실이었으니 하느님의 뜻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기만 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