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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소망을 가지는 자가 승리한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4,25) |
(39:6)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예페 토아르 위페 마르에)
한글 개역 성경의 '준수하고'와 '아담하다'는 원어 성경에서는 모두 '아름다운'(12:11), '안성맞춤의'(전 3:11)란 뜻을 가지고 있는 '야페'라는 하나의 단어이다. 한편 '용모'로 번역된 '토아르'는 '형상', '모양'의 듯이고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번역이 생략된 단어인 '마에르'는 '보기', '외관'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와 같이 요셉의 외모는 신체 그 자체의 균형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멋있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이는 다음에 서술되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의 배경 역할을 한다. 그의 지혜로움과 성실함 그리고 외모의 아름다움은 한 여인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39:7) 눈짓하다가 (왓팃사...에트 에네하)
본문 서두에 나오는 '왓티사'의 원형 '나사'는 '높이 들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녀가 요셉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39:8) 요셉이 거절하며 (와예마엔)
'거절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마엔'의 강조형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완강하게 거절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셉의 태도는 신앙인이라면 죄의 유혹 앞에서 재고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일언지하에 거절함으로써 죄가 틈 탈 조금의 기회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마 16:23). 왜냐하면 죄는 늪과 같아서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계속 탐닉하게 되고 더욱 큰 죄악의 자리로 끌려들어 가기 때문이다.
(39:8) 이르되 (와요메르)
본문은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아마르'에 계속적 와우가 결합된 상태이다. 이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뒤 바로 이어서 말하였음을 보여준다. 즉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동침 요구를 강하게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큰 죄임을 설명함으로써 그 여자를 설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성도들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수동적으로 거절하는 데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설득해서 죄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약 5:19,20).
(39:9)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웨하타티 렐로힘)
'득죄하다'에 해당하는 '하타'는 원래 '벗어나다', '빗나가다'란 의미이다. 즉 바른 길에서 벗어남으로 목적에서 빗나가는 것을 죄로 보는 것이다.
한 편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보디발에 대한 죄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본 것은 그가 신본주의적 가치관을 기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요셉은 죄의 기준이 하나님의 뜻을 침해하는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39:10) 날마나 (욤 욤)
'날마다'는 원문에서 '날(day)'을 뜻하는 '욤'이라는 단어를 두 번 연속해서 표현했다. 이는 보디발의 아내가 매일 매일 요셉에게 다가와 유혹한 것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은 보디발의 아내처럼 죄짓는 일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할 일은 구원을 선포하는 일이고(대상 16:23), 율법책을 낭독하는 일이며(느 8:18),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일이다(눅 9:23).
(39:10) 여인이... 청하였으나 (케답베라흐)
이는 전치사 '케'와 '청하다', '말하다'로 번역되는 동사 '따바르'의 강의형 구성형이 사용된 전치사구로서 직역하면 '그 여인이 청하였을 동안에'이다. 여기서 강의형이 사용된 것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주 강하고 끈질기게 요셉을 유혹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여인은 요셉의 강력한 거절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그를 유혹했던 것이다.
죄의 유혹은 한두 번 피하는 것으로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한 일에 대한 노력보다 더 강력하고 끈질기게 우리 성도들을 유혹하려 든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 마귀로부터 세 번이나 유혹을 받았다(마 4:1-11). 따라서 우리는 시험을 받을 때마다 강한 믿음과 말씀의 능력으로 이런 유혹들을 이겨야 할 것이다(신 7:4; 엡 4:22; 벧후 2:18).
(39:12) 그 여인이 ... 잡고 (왓티트페세후)
직역하면 '그러자 그녀가 잡았다'이다. 여기서 '잡았다'로 번역된 '티트페세후'의 원형 '타파스'는 기본적으로 '손으로 물체나 사람을 잡다'(겔 21:11; 29:7)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전쟁에서 포로를 사로잡다'(수 8:23; 왕하 14:13), '성을 취하다'(왕하 14:3; 수 8:8)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로도 쓰임으로써 아주 완강하게 부여잡는 것, 그래서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보디발의 아내는 지금이 마지막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요셉의 옷을 강하게 붙잡고 자신의 소원을 꼭 이루겠다는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눈짓만 하다가(7절), 그 후 처음으로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하고(7절), 그 다음부터는 매일 동침을 요구하다가(10절), 드디어 요셉의 옷을 붙잡는 격렬한 육체적인 행위까지 행하였다. 이는 마음에서 시작된 죄가 결국에는 그 사람을 완전히 삼켜버려 행동으로 강하게 표출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처럼 죄는 처음 생겨날 때에 잘라버리지 않으면 마음에서 급속히 자라서 그 사람을 자신의 노예로 삼고야 마는 것이다(막 7:20-23).
(39:12) 도망하여 나가매 (와야나쓰 와예체 하후차)
'도망하여(와야나쓰)'의 원형 '누쓰'는 보통 전쟁에서 적군에게 패하여 달아나는 장면(삿 4:17; 삼상 14:22)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이처럼 죄의 유혹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필사적으로 그 유혹의 장소를 떠나야 한다. 한편 '하후차'는 '바깥'을 의미하는 '후츠'에 방향을 나타내는 접미어'아'가 붙은 것으로 집안 어디 다른 곳으로 잠시 피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집을 떠나 바깥으로 나갔다는 의미이다. 요셉은 죄를 범할 요인이 있는 곳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의 성결함이 훼손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39:13) 그가...보고 (와예히 키르오타흐)
직역하면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보았을 때였다'이다. '키르오타흐'는 전치사 '케'와 더불어 '보다', '주시하다'라는 의미가 있는 '라아'의 부정사 연계형이 합해져 '보았을 때'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전치사구로서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에게 옷을 버리면서까지 도망간 요셉을 보았을 때 그녀의 마음이 갑짜기 돌변하였음을 회화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제 이전에 요셉을 향하여 기지고 있던 보디발의 아내의 불타오르던 욕정은 오히려 강한 분노와 수치심으로 변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 아닌 순간의 욕정은 이처럼 언제든지 분노와 미움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세상의 썩어질 것을 향하는 정욕을 피하고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벧후 1:4).
(39:14) 주인이...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헤비 라누... 레차헤크 빠누)
본문과 15절은 요셉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보디발의 아내의 사건 조작이다. 즉 보디발의 아내는 거짓으로 사건의 경과를 설명함으로써 집안 사람 그 누구도 요셉을 두둔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요셉을 신임하였던 보디발마저 아내의 말만 듣고 요셉을 옥에 가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희롱하기 위하여 데리고 왔다'는 왜곡된 표현을 사용하여 공격의 표적을 주인에게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비난은 히브리인 요셉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에 대한 불만과 시기심을 품고 있었던 집안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그녀는 '우리에게(라누)', '우리를(바누)'이라는 말을 연속 사용함으로써 자신 뿐만 아니라 집안 사람들 모두가 주인의 부당한 처사로 인한 피해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녀는 요셉과 자신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를 히브리인 요셉과 보디발의 집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과의 문제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디발의 아내의 영악함과 치밀함은 우리의 가슴을 섬뜩하게 한다. 우리 성도들은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공교한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벧전 5:8).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늘 깨어서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엡 6:10,11).
(39:14) 히브리 사람을 (이쉬 이브리)
'히브리 사람'이란 표현이 14:13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된 이후 본문에서 두번째로 나오고 있다. '건너온 사람', '이주자'란 의미를 지니는 '이 용어'는 요셉 당시에 이미 이방인들에 의해서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폭넓게 사용된 듯하다(43:32; 출 1:1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