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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46-56) 마리아의 찬송을 부르고 있는가?
누가복음 강해 (8)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눅1:46-56)
매그니피켓(Magnificat)
요셉과 약혼만 한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마리아로선 너무나 엄청난 의미이므로 크게 두렵기도 했지만, 남자와 관계를 갖지 않고도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권능이 임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면서, 늙도록 아기를 갖지 못한 친족 언니 엘리사벳도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어서 이미 임신 6개월이 되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천사가 떠나자마자 마리아는 곧바로 엘리사벳을 찾아와서 천사가 알려 준 말이 사실임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거기다 놀랍게도 마리아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말해주기도 전에 엘리사벳은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엘리사벳의 복 중에 있는 6개월 차의 요한이 마리아가 이미 예수를 잉태한 것을 알고서 기쁨으로 뛰논다고 증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사벳마저 그 예수를 ‘내 주’라고 부르면서 동생인데도 마리아를 그 주의 어머니라고 칭송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만난 엘리사벳과 그녀의 복중의 태아가 보인 반응을 보고서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나 신묘하고 은혜롭다는 사실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 예측 상상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정녀 임신에 순순히 따르겠다는 순종의 차원을 넘어서, 태중의 요한처럼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양까지 올려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칫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천사의 예언을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라고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 역사상 최고의 순종이었다면, 본문은 역사상 최고의 하나님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통칭 ‘마리아의 찬가’로 불리는데, 누가가 기록한 네 편의 찬양시 중, 첫번째입니다. 영어로는 ‘높이 찬송드린다’(praise highly)는 뜻으로, 첫 번째 라틴어 단어를 따서 ‘매그니피켓’(Magnificat)이라고 말합니다.
그 별칭대로 이 찬송은 동정녀 탄생의 당사자 마리아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할 내용입니다. 실제로 본문은 6세기 경부터 교회의 저녁 기도 시간에 낭독되었고, 동방 정교회에선 아침 찬송으로 불려졌으며, 성공회는 현재까지도 신자들이 저녁 기도문으로 활용한다고 합니다.
마리아도 죄인이었다.
마리아는 주님을 출산도 하기 전에 역사상 최고로 꼽힐 만한 ‘순종의 고백’과 ‘하나님 찬송’을 했습니다. 이제 곧 구세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잉태 출산 양육하는 인간으로서 최고로 고귀한 직무도 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도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며 죄에 찌든 인간이므로 절대로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그녀를 주님과 동격에 두고 숭배해선 안 됩니다.
그들은 대표적으로 마리아가 원죄로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무염시태(無染始胎) 교리를 믿습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은헤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28절)라고 말할 때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해져서 죄가 발동할 여지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천사가 고지한 전체 문맥을 따져보면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은혜는 동정녀 잉태였지, 죄를 씻어서 무죄하게 했다는 뜻은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도 그 잉태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즉 노예 같은 신분과 위치라고 솔직하게 진술했습니다.
그 고백이 겸손을 강조한 종교적 미사여구가 아니라, 마리아가 스스로 인식하는 자신의 영적 실체라는 사실을 본문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또 다시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라고 표현했습니다.(48절) 갈릴리 나사렛 시골 동네의 한 평범한 목수의 지극히 평범한 아내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의롭지 않은 자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지금 자신에게 아기 예수가 이미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성령이 간섭한 엘리사벳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고백했으므로(47, 48절) 이 찬양도 그 잉태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완전히 죄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또 엘리사벳과 마리아 사이에 주고 받은 대화의 주제는 성령의 잉태에 관한 것 하나입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마리아의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다는 언급은 물론이고 그런 뜻을 암시하는 기록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란 본질적으로 그것을 받을 만한 조건, 자격, 성품, 능력, 행위, 공적 등을 전혀 갖추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법입니다. 그녀는 아주 평범한 주부로서 요셉과의 사이에 장남인 예수님 아래로 여러 형제 자매들을 낳았습니다. 우리 모두 체험하듯이 가족끼리도 수없이 죄를 짓게 마련입니다. 아담 이후로는 모든 인간이 원죄 아래 태어나기에 죄를 안 짓고 살 수는 없으며 또 죄로 타락된 인간 사회에 살다 보면 주변의 죄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작 예수님부터 마리아를 엄마로서 사랑하고 존경은 했어도 신적 존재로 추앙한 적이 없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주님과 함께 참석한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아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놀랍게도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요2:4)
엄마를 무시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당신께서 행할 신적인 사역에 아무리 마리아라도 인간이 지시 간섭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을 명확히 밝힌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독생자를 낳는 너무나 귀중한 역할을 맡았어도, 예수님이 후대 사람들에게 절대로 그녀를 신적 위치에 두고서 숭배해선 안 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누가도 예수님이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한 벙어리에게서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어 고쳐준 후에, 유대인들에게 사탄의 사악한 활동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그 모든 경과를 지켜 본 한 여자가 일어나 주님을 낳은 마리아가 복이 있다고 칭송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8)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무시하는 뜻은 없으며, 주님이 베푸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당신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지키는 데에 더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또한 당신을 낳은 마리아를 숭배할 필요와 이유가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주님은 같은 맥락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라고 선언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를 육신적으로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고 요한이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요19:26,27) 마리아는 스스로 고백했듯이 하나님 앞에선 한 비천한 여종이었을 뿐 아니라, 요한 사도가 보기에도 아들을 잃은 한 불쌍한 엄마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간접적으로도 당신의 어머니를 경배하라는 뜻을 밝힌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경배하지 말라고 여러번 경고했습니다. 굳이 로마 교회의 잘못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정확하게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의견이 나눠지는 모든 이슈는 예수님에게서 최종적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자 기준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경배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반드시 주님이 말씀하신 교훈들을 정확히 배워서 일상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서 지켜야 합니다.
성령이 부르는 찬송
그렇게 마리아가 평범한 아녀자였음을 감안하면, 이 찬송을 엘리사벳과 만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불렀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기록상 두 사건이 곧바로 이어져도, 엘리사벳이 마리아 복중의 아기 예수를 ‘내 주’라고 칭송하는 말을 듣자마자 마리아가 이런 찬송을 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문자로 기록한 일종의 문학 작품이지, 모든 사건의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촬영한 기록 영화가 아닙니다. 저자가 후대에 꼭 알려주고 싶은 중요한 사안들만 선별해서 기록하므로, 앞뒤 행간을 잘 살펴서 합리적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에선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으며, 암시나 복선 등의 기법으로 은근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본문에선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쯤 함께 있다가 돌아갔다는 간단한 결론이, 바로 그런 표현으로 여러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56절) 간단히 살펴도 석 달이라는 기간으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엘리사벳이 임신 아홉 달로 만삭이 되었고, 둘째 마리아 자신도 임신의 확실한 증거를 얻게 되는 시간입니다. 혹시 엘리사벳이 요한을 조산했을지 모르지만, 누가가 세례 요한의 출생 같은 중요한 사건을 빠트릴 리는 없고 실제로 본문에 이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삭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엘리사벳을 배려해서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후대의 신자가 신앙의 대상이자 기준인 예수님에 대해 배워서 믿고 따를 수 있는 길은 성경을 통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배울 때도 반드시 성령이 역사해서 자신의 완악한 심령에 찔림과 각성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성령님 자신의 뜻에 따라 일어나기에 신자 쪽에서 주도할 방도는 없습니다. 결국 신자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서 복을 받으려면, 어쨌든 성경 기록을 깊이 파고 들어서 영적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그 깨달은 바를 현실 삶에 적용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앞에서 마리아의 경우를 살펴 봤듯이, 성경의 모든 등장 인물이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연약한 인간이라는 전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마리아마저 예수님이 ‘여자여’라고 불렀기에 다른 인물은 더더욱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간 있는 동안에 행했을 일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추정하면 됩니다.
가장 먼저 두 여인 다 임산부라는 입장에서 추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배가 불러질수록 태중의 요한이 계속해서 기쁨으로 뛰노는 것을 더 강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자신의 생리적 상태가 조금씩 바뀌는 상황을 이미 임신을 경험하고 있는 엘리사벳에게 문의하며 상담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로선 갈수록 동정녀 임신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졌으며, 경수가 세 번이나 거르자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틈이 나는대로 그녀들은 각기 가브리엘 천사에게 들었던 내용을 서로 나누며 되새겼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요한과 예수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각자에게 맡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함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가랴가 아무 말을 못해도 그 모임에 참여해서 속으로 진심으로 함께 기도하며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 사가랴가 제사장이고 엘리사벳도 아론 가문 출신인지라 모세 오경을 소지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큐티 모임처럼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은혜를 서로 나눴을 것입니다. 당시 책이 귀해서 구약성경이 없었다 해도 어려서부터 암송하며 배운 토라에 비추어서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며 서로 의견을 나눴을 것입니다. 그녀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교제할 때에 성령이 더욱 충만하게 역사해서 두 여인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넘치도록 풍성히 임했을 것입니다. 두 여인의 가슴이 기쁨으로 가득 차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힘껏 불렀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 세 달은 두 여인이 단순히 임산부로서 건강을 관리하며 태교에만 집중하는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일도 성실히 수행했겠지만, 그와 동시에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매일이 말씀 사경회이자, 간증 집회이자, 찬양과 기도로 치유받는 부흥회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마리아의 입술에서 이런 신령한 찬양이 저절로 터져나온 것입니다. 그 내용도 그래서 거의 구약 성경에 예언되거나 선포된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 짐작하건대 마리아가 삼 개월이 지나 임신을, 즉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확신했기에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다’고 과거 시제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을 찬양
마리아가 찬송한 내용도 그런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축복의 말을 듣고 바로 찬양했다면 아무래도 개인적인 감사와 경배에 치중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는 ‘내’라는 일인칭 주어를 사용한 전반 49절까지 뿐입니다. 그 후로 마지막 55절까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베푸실 영원하고도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 그것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실행될 것을 소망하면서 찬송했습니다. 그러니까 후반부에선 ‘내’라는 일인칭 주어는 사라지고 사실과 진리를 객관적 입장에서 서술했습니다.
임산부 둘이서 석달 간 산골의 한적한 집에서 진행한 그 은혜의 집회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기들 육신의 변화를 통해서 천사에게 통지 받은 신령하고 엄청난 말씀이 실현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두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났으니까, 자기들 태중의 아이들도 천사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큰 일에 쓰임 받을 것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이 지금껏 배워온 구약 성경에 따르면 천사의 예언은 하나님이 자기들 선조에게 이미 약속해 놓았던 구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온 이스라엘이 갈망해 왔던 일입니다. 당시로선 인간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연약한 여인 둘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큰 일을 실현하는 첫번째 주역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22:18)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구약 시대 내내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컨대 이사야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서 공의와 평화로 다스릴 메시아가 오며, 이방도 그에게로 돌아올 것이라”(사1:1-10)라고 예언했듯이, 재확인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곧 실현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경외감으로 가득 차서 떨렸을지는 이천 년 전 멀리 유대 땅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우리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일년 뒤에는 구세주 예수가 태어날 것이며, 그보다 육 개월 앞서서 엘리야의 역할을 할 세례 요한도 출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이 자기 아들들을 통해서 베풀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사가랴와 엘리사벳, 또 마리아와 요셉 네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두 아들이 유대의 랍비로 공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삼십 년 후까지 매일 희망찬 설렘과 소망을 가꿔가며 감사하는 기도를 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가 차면 요한이 먼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어서 백성들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대비하라고 물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 곧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며 택한 자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스승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기 까지는 요한과 예수의 사역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구체적으로 모를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예수가 공적 활동을 시작하는 첫날부터 얼마나 흥분되겠습니까? 특별히 예수가 자라는 동안 옆에서 지켜본 마리아인지라,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집사장에게 주님이 시키는 대로 아무 말하지 말고 그대로 따르라고 지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자신의 잉태보다는 자기 조상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찬양했습니다. 석달 동안 구약 성경의 약속을 계속 상기하면서 자신의 동정녀 잉태로부터 그 일이 시작된다는 너무나 큰 은혜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마리아도 주님을 잉태한 엄마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지킨 한 여자로서 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 찬송의 주제는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그녀가 십자가의 대속 구원의 진리를 미리부터 신학적으로 정확히 알아서 기뻐하며 찬양했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엘리사벳에게 성령이 작용해서 아기 예수를 ‘내 주’라고 고백하게 했듯이, 마리아에게도 성령이 역사하여 찬양에 십자가 복음이 계시되도록 해준 것입니다. 그 내용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십자가 복음이었으며 실제로 일부 표현에서 그런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찬양의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 46-48절은 서론 격으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베푸신 개인적인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둘째는 49-50절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거룩하신 이름과 풍성하신 자비를 찬양했습니다. 셋째는 51-53절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고 힘을 발휘하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 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에 완벽하게 공의로울 것이라고 찬양했는데,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계시한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 54-55절은 자기들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세워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될 것이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이 또한 제자들에게 유언격으로 주신 예수님의 지상명령과(마28:19,20) 맥을 같이 하므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한마디로 지금 마리아는 열달 후에 태어날 자기 아들을 두고 찬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배와 찬양을 받아야 할 하나님으로 높인 반면에, 자신은 하나님 언약의 수혜자가 되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자리 매김했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은혜로 구원받아야 하는 초대 교회의 한 신자의 입장에서 마땅히 주님께 올려드려야 할 찬송을, 성령의 역사로 앞당겨서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리아의 찬가는 여러 교회에서 공식적인 찬양과 기도문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양을 부르는가?
마리아가 맡은 주님의 일은 역사상 최고로 중요했었고 단 한 번 뿐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천 년 전에 마리아만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절대 아닙니다. 기독교 예식의 기도문 중의 하나도 아니며, 역사상 최고의 찬송이라는 성경적 지식을 알려 주려고 누가가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진심을 다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더 나아가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개인적 입장에도 자신을 동격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자녀들도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의 수혜자일 뿐 아니라, 그분의 구원 역사에 부름 받은 일꾼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도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녀들도 하나님께 이런 찬송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 찬양을 함께 부르려면 가장 먼저 마리아처럼 ‘나’라는 일인칭 주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죄에 빠져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있던 비천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친 백성이자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영육간에 아주 쇠약해진 마리아를 친엄마처럼 모셨듯이, 우리도 주변의 어려운 성도들과 불신 이웃을 가족 이상으로 섬겨야 합니다.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는 권력 재물 신분 등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가는 자기 인생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거꾸로 복음의 권능으로 세상과 죄악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넉넉히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개혁운동을 일으켜서 세상을 뒤엎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참사랑과 온전한 공의를 모르기에, 자기 인생이 자기의 것이라 고집하며 자기 힘만으로 인생을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안타깝게도 아무리 재물과 권력을 쌓은들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번민과 갈증 속에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이 너무나 불쌍하기에 그들에게 죽음이 닥쳐서 더 늦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는 반드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실현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개인의 기업이 커지고 후손을 창대하게 해주신다는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받은 십자가 죄 사함의 큰 은혜를 주변으로 전달해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거룩한 삶을 보고 그들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축복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신자답게 살지 못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으면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더 완악하게 멀어지게 만들기에 하나님이 그런 신자를 그냥 두고 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망하는 이유
세상이 먹고 사는 것이 모자라서 망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성경의 진리를 이 세대만큼 확실하게 증명하는 때도 없을 것입니다. 물질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해서 서민의 일상 생활이 로마 황제가 누렸던 것보다 더 풍족하고 화려해졌습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미쉐린 맛집에서 최고의 요리를 먹은 것, 세계 유명 관광지의 리조트에서 호캉스를 즐긴 것 등을 맘껏 자랑하는 사진과 영상으로 흘러넘칩니다.
심지어 그런 관종 끼에 미쳐서 인생 샷을 찍는다고 절경만 찾다가 떨어져서 죽기도 합니다. 유튜브로 손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 폭력과 섹스와 자살하는 것까지 실시간으로 현장 중계를 하며, 정치적으로도 극좌와 극우로 나뉘어서 온갖 갈등을 생산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양태를 정치 지도자들은 당파적 이익을 위해서 오히려 격려 악용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만 높이려는 죄로 타락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참사랑은 실종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온 세상이, 죄송하지만 지옥 심판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6:5)라고 한탄하신 말씀이 이 시대만큼 절실하게 적용되는 때가 없을 것입니다. 지식은 당신에 관한 지식이므로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고서 돈으로만 꾸려가는 인생에는 절망과 죽음만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개별적 인생은 물론이고 인류 역사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와 은혜가 실현되는 방향으로 이끄신다는 지식이 이 세대의 사람에게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자를 야단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도 그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서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고 덧붙였습니다. 오히려 제사장더러 지식을 버렸다고 야단치면서 그 자녀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해 버리겠다는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경고의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제사장이 제사장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세상이 지식을 몰라서 망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영혼 구원의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신자가 자신이 믿고 따르는 복음대로 살지 못하면 이 세대도 지금처럼 허망하게 돈만 좇다가 다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와 신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 대신에 주리는 자를 배불리 먹인다는 마리아의 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미쳐 돌아가는 이 세대를 바로 돌려 세울 방도는 없습니다.
그 일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아주 힘든 과업이 절대 아닙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평범한 여인이 성령 안에서 말씀 읽고 기도하며 진솔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면서 역사상 한 번 있은 그 위대한 십자가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자들이 교회에서 또는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순전하게 공부하고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자기 주변에서부터 또 실현가능한 사소한 일에서부터 실천해 나가면 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다면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성령은 충만하게 역사하여서 하나님의 큰 일로 이뤄 주십니다.
(11/2/2025) 박진호 목사
상기 제 글이 카톨릭 신자로부터 반박과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었는데, 마침 11/5에 로마 교황청이 교령을 내려 성모 마리아를 ‘공동 구세주”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공개 석상에선 1990년대 중반 이후 ‘공동 구세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마침내 정식 교리로 채택하여 내부적으로 이어진 수백 년간의 논쟁을 종식시킨 것입니다. 교황청은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낳음으로써 모든 인류가 기다렸던 구원의 문을 열었으므로 존경과 사랑은 하되, ‘공동 구세주’ 대신 ‘하느님의 어머니’ 등 다른 표현을 사용할 것을 권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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