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 자제(父老子第)와 공사천민(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와 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의 재주가 또한 이곳 서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쪽 땅을 버림이 더러운 흙과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쪽 땅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쪽 땅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쪽 땅의 글을 빌었으니 사백 년 동안 서쪽 사람이 조정을 버린 일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살별)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세상을 구제할 성인 (정제민 또는 정시수)이 청북 선천 검산의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 신령함이 있었고 다섯 살 때에 신승(神僧)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성장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여연에 머무르기 5년에 황명(皇明)의 세신유족(世臣遺族)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병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에 소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주, 군, 현의 고을원들에게 보내니 절대로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기마병의 발굽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위 격문을 안주병사. 우후목사와 숙천부사. 순안현령. 평안감사, 중군, 서윤과 강서현령, 용강현령, 삼화부사, 함종부사, 증산현령, 영유현령에게 내리노라. 대원수 <농민군의 격문> 순조기사 신미 12월 21일
해설 (해설)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세도 정치기에 평안도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민란이었다. 평안도 지역은 중국 무역의 통로로서 상업, 수공업, 광업이 가장 일찍 발전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서북민에 대한 차별 정책과 잠상 금지, 광산 개설 금지 조치로 이 지역의 신흥 상공업자들과 노동자들은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811년에는 큰 가뭄이 들어 이 지역의 많은 농민이 죽고 인심이 흉흉하였다. 평안도 용강에서 태어난 몰락 양반 홍경래는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와 함께 봉건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가산군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아 금광을 운영하면서 광산 노동자를 모집하여 군사 훈련을 시켰다. 홍경래는 12월 1천여 명의 군사로 다복동에서 봉기하고 격문을 발표하였다. 농민군은 10여 일 만에 가산, 박천 등 천청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크게 위세를 떨치었다. 그러나 정부군에 의해 정주성에서 패배하여 5개월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홍경래도 전투 중에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성을 함락시킨 관군은 살아남은 농민군 2, 983명 가운데서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1,917명을 모두 학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