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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진리에 더 다가가고 혹은, 더 성숙하고 성장함에 있어서 ‘질문’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생은 수수께끼도 많고 의문투성이입니다. 그 의문들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우리의 신앙도, 인격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더 이상 물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교만에 빠지고 영적인 감각이 무뎌져 스스로 성찰을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하신 질문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3:9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아담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 ‘지금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하나님은 물으시는데, 아담은 자신의 내면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동산나무 그늘에 숨어있으며, 그 이유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는 하나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동산, 하나님 은혜 안에 있어야할 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고 돌보며 살아야할 나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담은 스스로 동산 나무 그늘 아래 숨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부끄러운 실존이 폭로될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에 급급한 나입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부끄러워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그 질문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줍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고 회개하고 더 성숙한 믿음의 자리로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디두모’라고도 불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디두모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쌍둥이라는 말이 그의 별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마는 디두모라는 별명보다는 ‘의심 많은 제자’라고 하는 별명이 더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의심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도마에게는 조금 억울할지 모르지만, 의심한다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그에게는 늘 뒤따라다닌 것입니다.
도마가 처음 등장하는 본문은 요한복음 11장입니다. 베다니에 나사로라 하는 이가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오빠였습니다. 그가 병이 들었는데 병세가 심각했습니다. 마침 그 때 예수님은 유대지역을 떠나 광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교의 명절인 수전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느냐?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분명하게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하는 그 일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증거하지 않느냐? 그런데 도무지 너희는 믿으려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이라 말하니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 저편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그 광야로 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거기서 이틀을 더 유하시더니, ‘유대로 다시 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적극 말렸습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는데 또 그 유대 땅으로 가시려 하나이까?” 또 다시 유대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획을 바꾸려하지 않으셨고,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11:16의 말씀입니다.
도마는 그런 제자였습니다. 다른 제자들 모두가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할 때도, 주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우리도 죽을 각오로 주님을 따르자고 독려한 인물이 도마였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를 가르치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쓰신 <일반사회>과목 참고서에, 어떤 사진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진이 한 장 실려 있었고, 그 사진 밑에 작은 글씨로,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씀이 적혀있었고, ‘예수의 제자 도마가 한 말’이라고 하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도마라는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도마가 너무 멋있어 보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고 고난의 자리에 나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용기의 사람! 멋있지 않습니까? 도마 같은 크리스챤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관원들에게 체포되실 때,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주를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도 끝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간이지 싶습니다.
두 번째로 도마가 등장하는 곳은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를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바로 그 때 도마가 나섰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것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도마는 주께서 가시려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고, 그 길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 대부분이 그 길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을 모르니까 두려웠고, 그래서 예수님이 사로잡히시자 모두가 다 주를 버리고 도망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도마는 질문했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선생님이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겠다고 주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아직도 그걸 모르느냐’고 핀잔하지 않으셨습니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그 길이라는 것입니다. 영어 번역으로는 I am the way입니다. 바로 그 길, 아버지께로 나가는 그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마가 질문하였기에 예수님은 그 질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구원의 도리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도마가 세 번째로 등장하는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다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함께 있었고,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에 함께 달려가서 확인을 하였습니다. 정말, 그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베드로가 흩어진 제자들을 불러 모았는지도 모릅니다. 각자 숨기에 급급하여 한 집에 모여 있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베드로를 중심으로 연락망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 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연락을 못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베드로가 다 같이 모여보자고 하였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라가신 이상, 그럴 필요도 못 느끼고, 그럴 의욕도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날 제자들이 모인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라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지만, 도마는 의심이나 의문을 마음에 그냥 품어두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하게 의심을 표현하고, 또 질문을 하는 그런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직접 못 자국을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믿을 수가 없다’가 아니라 I will not believe it, ‘믿지 않겠다’, 내가 직접 보고 만져본 후에 믿겠다는 것입니다. 의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더 깊이, 확실하게 알고자 의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믿지 않겠다는 전제하에 믿을 수 없는 어떤 근거를 찾아내려고 하는 의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지 않고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도마는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전해준 정보를 그저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살아나신 주님을 내가 직접 체험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고 말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는 직접적인 체험을 간구한 것입니다. 도마는 지금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다른 사람의 체험이나 다른 사람이 전해준 정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체험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그런 도마를 예수님은 그냥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여드레 후에, 이번에는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26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다고 했습니다. 문들이 닫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장정들 열 한 명이 한 방에 모여 있는데, 웬만하면 답답해서 문을 열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숨죽여 문을 닫고 모여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위치나 정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날까봐 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신변에 대한 두려움, 장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평강’이란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이 ‘에이레네’란 말은 히브리어 ‘샬롬’을 번역한 것입니다 ‘평안, 평화, 화평, 평강’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샬롬’이란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헤어질 때 흔히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단지 ‘안녕’이라고 하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삶에 모자람이 없는 것입니다. 걱정이나 불안이 없고, 이웃과의 관계가 평안하고,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로울 때 그것을 샬롬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 있을 때 누리는 것이 평강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불평이나 원망도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 가운데 진정한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두려움에 떨며 숨을 죽이고, 문을 닫은채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평강입니다. 믿음입니다.
이제, 샬롬의 인사를 전하신 후에, 예수님은 열 한 명의 제자들 가운데 도마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 보지 않고는 안 믿는다고 했지? 만져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했지? 그냥 믿으면 되지, 그걸 안 믿다니, 믿음이 없는 자여!’라고 꾸짖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평강을 누리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믿음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잘 생기고 가진 것도 많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고 그 인격을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떻습니까? 사랑한다 하지만 그 관계는 불안합니다.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꿈꾸는 그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생겨야지,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속으로 믿고 있으면서, 그래도 혹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고 막연한 기대를 갖는다면, 그 희망은 헛된 물거품이 되고 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을 때 거기에 행복이 있고, 믿을 때 거기에 평강이 있습니다. 여러분, 뒤통수 맞아보셨습니까? 배신과 술수가 횡행하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이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평강을 찾기도 어렵고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침내 죽음까지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을 믿기에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주님을 믿기에 우리는 공허하고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두려움도, 실망도 넉넉히 이깁니다. 그래서, 가장 큰 축복은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자마자 그냥 하늘나라 아버지의 보좌 곁으로 올라가지 않으시고 이 땅에 40일을 거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셨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시고 부활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고, 그들의 사명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는 도마도 찾아오셨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 그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았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대어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그렇게 고백한 사람이 도마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만나고 도마는, 다른 사람이 만나본 예수님, 다른 사람이 알려준 부활의 주님이 아니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던 도마는,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락고 하는 그 고백을 가지고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기에 온 생을 바쳤습니다. 인도의 동남쪽 해안에 있는 도시 첸나이에는 도마 순교기념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도마는 주님의 복음을 들고 인도까지 가서 이민족에게 복음을 전했고, 결국 인도에서 순교를 한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도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여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질문하고, 또 대답을 찾으며,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