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
6위 곡주후(曲周侯) 역상 | ← | 7위 노후(魯侯) 해연 | → | 8위 여음후(汝陰侯) 하후영 |
奚涓
고조공신후자연표의 순위가 7위나 될 정도의 인물임에 불구하고,
사기 열전 등에 전혀 기록이 없다. 사기 표(表)에서는 일단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인으로서 패(沛)에서 고조를 좇아 기병하여 함양에 이르러 낭중이 되고, 한에 들어와 장군으로서 제후를 평정하고 사천팔백 호의 후(年)가 되다. 공이 무양후 번쾌에 비견되다. 유방의 대업을 위해 전사하였기에, 그의 어머니가 후(年) 를 대신하다. |
그리고는 이후 봉국에 대한 연표에서 모후(母侯) 자(疵) 원년 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즉, 이 인물의 어머니 - 여자가 제후에 봉해진 것이다. 이후 그 '모후' 가 사망하자 후손이 없어 봉국이 끊어졌다고 한다.
4800호 정도를 받고,
유방의 고향 부근인 패 땅에서 부터 유방을 따른데다,
번쾌에 버금가는 공을 세우고 유방을 대업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인데,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유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공신이라면
기신(紀信)이 있다. 기신을 잘못 표기했나 싶기도 한데, 그런데 양평후
기통(紀通)이라는 인물이 전사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봉해졌는데, 이 인물이 기신이라고 하니 기신도 아니다.
위키를 보는 인물 중에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수정바람(……) 만약 기신하고 전혀 별개의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기록이 없는게 대단히 이상할 정도다.
첫댓글 한자로 검색해서 나온 중국사이트에 나온 내용도 모두 위의 것과 같은걸보니, 잘못된건 아닌데, 그 이상의 기록이 없는 것 같네요.
由於劉疵在史書中無記載?多數學者從同時出土的錢幣?以及3把鐵劍?2件銅弩機推斷?墓主人劉疵是西漢早期的一位列侯。有學者猜測?墓主人可能是奚涓之母“疵”?根據《史記?高祖功臣侯者年錶》和《漢書?高惠高後文功臣表》記載?奚涓為漢高祖劉邦舍人?隨劉邦起兵于沛?入咸陽後?官拜郎中。劉邦封漢王後?奚涓為將軍?漢高帝六年(前201年)?以軍功封魯侯?食邑4800戶?功比舞陽侯(樊噲)。奚涓死後?因無子?封其母疵為侯。疵在位10年?呂后五年(前183年)薨?封除
그럼 정말 미래에서 유방을 돕기 위해서 날아온 천군이라도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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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기성은 사람 이름이 맞습니까?
김원중 역 사기 표에서는 '졸병으로서 기성에서 처음 거병하여 장군으로서 [고조를] 좇아 진을 공격하여 격파하다. 한에 들어와 삼진을 평정하니 공이 평정후에 비견되다. 호치에서 싸우다가 죽다. 아들 기통이 아버지의 공을 계승하여 후가 되다.' 라고 적혀 있어서 기성이 '인물' 이 아니라 '지명' 처럼 나오는데, 김원중의 오역일까요?
근데 기통이 기신의 아들이 아닌가요? 화설중국(중국을 말한다)에서도 기신의 아들이라 쓰여 있던데.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