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원 방학특강8 2015.8.4.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5년 8월 4일(화,오후 3시~6시)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5.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法念處]
5)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1) 사성제에 대한 개요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다섯 번째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알아차림’입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사성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상의 네 가지를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합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사성제는 괴로움(苦)의 원인(集)을 소멸(滅)시키는 방법(道)입니다. 이때의 소멸이 열반이고 소멸에 이르는 길이 팔정도입니다.
사성제(四聖諦)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자들만이 알 수 있는 진리라는 뜻으로 사성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성제를 성스러운 진리 또는 고귀한 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인이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자들이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칠청정과 열여섯 단계의 지혜의 과정을 거쳐서 열반에 이른 수행자를 일컫습니다. 우리가 괴로움이 있다고 알아도 완전한 지혜로 안 것이 아니고 사유로 알아서 괴로움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나서 도과를 성취하면 비로소 괴로움의 진리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성스러운 분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뜻으로 사성제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스러운 분이란 붓다를 말합니다. 붓다는 누구도 모르는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법을 폈습니다. 그러나 사성제는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고 원래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붓다만이 이 진리를 발견하여 인류에게 드러내 보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이 길로 오라고 했습니다. 사성제라는 진리는 깨달음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붓다는 이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여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은 붓다의 정법이 계승되는 시기까지 존속되다가 다시 사라집니다. 그러다 새로운 붓다가 출현하면 같은 법을 다시 찾아내어 성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라는 법은 겁을 통하여 출현하는 가장 고귀한 진리입니다.
셋째, 사성제를 통찰한 수행자가 성스러운 사람이 되기 때문에 사성제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로 사성제를 꿰뚫어보면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성자가 됩니다. 이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통찰한 사람은 성자라는 고귀한 정신세계에 이릅니다.
넷째, 사성제라는 진리가 그것 자체로 가장 성스러운 것이라서 사성제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스럽다는 것은 이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믿을 수 있는 실재하는 진실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오온의 실재를 알아차려서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이 모두 사성제라고 불리는 뜻입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이것이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가장 진실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이거나 불선이거나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원인으로 인해 생긴 결과이기 때문에 하나의 진실입니다. 여기서 실재라는 것은 선과 불선의 문제를 뛰어넘는 본질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좋은 것만 실재고 나쁜 것은 실재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행했을 때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라고 말씀하시고, 이런 말을 전에 들어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다섯 수행자들은 괴로움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는 나에 의해 처음 설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성제는 괴로움뿐인 염세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괴로움이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서 괴로움에서 탈출하는 출구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 순간부터 괴로움은 힘을 잃습니다. 괴롭지 않으려고 해서 괴로운 것이지 원래 괴로운 것이라면 견딜 만한 것입니다. 그래야 괴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를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고 해서 염세만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괴로움은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진실입니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는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고성제(苦聖諦)라고 합니다. 고성제의 특성은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괴로움은 생명이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괴로움은 화를 내게 하고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괴로움을 빨리어로 둑카(dukkha)라고 합니다. 이는 하찮은 것이라는 뜻의 두(du)와 비어 있다는 뜻의 카(kha)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뜻으로 보면 하찮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것을 대단하게 키워서 큰 것으로 생각하고 고통을 겪습니다. 괴로움을 고(苦)라고 하지만 이것이 정확한 뜻은 아니고 불만족입니다.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찮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의 괴로움이란 욕망과 어리석음과 유신견으로 인해 크게 생각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는 하찮은 것입니다.
둘째, 괴로움의 일어남이란 성스러운 진리는 갈애입니다. 이것을 집성제(集聖諦)라고 합니다. 갈애는 욕망입니다. 이 욕망을 집착해서 업을 생성합니다. 이러한 과보로 괴로움이 생기며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합니다. 탐욕은 항상 멈추지 않고 일어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애는 어리석음과 함께 연기를 회전시키는 근본원인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다른 것들과 결합하여 일어납니다. 갈애와 집착과 업의 생성이 서로 결합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일으킵니다. 이것들은 과거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현재까지 상속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새로 업을 생성해서 미래의 태어남을 만듭니다.
셋째,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를 멸성제(滅聖諦)라고 합니다. 멸성제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열반을 뜻하는 말로 평화와 평온함을 뜻합니다. 이때의 평온함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멸성제인 열반은 윤회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이 출구에 이르는 길은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몸과 마음의 느낌이 소멸하면 번뇌가 불타서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로부터 해방됩니다. 열반은 깨달음을 얻은 성자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누구나 이 열반을 통해 업이 소멸합니다. 그래서 열반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결과입니다.
넷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도성제(道聖諦)라고 합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입니다. 여덟 가지 바른 방법으로 계율을 지키고 고요함을 얻어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팔정도를 중도라고 하며,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어느 날 붓다께서는 꼬삼비에 있는 심사빠 숲에 머물면서 수행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붓다께서는 심사빠 나무 잎사귀를 손 위에 조금 올려놓고 수행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심사빠 잎사귀들과 이 심사빠 숲 전체에 있는 저 잎사귀들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많은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에 조금 들고 있는 그 심사빠 잎사귀들은 아주 적습니다. 이 심사빠 숲 전체에 있는 잎사귀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내가 최상의 지혜로 안 것들 가운데 내가 가르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다. 내가 가르친 것은 아주 적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나는 왜 가르치지 않았는가?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이익을 주지 못하고, 그것들은 청정으로 가는 행위의 시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싫어함으로 인도하지도 못하고, 탐욕이 빛이 바래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도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도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나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은 괴로움이라고 가르쳤다. 나는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라고 가르쳤다. 나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가르쳤다. 나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나는 이것을 가르쳤는가? 비구들이여, 이것은 참으로 이익을 주고, 이것은 청정한 행위로 가는 시작이고, 싫어함으로 인도하고, 탐욕의 빛이 바래도록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이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가르쳤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차리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알아차리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알아차리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다’라고 알아차리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
이상의 대화에서 밝혀진 것은 수행자가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확고한 길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념처 수행을 할 때만이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가야할 길은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귀의처로 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념처 수행법을 귀의처로 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또 여기서 괴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었습니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셋째,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첫째, 괴로움에 대한 해결은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괴로움이 있지만 괴로움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괴로움이 있는 사실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괴로움이 알아차릴 대상이 되면 괴로움이 객관화 되어서 하나의 현상에 불과해집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차릴 때 괴로움은 알아차릴 대상으로 법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로 고성제입니다.
둘째, 괴로움을 하나의 실재하는 현상으로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없애려고 싸우지 않아야 하며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것을 도모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괴로움 때문에 좌절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거나 괴로움이 아닌 다른 대상을 찾는 것은 또 다른 괴로움을 가져오는 결과밖에 없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에게나 괴로움이 있으며 이러한 괴로움을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의 지혜로써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팔정도이며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라는 진리로 집성제이며,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로 도성제입니다.
셋째,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무상, 고, 무아의 통찰지혜가 나서 유신견이 사라지고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열반에 이릅니다. 수행자가 무상, 고, 무아의 지혜 상태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고 마지막에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면 지고의 행복인 열반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괴로움이 종식됩니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며 보편타당해서 어떤 논쟁의 여지도 없어야 합니다. 이때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괴로움의 일어남은 집착이라는 사실도 있는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와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사실은 세속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를 얻으면 세속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출세간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다시 괴로움의 소멸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도 있는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에 이르면 괴로움뿐인 윤회가 끝납니다.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출세간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간이 진리가 출세간의 진리로 완성되는 것이 사성제입니다.
이상이 괴로움을 소멸하는 세 가지의 방법입니다. 처음에는 괴로움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다음에는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마지막으로 수행을 해서 생긴 통찰지혜로 열반을 실현하는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역대의 모든 수행자들은 전통적으로 세 가지 방법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 세 가지를 빨리어로 빠리야띠(pariyatti), 빠띠빠띠(paṭipatti), 빠띠웨다(paṭivedha)라고 합니다.
빠리야띠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거나 읽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를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빠띠빠띠는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따라서 실천하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빠띠웨다는 이러한 원인으로 도과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상의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사성제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진리와 괴로움이 소멸하는 두 그룹의 진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진리는 세간의 진리로 고성제와 집성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세속의 진리라서 윤회가 계속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붓다가 새롭게 발견한 진리가 없을 때는 이 세상에는 이 진리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괴로움이 소멸하는 진리는 멸성제와 도성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출세간의 진리라서 윤회가 끝나는 진리입니다. 이 두 가지 진리를 붓다가 찾아내어 비로소 인류가 괴로움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세간의 진리인 멸성제는 열반이고 도성제는 팔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먼저 괴로움이 일어나는 진리인 고성제와 집성제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멸성제와 도성제를 실천하여 끝없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세간에 살면서 출세간을 모르면 고성제와 집성제만 있고 멸성제와 도성제를 알 수 없습니다. 사성제는 세간과 출세간을 아우르는 완성된 진리입니다. 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오직 원하는 사람만 갈 수 있습니다.
(2) 사성제와 팔정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완성된 진리입니다. 사성제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과 괴로움의 일어남,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실천적 방법이 제시된 완벽한 진리입니다.
사성제 중에서 괴로움이 있다는 고성제와 괴로움의 일어남이라는 집성제는 윤회하는 세계의 질서이기 때문에 세속의 진리입니다. 괴로움이 소멸되는 멸성제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도성제는 윤회가 끊어지는 세계의 질서이기 때문에 출세간의 진리입니다. 사성제는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를 모두 포함한 진리라서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큰 뜻으로 본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성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길인 도성제의 팔정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성제는 알아차릴 대상이면서 진리이기 때문에 법(法)에 속합니다. 그리고 팔정도는 사성제를 완성하는 실천적 방법이기 때문에 포괄적 의미에서 율(律)에 속합니다. 사실 사성제는 율의 기능인 팔정도가 있어서 법으로써의 사성제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를 가르침의 큰 뜻에서 보면 법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천적 방법이 이끄는 측면에서 보면 법과 율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성제는 법(法)과 율(律)이 합쳐진 하나의 법(法, Dhamma)입니다.
여기서 사성제를 법과 율로 나누는 것은 팔정도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지만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가 없으면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와 괴로움의 일어남이라는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움의 소멸이 어렵습니다. 특히 팔정도의 지혜에 속하는 정견(正見)은 고집멸도 사성제는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정도는 사성제 안에 있으면서 사성제를 앞에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팔정도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밝히는 계정혜로 구성된 바른 길입니다. 이 길은 감각적 욕망과 극단적 고행이 아닌 중도의 길입니다. 이러한 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인데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래서 도성제, 팔정도, 계정혜, 중도, 위빠사나 수행은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상징적으로 말할 때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도성제가 사성제를 이끄는 것이라면 도성제인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모든 것을 이끄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팔만사천법문을 하나로 줄이면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이때 ‘바른’이라고 사용하는 여덟 가지의 정(正)을 빨리어로 삼마(sammā)라고 합니다. 삼마는 적절하게, 정확하게, 철저하게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중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며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있는 여덟 가지 항목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도의 항목은 다섯 가지입니다. 정견, 정사유,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이것이 계정혜 중에서 혜와 정에 속하는 도지(道支)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의 도지 중에는 정념(正念)이라는 알아차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계율에 속하는 정어, 정업, 정명이 자연스럽게 팔정도 안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정념으로 인해 계가 포함되어서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라고 합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며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법을 섬으로 하고 법을 귀의처로 하며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의 섬이 자신의 몸과 마음이며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이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은 고난의 바다를 건너 피안으로 가는 배입니다. 이 배의 노를 저어가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팔정도라는 배를 타지 않으면 결코 거센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직접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노를 저어가야 고통이 없는 피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면 결코 피안으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법문 잊이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