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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9학번 인하대 졸업생입니다. -영화 ‘건국전쟁’ 을 보고-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용산역 인근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는데 보통 다큐 영화는 역사현장을 취재하는 사람과 편집자의 의도가 들어간 기록물이기 때문에 무덤덤한 느낌으로 보게 되는데 이번에 내가 본 ‘건국전쟁’ 은 다른 역사물 다큐멘터리 와 달리 군데 군데 눈물을 훔치며 보게 되었다. 나만 그런가 하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변 관객들을 보니 그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난 것을 알게 되었고 마지막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부분에서는 많은 관람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 박수를 치며 영화의 주인공에게 그리고 영화를 만든 감독과 제작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다.
왜 이 글의 제목을 ‘나는 79학번 인하대 졸업생입니다.’ 로 정했을까?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9년과 그 이듬해 1980년에는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휴강하고 학생들이 데모에 참가하거나 아예 휴교 조치로 학교에 가지 않았던 적이 많은 시절이었다. 79년 대학 입학했던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장에게 시해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10.26 사건 이후 전국의 많은 대학들은 극심한 소요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총학생회 간부들이 데모를 이끌었던 시기였고 정상 수업을 하기 보다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데모를 하다가 학교 밖으로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행진하려고 하면 전경들은 교문 밖에서 최루탄을 쏘고 데모를 진압하는 일이 반복되었던 시절이었다. 80년 봄학기에는 시위하던 학생들이 내가 다니던 인하대학교 설립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밧줄로 넘어뜨리고 학교 연못에 빠트렸던 장면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인하대학교는 설립당시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을 가지고 만들어졌는데 그 성금을 모금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 주신 분이 일제시대 하와이에서 생활하셨던 이승만 박사이셨고 그래서 학교 이름이 인천의 인 자와 하와이의 하 자로 교명을 인하대학교로 정한 학교이다. 그래도 학교를 세워주신 설립자인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그 시절에는 학교 관계자나 교수님 중 누구 하나 학생들의 행동을 나무라거나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공대 야간대학생이라 낮에는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 까지 공장에서 생산직 사원으로 기계를 가공하는 일을 했고 밤에 공부하러 학교에 갔는데 학생들 시위로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최루탄 연기를 마시고 강의실에 들어가면 칠판에 휴강 이라고 써 있어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온 적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소의 생각은 자유당 말기 사사오입개헌으로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정권욕심이 많은 대통령이고 3.15 부정선거로 학생들 시위가 확대 되면서 많은 학생들의 희생을 야기시킨 4.19 의거가 발생하였고 결국 본인 스스로 하야를 선언하고 하와이로 망명간 대통령인 데다가 6.25 전쟁 중에는 한강다리를 폭파케 하면서 자기는 대전으로 도망간 참 나쁜 대통령이다.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학교에서 사회 선생님들에게 배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인식의 전부였다.
그리고 나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갖기 보다는 현실에 부닥치는 여러가지 일과 경제활동을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왔다.
이번에 ‘건국전쟁’ 영화를 보면서 내가 눈물을 흘렸던 첫번째 이유는 그동안 내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에 흘린 눈물이었고 두번째 이유는 8.15 광복으로 일제가 물러나고 대한민국을 세울 당시에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백성들이 많은 시기였는데 백성들을 잘 설득해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나라를 세워 주신 것과 6.25 전쟁으로 나라가 자칫 공산화될 수 있었던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미국에 긴급 도움을 요청해 나라를 구한 것에 대한 감사함의 눈물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이 한 사람의 의식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 실은 3년 전부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서적과 인터넷 그리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공부할 수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이야기와 내가 공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1. 이승만은 독재자인가 ? 4.19 부상자들을 위문하는 자리에 ‘불의를 보고 참지 않고 나서는 젊은이들이 있는 이 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라면서 4.19 의거 일주일 만에 스스로 하야를 선언하고 대통령 직을 물러났다. 독재자였다면 하야를 선택하기 보다더 강경하게 반대파 숙청작업을 했던 다른 독재국가 독재자들과 비교하면 된다.
2. 이승만은 6.25 때 서울을 팽개치고 도망간 비겁자인가 ? 북한이 서울을 침투하면 2시간 이내 한강철교를 폭파하는 군 작전 지침이 매뉴얼로 있었고 전쟁 중 군통수권자가 적에게 잡혀 항복을 하거나 전사를 하면 거기서 전쟁은 끝나게 된다. 후방으로 이동해 군통수권을 행사하면서 우방국 참전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해야 나중에 다시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다. 대통령이 서울에 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방송은 사실이 아니고 미국 참전이 결정되었다는 정보를 얻고 지금은 북한의 남침으로 위급한 상황이지만 우방국 도움으로 전쟁을 다시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한 격려의 메시지였다. 오히려 북한 김일성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북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을 탈출해 만주까지 도망갔었다.
3. 이승만의 장기 집권은 본인의 정권욕인가 ? 정권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사를 다시 돌릴 수는 없겠지만 만일 이승만이 아닌 다른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 6.25 동란을 맞았다고 생각할 때 당시 어느 누구가 미국 대통령과 집적 전화하고 태평양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통역 없이 바로 긴급전화로 미군 참전을 이끌어 낼만한 지도자가 있었을까 ? 하는 생각을 해 본다.
4. 3.15 부정선거에 이승만은 어떤 책임을 지어야 하나? 당시 대통령 선거에 나왔던 야당 조병옥 박사의 선거기간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은 경쟁자 없는 선거로 이미 확정되었던 선거였고 부통령 자리에 오르려 한 이기붕이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부정선거가 된 것인데 대통령은 부정선거가 저질러 지고 있는 현장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최고 책임자였기 때문에 4.19 가 터지자 바로 책임지고 하야했던 것이다.
5. 이승만은 스위스 비밀은행에 막대한 자금이 있었나 ? 당시 많은 언론에서 이승만 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막대한 자금을 축적했다는 보도를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시절 생활비가 없어 교민들이 걷어 주는 돈으로 궁핍하게 생활했고 말년 요양병원에 낼 돈이 없어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딱한 사정을 알고 무료로 진료를 해 주었다.
6. 이승만은 친일파인가 ? 초대 내각을 구성할 때 일부 각료와 정부 고위 인사 중 친일행적이 있던 인물을 기용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훨씬 많은 친일 인사를 내각에 등용시켰고 6.25 당시 중공군이 처들어와 전세가 불리해 지자 미국이 일본군을 중공군을 막아내는 역할로 참전시키려고 할 때 일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우리가 먼저 일본군을 쏘고 그 다음 중공군과 싸우겠다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7.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인가 ? 미군정의 도움을 받고 나라를 건국한 것은 사실이지만 휴전에 끝까지 반대하며 반공포로 석방으로 자유지영을 놀라게 해서 한때 미국 정가에서는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계획도 있었고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민국은 군사적 안정과 경제번영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8.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했던 이승만에게 분단의 책임이 있나? 이미 북한은 이승만이 남한에 들어오기도 전 소련의 등을 업은 김일성에 의해 공산주의로 물들었고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38선 이북으로 통행금지를 시켜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지 않다.
이승만이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 초대 대통령의 경우 3선을 해도 된다는 국민들의 요청이 있었지만 본인은 2선만 하고 물러났던 미국 건국 대통령 조지워싱턴과 같이 2선 까지만 대통령을 하고 물러났다면 후대에 길이 존경받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로 자칫 공산화 될 뻔했던 남한을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지켜 주신 분인 것은 분명하다. 말년에 올바르고 정직한 각료와 참모들을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작년 테슬러 대표 일론머스크가 자유민주체제와 공산 사회주의 선택의 70년의 결과 환한 불빛으로 밝힌 남한과 컴컴한 북한지역 야간 위성사진을 보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이 중요한가에 대해 시사점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일본의 항복으로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남한은 미군 주도하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고 북한은 소련의 주도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하였다. 75년이 흐른 지금 남한과 북한은 경제규모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30배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어느 체제를 선택해서 나라가 만들어지고 운용되어져야 하는지는 이미 판명되었다.
서구 나라들의 경우 건국에 공을 세운 초대 대통령은 사후에도 기념관을 건립하여 역사와 리더십을 배우고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공과 중 공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과에 해당되는 부분이 더 많이 교과서에 실려 있고 어린 학생들이 그대로 교육을 받고 있다.
이 글의 말미에 이런 말을 적고 싶다. 누군가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나부터 누군가를 존경해야 한다. 내가 선배나 스승을 또 부모나 어른을 존경하지 않으면 나 또한 후배들과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누구의 말이 역사 앞에서 진실한 것인가를 다시 알아보고 그동안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없었는지 혹시 남들에게 잘못 가르쳤던 부분은 없었는지 이제라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작고하신 아버님이 살아계셨을 때 몇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아버님은 북한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와 공산사회를 경험하고 인민군에 입대할 나이 6.25 사변이 일어나자 토굴속에서 숨어 지내다가 어렵게 남한으로 내려오신 실향민이시다. 남한에서 한 때 잘 살았던 때도 있었지만 하던 사업의 실패로 자포자기하며 술로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집안 경제가 무너지고 사 남매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사 남매가 초등학교 중퇴, 초등학교만 졸, 중 고등학교를 공장에서 일하며 검정고시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우리 남매들이 겪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있었는데 나도 커서 자녀를 키우며 그때 어린 나이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얼마가 괴롭고 힘들었을까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 아버님에게 그때 아버님을 원망했던 적이 있었음을 고백하며 아버지께 용서를 빌고 저를 이 땅에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이미 아버지 역할을 잘 하신 것입니다. 그때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그러한 경험도 살아가는데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표현해 드린 적이 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아버님이 그 때 너희들 많이 힘들게 했는데 그 때는 내가 잘못했다 라고 하시며 눈물로 자녀들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바람에 아버지와의 자녀들의 관계가 훨씬 편해지고 그 이후 아버지를 더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사는 사람이 잘 되거나 본인의 자녀에게 존경받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선배세대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그런 의식에서 이제부터는 선배와 어른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앞으로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는다. 이제라도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관이 세워지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이 세워져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바른 역사관을 길러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인하대학교 79학번 최용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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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을 보고나서 (강수석)
최근 개봉된 건국전쟁에 대한 소견이 계속되는 가운데 필자가 첨가하는 사유는 대개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 및 역사적 사실에 벗어나 오해와 왜곡이 갖는 의미이다. 4.19 이후 이승만대통령과 자유당 정부는 철저히 거부된 대상이다. 심지어 친일내각에서 6.25를 막지 못하고 서울점령에 도피한 비겁자에 이르기까지 가히 건국자가 아니라 저급한 인물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각종 자료는 건국대통령은 천재적 외교적 수완으로 한반도에 단독정부를 수립하였고 정부수립이후엔 토지개혁과 미국과의 안보체제를 추구한 지도자였고, 전쟁에서는 노구에도 전선을 누벼 한국의 클레망소에 비견되었다. 전쟁초기 절체절명의 순간 해외망명을 권고하는 미국대사에게 권총으로 자결을 선언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지도자(대통령) 이전에 이미 국제사회의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한학과 영어에 통달하고 불과 5년만에 세계최고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었다. 이미 그가 조국을 떠나기전 20세기초 쓴 독립정신은 옥중수고에 비견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대한 위대한 각성이었고, 중일전쟁 당시 저술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는 태평양전쟁을 예견한 예언서였다. 가히 한반도인을 넘어선 20세기 지도자의 지성을 보여주었었다.
문제는 독일이나 일본같은 지성이 결여된 한국은 이승만연구나 건국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없었다. 심지어 탈냉전후 러시아가 제공한 해방정국 당시의 러시아측 자료에 대해 번역조차 수년을 허비하기에 이른다. 오직하면 러시아인으로 해방당시 김일성(북한)연구로 유명해진 안드레아 란코프는 김일성정권은 국가마저 소련이 만들어주고, 소련군 대위였던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변신하는데 소련장군 스티코프의 결정이었다고 반증했다. 김일성은 결코 이대통령같은 항일전선의 주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 한국역사에서 이승만대통령 죽이기는 역대정부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군사정부의 조국근대화는 이승만대통령의 업적 즉, 한미동맹과 교육(유학생)제도 위에 가능했다. 1961년 군사정부는 남북격차를 인식하고 산업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위해 화폐개혁, 산업화전략 등 여러조치가 실패하자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전 참전으로 대반전의 기회를 잡게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박정희대통령은 이병철(1910), 정주영(1914), 최형섭(1919), 신격호(1921), 박태준(1927) 등 위대한 세대의 동참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와 두번에 걸친 전쟁(태평양전쟁, 6.25)을 겪은 오천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였다. 이들에게 인생은 곧 고해였고 전쟁이었다. 유럽제국경제사를 쓴 위대한 경제학자 거센크론이 결론지은 "미미한 도전에는 미약한 응전, 거대한 도전에는 위대한 응전"의 세기적 사례였던 것이다.
반면 구한말 태어나 홀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이승만대통령은 외로운 늑대였던 것이다. 유학중 이미 나라는 식민지가 되자 장래가 보장된 대학교수가 아니라 교민사회에서 항일운동을 선택하여 교육자, 종교인, 지도자의 역할을 자임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낳은 최고의 지성이자 대통령이된 윌슨 교수에게 배운 지성은 불후의 명저 [일본내막기]를 쓰게 한다.
태평양전쟁을 예견한 저술로 선각자가된 이승만에게 전쟁후 예견된 독립을 위한 준비는 나라없는 지도자로서 그야말로 최고의 자질을 보여준다. 그의 지성을 알아본 미국의 언론인들은 루스벨트정부의 비밀까지 제공하며 한반도정책을 압박하여 차선, 즉 한반도의 미군상륙과 주둔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미군정하에 조국독립을 위한 외교성과는 유엔승인하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셋째, 이승만대통령의 비전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머무르지 않았다. 빈곤과 문맹, 신분과 남여차별에 전쟁을 선언한다. 전쟁중 한국은 국민교육을 병행하고 [세계철학사전]과 [세계문학전집]을 발행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다. 외교력을 동원한 미국원조의 확보와 군인들과 유학생 제도의 도입은 조국근대화의 토대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는 원자력 분야 장학생을 파견하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1970년대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토대가 된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과학과 산업화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게된다. 6.25 중 북진에서 북한의 산업시설을 둘러보는 인사를 미군과 함께 파견하기도 하였고, 용돈을 유학생들에게 주기도 했다. 전쟁복구 당시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여 군사정부에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대통령과 전두환대통령은 단 한가지 단점, 즉 옥타비아가 자신의 이름을 암살당한 시저(Julius Caesar/카이사르)로 부르게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북한이 하야후 30년 넘게 저주한 이승만의 의미를 몰라, 이순신과 독립기념관만 지켰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와 교양이 결여된 한국 지성의 실체를 보여준다. 만약 독서, 세계사와 교양이 전제되었다면 이순신장군과 함께 이승만동상을 세우고, 독립기념관 대신 건국기념관을 건립했을 것이다.
이순신장군을 민족영웅으로 만든 지도잔 박정희대통령이었다. 조선왕조에 의해 철저히 소외된 민족영웅을 찾았으나 과거(조선왕조)의 인물이었다. 반면 이승만대통령은 책임이 무관한 4.19로 폄하된 건국과 미래를 상징하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특히, 5공정부가 주도한 독립기념관은 역사적으로 외세에 의해 독립되었기에 반역사적 상징이다. 결국 현재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된 전두환대통령의 경우는 결국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조작과 선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영화를 시청하면서 후반부 부터 흐르는 눈물을 멈출수 없었다. 10년전 감히(?) 한국의 현대사를 정상화시키겠다는 비전으로 영화 각본가로서 감회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지도자를 근거없이 공공연히 폄하하는 한국과 한국인은 과연 문화민족이라 할수 있는가?
오히려 경제적 풍요에 대비되는 저열한 교양으로 배은망덕한 개ㆍ돼지 동물농장인가? 분명한 사실은 개ㆍ돼지의 나라를 지성인의 나라로 바꾸는 첫 걸음은 [건국전쟁] 같은 지성물의 공유에 있다는 사실이다.
2024. 2. 8
하봉규명예교수(부경대학교, 유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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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김자점의 손자, 김자점은 능지처참의 효시•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고, 왕을 제치고 독재를 했다.
효종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자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해 능지처참을 당했다.
김자점이 능지처참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의 손자 김구 역시 김일성이 가장 아끼던 간첩 성시백에 포섭돼 북으로 밀행하여 1948년 4월 22일 김일성 정부 수립 행사에서 남쪽은
거지이고, 북쪽은 풍요로운 곳이라며 김일성을 위한 찬조 연설을 했고, 이후 이승만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건국 후에도 건국을 부정하다가 안두희 총을 맞았다.
김창수, 김구의 본명이다. 김창수 역시 ‘국가를 배신하고, 적장에 충성했던 김자점’처럼
똑같이 반역했다. 김자점은 능지처참 당했지만 김구는 애국 청년 장교 안두희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백범일지는 왜곡된 설화
많은 사람들이 백범일지를 읽고 속는다.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 작이다.
이광수의 글재주는 생쥐를 ‘백두산 호랑이’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백범일지의 대표적 거짓말은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에 대한 것이다. 백범일지에는 ‘쓰치다 조스케’ 일본군 중위가 국모 민비를 살해했기 때문에 김구가 애국심이 동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이는 완전 거짓말이다. ‘쓰치다 조스케’는 일본인 젊은 행상이었다. 이 상인이 황해도
치악포라는 포구에 짐과 돈을 실은 배를 정박시켜 놓고 주막 집에서 자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김구가 끌어내 돌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배에 있는 돈을 갈취한 것이다. 이로 인해 김창수는
해주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인천 감리서로 이송되었고 간신히 사형 선고를 면한 다음 수감돼 있다가 1898년 3월 19일 탈옥했다.
백범일지는 임금님이 인천에 전화를 걸어 그를 사면시켰다고 기재돼 있지만 이 모두 거짓말이다.
이에 대한 증명을 필자가 2019년 발행한 <조선과 일본> 제62~64쪽에 전개돼 있다.
김창수(김구)는 왜 황해도로 갔나?
3족을 멸망당한 김자점 가문, 그 손자 김창수(김구)는 어떻게 한양에서 황해도로 갔는가.
강보에 쌓인 김창수를 누군가가 황해도로 안고 갔기 때문이다. 김구는 곰보여서 동네 아이들의
놀림을 많이 받았고 놀림당하면 심지어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나가 아이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놀림을 많이 받았으니 열등의식도 자랐을 수 있을 것이고 기질이 공격적, 폭력적으로 가꾸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이승만에 사사건건 발을 건 과정을 보면 그의 이런 기질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승만에 대한 극도의 질투심으로 김일성을 도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사파가 위조한 영웅 김구, 우파가 왜 빠나?
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제3의 기재에 의하면 이승만은 소련으로 날아가는 조선이라는 풍선을
기적적으로 중간에서 가로챘다. 미국 행정부 핵심에 침투한 소련 간첩 히스에 놀아난 루스벨트의
결심을 드라마틱하게 돌려놓은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반면 이승만을 짓밟는 5.18과 민주당 패거리들은 이런 ‘이승만을 쓰러뜨려서 위에서 깔고 앉기를
일삼는 김구’를 사실상의 건국 대통령으로 선전해왔다. 이번 8.15 행사 플랫폼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였다. 대통령이 김구와 이종찬을 8.15 행사에 주역으로 선정한 것은 솔직히 창피한 선택이었다.
김구의 주특기는 살인
김구의 주특기는 주먹과 폭력과 살인과 살인교사다. 폭력으로 빼앗긴 조선이 찾아진다면 애초에
빼앗기질 않았어야 했다. 이러한 살인마를 대한민국의 영웅이라 하고 김일성에 놀아나 김일성의
건국(?)을 도운 반역자를 건국자라고 칭송하면? 일본에서 어린애들을 안고 남편이 돈 벌어갖고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던 ‘쓰치다 조스케’ 부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창피하기 이를 데 없다.
필자의 눈에는 김창수는 장래가 구만리 같은 의협심 있는 두 젊은이들(윤봉길, 이봉창)에게 살인을
교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미국의 정계를 움직이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겨우 김구가 한
일은 일본인 행상을 돌로 때려 살해하여 돈을 훔치고 살인 교사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김구를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영웅으로 선정했다. 이 부분에 대해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구의 아들을 중용하면서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념전쟁! 하려면 철저히 성역 없이 해야 할 것이다.
* 2023.08.30 지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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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이 '이승만 죽이기'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된 이유였다.
그렇게 해마다 6.25 한국전쟁 때가 되면 방송에선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친 런승만'이란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27일 서울중앙방송으로 발표된 이승만의 담화문 어디에도 시민들에게 서울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전사 어디에도 800명이나 되는 양민들이 한강 다리 폭파로 사망했다는 자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근거도 없는 거짓말들이다.
(실제로는 다리밑에 부표를 설치해서 시민들은 부표위로 한강을 건너게된 역사자료들이 영화속에 상세히 나온다.)
'미제의 앞잡이, 친일파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라는 논리 역시 단골로 등장하는 이승만 비판이다.
그것은 이승만을 죽이고 김구를 띄워야 했던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이었던 이인영은 '우리의 국부는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다'라면서 국회에 나와 증언했다.
평생 '이승만 죽이기'에 앞장선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의 거짓말에 있다.
대표적인 친북 주사파 운동권이었던 그는 '주사파는 없다'라고 증언했다. 정말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
이인영 같은 친북 주사파가 한 나라의 통일부 장관을 하고, '주사파는 없다'면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나라, 그것이 불과 3,4년 전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영화 '건국전쟁'의 제작 과정은 그런 근거 없는 거짓말과의 싸움이었다.
그걸 밝혀내지 못하면 대중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독재자', '살인마' 이승만이란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오로지 사실만이 진실로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걸 위해서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여러 나라들을 돌며 이승만 행적 찾기에 주목했다.
다행히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와 기록필름들이 발굴되었다.
괴벨스 말에 비유하자면, 친북 좌파 세력들의 '이승만 죽이기'를 반박할 수 있는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확보된 셈이다.
그런 수고스러운 작업이 없이는 거짓과 선전 선동과 맞설 수 없다는 각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10여 가지 넘는 이승만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객관적 증거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전문가들의 증언도 인터뷰를 통해 얻어낼 수 있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것 없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수는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가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한 '386세대'의 통렬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하고 싶다.
솔직히 대학을 다니던 시절,
내가 대학에서 배운 이승만은 부정과 모순의 종합선물 세트와 같았다.
그걸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살아왔던 삶에 대한 부끄러움도 한몫을 했다.
더 이상 거짓 이데올로기로 한평생 대한민국만을 생각했던 '이승만'이란 한 노인을 죽이는 일은 멈춰야 한다.
그것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진정한 바람이기도 하다.
영화의 극장 개봉을 준비하면서 다섯 차례나 비공개 기술 시사회를 했다.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검증을 받기 위함이었다.
몇일전 한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어느 중학생이 마이크를 잡더니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제가 이승만에 대해서 안 좋게 보고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학교에서도 교육을 그렇게 하고... 이승만에 대해서 ‘개만도 못한 ×××이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까요.
이승만이란 대통령이란 분께서 초대 대통령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여러 일을 하시고, 여기 있는 분들이 일상을 사는 것도 다 이승만이란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돼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서 무척 기뻤다.
어린 학생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영화를 통해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생각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제 70여 년 넘게 지속되어 왔던 '이승만 죽이기', '이승만 지우기'의 역사가 끝날 수도 있다는 희망의 단서였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행복과 번영의 출발은 어디였을까?
물론 우리 모두가 열심히 노력했고 땀 흘려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만으로 한 국가가 가난의 끝에서 선진국까지 도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가 대한민국의 기적에 놀라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세상에 열심히 땀 흘리고 노력하는 사람이
어디 대한민국 사람들 뿐이겠는가?.
과연 도대체 우리의 번영을 가능케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우리를 이 젖과 꿀이 흐르는 행복의 나라로 인도 했을까?
그리고 이제 그 질문에 앞에서 우리가 겸허하게 바라봐야 할 한 사람이 있다.
시사회에 참석했던 어린 학생은 친절하게도 어른들을 대신해서 이렇게 말을 맺는다.
"앞으로도 이승만이란 대통령이 주신 저의 일상생활을 가치있게 보내겠습니다."
그 소년의 그말을 들으며 감사했고, 기뻤다.
누군가 내 영화를 보고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 그것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영화 '건국전쟁'을 만든 나의 마음 역시 그 학생과 같다.
나는 그걸 'The Birth of Korea',
'대한민국의 탄생'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한민국은 '태어 나지 말아야 했던 나라'가 아니라, 내겐 너무 감사하고 소중한 나라다.
그 중심에 한 노인이 있다.
김덕영
영화 '건국전쟁'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