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은 10월 10일 독자출마를 선언하고 김대중도 신당창당 작업에 돌입했다.
전두환 세력의 5ㆍ17폭거에 대항하여 워싱턴과 서울에서 손잡고 민추협을 결성하고, 2ㆍ12총선 열풍과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두 사람은 대권이 눈 앞에 보이자 다시 등을 돌렸다.
국민의 분노와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도생의 길에 나섰다.
이로써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정확하게는 김대중이 2009년 8월 서거할 때까지 감정의 벽을 허물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87년에 실시된 제13대 대선에서 노태우에게 대권을 헌납하고, 14대 김영삼, 15대 김대중의 순으로 나란히 대권을 장악했지만, 그동안 서로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김영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대중을 거친 언사로 비난했다. 김대중이 병상에 눕자 김영삼은 연세대학 세브란스병원을 찾고 국회에서 거행된 국장에 참석했으며 국장기간에 상도동 자택에 조기를 달았다. ‘병상화해’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양김은 60년대 후반부터 라이벌 관계로 성장했다.
척박한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그것도 층층시하의 보수야당에서 40대의 두 젊은 정치인이 정도를 크게 일탈하지 않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었다. 이것은 군사독재가 남긴 역설의 산물이기도 했다.
양김은 군사독재의 탄압과 보수야당 지도자들의 견제를 받아가면서 자수성가한 투지와 집념과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성씨ㆍ연령ㆍ지역에 있어서 공통적이거나 상치적인 관계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팽팽한 라이벌 관계가 지속될 때도 있었지만, 우호적인 협력자의 관계를 유지할 때도 적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가능했을 때는 라이벌이었지만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협력했다. 세상에서는 흥미 위주로, 언론에서는 기삿거리로 라이벌 관계에 초점을 맞췄지만 협력자일 때도 많았다.
노부부 중 한쪽이 사망하면 멀쩡했던 절반도 곧 시들해진다고 한다. 식물은 동류의 서식지보다 이종의 서식지에서 훨씬 더 활발한 성장률을 보이며 병충해에도 강하다. 끊임없는 견제와 왕성한 생명의 자기보존 본능 때문이다. 양김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였다.
해방 뒤 한국의 정치사에서는 여운형과 송진우, 이승만과 김구, 윤보선과 장면, 김대중과 김영삼,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가 ‘적과 동지’혹은 라이벌 관계를 이루었던 면면이다. 대부분이 대립과 불화로 마무리되었다. 그나마 양김은 두 사람이 다 집권에 성공하고, 그리고 질량의 차이는 있지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대선에 대비한 김대중의 사조직은 회원 1만여 명을 확보하고 있는 민주헌정연구회(민헌련)과 현역의원 32명을 포함하여 40여 명이 이사진으로 구성된 민권회, 그리고 청년조직인 민주청년연합(연청)이 있었다.
민헌련은 1970년대부터 김대중을 적극 지지해온 사조직으로서 김종완을 이사장으로 하여 박영록ㆍ송좌빈ㆍ최영근ㆍ박민기 등 구신민당 인사와 양순직ㆍ박종태 등 구공화당 인사, 김광일ㆍ이기홍 변호사 등 50명이 지도위원, 그리고 300명의 이사진이 포진하고 있었다.
민헌련은 매년 한두 차례씩 수련대회를 갖고, 이 해 8월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800여 명의 회원이 모여 단합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민추협이나 2ㆍ12총선에도 불참하고 제도권 밖에서 오로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열정을 바쳐왔다.
원내에 기반을 둔 민권회는 회장 이중재 부총재, 부회장 박종률 의원, 이사장 이용희 의원이고, 양순직ㆍ노승환 부총재가 고문을 맡아왔다. 사무처장은 이석용 전의원, 기획실장 한화갑, 홍보실장겸 대변인에 한광옥이었다. 이사진은 현역의원으로 노승환ㆍ송원영ㆍ조순형ㆍ김영배 등 32명이고, 전직 의원 10여 명도 이사진으로 참여했다.
청년조직으로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중심이 되어 이끈 연청은 수 만명의 회원을 갖고 JC회장 출신의 문희상, 제약회사 홍보담당 송영호 등이 참여하여 크게 활성화되었다.
이밖에 1983년 미국 망명시기에 워싱턴에 설치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서는 <우리의 소식>을 펴내면서 미의회 등에 홍보물을 영역하여 배포하는 역할을 했다. 김대중이 독자 신당을 만들고 대선에 출마하는 데는 이런 조직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