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귀환(歸還)
비가 온다는 날에 여동생들과 약속을 잡았다. 장마철이니 비를 각오하고, 어린이대공원 앞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한 후 우산쓰고 공원을 산책을 하기로 하였다.
우산 셋이 나란히, 그런데 나머지 우산들은 어디로 갔을까? 미국으로, 서울로, 그리고 성급하게 부모님따라...
형제들은 어린시절 가난한 보릿고개를 거쳐왔다. 시골의 한여름 평상, 그곳 밥상머리엔 오손도손 보리밥에 된장국을 반찬하여 얼굴 마주보며 밥을 먹었었다.
큰 여동생은 부산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는동안 똑소리나는 서울댁 큰형수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살림하고 조카들 키우는 수련도 받았다.
독립정신이 생기자 회사를 들어갔고, 적령기가 되자 회사동료 남자친구를 사귀어 결혼을 하겠다고 나섰다.
가족들의 강력한 반대, 예식장 손잡고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그걸 무릅쓰고 감행했던 눈물의 결혼식, 굳이 뭐하려 그렇게 힘든 사랑을 선택하였을까?
평범한 결혼생활, 두남매를 두었고, 아이들이 성장하자 몸 아프기전까지 한때는 직장을 다녔었다.
남편이란 반려자, 평생 연구에 몰두한 사람인가? 한때는 첨단소재를 합성(?)했다며 나이키와 협약을 하였고, 과일 생산의 획기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며 들떠 있었다.
금새 돈벼락을 맞고, 빌딩을 세울듯...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걸 싫은 말 한마디 안하고,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 세상의 부정적인 시선을 홀로 몸과 마음으로 막아 내었으니, (형제이기에) 병이 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을 것 같다는 야속한 생각까지 들었다.
5년전 서울의 조카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엄마가 식도암인데, 수술이 어려운 부위에다 악성이라고...
수술을 앞두고 서울로 가는 버스안에서 내내 기도했다. 제발 남들이 말하는 가벼운 종류의 것, 잠시 의사의 오진(誤診)이 섞이기를 바랬다.
매사에 열정적인 조카가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서 담당교수를 소개받았고, 어렵다는 수술을 마쳤다.
조바심속의 세월이 흘러갔다. 성질 고약한 나는 '인간시장'의 장총찬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믿음을 가진 여동생에게 하늘이 주시는 시련은 너무 가혹하다'고 항변 (抗卞)했다.
억울(抑鬱:애매한 일을 당해서 원통하고 답답한)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5년 가까이 살얼음판 예후(豫後)를 기다리는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업친데 덮친격, 그것이 폐로 전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검사와 치료가 이어지고, 한달에 800만원이 넘게 치료약값이 들어간댔다. 어떻게 해야할까?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조카는 전화를 할때마다 울먹였다. 형제 함께 제주도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했고, 기도해 달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긴장의 세월이 흘러 가던 중, 10여일 전쯤 서울로 검사를 받으려간 여동생으로부터 낭보(朗報)가 날아들었다. 기적같이 암세포가 사라져 버렸다는 문자가 날아든 것이다.
"오늘 병원 갔었네요. 암이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모두들 기도해주시고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낙심될때도 있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또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감사합니다.사랑합니다."
순간 눈물이 났다. 믿음 희박한 나의 평소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불쌍한 동생들보다 제가 먼저 가게 해주세요" 정도의 단순 내용이었다.
호들갑을 떠는 것도 소위 부정탄다고 여겨질까? 조심스레 답글을 보냈다.
"그래.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다. 네가 마음 고생한 것도 있지만, 계속해서 지켜봐라. 부산오면 한번 만나자."
그렇게 우리는 오늘 만남을 가진 것이다. 어린이공원입구에서 셋이 만나 점심을 먹었다. 마음 편하니 넘기는 막걸리 한잔은 세상 최고의 음료였다.
주적대는 비는 우리에게 아무런 방해를 주지 못했다. 잔잔한 수면에 굵은 빗방울이 그려내는 수많은 동심원, 비단잉어 봐달란듯 유영하는 수원지를 돌아서 작은 폭포되어 물길터진 녹음 짙은 백양산자락 편백나무 숲으로 올라갔다.
걷다가 멈칫거리며 좀더 궁금한 것을 언제 물을까? 조바심을 해대며, 악몽을 떠올리는 부담을 가지지 않게 텀(Term)을 두고 말문을 열어댔다.
철저히 검사를 한게 맞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말했다. 나의 그들 세상을 잘아니 의료진도 불확실성을 남기지는 않으리란 생각을 하였다.
일단 안심이다. 그래도 검사도 수시로 받아보고, 최대한 마음에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해주었다.
동생의 귀환,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축복인가? 아니면 당연한 귀결(歸結)인가?
이따끔씩 폭우가 내려 인간에게 재앙을 주지만, 오늘 내리는 지금의 비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100세 인생도 좋다만 보편타당하게 순서를 지켜야지...언제 가든 그런 마음먹은 내가 먼저 가는게 맞다.
이 우중에도 산을 다녀오는 열혈 산꾼들이 많다. 고수 산꾼(?) 두 여동생과 바지가랑이가 다 젖도록 우산을 쓰고, 숲속을 거닐다 산을 내려와 다음을 기약하며 집을 향하여 헤어졌다.
두 동생들에게 감사하고 건강을 빌며, 덕택에 진정으로 행복한 하루를 마감했다.
*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은...
언젠가 직장 후배가 회고록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회고록? 유명인사들이 그랬다는...그 후배는 사선(死線)을 뛰어넘다 지금은 열심히 살고 있으니 애기꺼리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도 무언의 기도를 한다. "세상의 모든 전쟁과 기아가 사라지고, 창조의 소망대로 살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