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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10월3일 영산포 황포돗단배 승선기
<출발하기 전>
안녕하십니까? 영산강 굽이굽이 350리를 찾아와 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천년 전 왕건이 배를 타고 오르내렸던 역사 속의 강, 영산강으로 여러분을 모시게 된 영산강 왕건호 선장 ooo입니다.
2004년 영산강에서는 놀랍게도 천년 전의 뱃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배는 빠르면 통일신라시대, 늦어도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으며 길이가 40m가 넘는 초대형 전통 한국의 배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타고 계신 이 배는 그 뱃조각들을 토대로 50%로 축소 제작한 것으로, 천년 전 왕건이 타고 온 배를 상징하기 위해 영산강 왕건호라 명명하였습니다. 이 배는 전체 길이 29.9m, 100톤급으로 현재 국내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목선으로 2011년 제작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뱃 조각이 발견된 후 영산강은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수 만 년 전부터 역사와 문화를 실어 나르던 영산강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그 영산강을 무대로 호남의 주인공으로 살아온 나주는 이제 다시 영산강의 주역으로 우뚝 서고 있습니다. 자, 이제 천년 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출발>
<영산포 선창 설명>
여러분이 배를 타신 영산포 선착장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일제가 목포를 개항하고 내륙의 물자를 수탈하여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전략적으로 개발한 항구, 그 이름도 유명한 영산포입니다. 눈물나게 톡 쏘는 알싸한 홍어를 잘 삭히기로 유명한 영산포,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영산포는 목포, 군산과 더불어 일제가 개발한 호남의 3대 포구입니다. 선창에는 많은 창고와 객주들이 즐비하고 목포 앞바다 많은 섬에서 막 도착한 고깃배, 젓갈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끌벅적하던 포구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포구에 있는 등대는 일본인들이 영산포에 정착한 후 영산강 범람을 두려워하여 물의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 1915년에 만들었던 수위 측정소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정착했던 땅은 조선인들의 거주지를 피해서 주로 영산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영산강의 물높이를 측정하는 일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없어도 자동으로 수위를 측정하도록 최신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고, 당시에는 보기 힘들게 최신 공법을 사용하여 만든 시멘트 구조물이었습니다. 지금은 영산강의 상징이 되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최근 영산강 정비사업이 진행되면서 많은 일제강점기 건물들이 사라졌지만, 다시 배가 운항하면서 포구로 명성을 되찾고 있으며 홍어 거리로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영산포에는 일제강점기 식산은행 건물, 대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가 살던 저택과 사무실 등이 남아 있어 근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찾아오고 있습니다.
지금 나주시에서는 영산포구와 선창 일대를 전라도 맛을 느낄 수 있는 식도락 거리로 조성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시면 홍어만을 이용한 20가지가 넘는 요리를 맛보는 즐거움과 하께 일제강점기 역사공부까지 할 수 있어 가족나들이로 좋은 여행지가 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영산포 포구 주변에는 일본인들과 함께 많은 중국 화교들이 살면서 요리점, 학교, 회사 등을 운영했고, 일제가 조선인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는데 문서를 보관하던 문서고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또 그 옆으로는 1970년대까지 초분골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러분 왼쪽을 보시면 언덕 위에 멋진 집이 보이시죠. 그 부근인데요. 초분이란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이엉 등으로 덮어 두었다가 뼈만 추려 나중에 땅에 묻는 장례 풍속이죠. 전라도 섬 지역에 특히 많이 남아 있는데요. 영산강가에도 초분골이 있었다는 것이죠.
<가야산 보일 때>
자, 그 끝 쪽에 높은 산이 보이시죠? 그 산이 영산포의 주산인 가야산입니다. 189m밖에 안되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영산포를 상징하는 산입니다. 생긴 모양이 개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일명 ‘개산’이라고도 합니다. 이 개산과 얽힌 전설이 있는데요. 구한말 영산강변에 자리 잡은 ‘토계동’이라는 마을의 부잣집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얼굴과 온몸이 황구처럼 노란 털로 가득 덮여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가족들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태어난 아이가 괴물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마을의 어른이 와서 하는 말씀이 ‘이 아이는 개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으로 보이니 틀림없이 커서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가 커서 나주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도왔다고 하니 개산이 참으로 훌륭한 산인가 봅니다.
여러분도 범상치 않은 아이들을 보면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칭찬해 주시면 큰 복을 받으실 겁니다.
<구 영산포 역쪽을 보며 >
자, 이제 오른쪽으로 보시면 부영아파트가 보입니다. 그 일대에는 고려 태조의 처가이자 고려 2대왕 혜종의 외가였던 오씨 집안에서 소금을 구워 팔았다는 전설의 현장, 염창굴이 있습니다.
염창굴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나오는 곳으로 봄가을로 나라에 내는 소금이 2590석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씨를 중심으로 나주세력들은 영산강을 따라 해상무역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소금뿐 아니라 많은 물산들이 이 영산강을 오르내렸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소금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 역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될 때 만들어진 영산포역이 있었습니다. 영산포역은 당시 나주역보다도 커서 모든 기차가 통행하고 화물이 집산하던 호남을 대표하는 기차역이었습니다.
영산포역은 나주역과 통합하여 2005년 새 나주역이 생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부영아파트 쪽 보면서, 내영산마을 설명>
자, 오른쪽으로 보시면 영산강으로 튀어나온 구릉이 보이실 것입니다.
그 안쪽에 ‘내영산’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양천 허씨들이 조선 중기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았던 곳으로, 1364년 고려 공민왕 12년까지 영산현의 소재지였고 구한말까지 원래의 영산포가 있던 유서 깊은 동네입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되찾고 진주성을 지키다가 돌아가신 김천일 의병장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 옆에 택촌이라는 유명한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약 1,500년 전 나주나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이룬 곳으로, 나주나씨들이 한 마을에 전부 살았다 하여 택촌이라 이름 붙었다고 합니다.
택촌에는 구한말까지 ‘도내기샘’이라는 유명한 샘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전설이 전하고 있습니다.
자, 도내기샘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드릴 테니 잘 들어보세요.
나주는 인물의 고장이라 할 만큼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지만 뛰어난 여성인물이 많기로도 유명합니다. 그중 많은 전설을 남긴 여성으로 단연 ‘나합’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나합은 택촌마을 태생으로 구한말 외척으로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 중에 영의정 김좌근의 애첩이었습니다.
나합이 택촌에서 자랄 때 아름다운 미모로 일대에 소문이 자자하여, 도내기샘에 나합이 나오는 날이면 인근에 사는 총각들이 나합의 얼굴을 한번 보려고 몰려와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 노래가 나주에 ‘나주 영산 도내기샘’이라는 민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 나주 영산 도내기 시암, 상추 씻는 저 처녀야
상출랑을 씻거들랑, 속에 속잎은 니가 먹고
쭉대길랑 나를 주면, 동지섣달 긴긴 밤에
쭉대기값은 내가 허리’
나합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하는 총각들의 애타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재미있는 민요입니다.
그런데 나합의 탄생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나합이 태어날 즈음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서구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뛰어난 학문과 청백리로 유명했는데, 특히 역학과 천문학에 통달하여 앉은 자리에서 천리 밖 일을 알아 맞춘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하늘을 보고 있는데 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부하를 불러 ‘지금 나주 땅에 가보면 아이가 태어났을 것이다. 만약 여자 아이면 살려 주고, 남자 아이면 죽여 버려라’하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하가 나주 땅에 당도해 보니 영산포 택촌에 여자아이가 태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살려주고 돌아가 이서구 관찰사에게 보고하니 ‘그 아이 세상깨나 시끄럽게 하겠다’라고 하였답니다. 그 아이가 바로 나합이죠. 그래서 도내기샘을 ‘나합샘’이라고도 불렀답니다.
아쉽게도 1913년 마을로 호남선 철도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도내기샘이 없어져 버려 최근 마을 주민들이 복원을 해 놓았습니다.
여러분도 이 민요를 외우셨다가 사랑을 구할 때 불러 보시면 어떨까요? 나합과 같은 절세미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합은 영의정 김좌근 영감의 애첩으로 있으면서 나주에 좋은 일을 한 가지 했습니다. 구한말 전국에 3년간 심한 가뭄이 들어 온 나라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김좌근 영감을 졸라 나주에 구휼미를 풀어 나주 사람들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도 나합에게 벼슬을 청탁하는 일이 없어 당시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나합이 ‘나주 사람들이 내게 오기만 하면 벼슬을 줄 텐데 아무도 안 오는구나’하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합의 얼굴이 보고 싶으시죠?
<부영아파트 지나서 영산창성 설명>
자, 다시 오른쪽으로 보시면 영산강으로 튀어나온 구릉이 보이시죠? 지금은 구릉에 묘지들이 가득 들어서 있지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나라에 바칠 세곡을 저장하던 창고인 영산창이 있었던 곳입니다. 영산창은 전라도 2대 조창으로 17개 고을의 세곡을 모아 바닷길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던 대 포구였습니다.
조선시대까지 조세는 대부분 현물로 납부했는데, 모은 조세는 강가나 바닷가의 요지에 설치한 조창이라는 창고에 모아 두었다가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는 바닷길로, 강원도는 한강, 경상도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통해 한양의 용산과 서강에 있는 경창으로 운송하였습니다. 나주는 고대부터 생산물이 풍부하고 해양활동이 발달한 곳일 뿐 아니라 호남의 중심고을이었기 때문에 조창이 설치되었습니다.
영산창에는 순천, 장흥, 담양, 낙안, 보성, 해남, 영암, 영광, 광주, 강진, 고흥, 광양, 능주, 남평, 화순, 동복, 곡성, 옥과, 창평, 장성, 함평, 무안 등에서 걷어드린 조세를 보관했습니다.
영산창에는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매년 7만석 정도 저장했다가 영산강을 따라 바닷길을 이용해 서울까지 운송하였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물류 유통의 거점지요, 국가경제의 보루였던 셈이죠.
그리고 영산창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영산창성입니다. 당시 영산창에는 한번에 500~600석을 실을 수 있는 조운선이라는 배가 53척이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역사 속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요.
나주가 조선시대에 인구로는 전국 3위, 곡식 세금으로는 전국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말은 나주가 조선 전체를 먹여 살렸다는 것이죠.
<앙암바위 설명>
자, 이제 왼쪽을 한번 보실까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이시죠? 저 절벽이 그 이름도 유명한 앙암바위입니다. 이 바위에는 삼국시대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저 앙암바위 쪽에 있는 진부촌과 그 맞은편에 택촌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택촌은 아까 나합이 태어났다는 그 동네이지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어느 날 택촌에 사는 ‘아랑사’라는 어부가 영산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울음소리가 들려 그 소리를 따라 가 보았더니 아름다운 처녀가 울고 있었지요. 아랑사가 그 처녀에게 다가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는 진부촌에 사는 ‘아비사’인데, 병든 아버지가 계셔서 물고기를 잡아다 드리고 싶은데 잡을 수가 없어 울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총각 아랑사는 자기가 잡은 고기를 모두 주었죠.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들이 우는 여자들에게는 간도 쓸개도 다 빼주고 싶은 것은 똑같은가 봅니다. 아무튼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밤마다 저 높은 앙암바위에서 만나 사랑을 속삭였죠. 그런데 진부촌 젊은이들이 이를 알고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총각 아랑사를 바위 아래로 떨어뜨려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녀 아비사는 또다시 밤마다 앙암바위로 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마을 총각들이 따라가 보니 놀랍게도 아비사가 앙암바위에서 구렁이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깜짝 놀라 나쁜 징조라 생각하여 처녀와 구렁이를 앙암바위 아래로 굴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진부촌 마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청년들이 하나 둘씩 죽어갔고 두 마리의 구렁이가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마을 노인 들이 합의하여 무당들로 하여금 음력 8월에 씻김굿을 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한 뒤로는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앙암바위를 올려다 보았을 때 구렁이가 보이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구렁이가 보이는 분은 아마도 전생에 아비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1970년대까지 이 일대에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앙암바위 아래 에 굴이 있고 이 굴에는 용이 산다는 이야기인데요. 영산강에 가뭄이 들어 물이 빠지고 나면 그 굴이 보이고 용이 승천한다는 소문이 돌아 1970년대 후반에 이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렸다고 합니다. 정말 용이 사는 것일까요?
<앙암바위 맞은편 제창마을>
자, 이 이야기는 지금 여러분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 옆으로 보시면 농협 창고가 하나 보이실 겁니다. 그 마을이 제창마을입니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어려울 때 구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쌀을 구휼미라고 하지요. 그 구휼미를 저장하던 제민창이라는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요.
저 마을을 보시면 마을 가장 뒤쪽에 큰 나무가 보이시죠? 그곳에‘용진단’이라는 당집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나주는 전라도를 관할하던 나주목이었죠. 지금으로 말하면 전라도의 도청이 있던 도청소재지인 셈이죠. 이 나주목의 최고 관리가 나주목사였는데요. 나주목사가 직접 영산강 용신께 제사를 드리는 당집이 바로 용진단이었습니다. 영산강은 조세를 운반하는 중요한 국가의 동맥이었기 때문에 영산강 뱃길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죠. 그런데 영산강 물이 이 앙암바위 아래서 세차게 소용돌이 치기 때문에 이 곳을 지나는 배들이 파선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배가 파선되던 그 곳을‘고바우등’이라고 부르죠. 그래서 이 곳을 지나는 배의 안전운항을 기원하는 제사가 용진단에서 거행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로 바뀌었는데요. 저 제창마을의 당산제는 규모도 크고 유명하여 나주시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습니다.
당집 안에는 당할아버지의 영정이 걸려 있는데 이 것도 진본은 도난당하고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 그 옆으로 여러 채의 기와집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 보이시죠? 그곳이 바로 호남에서도 유명한 남인계 서원‘미천서원’입니다. 서원이란 조선시대에 큰 학자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후학들이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하면서 돌아가신 스승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입니다. 한마디로 향교가 조선시대 지방의 공립학교라면, 서원은 사립학교지요.
미천서원은 17세기 유학의 대가인 미수 허목이라는 분의 도학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곳입니다. 1690년에 호남의 유림들이 상소를 올려 영산강 미천(眉泉)위에 집을 짓고 미천서원이라는 이름을 나라에서 내려 주었지요. 그리고 나중에 미수 허목 선생의 학통을 이어 받았고 미천서원의 13대 원장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미천’이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미수 허목 선생은 조선 중기 우암 송시열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유학자이자 당파로 보자면 남인계를 리드하는 거두였습니다. 특히 나주가 배출한 조선의 대표 시인이자 소설가인 백호 임제 선생의 외손이시죠. 그래서 미수 허목 선생은 외가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이라고 하는 유명한 마을에서 탄생하여 유년시절을 이곳 나주 영산강가에서 보냈습니다. 회진마을과 미천서원이 있는 제창마을까지는 걸어서 채 1시간도 안되는 거리니 참 가깝지요. 어린 시절 미수 선생이 하루는 영산강가를 걸어 미천서원이 있는 제창마을까지 와 보니 마을 사람들이 마을에 우물이 없어 건너편 앙암바위 있는 마을까지 마실 물을 길으러 배를 타고 건너다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물을 파면 될 것인데 왜 이리도 불편하게 살고 있느냐”고 물으니,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바닷물이 들어오니 어떤 곳을 파도 물이 짜서 먹을 수가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수 선생이 이 말을 듣고 “내가 가리키는 곳을 파면 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하여 그 곳을 파니 거짓말처럼 물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며 이 샘의 이름을 미수 선생의 호를 따서 미천이라 이름하였고, 그 샘은 지금도 미천서원 마당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수 허목 선생의 탄생에 얽힌 일화가 참 재미있습니다. 하루는 외조부인 백호 임제 선생이 집의 사랑채에서 낮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눈처럼 하얀 학 한 마리가 자기 집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이것은 분명히 훌륭한 손자가 태어날 꿈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그때 대문으로 며느리가 아닌 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무릎을 치고 한탄했다는 것입니다. 그 꿈속의 하얀 학이 바로 미수 허목 선생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미수 선생은 눈썹이 굉장히 길고 특이해서 호를 눈썹 미, 늙은이 수자를 써서 호를 미수라 했다고 합니다. 미수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통을 잇는 유학자이자 서예에 조예가 깊어 전서체에 능하였으며, 어찌나 글씨를 잘 썼던지 미수 허목 선생의 독특한 필체를 미수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분은 과거를 보지 않고도 우의정에 올랐을 정도로 청렴하고 고결한 인품을 가지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저 미천서원에는 1721년에 완성된 미수 선생의 문집인「기언」목판 861매가 보관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 9일에 지역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냅니다.
<구진포 설명>
자, 여러분은 장어요리를 좋아하십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나주가 양식 장어를 많이 키우기로 유명합니다. 이곳이 바로 나주의 3대 먹을거리 장어로 유명한 구진포 장어의 거리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최초로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장어요리를 팔게 되었고 지금은 구진포 장어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지요.
자, 장어식당들이 있는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끝에 보면 기지국 안테나가 보이는 나지막한 산이 보이시죠. 그 산 꼭대기에는 바로 미수 허목 선생의 외조부이자 조선이 낳은 유명한 문학가인 백호 임제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구진포 지나 오른쪽 기오정 설명>
자, 이제 유명한 영산강 열 두 정자 중에서도 유명한 정자들을 보실 차례입니다. 지금 오른쪽으로 보이는 정자가 기오정입니다. 조선시대 유력한 가문에서 정자는 필수품이었죠. 특히 영산강처럼 유서깊고 풍경 좋은 곳에는 정자들이 발달했습니다. 기오정은 다시면 회진에 살던 반남박씨 문중의 정자로 1669년에 지어진 것입니다.
<회진마을 설명>
그 옆으로 영산강에서 가장 유명한 회진마을이 보입니다. 마을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로 나주임씨들의 본향으로 유명하지요. 회진마을은 조선시대 회진현의 치소였던 곳으로 백제시대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회진토성이 있고 백호 임제 선생이 전국의 문인들과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영모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백호 선생은 조선 중기에 태어나 39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시와 소설을 남긴 문인으로 황진이의 묘에 들러 술을 올리고 시를 읊었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한평생 문학가로 살았던 분입니다. 백호 선생이 돌아가실 때 후손들에게 남겼던 유언을 ‘물곡사’라고 하지요. 이 물곡사는 백호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명문장으로 유명합니다.
‘세상의 오랑캐들이 다 황제라 칭하는데
오직 우리 조선만이 황제라 못하고 군주라 칭한다
이런 나라에 태어나서 살다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겠느냐. 그러니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라‘라는 내용입니다. 백호 선생의 주체적이고 시대를 앞서간 정신을 알 수 있지요.
<천연염색문화관 설명>
자, 그 옆으로 울긋불긋 색깔이 고운 건물이 보입니다. 바로 나주천연염색박물관입니다. 나주는 예로부터 양반문화가 발달하면서 의식주와 관련한 고급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중 여러 빛깔의 염색문화는 우리 민족의 멋스러운 감각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우리 민족은 거의 모든 식물에서 염료를 얻었지만 그중 가장 염료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이 쪽이었습니다. 우리 나주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쪽염색장으로 중요무형문화재가 계십니다. 영산강에는 예전부터 홍수대체작물로 쪽을 많이 심었죠. 이렇듯 한국 염색의 본고장으로서 염색문화를 널리 홍보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예산을 지원하여 건립한 것입니다.
천연염색박물관에서는 전시, 체험, 상품 판매, 공방건립 지원, 염료 추출 등 천연염색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보고 체험할 수 있으며 공방을 직접 운영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천염염색박물관을 지나 영산강 하류 쪽으로 강변을 따라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파트형 고분인 복암리고분군이 있으며 우리나라 4대강에 설치된 보 중에서 유일하게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통선문이 설치된 죽산보가 있고, 그 아래에는 드라마 주몽촬영장으로 널리 알려진 ‘나주영상테마파크’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유스호스텔을 건립중이며 나만의 영상을 만들 수 있는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어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영산포로 올라가면서>
자, 이제 배를 돌려 다시 영산포 선창으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영산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려서 구석구석 보고 싶으시지요?
다음에 오실 때는 영산강변으로 나 있는 자전거도로를 따라 자전거 여행을 해 보시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오늘 안내해 드린 곳들을 직접 보고 체험하시면 보다 더 재미있는 추억을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자, 이제부터는 나주와 영산강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산강은 남한의 4대 강 중에 하나이지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특징이 전체 길이 350리 중에 반 이상까지 바닷물이 밀고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려 말 나주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조선건국의 꿈을 키웠던 삼봉 정도전 선생 같은 분은 나주를 들어 ‘거진 즉 거대한 해양기지’라 하였고 영산강을 ‘내해 즉 내륙의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듯 영산강은 날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는 바다와 똑같이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영산강가에는 모래사장이 길게 뻗어 있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산강변의 해수 모래찜질은 일대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농촌 어머니들에게 산후 신경통을 고치기 위한 자연 치료장으로 각광을 받은 것이죠.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영산강과 바다가 만나는 목포에 영산강 하구언이 만들어지고 더 이상 바닷물이 영산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되면서 영산강이 커다란 담수호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까지 영산강은 어종이 풍부하여 어팔진미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팔진미란 나주의 유명한 먹을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채소류를 말하는 소팔진미, 고기류를 말하는 육팔진미, 물고기류를 말하는 어팔진미가 있습니다. 어팔진미에는 조금물 또랑 참게, 몽탄강 숭어, 영산강 빙어, 구진포 웅어, 황룡강 잉어, 황룡강 자라, 수문리 장어, 복바위 복어를 말합니다. 소팔진미는 동문안 미나리, 신월마을 마늘, 흥룡동 두부, 사매기 녹두묵, 전왕면 생강, 솔개마을 참기름, 보광골 열무, 금계동 겨우살이를 말합니다. 육팔진미는 진영 수육, 다도 애저, 영계 등입니다. 또 영산강에서 잡히는 재첩은 어른 손가락 한마디만큼이나 큰 것으로 섬진강 재첩보다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바닷물이 안 들어오면서 다 사라지고 없어져 버려 정말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합니다.
그러나 영산강이 정말 유명한 것은 먹을거리가 아니지요. 20만 년 전부터 영산강을 따라 사람이 드나들면서 문화를 탄생시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주 동강면 장동리에는 약 2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구릉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20만 년 전이라는 세월이 상상이나 되십니까?
이어 신석기 시대에는 영산강가에서 벼농사를 지었고, 삼국시대로 오면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2m도 넘는 거대한 항아리관, 일명 대형옹관에 넣어 묻었습니다. 그것도 땅을 지하에 파지 않고 지상에 흙을 쌓아 묻었지요. 그렇게 만든 고분들이 지금 남아 있는 반남 고분군, 복암리 고분군이고, 영산강 유역의 많은 고분들이 이러한 형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은 한 봉분 안에 한 사람만을 묻지 않고 여러 명을 묻었는데요. 가야지역의 순장과는 달리 사람이 죽을 때마다 추가로 묻는 형식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고대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고 대형옹관을 사용한 것은 세계적으로 이곳의 고분들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대형옹관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기술과 장비가 발달한 시대에도 2000년 전 사람들이 만들었던 옹관을 백프로 재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고대옹관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옹관을 주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 이제 후삼국시대로 넘어가 보실까요?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서남해의 패권을 잡기 위해 견훤과 왕건이 영산강에서 치열한 해전을 치루게 됩니다. 견훤과 왕건은 나주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10년간을 싸우게 되는데요. 이는 나주가 전략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주를 차지하는 사람은 영산강을 따라 바다로 나가고 들어오는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으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나주는 용이 승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여의주와 같은 것이었지요. 견훤과 왕건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지금까지도 그때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 그럼 고려시대 나주 이야기를 해 볼까요?
왕건이 나주와 힘을 합하여 세운 나라가 고려입니다. 나주 사람들은 왜 견훤이 아니라 왕건과 손을 잡았을까요? 그것은 북쪽의 해상세력과 남쪽의 해상세력이 손을 잡은 것입니다. 나주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영산강 뱃길을 따라 바닷길로 중국, 일본, 동아시아와 활발하게 교류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여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해상세력입니다. 특히 왕건의 두 번째 왕비인 장화왕후의 집안인 오씨세력은 서남해를 무대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무역상이었으며,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예성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북쪽의 해상세력이었으니 이 두 세력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건국된 고려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통일국가였습니다.
왕건이 나주오씨 부인과 처음 만난 것으로 전하는 전설의 샘 완사천이 나주시청 앞에 있지요.
전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왕건이 궁예 밑에서 해군대장을 하고 있을 때 나주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배를 타고 지금의 나주역 자리에 있던 목포라는 포구에 도착하여 보니 오색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 보였습니다. 그곳에 가니 아름다운 처녀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지요. 처녀에게 물을 한바가지 달라고 청하니 처녀가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물을 건넸습니다. 왕건이 처녀의 지혜에 감탄하여 성씨를 물으니 오씨집안의 딸이라 하였고 둘은 혼인을 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왕건에게는 첫 번째 아들이었으며, 후에 왕건의 뒤를 이어 고려 2대왕에 오른 혜종입니다.
혜종은 어릴 때부터 문무에 뛰어났고 특히 왕건과 더불어 북진정책에 힘을 쏟았던 왕으로 왕건이 매우 사랑하고 아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주를 왕이 탄생한 곳이라 하여 ‘어향’이라고 부릅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에 나주에 ‘나주도대행대’라는 특별통치기구를 설치하고 지금의 국무총리급인 시중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죠. 이는 나주가 고려시대에 특별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나주세력은 고려를 건국하고자 했던 왕건에게 일등공신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 왕조의 고향이자 외갓집으로서 중앙 정치무대에 우뚝 서게 된 나주는 983년 고려 성종 때에 전라도 일대를 관할하는 도청 소재지인 나주목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 나주목은 전라도 일대 5개군과 11개현을 다스렸으며 1895년 구한말까지 약 천년간 전라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나주를 천년고도 목사고을이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나주 시내에는 당시의 나주읍성과 관아 건물들이 남아 있어 조선의 도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그중 나주목사가 살았던 나주목사내아 금학헌은 TV프로 1박 2일에 나오면서 아주 유명해졌죠? 전통한옥체험을 할 수 있도록 유료숙박을 운영하고 있는데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목사님이 살던 관아에서의 하룻밤은 매우 독특한 추억만들기가 되겠죠?
고려 현종 때 거란이 2차로 침입했을 때에는 현종이 나주로 피난 와 10여일 머물러 임시 왕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고려 왕들이 나주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학자인 이중환선생은「택리지」란 책에서 우리 나주를 서울과 닮았다 하여 작은 서울이란 뜻으로 ‘소경’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이런 연유로 예부터 나주를 소경이라 부릅니다.
서울 북쪽에 삼각산이 있듯이, 나주 북쪽에 금성산이 있고, 한강이 있듯이 영산강이 있으며, 서울 남쪽에 남산이 있듯이 나주 남쪽에도 외남산과 내남산이 있습니다. 또 서울에 도성과 궁궐이 있듯이 나주에도 읍성과 지방 궁궐이 있으며 청계천이 서울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도성을 관통하여 동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나아가듯이, 나주 서쪽에서 나주천이 발원하여 읍성을 관통하여 동쪽으로 흘러 영산강으로 나아가는 형세가 꼭 서울과 닮았다 하여 소경이지요.
영산강은 담양에서 발원하여 광주, 남평을 지나면서 많은 새끼강이 합류하고 비로소 나주에 와서 본류가 시작되면서 영산강으로 불리웁니다.
영산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역사와 문화를 실어 나르던 문명의 해양 실크로드입니다.
강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강에 배를 띄우고 외부 세계와 소통하면서 계속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한 문인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영산강을 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보고 느낀 것들로 인해 영산강을 새롭게 보고 사랑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나주의 강, 영산강이 문화가 꽃피우는 21세기의 강으로 다시 되살아나도록 우리 나주시는 계속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편안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 : 승선하여 배가 떠나면서 해설사의 해설이 시작되는데 확성기가 윙윙거려서 무슨말인지 식별하기 곤란할 때가 있어서 끝난후 해설사한테 씨나리오 한부를 줄수 없느냐고했더니 나주시 문화관관과 윤지향 학예사한테 물어보라 자기는 가진게 없다고하여 그리로 폰을 넣고 E-mail 주소를 불러주었더니 전부를 보내주어서 여기 올린다, 윤학예사한테 감사말씀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