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목포-벽파-조도간을 운항했던 배 문화호
이전에 1970~80년대 조도 섬 사람덜한테 찰로 요긴하고 귀한 교통수단이었든 디젤 발동선이로 '문화호'란 배가 있었지라.
목포에서 진도 벽파항을 거쳐서 조도 서거차도까장 운항했던,
대표적인 완행 여객선이로 목선이었든 문화호 사진이 있어가꼬 올레 봅니다.
1966년에 취항해가꼬 1991년 10월까지 25년간을 운항한 134톤에 문화호는
고케 질고진 사반세기 동안 섬주민덜에 요긴한 발이었었고 교통과 소통에 수단이로 만남과 이별에 숱한 애환이 담긴 여객선이었었지라.
그라고 당시에 쬐꾸만 섬덜에넌 선창이 있었다고 해도 쪼깐 큰 여객선 배덜언
접안이 에렁께 대부분에 섬에서넌 거룻배인 종선(從船, 傳馬船, 전마선, 일본말로 テンマセン, 뗀마)이라고 불리던
째깐한 배로 앞바다로 나가가꼬 여객선하고 연결덜얼 했었는데라.
여객선이 그란 섬에 가차이 오므는 미리 바다 위에서 '뿌~와~~앙~~~'하고 질~게 뱃고동을 몬차 울리고 노래도 틀었었지라.
그라믄 신호에 맞촤가꼬 노젓넌 거룻배에다가 짐이랑 사람이랑 무쟈게 많썩 실어가꼬
바다에서 지달리넌 여객선이로 노를 젓어 와가꼬 내릴 사람도 내릴 짐도 탈 사람도 탈 짐도 모도 욍개 내리고 실었었넌데
찰로 위태롭고 위험하기도 했었어라?
그케 곡예같은 승하선이 끝나므는 문화호넌
또 질~게 뱃고동소리럴 다시 울리고 또 담 행선지로 떠나곤 했었어람짜.
사진이로 지끔 봐도 저케 째깐한 종선에 짠뜩 올라 탄 사람덜이 찰로 위험해 뵈제만
저 배럴 놓치믄 기상 사정상 낼얼 장담 못 하넌 상황이다 봉께
그야말로 목숨 건 섬사람덜에 일상이고 운명이 당연지사라고 치부함시로 그케덜 살었었겄지라. 덜~!
당시에 조도넌 목선이었든 한일기선 소속 ‘한성호’(68t)가 몬차 운항했고, 뒤럴 잇어가꼬 영진호, 문화호가 목포 ↔ 벽파 ↔ 조도 등얼 댕갰고,
목포 ↔ 해창(쉬미) 짝이로넌
진도환, 해남환 등에 잇어가꼬 낭중에 소전 선상네 철선인 옥소호가 목포랑 ↔ 진도(해창, 쉬미)럴 댕김시로
장산도, 하의도랑 진도의 인근 신안 등에 여러 섬덜얼 연결했었지라.
명신호는 완도 ↔ 벽파도 운항하기도 했다는데...??
※ 강진일보의 기록엔 명신호가 완도 ↔ 벽파를 운항해서 강진군 사람들도 그 배를 타고 벽파로 가서 제주도를 들어갔다는 기록이 뵙니다만 혹시 명륜호의 오타...??
야튼 명신호는 목포 ↔ 진도(용호리 종착)를 오감시로 일부 도서 지역을 운행하기도 했어람짜.
용호리 출신 서영완 씨 증언이로 명신호는 용호리가 종착지여가꼬 밤에 용호리 앞바다에 정박했다가
담날 아칙에 종선을 이용해가꼬 용호리랑 인근 주민덜이 종선들을 타고와 짐얼 실으므는 7시에 용호리 바다럴 출항해가꼬
고대미로 벌포→ 황조→ 벽파로 가가꼬 해남 화원 쪽이로 지께서 12시에 목포항에 들어 갔고 둘오는 편은 오후 2시 출발해서 내나 그 역순이로 지께가꼬 7시에 용호리 앞바다에 도착했다고 그케 증언항구만이라.
※벌포, 황조, 마산 등에서도 모도 종선을 이용했다고 함.
그라고 딸리
목포서 출항해서 진도 벽파항을 지께가꼬 추자도럴 거체서 제주로 댕기든 배로
안성호랑 삼화호에다가 가야호가 있었넌데, 가야호란 배넌 아주 큰배임시로 당시에 최고 빨르기도 했었다제만
그래봤자 벽파서 지주도 가기가 5시간이나 걸렜었다지라.
헌데 당시에 벽파항은 지주 사람덜 멕이넌 쌀에 주된 공급원이로
‘진도서 나넌 쌀로 진도 군민만 다 먹으므는 3년얼 먹는다’라고 하든 그 진도 쌀덜이
벽파럴 통해가꼬 실어 날러서 지주도민덜한테다가 쌀밥얼 멕에 살렜었지람짜.
한편 문화호 운항 구간은
목포항 ↔ 벽파항 ↔ 조도군도 일원을 돌고 종착지인 서거차도까지 가는데라.
소요 시간은 편도 약 9~10시간이 소요되는데 기상악화로 결항이나 지연이 잦았었지라.
목포에서 아침에 출발해가꼬 하루 점두록 달레서
지녁 해거름참에사라 도착하는 한낮 왼종일시간의 대여정이였지라.
그 속에서 파도가 씨거나 안개가 많썩 끼므는 서거차도나 조도에서
꼼짝없이 하룻밤을 자고 고 담날 목포로 나가야만 했었지라.
당시 문화호에 주요 경로로넌 목포항 출발 → 장산도 → 하의도 → 조도 창유(상조도) → 소마도 → 모도 → 관매도 → 서거차도 / 섬등포항(최종 종착지).
요케 지그재그로 각 섬덜얼 많썩 돎시로 느리긴 하제만 열심히 돌아댕갰어람짜.
그람시로 바다 위에 만물상이로 섬 주민덜이 재배한 농산물덜이랑 가축부텀 해가꼬
돈 바꿀라고 잔뜩 싣고 나가고, 목포 시장에서 사 오는 오만가지 생필품덜에다가 가구덜까장
온갖 물견덜이 그 배를 통해가꼬 오갔잉께 짝은 섬사람덜한테 찰로 요긴한 배가 요 문화호였었지람짜.
명절이나 방학 때므는 목포나 광주로 유학 간 조도 출신 학생덜이랑,
대처로 돈 벌러 나갔든 자녀손덜이 한~나 타가꼬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지람짜.
구형 디젤엔진이라 아주 크게 퉁퉁퉁퉁거리는 기계음 소리가 귀청때리넌 가운데
또, 배 안 여그저그 곳곳에가 찌들고 밴 지름때에서 나넌 쩔은 지름 냄사 등이 늘 귀청얼 때리고 코럴 자극했넌데라.
걱다 더해가꼬 거센 물살에 맹골수로 파도럴 타고넘을 때므는
객실 안이로 한~나 퍼지든 배멀매하고 개옥질한 냄사덜언
그 시절 문화호럴 타봤던 사람덜이라므는 누구나 다 추억되넌 공통에 옛 야기덜이지라.
벽파항엔 해남 옥동(삼지원) 간이로 1969년에 철부선이 취항해가꼬
금성여객 고속버스가 진도 ↔ 광주간이로 댕기기도 했었지람짜.
그라다가 인자 1984년 10월 18일에 당시 대통령이었든 할딱보 전두환도 참석해가꼬 진도대교(길이 484m, 국내최초에 사장교)도 놔짐시로 하루 전날인 1984년 10월 17일에 벽파-옥동간 철부선도 운행이 중단 댰지라.
그란 뒤로 1980년대 후반이로 접어 듦시로 각 항로에 철선덜이 목선을 대체해가꼬 댕기게 되고
차까장도 항꾼에 실어 날르넌 크나큰 철선덜이 댕기게 되았고,
진도 본섬하고 조도럴 잇넌 짜룬 단거리 뱃질(팽목항~창유항)이 활성화됨시로
목포서 출발해 왼종일 걸리든 문화호 같은 장거리 목선 완행 배덜언 자연시럽게 감척되고 결국 운항을 중단하게 댰다지라. 덜!
야튼 당시에 출항할 때랑, 종선얼 불룰 때라등가
항구에 가차이 오므는 크고 질~게 '뿌~아~~앙~~~!'하고 울리든 그 뱃고동 소리랑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진도 아가씨, 목포는 항구다, 홍도야 우지마라, 바다가 육지라면... 등등
배에서 크게 틀어주든 그 노랫소리덜도 무쟈게 그립구만이라.
-제59회 진도 솔개동리 출신 조병현 올림-
첫댓글 멋짐....... 문화호 명신호 가야호 벽파에서 쉽게 봐왔던 배. 사진 보니 그립네요
명신호 땜시 강진 사람과 진도사람 교류가 많았고 진도에 강진 사람 이주가 많았습니다.
가야호 때문에 제주도로 시집간 아낙네도 있고 벽파 사람이 나락가마니 등짐과 벽파 아낙네들의 떡장사가 많았습니다
백파, 백파장이라고 불렀었지라? 덜?
이전 우덜 에릴찍에 벡파장 가보므는 날마디 장날같어가꼬
그케 벡파장이라고 불렀등갑서라? ㅋ~~
진도대교 놓기 직전 1980년대 초
최고 시절 최대 108가구 500명 이상이 살았던 데지라.
지주도 가넌 배럴 갈어 탈라고 강진 해남 완도서 오넌 손님덜이 많앙께
주점 겸 식당을 겸하는 여인숙덜이 다섯 반데나 댰었넌데도
기상이 안 좋아 뱃질이 멍크므는 그케 많안 방덜이 모도 꽉꽉 창께
반침이나 지시렁 밑에랑 허청재까장도 꺼적 펴놓고 자고
그랬든 데가 백파장이었었지라.
지끔은 모도 흘러간 옛 노래가 댜뿌렀제만이라.
소전 선성님 조부이신 옥전 할아부지께서
여그 벽파진 수진장을 지내셨단 기록이 있지라.
제 기억으로는 1960년말경 진도쌀을 제주도로 보낼 때 벽파에서 배로 실어 옮길 때. 한가마당 약 80kg 사람이 일일이 어깨 짐해서 선적했어요 그때 가마당 5원인가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하루에 2-3백가마 선적하면 1000원~1500원 벌었으니 큰 돈이죠. 제 외가가 벽파이고 바로 선착장이며 외가집에서 가야호 명신호 등 배표를 담당을 해서 잘 압니다.
벽파항은 서권영씨라고 서씨 댁이 매표관리럴 했었등 거 같은데라만...
참고로 진도 지명에 -진(陣)과 -진(津)이 있넌데라
일단 진(陣)은 군대가 진을 친 곳인데
내나 진지(陣地)로 언제든지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설비 또는 장비를 갖추고 부대를 배치하여 둔 곳이지라.
진도에는 세종 때 남도진(南桃鎭)히고 금갑진(金甲鎭)에 수군 만호들얼 둬가꼬 만호가 주재했던
남도진성(南桃鎭城), 금갑진성(珍島 金甲鎭城)이 있었고
그란데
녹진리(鹿津里) 벽파리(碧波里)는 거가 진이라도 나루터라서 나루터 진(津)이로
글자가 남도진(南桃鎭), 금갑진(金甲鎭)하고는 딸러람짜.
벽파진(碧波津)하고 녹진(鹿津)은 나루터라서 진지(陣地)는 아니고 나루터 진(津)이지라.
또 참고로 해창(海倉)에넌 병선도 6척이 있었고 수군도 300명이 있었다제만
여그는 국가 창고가 있어가꼬 그란 것이었고라
@59회 조병현 서권영씨는 58회 서만석씨 작은 아버지입니다 매표는 주로 저의 외가에서 하다가 1970년 중간부터 서권영씨가 했습니다.
또한 옥전(손병익)이 벽파진에 계실 때는 더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고군 벽파리 연동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유는 옥전의 집이 연동마을에 있었고 연동마을을 넘어 바닷가로 가면 뾰족 나온 곳(붉은 원)이 있어요 그곳에 초소 비숫한 망을 보던 곳이 있습니다. 또한 그 일대가 지금도 옥전 소유의 임야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진도고등학교 소유가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