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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열리다
출처 : 『예수가 하려던 말들』 김호경 / 뜰힘 2022년
“하나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마태복음 13:45-46)
예수가 이 땅에서 선포한 말씀을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는 고지다. 예수는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가 매우 빠른 시기에 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희망 가득한 이야기인가. 아마도 이 말씀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고생 끝’과 같은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수많은 고난과 절망을 몰아내는 새 시대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도래만을 고지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에서 예수는 또 하나의 내용을 첨부한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면, 혹은 하나님 나라가 올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회개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라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하나님이 통치할 것이다. 이 절대 주권을 건드리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수는 ‘회개하라’는 말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회개’는 ‘돌이킴’이다. 이는 단순히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잘못을 비는 행위가 아니다. 회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겠다는 방향 전환이다. 이 방향 전환을 위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어디 있었는지를 알아야 어디로 방향을 바꿀 것인지를 알 것이 아닌가. 이러한 맥락에서 회개의 첫걸음에는 철학에서 말하는 에포케(epoche)가 있다. 에포케는 ‘정지, 중지, 중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판단중지를 요구한다. A를 원인으로 한 B라는 결과가 있다고 할 때, 에포케는 여태껏 당연하게 생각해 온 사고의 연결고리를 일단 멈추고, “정말 그게 옳은 걸까?”라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에포케는 자신이 옳다고 여겨 온 일과 그로 인해 누렸던 권리와 힘, 혹은 어쩔 수 없이 당했던 고통과 불의, 이 모든 것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한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가던 것들에 대한 판단중지는 새로운 대상에 접근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앞에 두고 판단중지의 필요성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 나라는 당연하게 여겨 온 왕의 통치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것이 과연 옳은가, 그래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이 전적인 물음이 ‘회개’다.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라고 할 때, 그 신세계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 바로 회개다.
‘회개하라’가 그 익숙함으로부터의 돌이킴이라면, ‘복음을 믿어라’라는 선언은 방향 전환의 목표이며 에포케를 통해서 새롭게 대면하는 현실이다. ‘복음’의 의미는 기쁜 소식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은 매우 익숙한 단어였다. 일반적으로 기쁜 소식이란 왕의 탄생이나 왕의 즉위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는 단어보다는 복음의 내용이 중요하다. “무엇이 나에게 기쁜 소식인가”를 물어야 한다. 왕의 통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왕의 탄생이 복음이었겠지만, 이제 예수는 새로운 복음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와 함께 도래한 복음은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과거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
예수가 전한 수많은 이야기를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로 요약할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비유의 내용도 명확하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가, 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친다. 비유의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므로 이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 ‘빗대어 말해지는 것’은 일종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빗대어지는 그것에만 눈길을 줄 때가 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매혹되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비유를 은유적 이야기라고 할 때, 은유(metaphor)는 ‘뒤에, 넘어서’를 의미하는 ‘메타’라는 전치사와 ‘나르다, 데려가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합성된 단어다. 은유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다른 것으로 보게 하면서 그 뒤에 가려진 의미로 청자를 데려간다. 그러므로 비유를 읽을 때는 겉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 비유 뒤에 있는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빗대어 말해지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의 목적은 듣는 이로 하여금 빗대어 말해진 것으로부터 벗어나 가려진 의미를 찾아가게 하는 데 있다. 비유를 의미하는 헬라어 ‘파라볼레’는 ‘옆에’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와 ‘놓다, 던지다’를 뜻하는 동사의 합성어로서, ‘옆에 놓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비유의 핵심은 표면적으로 가리키는 그것을 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이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놓여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에 비유했다.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가진 것을 전부 팔아서 그 진주를 사는 내용이다. 여기에 사용된 ‘상인’이라는 단어를 보면, 그는 소매상보다는 도매상 정도의 규모를 갖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좋은 진주를 찾으러 직접 나서기도 했을 것이며 자신에게 좋은 진주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과 거래를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그 사람만 한 것은 아닐 테다. 수많은 진주 상인들이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해서 동일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들일 만큼 좋은 진주를 발견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과연 이 진주는 누구든지 의심 없이 모든 것을 걸 만큼 눈에 띄는 거대한 진주였을까? 다른 상인들은 이 진주를 보지 못했고, 비유 속 상인이 이 진주를 본 첫 번째 사람이었을까? 이러한 확률은 얼마나 될까? 세상에 딱 하나뿐인 진주를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말이다. 얼마나 피땀을 흘리며 노력해야 이런 진주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아직 진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때문이 아닐까? 이런 질문들은 비유를 듣는 사람들을 절망과 자책으로 몰아넣는다. 진주를 발견하지 못한 책임이 마치 상인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짧은 은유 이야기는 무수히 많은 상황을 그려준다. 진주를 찾아 나선 수많은 사람들, 오랜 시간 여러 곳을 다니며 만났던 수많은 진주들, 진주의 가치를 매기며 갈등했을 수많은 시간들... 진주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겪는 수많은 사건은 비유 속 상인의 여정과 많이 닮았다. 이제야 발견한 아름다운 진주는 아마도 어제는 그냥 지나쳤을 그 진주였던 것은 아닐까? 어떤 상인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내 앞에 두고 간 그 진주였던 것은 아닐까? 이 진주는 노력의 결과로 비로소 얻게 된 진주가 아니다.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해서 좋은 진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주를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일종의 행운이다. 진주는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사용해 진주를 찾을 때까지 끝없이 노력하라고 부추긴다면, 결코 우리는 진주를 발견하는 기쁨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비유는 진주를 사러 다녔던 지난한 과정을 상상하게 하며, 그 속에서 무엇을 찾아다녔는지를 묻게 만든다.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고된 삶을 견뎌냈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에포케의 순간으로 이끈다.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새로이 보게 된 그 순간에 진주는 자신의 얼굴을 내밀며 반짝거린다. “나는 예전부터 여기에 이렇게 있었어요” 하고 말이다. 이 에포케는 바로 눈이 떠지는 순간이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순간이다.
그러나 상인이 발견한 진주는 사실 재산을 다 팔아서 살 만큼 대단한 진주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 상인이 도매상이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재산은 상당했을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이 정도 진주 때문에 전 재산을 팔 필요는 없다고 조언해 주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자본주의적 계산으로 볼 때, 상인은 아무래도 섣부른 판단을 한 듯 보인다. 진주의 실제 가격을 상인의 재산과 저울질해 보면, 그의 선택이 어리석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판단중지 이후의 선택이라면, 저울질은 무의미하다. 이제 이 상인은 새로이 눈을 떴다. 진주는 이전의 가치를 무효화하며 전혀 새로운 곳으로 상인을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그 사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진주에 전 재산 걸었다 망했잖아!”라는 뒷담화를 늘어놓는다고 할지라도, 상인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곳으로 갔기 때문이다. 상인이 발견한 진주가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비유를 오독한 것이다. 상인은 부자가 되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전혀 가 보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 그의 눈을 열어 준 새로운 빛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이렇듯 수없이 지나쳐 버린 사람들과 진주들 속에서, 모든 것을 걸 만한 새로운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에포케는 성경에서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조급함 때문에 아브라함의 아내가 된 하갈의 이야기도 이와 유사하다. 사라의 권유에 따라 하갈은 아브라함과의 사이에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녀는 사라의 집에서 평안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삭이 태어난 후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나왔고 광야에 이르렀다. 물은 떨어졌고,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하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하갈의 눈을 밝히셨고 그녀는 샘을 발견했다. 없던 샘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샘, 이 샘 앞에서 갈증으로 죽어 가던 불쌍한 아들, 이 처참한 상황에서 하갈의 눈은 밝아졌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있던 하갈은 이제 밝은 눈으로 샘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가죽 부대에 샘물을 담아 아이에게 먹였다. 하갈과 아이는 모두 살았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하갈은 밝아진 눈으로 자신 앞에 열려 있는 삶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집을 나와 들어선 광야는 죽음의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광야는 그들에게 생명의 길이 되었다. 그 길에 이스마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눈이 열리니,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었고 통곡은 멈추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왕의 통치에서 보지 못한 것들, 지나쳐 버린 것들, 가치 없다고 여겼던 것들, 혹은 대단하다고 여겼던 것들. 이 모든 것에 각기의 빛을 던지며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하나님 나라에서 열린다. 이 열린 눈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면, 이전의 모든 것은 빛을 잃고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마치 죽을 것 같던 상황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린 눈으로 진주를 발견한 상인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진주를 찾아 떠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찾았다. 그가 발견한 것은 진주가 아니다. 바로 생명이다. 진주가 가져오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안에서 그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모든 것을 판 그가 얼마나 즐거운 삶을 살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