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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 | 왕력 | 년 | 월 | 일 | 관력 | 형태 | 해당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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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 1 | 1545 | 6 | 26 | 가주서(假注書) | 현직 | |
인종 | 1 | 1545 | 6 | 29 | 가주서(假注書) | 현직 | |
명종 | 0 | 1545 | 8 | 16 |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 현직 | |
명종 | 0 | 1545 | 8 | 28 | 기사관(記事官) | 현직 | |
명종 | 0 | 1545 | 9 | 1 | 검열(檢閱) | 현직 | |
명종 | 1 | 1546 | 8 | 29 | 주서(注書) | 현직 | |
명종 | 2 | 1547 | 1 | 27 |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 현직 | |
명종 | 2 | 1547 | 4 | 3 | 정자(正字) | 현직 | |
명종 | 2 | 1547 | 8 | 9 | 전경(典經) | 현직 | |
명종 | 2 | 1547 | 9 | 20 | 정자(正字) | 현직 | |
명종 | 2 | 1547 | 윤9 | 5 | 정자(正字) | 현직 | |
명종 | 2 | 1547 | 윤9 | 22 | 전경(典經) | 현직 | |
명종 | 2 | 1547 | 10 | 11 | 정자(正字) | 현직 | |
명종 | 2 | 1547 | 11 | 16 | 정자(正字) | 현직 | |
명종 | 2 | 1547 | 12 | 19 | 정자(正字) | 현직 |
[문과] 중종(中宗) 39년 (1544) 갑진(甲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12위
1세
[子] 안자미(安子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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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 子] 영유(永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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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영린(永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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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영화(永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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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 子] 득재(得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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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득인(得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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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子] 희서(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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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子] 석(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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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子] 헌(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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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축(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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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보(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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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집(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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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을수(乙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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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 子] 종기(宗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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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종원(宗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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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정량생(鄭良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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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 子] 경온(景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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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경량(景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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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경공(景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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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경검(景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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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유후(柳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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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 子] 순(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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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子] 숭직(崇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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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숭선(崇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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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숭신(崇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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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숭효(崇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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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이숙치(李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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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조혜(趙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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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김준례(金遵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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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子] 훈(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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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의(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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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김숙(金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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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조석문(曺錫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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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子] 우삼(友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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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우건(友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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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우익(友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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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우하(友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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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윤강(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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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子] 찬(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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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요(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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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담(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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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훈(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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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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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엽(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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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수(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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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손부(孫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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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이억수(李億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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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 子] 명세(名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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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 子] 천지(千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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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백지(百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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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 子] 처지(處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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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 子] 정(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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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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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 子] 두벽(斗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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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 두진(斗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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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系子] 비(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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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4, 1994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심곡동 산67에 있는 안명세의 묘 전경이다. 본래 시흥에 안장되었으나, 1960년대에 이 일대가 택지로 개발되면서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으며, 이 때 그의 아버지 안담(安燂)의 묘도 같이 이장되었다. 묘는 원형의 봉분으로 배위(配位) 숙인(淑人) 재령이씨와의 합장분이다.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으나 이는 모두 근래에 새로 만든 것이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심곡동의 순흥 안씨는 安明世(1518~1548, 翰林公派祖)의 증손 安睦의 장자 安弘奉(1504~1544)과 차자 安弘起(1521~1587)가 속칭 ‘장벌’에 자리잡으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안명세는 을사사화 당시 사관으로서 이 일에 관련되어 명종 3년(1548)에 사형을 당하였다가 선조 즉위 후 신원되어 직첩을 돌려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안명세의 차자 伯芝 이하 睦까지의 묘소는 실전하였고, 심곡동의 순흥 안씨들이 선계를 확인한 것도 약 40년 전인 1960년경이었다고 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단지 순흥안씨라는 사실만 알 뿐, 가까운 집안이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한 후손의 노력으로 선계를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시흥 일원이 대거 택지로 개발되면서 시흥에 있던 안명세, 그리고 그의 부 의 묘소를 심곡동의 선영으로 遷葬하였고, 1998년에는 심곡동 선영에 실전된 3위의 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순흥 안씨대동보에는 명세에게 두 아들이 있었고, 심곡동의 후손은 차자 계통으로 알려져 있으나, 위 제보자에 의하면 ‘최근 대종친회에서는 심곡동의 후손이 실은 宗系일 것이라는 말을 내비쳤다.’고 한다. 현재 대동보에 안명세의 종계로 되어 있는 후손들은 괴산 등지에 거주하고 있으나, 그 수는 10여 호에 그친다고 한다.
백지에게도 두 아들이 있는데, 심곡동은 장자의 후손이며, 그 아우의 후손들은 여주에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國朝人物考』,安明世墓碣銘(金孝元 撰)에는 “有二男 長無後 次有一女”라 되어 있다). 그러나 심곡동의 순흥안씨의 선계 가운데 입향조로 알려진 安弘奉과 그 아우 安弘起 이하의 내력은 비교적 소상하며, 그들의 묘소는 심곡동에 있었다.
이들의 심곡동 입향시기는 안홍봉 형제의 년령 과 그들의 고조 안명세가 1548년에 사형 당하는 사실을 참고하여 보면 16세기 중엽 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순흥안씨 한림공파 가운데 홍봉의 후손은 약 80가구에 이르며, 심곡동 및 이웃한 고등동 일원에도 살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각지로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심곡동에는 안홍봉의 12대 손까지 포함하여 총 2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심곡동 순흥 안씨의 종중재산으로는 심곡동의 선영 약 2,800평과 위답 약 1,000평이 있었다. 그런데 위답이 모두 성남비행장 부지로 수용되었고, 지금은 그 보상금으로 평택시에 3,000여 평의 논을 매입하였다고 한다. 시향은 원래 음력 10월 13일에 지냈으나, 선계를 확인한 후에는 그 순서를 지켜서 10월 4일에 하루 동안에 첨 이하 8위를 合祭로 올리고 있다 한다.
[출처] 성남시의 전통마을/안명세(安明世) 家
안명세(安名世)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男 : 2 女 : 1 總 : 안명세(安名世)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안명세 ◆ 배우자 : ◆ 자 녀 :
姓 名
안명세 (安名世)
性 別
남 (男)
本 貫
순흥 (順興)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朝鮮 中宗 13年
死 亡 日
朝鮮 明宗 3年
最終官職
주서 (注書)
出仕方法
文科
出 仕 日
朝鮮 中宗 39年
子 女
異 名
號
字
경응 (景應)
諡 號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文科榜目
본관
氏族源流
381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786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579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최고관직
문과방목 : 弘文館正字씨족원류 : 弘正
安名世
이(李)
안(安)
안만지(安萬之)
안천지(安千之)
계담서원(桂潭書院) 추향제 가 2009년 11월 8일(일)에 있었다.
이날 초헌관에는 임각수 괴산군수, 아헌관에는 안영홍 순흥안씨2파 회장, 종헌관에는 김영수씨가 하셨으며 순흥안씨3파 안숙준 문숙공종회장, 안상윤 문화원장, 총무이사를 비롯한 안동준 전 순흥안씨 대종회 부회장(4선국회의원)이 참석하였다.
계담서원(桂潭書院)은 충북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에 있다. 을사(乙巳) 명신(名臣) 안명세(安名世) 선생의 춘추정필(春秋正筆)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계담 중원향교유림(中原鄕校儒林)에서 건원통문(建院通文)을 발의(發議) 계담사를 건수세사(建竪歲祀)를 모셨으나 1865년 대원군(大院君)에 의해서 훼철(毁撤)되였다. 1993년 괴산군 향교유도회(鄕校儒道會) 회장으로부터 계담서원 복원(復元)에 관한 발의문(發議文)을 성균관(成均館)에서 접수 문성공(안향), 문의공(안문개), 문정공(안축), 문간공(안종원), 문숙공(안숭선), 문민공(주세붕), 문순공(이황), 문강공(이석형), 문민공(김일손), 문강공(이지함), 한림공(안명세), 문성공(이이), 사촌공(안덕린), 세마공(안술), 최익현, 홍범식, 김구, 연병호 등 18명현(名賢)을 배향하고 있다.
桂潭書院 충북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1009 안명세(安名世) 海東名臣言行錄(及)別集 v6(해동명신언행록(급)별집 v6) 명절(名節) 안명세(安名世) 14世 안명세(安名世) 묘갈명(墓碣銘) 김효원(金孝元) 만력(萬曆)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 11월 7일에 현감(縣監) 안천지(安千之)와 찰방(察訪) 안백지(安百之)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지낸 선고(先考)의 관(棺)을 양주(楊州)에서 과천(果川) 삼현(三峴) 곤좌 간향(坤坐艮向)의 언덕으로 옮겨 장례를 치른 후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아! 공의 바른 도리(道理)와 아름다운 명성(名聲)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는데, 재주와 학식이 짧은 내가 어찌 그 만분의 일이나마 새겨 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감히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명세(名世)이고, 자(字)는 경응(景應)으로 정덕(正德)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년)에 태어났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보다 특출(特出)하여 머뭇거림 없이 바로 재결(裁決)하였고 강직 방정(方正)하였으며, 망령되게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여덟 살에 시(詩)로 명성(名聲)을 얻었고, 자라면서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 나아가 배웠다. ≪근사록(近思錄)≫과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늘 옆에다 두고서 돈독하게 실천하고 널리 통하여 부지런히 힘써 게으르지 않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예법(禮法)으로 아내를 대하였으며, 자제(子弟)와 하인들을 다스리는 데 은정(恩情)과 법도(法度)가 있었으므로 집안이 두루 화락(和樂)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들어갔다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겼고,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승진하였다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기(李芑)와 정순붕(鄭順朋) 등이 정사(政事)를 전횡하면서 살육(殺戮)을 자행하여 명류(名流)들이 조정에서 거의 다 사라졌다. 이때 공은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그 정황을 낱낱이 기록하였는데, 동료 가운데 대신들에게 아첨하는 자가 있어 그 말을 누설하게 되어 이기와 정순붕은 개가 으르렁거리며 물어뜯듯이 하다가 마침내 사사(賜死)케 조치하였다. 공은 국문(鞫問)을 당하면서도 할 말은 다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고, 형벌을 받기에 임해서는 당당하기가 평소와 같았으니, 바로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 2월 15일로 공의 춘추(春秋) 겨우 31세였다. 그 뒤 상(上, 선조(宣祖))께서 즉위하여 제일 먼저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그 자손들을 거두어서 녹용(錄用)케 명하였다. 공의 계통은 순흥(順興)에서 나왔으니 고려조의 명현(名賢) 안축(安軸)의 후손이다. 고조(高祖) 휘 숭선(崇善)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증조(曾祖) 휘 의(誼)는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祖) 휘 우하(友夏)는 선공감 판관(繕工監判官)을 지냈는데 대질(大耋, 80세)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고(考) 휘 담(燂)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외조(外祖)는 변수양(邊壽楊)으로 관향(貫鄕)이 원성(原城)이며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를 역임하였다. 부인은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사도시 부정(司寺副正) 이은우(李殷雨)의 딸인데, 공과 합장하였다.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후사가 없고, 차남은 1녀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머리는 꺾을 수 있어도 지조는 바꾸기 어려웠네. 직필(直筆)로 죽었지만 조금도 두려움 없이 태연하였네. 은전(恩典)은 이미 백골에 미치고 아들에게도 이어졌네. 내가 사실만을 모아서 이렇게 시로 밝히네. 집례 이재출 님 초헌관 임각수 괴산군수, 아헌관 안영홍 순흥안씨2파 회장, 종헌관 김영수 님 좌측 앉은이 안동준 전 순흥안씨 대종회 부회장(4선국회의원) 제례후 헌관 음복 배향후 불살으는 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