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삶을 위한 역사 산책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전3권 중 제3권
성공한 문학인도, 실패한 정치인도
* 성공과 실패는 다만 한때에 행하여지는 것이나, 시비의 분별은 곧 만세에 정해지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에서 사관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한때의 득실을 기록하여 그것으로 만세의 시비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할 수는 있어도 사기는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항복)
1 신동이라는 말에는 얼마간 환상적인 분위기가 담겨져 있다. 특히 조선조 시대의 경우가 그렇다. 요즈음은 영어의 단어를 많이 왼다던가, 수학적인 재능 등으로 '신동'임을 말하지만 조선조의 경우는 얼마나 어려서, 어떤 내용의 한시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그 신동임을 확인하고 평가하였다. 설혹 다섯 자, 네 줄로 매듭지어지는 오언절구의 짧은 한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운자를 써야 하고 또 기승전결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등 작법상의 제약과 어려움이 있었기에 대단한 천재성이 요구된다. 우리들의 심저에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새겨진 매월당 김시습의 경우가 이른바 조선 시대 '신동'의 개념을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에 능히 글을 알았다고 하였고, 말은 늦게 깨치고 더듬거렸으나 총기는 일찍 깨여서 글을 입으로 읽지는 못해도 뜻은 다 알았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놀랍게도 세 살에 시를 지어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는 대목이 이르면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도홍유녹삼월막: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무는구나.
주관청침송엽노로: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였으니 솔잎의 이슬이로다.
무뇌성하처동: 비도 안 오는데 천둥 소리는 어디서 울리나, 황운편편사방분: 누른 구름 점점이 사방으로 흩어지네.
이 세 편의 시가 신동 김시습이 세 살 때 지은 것인데, 마지막 두 줄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광경을 보고 읊은 것이라니 그 착상과 비유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다섯 살에 '대학'을 깨치고 글을 짓는데 막힘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 하자, 세종조의 명신 허조가 몸소 김시습의 집을 찾아와 시험을 해보게 되었다.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 자를 넣어 시를 지어 보아라."
노목개화필불노: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허조는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세종대왕은 지신사(승지의 별칭) 박이창으로 하여금 어린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다시 시험해 보게 하였다.
동자지학백학무청공지말: 동자의 공부가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도다.
어린 김시습의 화답은 막힘이 없었다.
성주지덕황용번비해지중: 성군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뒤집으며 노는 듯하도다.
박이창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지켜보던 좌중 또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이창은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며 신동 김시습에게 물었다. "저 그림을 두고도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예." 그것은 강가에 작은 정자가 있고, 그 밑에 빈 배가 매어져 있는 그림이었다. 김시습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소리내 읊었다.
소정주택하인재: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이쯤되면 신동의 영특함이 넘어섰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김시습은 시적인 재능으로 그 신동 됨과 천재성을 입증하였지만, 산문의 경우라면 선조조의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의 예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난설헌은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아주 환상적인 글을 지어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광한전백옥루'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전각이기에 난설헌의 천재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대저 보옥으로 만든 차일은 창공에 걸려 너울거리고, 구름 같은 휘장은 색상의 한계를 떠나 그저 황홀하기만 하며, 은다락은 햇빛에 번쩍거리고 노을 같은 주두는 헤매는 속세의 티끌 세계를 벗어났도다(후략^5,5,5^ 원문 생략)
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명문(더구나 한자로 된^5,5,5^)을 어찌 여덟 살 난 여아가 쓴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 같은 천재성으로 그녀는 후일 동양삼국(조선, 중국, 일본)에서 으뜸가는 여류시인으로 추앙받게 되는 것이리라. ------ 2 조선 시대의 모든 학문은 문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문자를 체계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처음 대하게 되는 '천자문'의 구성이 4자시 250수로 되어 있었으므로 시를 통해 우주를 알고, 시를 통해 자연과 역사를 알게 하였으며, 또 인성을 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도덕적인 가치도 시를 통해 터득하게 하였다.
지우필개 덕능막망 내게 잘못이 있음을 알았거든 반드시 고쳐야 하고, 내가 능히 할 수 있을 일을 얻었거든 잊지 말아야 한다.
(203p 한시 두 줄 생략) 위태롭고 욕스러운 일이 잦으면 곧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것이니, 숲이 있고 물이 있는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옳을 지어다.
두 가지 경구는 모두 "천자문"에 적혀 있는 구절이지만, 삶의 지혜를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네 살짜리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에게 이 같은 구절을 수백 번씩 외게 하여 몸에 익히게 하는 인성교육의 방법도 본받을 만하지만, 그것을 문학적인 형식을 통해 이해시키고자 한 지혜로움에는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명심보감", "통감", "소학", "논어" 등에 기술된 아름답고도 가치있는 내용을 되풀이 읽게 함으로써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혹은 그것을 지행해야 하는 이치까지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학문과 인격의 완성을 동시에 도모하다가, 결국 "시경"에 이르러 문학의 이치로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살피게 하는 안목을 갖게 하는 교육과정을 오늘 우리들의 찌들고 맹목적인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지침으로 삼는 것이 진실로 옛 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온고이지신의 아름다운 정신이 아니겠는가. 조선 시대를 살았던 뛰어난 경세가나 명성을 남긴 정치가는 모두가 문학을 바탕으로 인격을 도야하고 교양을 넓혔으며, 또 자신의 의지도 그런 방법으로 토로하였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론이라는 면에서 살핀다면 예술로서의 문학이라기보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이거나, 생활로서의 문학이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의 사대부로 문학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었던 사람들은 정승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훌륭한 정치가로서의 명성을 남기지는 못 했다. 다시 말해서 성공한 문학인이기에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경우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교산 허균일 것이다. 송강 정철은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조 가사문학의 쌍벽이자 우리 문학사를 여는 큰 별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송강 정철을 천재적인 시인으로 평가하고 그가 남긴 주옥 같은 가사문학을 상찬하는 데만 주력해 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도 송강 정철을 그렇게만 보아왔고, 더구나 정철 최초의 가사인 관동별곡에 내 고향 강릉 경포대와 강문포구의 절경을 노래하고 있어 남다른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개지륜이 경포로 내려가고 십리빙환을 다리고 고쳐 다려 장송을 혼 속에 싫도록 펴지시니 물결도 잔잔하여 모래를 헤이로다 고주해람하여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너머 옆에 대양이 거기로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4백여 년 전에 쓰여진 위의 정경은 지금의 실경과도 별로 다를 게 없다. 나는 지금도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에 즐겨 오르고 강문교도 자주 건너는 편이다. 그때마다 "관동별곡" 의 이 대목을 흥얼흥얼 외면서 송강가사의 진수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송강 정철을 가사문학의 거벽만으로 보아왔던 내가 그의 전생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을 쓰면서 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된 그에 관한 기록과 또다른 여러 전적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문학사적인 면에서의 송강 정철만으로는 그의 파란 많았던 전생애를 정확하게 살펴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송강 정철은 조선 시대의 선비가 그러했듯 문인이기 전에 관직에 등용된 공직자였고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살았던 정치인이었다. 그의 가사문학에는 통한으로 점철된 정치인 정철의 번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의 가사문학은 천재적인 시재로서의 문학성을 집대성한 것일 뿐, 인간 정철의 진면목은 파악하기는 태부족일 뿐이다. 선조는 정철을 이렇게 말했다.
정철은 그 마음이 정직하고 그 행동은 올바르며 그의 혀는 곧 직언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미움을 줄 뿐이며, 직에 임하여서는 불고가사, 몸이 쇠척하도록 온 힘을 다했고, 충성과 절의는 초목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다 아는 바이니 참으로 이른바 군계일학이며 전상의 맹호라, 만약 그를 벌한다면 이는 마치 주운을 베는 것이나 같다.
임금이 신하를 평하는 글로는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침이 마르게 자신을 극찬한 바로 그 선조의 명으로 파직을 되풀이하였고, 끝내는 귀양살이까지 하게 된다. 동서로 갈라진 정쟁이 극심했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은 이른바 서인의 거벽이었고, 그는 꺾일지언정 휘어질 줄 몰랐던 탓으로 타협은 고사하고 차선도 몰랐다. 그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였다. 명종의 사촌 형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탐내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처족을 모함하여 마침내 처남을 죽이고 처가의 재산을 탈취한 사건이 있었다. 정철이 이 사건을 맡게 되자 명종은 그에게 관대히 처분하도록 밀지를 내렸다. 정철은 왕명을 거부하고 경양군을 중형(사형)에 처했다. 법도와 정의를 으뜸으로 여기는 공직자의 표상이자 용기있는 행동이 아닐 수가 없다. 그후 정철은 명종의 미움을 사게 되어 벼슬길이 막히는 등의 불이익을 당했으나 그럴수록 정철의 강직한 성품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다. 송강 정철의 강직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도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옛 간관의 풍도가 있다.
정철은 대쪽같은 선비의 기상으로 이미 젊은 날에도 끊임없는 핍박과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함으로써 마침내 파직되어 부처되기에 이른다. 이때의 사단을 여기에 소상히 적을 겨를이 없으나, 이 또한 임금(선조)의 내심을 헤아리지 않은 채 명분과 공론을 내세웠던 당당한 모습이었다. 조선조와 같은 봉건군주시대에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임금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공론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에게 밀어닥칠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설혹 그 주장이 옳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기에 더욱 그렇다. 송강 정철은 명종, 선조의 2대에 걸쳐 어의에 거슬리는 공리공론을 내세웠으면서도 58세를 일기로, 더구나 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세상을 마감할 수가 있었던 것은 기적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그가 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주기를 주장하였으나 옳고 그른 일을 분명하게 가렸기 때문일 것이며, 그에게 내려진 시호가 문청이라는 사실로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송강 정철에게 밀어닥치는 곡절은 그가 죽음 다음에도 삭탈관직과 복직을 거듭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강직히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사계 김장생이 우암 송시열에게 물었다. "송강 정철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송시열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 부형께서 일찍이 정철은 청직하나, 속이 비좁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에 김장생이 다시 부연하였다. "옳은 말이오. 정철은 자신이 청백하고 아무런 혐의가 없음만 믿는 안하무인으로, 이것이 끝에 가서 일세의 원수같이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지." 송강 정철을 평가하는 이 같은 견해를 깊이 있게 살펴본다면 자신의 결백함만을 표준으로 삼아 불의를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갔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학문이 높아지면 도량도 넓어지는데, 정철도 역시 학문이 낮은 탓이다."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찌 되었거나 송강 정철은 법도와 명분을 소중히 한 불출세의 선비였다. 사가들은 그를 말할 때, 천성이 소통하고 준결하다고 적었으며, 부모를 섬김에는 지효 하였고, 형제간의 우애는 화목을 으뜸으로 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또 정철은 어떤 글이라도 세 번 읽으면 능히 암송하였고, 근사록, 주자의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시문을 잘했으며 글씨에 능했다고 적었다. 송강 정철. 그가 남긴 주옥 같은 가사문학을 읽으면서 문학사적인 의미에서는 성공한 문학인이지만, 실패를 거듭한 정치인 정철이라는 면에서는 문학사의 뒷장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그의 전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되었던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던 선비의 표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 3 문학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과거에 등과하게 되고, 그것이 입신양명의 길로 들어서는 기초가 되었던 것은 조선 시대의 제도나 관행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문장이나 시문의 대가는 대개가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었던 정치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사람들을 문학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가 당대의 시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면서도 정승의 반열에 들지 못했던 것은 예술적, 문학적인 소양이 정치적인 성향을 앞서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 다시 말해서 문학적으로는 대성하였으되 정치적으로는 참담한 패배를 맛본 인물로는 교산 허균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땅에서 싹튼 저항문학의 효시이자, 개혁성향의 사회소설이요, 참여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홍길동전"의 내용은 적서의 폐단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만민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향해 떠나가는 이른바 핍박받는 민중들의 생생한 모습을^5,5,5^,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문학적인 저항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더구나 유불선에 통달하였다고 평가받을 만큼의 지고한 학문을 갖추었던 교산 허균이 자신의 소설 "홍길동전"을 이 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완성했다는 점은 그의 양식과 용기를 웅변으로 말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문학사적인 의미에서는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판서(지금의 장관)의 지위까지 올랐던 정치가 허균이 반란의 수괴로 지목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다면 정치적으로는 큰 실패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허균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누님, 난설헌 허초희를 함께 거론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난설헌 허초희의 관향은 양천이고, 자는 경번이다. 그녀가 강원도 강릉의 초당동에서 허엽의 셋째 따님으로 태어난(1563: 명종 9년) 것은 거기에 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조부 김광철은 학문이 깊고 풍류를 아는 예조참판이었다. 그는 지금의 강릉시 사천면에 있는 모기재에 애일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볼 만큼 자연과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먼저 태어난 난설헌이 그랬던 것처럼 교산 허균도 외조부의 무릎에 앉아 자연을 사랑하는 낭만을 몸에 익히면서 자랐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자신의 호를 초당이라고 한 것은 장인의 고장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고, 허균이 호를 '교산'이라고 한 것은 외조부의 정자인 애일당이 있는 '모기재'에서 연유된 것이라면 그 고장의 풍광이 수려한 탓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그 고장의 생기와 숨결을 간직하려 했음일 것이다. ------ 4 허엽은 서평군 한숙창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나,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고 사별하였다. 그러니까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모인 강릉 김씨는 허엽의 재취가 되는 셈이다. 허엽과 김씨 사시에서 태어난 소생으로는 천하의 대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하곡 허봉과 허균 그리고 난설헌의 삼남매가 있다. 이런 연유로 허엽, 허성, 허봉, 허균, 허초희를 일러 당대의 오문장가의 가문이라고 하였다. 난설헌이 태어났을 때, 오라버니 허봉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으므로, 난설헌은 문장가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학문하는 분위기를 몸에 익힐 수가 있었고, 또 오라버니 허봉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는 천재 소녀의 문학적인 자질이 유감없이 개발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허균의 경우는 달랐다. 유년시절을 외가에서 보낸 허균이 서울의 본가로 돌아왔을 때 참으로 훌륭한 스승과 만날 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달이었다. 이달은 뛰어난 학문과 글재주를 가졌으면서도 계집종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는데, 오직 허엽만이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면서 자신의 집에 드나들게 하였다. 물론 자식들의 학문을 보살피게 할 생각에서였다. 중형인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하였다 하여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 불운도 겪었지만, 형기를 마치고 적지에서 돌아온 허봉은 아우인 허균에서 몸소 옛 글을 가르치는 한편, 친우 이달에게는 허균을 위해 이백의 시를 강론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으며, 또 자신과 절친했던 유성룡으로부터는 문장을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스승 이달에게서 당나라 시인들의 낭만적인 시세계를 배우면서 서얼의 뼈아픈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고, 통한과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스승의 모습에서 재주와 능력을 갖추었어도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입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해야 하는 봉건적 신분제도의 모순에 격분하게 된다. 교산 허균의 '유재론'은 그렇게 싹트고 익어 갔다.
고금은 멀고도 오래고 천하는 넓으나, 서얼 출신이라고 하여 현자를 버리고, 어미가 개가한 자손이라 하여 재능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질 못했다. 우리 나라만이 그런 자손에게 영영 벼슬길은 막고 있다. 작은 나라, 더구나 양편에 적을 두고서도 반역을 도모할까 봐 그들의 재능을 쓰지 않고, 그들의 경세를 이용할 줄 모른다. 이렇게 스스로 환로를 막고서도 우리 나라엔 인재가 없다고 탄식한다.
허균이 뒷날 서양갑, 심우영 등 여강칠우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후원자가 되는 것도, "홍길동전"을 지어서 적서의 제도를 폐지하고 평등사상을 고양하고자 하였던 것은 모두가 그의 스승 이달의 영향을 받으면서 확립한 '유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허균은 누님 난설헌을 끔찍이도 따랐다. 여덟 살 어린 나이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과 같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글을 지어 세인을 놀라게 했던 누님이 출가를 하고 나서부터, 만권 서적을 벗하면서 밤마다 독수공방으로 지새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는^5,5,5^ 정한으로 가득한 누님의 시가 바람결에라도 실려 오는 날이면 허균은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 누님의 시에 심취하곤 하였다.
비단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 옷 짓노라면 손끝 시리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밤에 홀로 앉아' 전문
선경(난설헌의 문학세계이기도 하지만)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던 그녀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절창이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마지막 두 줄^5,5,5^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젓는 것이 불꽃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는 절구는 오직 그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허균은 누님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착잡해 진다. 명문가에 출가하였으나 남편 복은 지지리도 없다. 밤마다 홀로 앉아 만권 서적을 벗하며 환상의 세계를 문장에 담아 본다 한들 어찌 지아비와 함께 하는 사랑만 하랴. 난설헌에게 밀어닥치는 불행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딸과도 사별해야 했다. 뒷동산 언덕 위에 어린 자식들의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 어미의 심정은 고사하고 그 참담한 아픔을 시를 써서 달래는 난설헌의 회한을 무엇이라고 형용해야 되는 것일까.
지난해 사랑하던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던 아들 잃었네. 슬프고도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섰구나. 사시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노라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아! 너희들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놀고 있으리 이제는 또다시 아기를 가진다 해도 어찌 무사하게 키울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곡자' 전문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로 난설헌을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재였소 가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명시를 남길 만큼 다정다감했다. 그녀에게 마지막 설움을 안겨다 준 것은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던 오라버니 허봉의 죽음이었다. 난설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과도 같은 큰 좌절을 안겨다 주었다. 난설헌은 비탄에 잠겨 실성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때가 스물 여섯 살, 난설헌은 일 년 동안을 통곡으로 지새우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 그렇다. 그녀는 한을 남기고 하곡 오라버니가 기다리는 세상으로 떠나간 것이다. 꽃 같은 나이 스물 일곱 살에, 1589년 3월 19일의 일이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연꽃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꿈에 노닐던 광상산의 노래' 전문
참으로 놀랍도록 아름답다. 또 환상적이다. 그녀가 꿈속에서 노닐었던 광상산은 물론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산이다. 그 산에 오르면 푸른 바다의 구슬 물이 손에 잡힐 듯하였고, 새 중의 새라고 하는 난새가 현란한 색채를 뿜어 내는 무릉도원이었다. 여기가 바로 난설헌이 살고자 하였던 이상 세계였으니 바로 선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부용삼구타'라고 적은 원시의 구절이다. 물론 '부용'은 연꽃을 말하는 것이지만, '삼구타'는 구구단으로 해석하는 것이기에 '스물 일곱 송이'가 늘어졌다가 다음 구절인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였다로 이어지고 있다면 그 스물 일곱이라는 수는 그녀의 짧은 생애와 같은 27이기에, 이로 미루어 난설헌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견을 우리는 선도사상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난설헌 허초희의 죽음을 천주에 삼한을 품고 갔다고들 애석히 여겼다. 첫째는 중국과 같이 큰 나라가 아닌 조선과 같이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셋째는 인품과 시재를 겸비한 두목지와 같은 지아비를 만나지 못했고, 자녀가 없어 모성애를 알지 못하고 간 것을 한했다는 것이다. 난설헌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시집과 시편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을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 5 교산 허균이 진사시에 합격한 해(1589년), 난설헌은 정한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생애에 종지부를 찍으며 요절하였다. 허균은 누님의 시편들을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모든 문장과 시편을 함께 불태워 없애라는 누님의 유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선도사상으로 다듬어진 누님의 시세계라는 사실을 허균은 알고 있었기에 누님의 시가 있다는 곳이면 천릿길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허균은 자신에게 보내졌던 누님의 시편들과 난설헌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한편 한편 모아가기 시작하였고, 더러는 구전되는 것을 받아 적어서 재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모아진 시편이 모두 2백 10편, 허균은 그 시편들을 쓰다듬으며 누님의 환생만큼이나 기뻐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난설헌 허초희의 시편들이 이렇게 모아졌던 탓으로 후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난설헌의 시는 아우 교산에 의해 고쳐진 것'이라고 매도되기도 하였다. 허균은 누님의 시편들을 책으로 엮어서 서애 유성룡에게 보이면서 서문을 청했다. 유성룡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략) ^5,5,5^ 이상하구나. 이건 여자의 글이 아니다. 어떻게 돼서 허씨의 집안에만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나는 시학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보는 바에 따라 평한다면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하는 솜씨가 허공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았다(후략).
허균은 누님 난설헌의 시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자칫 사장될 수도 있었던 천재 여류시인의 시편들을 세간에 알렸고, 시를 사랑하는 사대부들은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절절하게 전달되는 정한의 미학과 선도사상의 깊이에 탄성을 토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의 여류문학이 기방이나 그 주변에서만 생성된 것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내당에도 실재하고 있었음이 비로소 입증된 셈이었다. 허균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난설헌의 시를 조선보다 땅덩이가 더 크고 넓으며, 수준 높은 문학이 실재하는 중국에 알림으로써 누님의 시적인 천재성을 이백이나 두보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었다. 난설헌 허초희의 시집이 간행된 때로부터 9년 뒤인 1598년에 이르러서야 허균은 중국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주지번에게 "난설헌집"을 보여 줄 수가 있었다. 주지번의 감동과 경탄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허균은 누님 난설헌의 시세계를 중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뜻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협력을 요청하였다. 주지번은 허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난설헌집"은 중국에서 간행되어 조선 여류시의 진수를 뽐낼 수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난설헌집"은 다시 일본에서까지 발간되어 널리 읽히게 됨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동양 삼국에서 으뜸가는 여류시인으로 칭송받게 하였다. 모두가 누님 난설헌을 아끼고 따르면서 그녀의 선도사상을 흠모하였던 교산 허균의 눈물 겨운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6 교산 허균의 문학적인 인생은 나무랄 데 없이 빛나는 것이었지만, 관직에 입사하여 그 직이 높아지는데 비례하여 그의 행적은 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주자학을 학문과 행실의 근간으로 삼는 유학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되, 그로 인한 고질적인 제도와 관행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따라서 개혁적인 차원에서의 참여의식을 분출한 때가 많았다. 허균의 '호민론'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대체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인식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성을 항민이라 한다. 이들은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다. 다음은 살이 닳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모은 재산을 착취당하고 혼자 우는 백성들이 있다. 이들은 위정자를 원망하는 백성, 즉 원민이라 한다. 이들은 그렇게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다음으로 호민이다. 이들은 잘못되어 가는 세상일에 불만을 품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잠적한다. 이들이 몸을 감추는 것은 잘못된 세상을 자기 손으로 바로 잡을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다. 이들이 무서운 존재들이다. 이들이 주먹을 흔들며 개혁의 뜻을 외쳐 대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 모여든다. 이렇게 되면 수종하던 항민들도 호응한다.
이른바 민초들의 저항의식을 자극하고 예견할 수 있는 '호민론'은 "홍길동전"의 주제의식으로 구체화되면서 허균의 삶을 관통하게 된다. 허균은 유학의 나라에서 태어나 주자학을 익혀서 관직에 등용되었고, 판서의 반열에 오를 만큼 학문에 통달했으면서도 제도의 모순점에 대해서는 개혁의지를 날 세웠던 진보적인 사상가였고, 배불숭유하는 나라의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불경에 통달하여 퇴청 후에는 먹장삼을 걸치고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하여 간관들의 탄핵을 받은 바 있었으며, 강원도 삼척부사가 되어 임지에 도착하여서는 기생들과의 스캔들이 문제되어, 또 부처를 섬겼다는 비방이 추가되어 임지에 도착한 지 13일 만에 파직되는 등 그의 행적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허균을 말할 때 유, 불, 선에 통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교산 허균은 47세가 되던 해(1616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다섯 달만에 파직된다. 그의 파격적인 행적으로 미룬다면 파직은 예정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겠지만, 다시 1년 뒤에 좌참찬으로 발탁되는 것은 기적적인 그의 회생이라기보다는 광해조 말기의 난정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허균은 누님 난설헌처럼 자신에게 닥쳐오는 비극적인 종말을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이미 4년 전에 자신의 문집을 완벽하게 정리한 다음, 절필을 밝히고 있다.
마흔세 살 되도록 글이나 짓는다고, 천금을 널리 털어 애쓰며 버티었네. 시와 문장 열 권을 방금 옮겨 쓰길 마쳤으니, 오늘부턴 이 몸이 다시는 시를 짓지 않으리 '문집을 다 엮고 나서' 전문
급기야 정치가 허균에게 비극적인 종말이 밀어닥친다. 허균의 애제자인 예조좌랑 기준격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허균의 반정계획을 고발하는 비밀상소를 두 번에 걸쳐 올린 것이었다. "광해군일기" 9년 12월 24일 조에, 성공한 문학인이자 행동하는 양식이었던 교산 허균의 비극적인 종말을 예고하는 기준격의 상소가 실려 있다. 비밀상소라고 강조되어 있는 것이 다소 께름칙하지만, 여기에 그 비밀상소의 전문과 형이 집행되기까지의 과정을 옮겨 놓는 것은 교산 허균이 '폐모론'에 연루되어 사형이 되었다는 등, 그에 대한 마지막 정리가 대단히 애매하고 미흡한데서 오는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를 불식하기 위한 고충임을 헤아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삼가 생각건대, 국가가 불행하여 역변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역적의 뿌리는 실로 허균인데 그가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신은 몹시 분통합니다. 지금 허균이 역적 의를 세워서 서궁을 끼고 정사를 보게 하려 한 진상을 일일이 진달하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전하께서는 아마 죄인을 알게 될 것이고 종묘 사직도 공고해질 것입니다. 기유년 겨울에 신의 아비는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신의 아비의 안부를 묻고 이어 말하기를, "의창은 선왕이 아끼던 자식이었으므로 매번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너의 아비의 저지로 옹립할 수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마 의가 출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옹립하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또 신해년 겨울에 신의 아비가 역시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연흥이 나로 하여금 정세의 딸을 며느리로 삼도록 윤수겸에게 청혼해 달라고 하였다. 연흥은 수겸이 일찍이 도감의 군사들에게 호감을 샀기 때문에 혼사를 맺고서 큰일을 시행하여 시체 두 구를 끌어내고 대군을 세워서 대비로 하여금 정사를 대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뼈가 저리고 가슴이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두 시체는 누구를 말하느냐고 천천히 물었더니, "임금과 동궁이다. 오늘 내가 연흥과 함께 가서 윤수겸을 만나 보고 청혼을 했다. 윤수겸이 비록 싫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윤이 뭐라고 하던가?" 하니, 들어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허균이 또 말하기를, "연흥을 통하여 궁중의 사실을 얻어 듣건대 임금에게는 이러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지금 연흥에게 지휘 받고 있지만 일이 성사된 뒤에는 내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무력을 행사하여 연흥도 함께 죽임으로써 나의 권력을 가장 크게 만들고 대비를 끼고 온 나라를 호령하여 다른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책이다. 그리고 상에게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황제에게 모두 진달할 것이다. 그리고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폐지하고 적자인 의를 세웠다고 한다면 은을 1만여 냥까지 쓰지 않아도 일은 순조롭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권력을 잡는 것은 좋지만 심가 집에서는 그대의 집을 원망하고 있으니 심가가 뜻을 이루게 되면 그대의 집은 크게 패망하고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때 신이 그의 표정을 보니 의기양양하여 곁에 있는 사람은 안중에 없는 듯이 행동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상소하려 하였으나 그 당시 온 조정이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막론하고 모두 신의 집을 미워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혹시 신을 위협하고 죄를 뒤집어씌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로 백방으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 혼사를 중지시키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사약 조희형을 불러서 이르기를, "듣건대 심가와 윤가 사이에 혼사말이 있다고 한다. 그대는 윤가와 서로 알고 있으니 꼭 나를 위하여 윤가에게 말하기를 '아무리 김가와 허가가 정세의 딸을 며느리로 삼도록 권하더라도 따르지 말아야 한다. 허가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간사한 사람이니 만약 그의 말을 따른 뒤에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라." 하였습니다. 그후 며칠이 지나자 희형이 돌아와 말하기를, "윤가는 생원님의 분부에 따라 혼사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수겸은 즉시 신과 절친한 사람인 송구를 청하여 손을 잡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김가와 허가가 와서 혼사 문제를 말하여 내 몹시 민망스러웠다. 만약 기생원이 혼사를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꼭 기모에게 달려가 만나 보고 혼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주고 고맙다고 해달라." 하였다 합니다. 그 당시 심가와 김가는 신을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허균이 윤수겸에게 혼사를 권한 전말이 명백하게 드러났고, 수겸, 희형, 송구가 다 살아 있으므로 속일 수가 없는 일입니다. 수겸이 신의 덕을 입어 혼사를 하지 않았지만 만약 혼사를 하였더라면 어찌 균에게 나쁜 영향을 받아 나라에 화를 끼치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용렬하지만 속으로는 노중련과 이병길의 높은 의리를 본받아 혼란된 것을 배제하고 큰 화변이 확대되기 전에 방지하고서도 감히 공로를 말하지 않았으니, 신을 일러 화단 사전에 방지하였다고 말하더라도 옮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균은 역적의 주모자입니다. 대개 허균은 선왕을 해치려고 음모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공주목사로 있다가 파면 당하고 부안으로 돌아갔을 때 그 고을 수령은 바로 광세였는데, 균은 그와 함께 의를 세우고 권세를 잡을 것을 음모하였습니다. 또 경술년에는 죄를 받고 옥에 갇혔으며, 신해는 정월에는 귀양갔으며 석방되어 돌아온 뒤에는 균의 집이 광세와 문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상종하면서 감히 역적 음모를 하였습니다. 허균의 성질이 경박하고 또 망령되기 때문에 신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소진은 제 나라에 있으면서도 연 나라를 위하여 제 나라를 쇠퇴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허균은 김제남과 공모하면서 서울을 옮기자는 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참서의 본문에 없는 말을 더 써넣어 '첫째는 한, 둘째는 하, 셋째는 강, 넷째는 해이다'고 하였는데, 하라고 한 것은 교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인심을 원망하고 소란하게 한 다음 이어서 손을 쓰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허균이 공주목사 시절에 영을 셋이나 두었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의 식객인 심우영, 윤계영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우영은 균의 처갓집 친족으로서 서로 친밀하기가 한몸과 같았다는 것은 온 나라에서 다 아는 바입니다. 허균이 일찍이 시문을 지어 우영에게 주기를 '나의 벗 심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균은 한평생 정도전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고 우영의 시도 그 안에 뽑아 넣었습니다. 그런데 계축년 뒤로 허균은 말하기를, "나는 복이 있다.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우영에게 준 시를 모두 가지고 와서 나의 문집 속에다 넣으려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터져서 나만 화를 면하였다." 하였습니다. 심우영과 서양갑은 모두 허균이 친히 기른 자들입니다. 균이 양갑의 자를 석선이라고 지어 주었으니 그것은 전설 속의 신선 황초평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킨 일에서 뜻을 취한 것입니다. 허균이 매번 하는 말이 '오늘날 영웅은 내가 본 바로 는 서석선뿐이다' 하였는데, 허균이 법망에서 빠져나가게 된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축년에 허균이 태인에서 올라온 후에 말하기를, "옥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신경이 쓰여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는데, 죄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오던 길에 선전관을 만나자 혼이 떨어져 나갔는데, 내가 서 있는 곳을 그냥 지나가자 매우 기뻤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역적의 격문은 내가 지었지만 내가 우영으로 하여금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끝내 죄를 면할 수 있었는데, 허실은 어떻게 내가 지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단 말인가. 매우 잘못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경술, 신해년 간에 이르기를 '상이 법궁으로 이어하지 않으면 법궁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게 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묻기를 '이른바 주인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천시와 인사를 놓고 볼 때 대군이 마침내 주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계축년 전에는 허균이 스스로 말하기를 '의가 성사만 되면 원훈을 바로 이루게 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매번 말하기를, "이이첨의 집에 머리가 큰 뱀이 있는데 최영경과 김직재의 귀신이라고 한다. 그러니 얼마 후에 망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변란이 발생하여 몸둘 곳이 없게 되자 결국 이이첨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신이 계축년 가을 무렵 그에게 묻기를 '전에는 어찌 대비로 하여금 의를 왕위에 앉혀 놓고 수렴청정하게 하겠다고 해놓고 오늘날은 그를 폐위시키겠다고 하는가?' 하니, 허균이 대답하기를, "너는 나이가 어리니 무엇을 알겠는가. 말로를 걷는 사람은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다가 과녁을 세워야 세상을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마 허균의 성품이 경솔하지 않았다면 신은 필시 허균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마음도 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방자한 말을 함부로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그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신의 집안이, 그의 전일에 임금을 모해한 사실과 서궁을 부추겨 의를 세우려 했던 사실과 심가와 윤가의 혼사를 의논한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싫어하여 기필코 우리 식구를 다 죽이고자 기회를 틈타 모함을 하기에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신은 허균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인데, 알면서도 일찍이 진달하지 않은 죄는 마땅히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허균의 죄는 그 진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신의 아비의 차자는 시대 상황을 알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므로 그저 그릇된 일인 줄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남곤이 광국의 공훈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비록 허균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어서 변무하는 일을 감당할 것이며, 대론의 경우는 삼사와 우의정, 동벽과 서벽의 다른 관리들이 응당 수일 안에 처리할 것이므로 허균과 같은 역적이 간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담당하면서 뒤로 물리고 또 물려 고의로 지연시키면서 오로지 신의 아비를 무함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적인 원수를 갚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허균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천지간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게 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허균이 말하기를, "정협이 자복하는 날에 이원형이 먼 곳으로부터 손을 흔들며 오기에 내심 그의 공초에서 말이 나올까 우려했는데 도착한 후에 문초하였으나 발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겨우 모면하였다." 하였습니다. 균이 또 말하기를, "내가 만약 정권을 잡고 대비가 청정을 하게 된다면 내가 심이기가 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원상이 되어 온 나라의 일을 결정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렇듯 무뢰하고 패려스러운데다 흉악하기까지 한 허균의 죄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지금은 대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허균과 같은 역적의 도움이 없더라고 일을 변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을 모해하고 의창을 세우려 한 죄와 의를 내세워 서궁으로 하여금 수렴청정하게 하려 한 허균의 죄를 다스리소서.
기준격이 올린 비밀상소문의 전문이지만, 역모를 꾀했다는 확증을 제시하지 못한 채 산만한 내용과 허술한 진술로 일관하고 있다. 또 역모를 고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처리되는 과정이 애매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이 상소문에 담긴 내용에 대해 반신반의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역모를 고변한 상소문이라면 지체없이 관련자를 잡아들여서 사실의 확인을 서둘러야 하는데도, 몇 달 동안이나 방치하여 두었다는 사실이 같은 날짜의 실록에 '해설기사'로 등재되어 있음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상소를 오랫동안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가 무오년 윤4월 14일에 추국청에 계하하였다. 당신에 기자헌은 강가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준격이 이 상소를 올려 그의 아비를 구하였다. 허균의 세력도 이때부터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조정의 반응이 신통치 아니하자, 기준격은 이틀 뒤인 26일에 다시 비밀상소를 올려 허균의 반역모의를 고변하였지만 그 내용도 먼저 올린 비밀상소문과 대동소이할 뿐 더 새롭고 구체적인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과정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대목은 교산 허균이 기준격의 상소를 반박하는 비밀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문이 분실되어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실록이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을 고려한다면 교산 허균의 상소문은 누군가에 의해 파기되지 않고는 분실될 수가 없고, 또 분실되어서도 아니되기에 의도적으로 그를 무고하였거나 모함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1617년 12월 26일자의 "광해군일기"는 우참찬 허균이 비밀리에 상소문을 올렸으나 그 내용이 유실되었음을 적었고, 다시 1618년 윤 4월 7일자에는 궁색하게도 허균이 올린 비밀상소문의 '대체적인 내용을 요약해서 등재' 한다는 애매모호한 기사까지 있고 보면 교산 허균에 대한 국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삼가 정원의 계사를 보건대, 곽영의 상소에 신의 이름과 경준의 흉격 등의 말이 있습니다. 이에는 명확한 말의 출처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 곽영과 함께 궐정에서 신문을 받아 그 출처를 끝까지 캐내어 허실을 밝힘으로써 모함 당한 신의 원통함을 씻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물론 허균의 반대상소는 채택되지 않았고, 조정은 그를 국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모의 확증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이 사건을 의심하고 해괴이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형편이었고, 교산 허균의 자복을 받아 내지 못한 채 그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게 되었다. 물론 허균의 확실한 자복이 있을 때까지 국문을 계속해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다. 이같이 황망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관들은 '해설기사'를 써서 이 사건의 애매함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하인준과 황정필이 대체로 공초에 자복하였으나 또한 서로 미루고 핑계 대어 옥사의 실정을 다 캐내지 못했는데 국청이 급급히 허균을 아울러 죽이고자 계청하였으니, 이는 대게 이이첨이 옥사를 완결 짓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형을 받은 사람들은 불과 한두 차례의 형신에 잇따라 죽어 나갔으니 그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상황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광해군은 정승들과 의금부의 당상들을 거느리고 친국에 임했다. 잡혀 온 사람들은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문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혹독한 매질 속에서 작성된 현웅민의 공초는 음미해 볼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후의 흉서는 모두 신이 한 짓으로 허균은 모르는 일입니다. 단지 신만을 정형하소서. 허균이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 친국이 더 길어지면 허균이 입을 열지도 모른다. 그가 입을 열어서 '서궁을 핍박한 일' 등을 거론한다면, 폐모의 난정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공초에 적혀야 하지를 않겠는가. 이를 두려워한 이이첨 등은 서둘러 정형하기를 목청 높이 주청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광해군이 이를 가납함으로써 친국을 끝내게 되었다. 교산 허균은 결안에 승복하지 않은 채 광해군 10년 8월 24일에 이르러 서쪽 저잣거리로 끌려 나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진실로 파란 많았던 인생을 마감하는 허균다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교산 허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헌은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허균을 역모의 괴수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기준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기자헌의 탄식에는 조선 선비의 양식이 담겨져 있었고, 또 "왕조실록"은 그것을 적어서 후세에 전하고 있음에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
* 학문을 하는 자는 오직 정성을 다하는 것과 오래 계속 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요, 오래 계속하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수광)
1 서울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 강남땅 석촌호수가에 커다란 돌비석이 서 있고, 그것이 약 3밸 50여 년 전 청나라의 강압에 의해 세워진 치욕의 '삼전도비'라는 사실은 늦어도 알려져 있지만, 그 비석에 담겨진 통한의 역사는 고사하고 비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기는 정말로 쉽지가 않다. 우리는 치욕적인 과거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마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일본제국의 조선침략과 36년간의 식민통치를 입에 담으면서도, 실상은 그보다 더 참담하고 더 수치스러웠던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새겨 보고자 하질 않는다. 고려왕조가 원나라를 상국으로 섬겼던 까닭으로 임금의 묘호에 충 자를 써야 할 만큼 치욕적인 시달림을 당했고, 조선왕조는 창업의 이념이 곧 향명배원이었기에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후일 상국으로 섬기게 된 청나라에 당한 것이기에 일시적인 응징이거나 보복쯤으로 생각한 때문이라면, 역사 인식을 날 세우기 위해서라도 '병자호란'을 전후한 치욕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인조 15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몽진하여 적군과 대치하고 있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병사)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휘하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선다. 적장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적장이란 후금을 창업한 누루하치의 아들인 청태종 홍타이치를 말하지만,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 조정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를 오랑캐의 괴수로 멸시해 왔으므로 그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주기다 더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 올라 청태종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2백 46년, 조선의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몸소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청태종 홍타이치는 항복한 조선왕조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수모를 강요하였다. 전쟁의 책임을 조선 조정에 전가하는, 이른바 전후 처리라는 착취의 감행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수항단이 마련되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워, 청태종 홍타이치의 위명을 영원히 기리되 그 비문은 자신들이 검증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오랜 논의 끝에 대제학 이경석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참판 오준에게 쓰게 했으며, 참판 여이징으로 하여금 전서하게 하였다. 짓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통한의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괴수를 황제라 부르고, 그의 은혜를 입어 조선 종사가 유지되며 따라서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되었음을 돌비석에 새겨 만세에 전해야 하는 욕스러운 문장을 지어야 한다면^5,5,5^ 조선의 사대부로서는 피눈물을 쏟아야 할 수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전문을 여기에 옮기는 것은 수치스러운 역사에 담겨진 교훈을 채찍으로 삼고자 함이지만, 혹여라도 '삼전도비'를 스치며 지나거나, 가까이로 다가서는 기회가 있을 때 비문의 내용을 알고 보면 색다른 감회를 느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청 숭덕 원년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께서, 우리 편에서 먼저 화의를 깨뜨렸으므로 크게 노하시어 병위로 임하시어 바로 동녘을 치시니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남한산성에 계셨는데, 위태롭고 두려워 마치 봄날 얼음을 밟는 것 같으시어, 밝은 해를 기다리시기를 5순이었다. 동남쪽 여러 군사가 잇따라 패해 무너지고, 서북쪽 장수들은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였으며 성안의 양식 또한 떨어져 갔다. 이러한 때에 황제께서 대군으로 성에 육박하시니, 마치 서릿발 같은 바람이 가을 대나무 껍질을 휘몰아 가려는 것 같고, 화로의 이글거리는 불이 조그만 새털을 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으로 병위를 삼으시고 오직 덕을 펴시는 것을 앞세우셨다. 그리하여 곧 칙유를 내리시어, "오라. 짐은 너를 온전하게 할 것이다." 하셨고, 용, 마(용골대와 마부대) 등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길에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문무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으시고, "내가 대국에 화호를 의탁한 지 10년인데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내가 어둡고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천토를 재촉하여 만백성이 어육이 되게 한 것이니,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차마 죄인을 도륙하지 않으시고 이와같이 타이르심을 받들어, 위로 우리 종묘사직을 안전하게 하고 아래로 우리 생령들을 보호하지 않으리오." 하셨다. 대신들이 찬성하여 마침내 임금께서는 수십기를 거느리시고 군전에서 죄를 청하였는데, 황제께서는 예로써 우우하시고 은혜로써 가까이 하시어, 한 번 보고 심복으로 허락하셨으며, 물품을 하사하는 은택이 신하들에까지 고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황제께서는 곧 우리 임금님을 서울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부르시어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셨으며, 백성을 무마하시고 농사를 권장하시니, 멀고 가까운 곳에 새떼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우리 나라의 수천리 산하가 이전과 같이되었다. 돌이켜보면 소방이 상국에 죄지은 지 오래 되었다. 기미년의 전쟁에 도원수 강홍립이 명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는데, 태조 무황제께서는 다만 홍립 등 몇 사람만 머물러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셨으니 그 은혜가 한없이 컸다. 그런데도 소방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모르다가 정묘년에 지금의 황제께서 동정을 명하시자 우리 임금과 신하는 성으로 피해 들어가서 화평을 청하였다.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시고 형제의 나라와 같이 보시어 강토를 복원하시고 강홍립 또한 돌아왔다. 이로부터 예우가 변치 않으시어 관개가 서로 오고갔는데, 불행히 근거 없는 논의가 일어나서 소란꾸미기를 선동함으로 소방이 변방의 신하들을 선칙하였으되, 불손한 말이 계속 돌아다녔다. 그 문서를 상국의 사신이 얻었으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관대하게 용서하시어 즉시 군사를 가하지 않으시고, 먼저 명지를 내려 나라에 출정할 시기를 효유하셨는데, 이리 핑계 저리 핑계 할 뿐 아니라, 군사를 일으키지 않다가 몸소 명령을 받고 끝내 모면하지 못하였으니, 소방 군신의 죄가 더욱 모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황제께서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시고 다시 일부 군대에 명하시어 먼저 강도를 함락시켜 궁빈, 왕자와 경사의 가족들까지 다 포로로 하셨는데, 황제께서는 여러 장수들을 경계하시어 소란 떨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 종관과 내시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셨다. 또 크게 은전을 내리시어 소방의 군신과 포로된 귄속들을 옛집으로 돌려보내셨다. 서리와 눈은 따뜻한 봄으로 변하고, 가뭄은 단비가 되었으며, 망한 것이 다시 살아나고, 끊어진 것이 다시 이어졌다. 동토 수천리가 고루 생성의 혜택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만고의 기록에 드문 일이다. 한수 상류 삼전도의 남쪽은 곧 황제께서 머물러 계시던 곳이라 단과 뜰이 있는데, 우리 임금께서 수부에 명하시어 그 단을 더욱 높고 크게 하시고, 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워서, 황제의 공덕을 드날리어 영원히 전하게 하셨다. 참으로 천지 자연과 함께 함이니, 어찌 우리 소방만이 대대로 영원히 의지하랴. 또한 대조의 인을 행하고 무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아무리 먼 곳에 있던 자라도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으리니, 그것은 다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큼을 본뜨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린다 하더라도, 그 만의 하나라도 방블케 하기에는 모자랄 것이나 삼가 그 대략을 실을 뿐이다. ------ 2 청태종 홍타이치는 조선의 세자 내외와 대군 한 사람을 인질로 요구했다. 조선에 대한 더 많은 요구와 거기에 따르는 핍박의 여지를 남겨 두려는 속셈이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거절할 수 있는 명분도 힘도 없었다. 인조는 피눈물을 쏟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갈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 장씨를 홍타이치에게 인질로 내주었다. 세자 내외와 대군 내외가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서울인 심양(북경으로 옮기기 전이다)까지 끌려가자면 그들을 호위하고 수행해야 하는 조정의 관원들과 내시 상궁들도 있어야 하질 않겠는가. 춘성군 남이웅을 재신으로 삼고, 대사간 박황, 참의 김남중 등의 품계를 올려 부빈객으로 삼아서 세자를 호종하게 하였으니, 또 이들을 따를 수행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이들과는 별도로 전범으로 지목된 척화신들의 강제 연행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쪽 같은 지조로 홍타이치의 면전에서조차 조선 선비의 기개를 꺾지 않았다 하여 병자년의 삼학사로 추앙받게 될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의 당당한 모습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조선 세자 일행이 심양에 당도하자 청태종 홍타이치는 몸소 조선인 인질들을 친국하겠노라 선언하고 먼저 전범(척화를 주장하였다 하여)으로 지목된 홍익한 등 삼학사를 친국장으로 끌어 냈다. 3월 7일, 청태종 홍타이치는 홍익한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준다면 부귀와 영화를 내려서 극진히 우대할 것이라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홍익한은 조금도 굽힘이 없다가 홍타이치의 말이 끝나자 지필묵을 요구하여 자신의 심회를 글로 적어서 보여 주었다.
조선에서 잡혀 온 신하 홍익한은 척화한 사실의 내용을 분명히 말하고자 하나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글로써 대신하고자 하오. 온 세상은 다 형제가 될 수 있으나 천하에 아비가 둘 있는 자식은 없소, 조선은 본래 예의를 존중하고 간신은 오직 바른 대로 주장함이 풍습으로 되어 있는 까닭으로 지난해 봄 간관의 직을 맡고 있을 때, 금국이 장차 맹약을 배반하고 황제를 참칭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만약 정말 맹약을 어긴다면 이는 곧 형제를 거스르는 것이고, 또 황제를 일컫는다면 이것은 곧 천자가 둘 있게 되는 것이오. 한 집안에 어찌 형제가 어그러지는 일이 있을 것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두 천자가 존림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나는, 위로 임금과 어버이가 다 계시되 모두 안전하게 부호해 드리지 못하여 왕세자와 대군을 포로가 되게 하였고 늙으신 어머니의 생사조차도 모르고 있소. 내 한 장의 상소로 인해 나라에 환란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충효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는데 어찌 삶을 바랄 것인가. 천만 번 죽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고 피를 북에 바르면 넋은 하늘을 날아 고국으로 돌아가 놀 것이니, 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 일이오,. 이밖에 더 할말은 없으니 어서 나를 죽여 주기 바라오.
홍익한의 뒤를 이어 윤집과 오달제도 홍타이치의 친국장에 끌려 나왔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가기 전날인 1월 29일에 두 사람은 최명길에 의해 적장에게 넘겨졌었다. 적진에 당도하기 전 최명길은 윤집과 오달제에게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빌면 무사할 것이니 자신의 말을 따라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으나 두 사람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었다. 홍타이치는 역시 타이르는 말로 두 사람을 극력 회유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들의 목을 치라!" 세 사람의 조선 선비들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결기를 굽히지 않은 채 심양성의 외양문 밖에 마련된 형장에서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참되고 값진 삶을 마감하였다. 후일 청나라 조정에서도 삼학사의 높은 기개를 가상히 여겨, 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심양성 외양문 밖에 사당과 비석을 세우고, 그 비에 '삼한산두'라 새겼다. 조선의 태산, 북두와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죽어서 아름다운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도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민초라 불리웠던 백성들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독자들이여, 놀라지 마시라. 병자년의 호란으로 만주땅에 끌려간 조선인 남녀의 수는 자그마치 60여 만을 헤아렸고, 그들의 대부분이 곱고 나이 어린 규중처녀들과 사대부가의 내당마님이었기에, 후일 그녀들이 용케도 목숨을 부지하여 고향이 돌아왔을 때 조선땅에는 화냥년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병자년의 호란이 안겨다 준 치욕적인 비극에 다시 한 번 몸서리치게 되는 것이다. ------ 3 심양성. 심양성은 청나라의 첫 도성으로 만주대륙으로 이어지는 서북쪽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요충이다. 봉천이라고 불리운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옛 지명을 따서 그대로 심양으로 불리우며 동북삼성의 요충임을 자부하고 있다. 보행으로 왕래하던 조선 시대를 심양과 한양과의 거리를 대략 1천 6백 60리로 여겼으나, 지금은 대한항공의 직항로가 개설되어 2시간이면 오갈 수 있게 되어 가슴 아팠던 지난날의 역사를 쉽사리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심양은 옛날 읍루의 땅으로 한나라 때에는 요동군에 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에 속하였었다. 요, 금 2대에 와서 비로소 요양에 동경을 세우고 심주소덕군을 설치하였는데, 원나라에서는 심양로라고 불렀다. 명나라에서는 심양위를 두어 만주의 여진족을 경계하였으나, 광해군 13년에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함락되었다. 누르하치는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심양의 정령이 시급하다는 생각으로, 4년 후인 인조 3년에는 수도를 요양에서 이곳으로 옮겨 중원진출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청태종 홍타이치는 인조 9년에 거대한 내외 성곽을 쌓고 내성에 여덟 개의 문을 세웠으니, 남쪽 왼쪽에 있는 것이 덕성문, 그 오른편에 있는 것이 천우문, 북쪽의 왼편에 있는 것이 복승문, 그 오른편에 있는 것이 지재문, 동쪽의 남편에 있는 것이 무근문, 그 북편에 있는 것이 내치문, 서쪽의 남편에 있는 것이 회원문, 그 북편에 있는 것이 외회문이다. 성의 모양은 방형이고 문로는 가로 세로 성안을 꿰뚫어서 마치 우물 정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남과 북, 동과 서의 네 길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는 모두 십자누각이 서 있고, 그곳을 중심으로 민가가 즐비하여 시장이 성해 사람들의 생활이 무척 사치스럽다. 종루는 북소문이랄 수 있는 북승문 안의 큰 시가에 있고, 고루는 지제문 안의 큰 거리에 있다.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이 기거하던 '조선관'은 성내 동남쪽에 있었다고 막연히 전해지고 있었는데, 환력이 여섯 번이나 돌고난 새 병자년에 그 조선관의 규모를 알리는 '조선관도'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청나라로 가는 사신에게 심양에 들려 '조선관'이 있었던 위치를 찾아서 그림으로 그려 오라는 영조의 명을 받은 사신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라면, 소현 세자가 볼모살이를 한 지 1백 20년 뒤에 그린 그림인 셈이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의 이규태 씨는 그의 칼럼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3년 전 옛 문헌에 기재된 글을 모아 이 심양의 조선관을 찾아 본 일이 있었다. 김창업의 연행록에 보면 심양의 대남문을 들어가서 1백여 보를 걸어가 동쪽으로 꺾어 드니 조선관터가 나왔다 해서 그 기록대로 방향을 잡아 발자국을 헤아리며 걸어갔더니 화양절충식의 'ㅁ'자형 2층집이 나왔다. 옛 심양지도에 바로 이 골목이 고려관호동으로 되어 있고, 일본제국주의 시대에는 이곳에 대동학원이 자리잡고 있었다는데, 바로 그 건물임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시립 심양아동도서관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도서관장은 장국철이라는 한국인 2세였다. 물론 그 장씨는 그 자리가 인질관터인지 모르고 있었다. 중국의 문헌인 "성경통지"에 보면 조선관 당시의 건물 배치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이번에 발견된 그 1백 20년 후의 조선관 배치도와 비교하여 보면 이렇다. 대문은 3칸으로 남향이고 문을 들어서면 5칸의 정방과 동서 양편에 5칸씩 상방이 있다 했다. 뒷방에는 세자와 대군이 기거하고 호방 법규와 예절을 담당한 예방, 마필과 행차를 담당한 마방, 각종 수선을 맡은 공방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조선관도'에 보면 두 개의 상방 가운데 동상은 남아 있는데 서상만은 그려져 있지 않아 그간에 헐려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중문이 가로질러 있어 그 문밖에 하인들이 움막을 짓고 기거했으나, 노숙하는 자도 있었다 했는데 '조선관도'에는 그 중문이 보이지 않는다. 세자는 사신이 들렸다 떠날 때마다 이 조선관 기둥에 기대어 대남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그 문밖으로 나가면 신발을 끌고 문밖까지 나가 요동벌 아스라이 콩알만하게 겨자씨만 하게 작아지다가 하늘과 땅이 맞닿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한다. 치욕 문화재를 없애 버린다고 그 치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세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는 반사효과를 위해 보존하는 것이 앞서가는 나라들의 추세다. 이로써 문헌과 그림으로 확인된 심양의 '조선관' 터만이라도 정부 차원이건 민간인 차원이건 이를 매입 재건함으로써 관광자원, 정사자원으로 영구히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 4 요즘 신문지상에 가끔 오르내리는 말에 '열지자도 가요, 습지자도 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알기 쉽게 풀면 '찢는 사람도 옳고, 줍는 사람도 옳다'가 된다. 이 말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심오하다. 어떤 일이 극단적인 이견으로 대립되어 있을 때, 그 상반된 견해에 대하여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는 것이므로 일종의 명분론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협상의 길을 여는 중요성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양시론이 생겨난 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1623년, 광해군을 밀어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이 암암리에 추진해 온 실리외교에 대한 방향전환에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밀어냈던 인조인지라 광해군의 향금정책을 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정 중신들의 의향도 향명배금이었다. 이런 연유로 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게 된다. 이 무렵에 등장하는 것이 최명길이 주도하는 '화친론'과 김상헌이 주도하는 '척화론'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목숨을 건 대립이었지만, 여기서는 그 배경을 상세히 기록할 지면이 없으므로 간략히 적기로 한다. 최명길이 주장하는 '화친론'은 당시 조선의 힘으로는 욱일 승천의 기세로 치솟아 오르는 후금의 국력을 당할 수 없으므로 서로 화친을 하여 조선의 안위를 보전하는 것이었고, 김상헌의 '척화론'은 이미 2백 년이나 섬겨 온 명나라가 있으니 오랑캐와 화친을 꾀하는 것은 도리를 모르는 금수의 소행이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대립을 놓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최명길의 '화친론'에 타당성을 부여하게 되지만, 당시의 사정으로는 그 명분에 있어서 김상헌의 '척화론'이 우위에 있었으므로 최명길의 '화친론'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매국노의 누명을 써야 할 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명길이 보여 준 공직자로서의 소신과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와 찬사를 보내게 된다. 만일 최명길이 명리에만 급급하는 안일무사한 생각으로 자신의 소식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세에만 영합했다면, 오늘 우리의 처지가 어찌 되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와 같은 '화친론'과 '척화론'의 첨예와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선 조정은 또다시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라는 전대 미문의 국난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론이지만 최명길의 '화친론'이 조정의 공론으로 채택되었다면 병자호란과 같은 참극은 경험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가 매국노로 몰릴 만큼 '척화론'이 우세한 당시의 정세로서는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남한산성이 청나라 병사들에게 완전 포위된 지 23일째인 1637년 1월 18일, 조선 조정은 마침내 청나라의 진영에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내기로 했다. 바로 그 국서를 찢어 팽개치면서 최명길을 질타했다. "지천, 자네의 선대부께서는 사우들 사이에서 지조 있는 선비라고 추앙을 받았는데, 자넨 어찌 그 모양인가. 선대부께서 통곡을 하시고 계실 것일세!" 그러나 최명길은 태연히 대답했다. "대감께서는 찢으셨지만, 저는 도로 주워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최명길은 김상헌이 찢어 팽개친 국서를 주워 모아서 풀로 붙인 것이다. 찢은 사람은 김상헌이었고, 주운 사람은 최명길인 셈이었다. 여기서 '열지자도 가요, 습지자도 가'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를 모두 옳다고 보는 것은 두 사람의 참뜻이 모두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이 꼭 한 가지일 수만은 없다. 김상헌의 명분론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었으나, 그 어려웠던 시기에 실리론을 펼칠 수 있었던 최명길의 용기는 더욱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참으로 절묘한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삼전도의 수항단에서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에게 치욕의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리면서 항복하는 것으로 병자호란은 매듭 지어졌지만,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과 척화를 주장했던 김상헌은 똑같이 청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받게 된다. ------ 5 1641년, 전범의 죄인으로 청나라의 도성인 심양땅으로 잡혀가 하옥되어 있던 김상헌이 의주옥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심양땅으로 끌려가서 무기수들이 수감되는 남관의 옥사로 옮겨졌는데, 바로 그 자리에 투옥되어 있던 최명길과 조우하게 된다. 이 무슨 운명의 만남이던가. 그렇게도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했던 두 사람은 비로소 시심으로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김상헌이 먼저 읊었다.
조용히 두 사람의 찾아보니 문득 백 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려.
이에 대한 최명길의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는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돌리기도 한다오.
참으로 기막힌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서로 상극과도 같았던 주장을 되풀이하다가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은 패전국이 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적국의 감옥에 유폐되지를 않았는가. 그 애타는 이심전심의 우애로 두 사람은 7년 만에 서로가 품었던 오해를 풀어내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강직한 사상은 다시 시로써 표현되어 나타난다. 여기서는 원문을 생략하고 핵심적인 부분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아침과 저녁은 바꿀 수 있을망정 윗옷과 아랫옷을 거꾸로야 입을쏘냐.
김상헌의 명분론은 패전국의 전범이면서도 이와 같았고, 불행을 같이하는 최명길의 실리론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같은 물이요 털옷도 삼베옷도 옷 아닌 것이 없느니.
전쟁은 패전으로 끝나고 민초들의 고초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두 사람의 심저에 깔린 정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만리타국에 있는 옥중에 유폐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명분론과 실리론을 우정에 곁들여서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 선현들의 경륜이 아름답기 한량없다. 이 같은 선비들의 의식을 어찌 당파싸움으로만 매도할 수 있겠는가. 최명길과 김상헌이 주고받은 시문 화답을 조선땅에서 전해들은 이경여는 너무도 감동하여 한 편의 송시를 지어 두 사람에게 보냈다.
두 어른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이니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김상헌), 한때를 건져 낸 큰 공적일세(최명길). 이제야 원만히 마음이 합치는 곳 남관의 두 분은 모두가 백발일세.
최명길과 김상헌.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흑백논리에 젖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화친론'과 '척화론'의 상극된 대명사로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조선조 시대의 정쟁을 이단시하는 식민지 사관에 젖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지식인들은 아무래도 둥글면서도 도를 잃지 않은 최명길의 경륜과 용기를 더 높이 본 듯하다. 당시의 석학이었던 택당 이식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청음이 남한산성에서 나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비록 지조가 높은 행위이기는 하나, 역시 그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완성군(최명길)이 그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국익우선이라는 이념은 같을지라도 대책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취할 수가 있다. 이러한 의견의 상충을 유독 조선 시대의 경우만을 당파싸움으로 규정하고, 마치 그것으로 인해 나라가 망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 인식이 편협한 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믿어진다. ------ 6 적지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최명길은 다시 심양으로 보내 줄 것을 인조에게 청했다. 첫째는 소현 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의 귀환을 서둘러야 하고, 둘째는 조선인 장정들에게 내려진 징병 안의 철폐를 요구해야 하며, 셋째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속환을 교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윤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명길은 도성을 떠나기에 앞서 청나라로 잡혀간 인질 중에서 연고자가 없거나, 속환에 필요한 금품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은 2천 5백 냥을 마련하였다. 물론 국고금을 전용한 것이었다. 최명길이 도성을 떠난 것은 9월이었고, 심양에 도착한 것은 동짓달 그믐께였다. 청태종 홍타이치는 동관문 밖까지 나와서 몸소 최명길을 맞이하였다. 물론 조선이 자진해서 보낸 첫 사신인데다가 화친하는데 공이 큰 최명길이 정사로 왔기에 그들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과시함일 것이었다. 최명길은 전란의 후유증으로 민심까지 흉흉해진 조선의 사정을 세세히 알리고 앞에서 적은 세 가지 간청을 관대히 처분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홍타이치는 소현 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의 귀국만을 불허한 채 나머지 두 가지는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심양에서 새해를 맞았다. 인조 16년 2월, 최명길은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 내외에게 작별을 고하고 심양을 떠났다. 연고자가 없는 조선 백성 7백여 명과 연고자가 있는 2만 9천여 명에게 속환이 허락되었던 까닭으로 최명길과 함께 귀국하는 사람들은 무려 3만여 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행렬이었다. 최명길의 귀국은 조선 강토를 들뜨게 했다. 영영 돌아올 수 없으리라 여겼던 가족, 친지들이 대거 돌아온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호도 잠깐이었다. 화냥년^5,5,5^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인이라 하여 환향녀라 하고 적은 것이 그렇게 읽히고, 그렇게 와전되고 멸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양에서 돌아온 기혼여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사대부가 돌아온 기혼여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사대부가에서 돌아온 처첩들을 화냥년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의정 장유까지도 속환되어 돌아온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정유의 딸이 봉림대군의 부인이 아니던가. 이름있는 사대부가에서는 모두 장유와 뜻을 같이 하였다. 여인의 절개가 도덕의 척도로 평가되던 시대, 설사 그것이 전란으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더럽혀진 여인들에게는 오직 화냥년이라는 치욕의 굴레가 씌워질 뿐이었다. 버림받은 여인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더러는 목을 매고 죽었고, 더러는 목을 매고 죽었고, 더러는 강물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길가에는 여인들의 주검이 즐비하였다. 모두가 '화냥년'들의 시신이었다. 최명길은 왕조의 배알을 다시 청했다. 환향녀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전하, 비록 환향녀들이 절개를 잃고 몸을 망쳤다고는 하오나, 이는 스스로 음행을 자행한 것이 아니옵고, 극심했던 전란과 적지에 인질이 되었던 만부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신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오나, 나라에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으리까." 인조는 탄식만을 거듭하였고, 최명길은 궁여지책을 진언하였다. 각 고을에 있는 강을 지정하고, 정해진 날에 환향녀들로 하여금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게 하는 것으로 심신을 모두 닦은 것으로 하되, 그런 연후에는 따뜻이 맞아들이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인조는 최명길의 진언에 따른 교지를 내렸다.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인조의 수습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냥년으로 음독이 변해 버린 말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지고 있음에랴. ------ 7 장장 8년 동안이나 인질로 잡혀 있었던 소현 세자는 명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고, 보다 넓은 새로운 세계에 눈뜸으로써 비극의 길을 걷게 된다. 청나라의 섭정왕 다이곤이 오삼계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진군할 때, 그는 소현 세자에게도 동행을 청했다. 강요나 다름이 없는 청함이라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으나, 조선에 다녀온 뒤로 우울해 있었던 소현 세자는 마음도 달랠 겸, 새로운 문물에 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다이곤을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나라는 망하고 없어도 문물과 풍속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조선과도 다르고, 심양과도 다른 북경의 풍물은 소현 세자의 모든 관심을 끌어당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이 그를 눈뜨게 하였다. 소현 세자가 북경에 머문 것은 기껏해야 70여 일이었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7년에 버금가는 변혁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심양에서와는 달리 소현 세자의 행동은 아무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었다. 명나라가 이미 멸망하였으므로 청은 더 이상 소현 세자를 구속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소현 세자는 북경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양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중국명)과의 교유는 그의 사상을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현 세자는 아담 샬과 자주 만나면서 역법, 천문학, 천주교 등과 같은 서양문물에 거침없이 심취해 들어갔다. 이에 부응하듯 아담 샬은 친절하고 자상하게 소현 세자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로서는 장차 조선의 임금이 될 소현 세자에게 서양문물의 깨우침과 더불어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다는^5,5,5^ 앞날을 위해서도 긴요한 포석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리라. 소현 세자는 촌각을 아껴 쓰며 되도록 많은 것을 배우기에 힘썼다. 그 자신에게도 크나큰 포부가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담 샬은 자신이 한역한 "천문역산서"와 여지구, 천주상 등과 같은 진귀한 서책과 물건들을 소현 세자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귀하가 주신 천주상과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즉시 그중 몇 권의 책을 읽어 보았는데, 그 속에서 정신수양과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천문학에 과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한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아마 우리를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소현 세자가 아담 샬에게 답례로 보낸 서한이다. 우리는 이 서한을 통해 서구 과학에 대한 소현 제자의 관심과 흥미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아담 샬과의 우의도 꽤나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서한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인조 22년 11월 26일, 마침내 소현 제자는 장장 8년 동안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민희빈과 두 아들인 석린과 석견을 대동하고 북경을 떠났다. 그가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인조의 미움을 받지 않고, 또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조선과 서양문물의 교류를 적어도 백년 이상을 앞당겼을 것이지만, 그 절호의 기회가 무산된 것은 조선 왕조사에 있어서도 큰 손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찬란한 여명 그리고 선각자의 고독
*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진실로 인민에게 이익이 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한테서 나왔다 하더라도 장차 들어서 본받아야 할 것이다. (박지원)
1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선각자가 있어야 나라의 미래가 보장된다. 어둡고 답답했던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나라의 미래를 향해 등불을 높이 들었던 선각자의 행적을 바로 살피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학문으로서 역사도 인물사적인 연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사의 경우는 활동이 눈부셨던 선각자들의 행적을 애써 외면하고, 알려진 사실에만 매달려 있었던 탓에, 그들 선각자들이 인물사적인 연구마저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지 사관에서도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기에 자주적이고도 진취적인 역사 인식을 정립하지 못한 큰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가령, 흥선대원군의 유아독존적인 아집 때문에 개항에 실패하였다던가^5,5,5^ 같은 맥락으로 흥선대원군과 중전 민씨와의 끝없는 갈등과 대립으로 정치부재의 현상을 빚어 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바로 그런 오류를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봉건전제국가가 자력으로 개항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미래를 예견할 줄 아는 선각자가 있어야 하고, 그들의 꿈과 고독 그리고 뼈아픈 좌절이 있지 않고서는 근대국가로의 발돋움은 불가능하다. 19세기가 저물어 가는 조선왕조에도 국가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던 선각자가 있었기에 자주적인 개항의지를 불태우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던 개항 2세대가 탄생할 수가 있었다. 이 엄연한 사실이 학문의 방법으로도 정립되어 있지를 않다면 학계의 게으름도, 예술계의 안일함도 함께 질타를 받아서 마땅하다. 그것이 바로 청소년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꿈을 앗아낸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개항사를 소상히 살펴보면 그 사상적인 변천이 두 세대로 이어진 것을 알 수가 있다. 개화사상의 정상이자 원로격으로 평가되는, 박규수, 그는 실사구시의 거벽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으므로 실학중에서도 할아버지의 북학 사상을 이어받은 두터운 선각자였다. 박규수는 고종 3년 7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평양 부민들에 의해 화공으로 격침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와의 우여곡절이 계속될 대 평안감사로 그 현장에 있었다. 조선의 개항사를 이끌었던 박규수의 위치로 보아 그 사실도 우연이랄 수가 없다. 그러나 박규수의 개화사상이 그 자신에 의해 구체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주장되거나 거론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의 영향하에 유홍기, 오경석, 이동인과 같은 선각의 젊은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유홍기는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는 가계에 따라 당연히 역관이 되어야 할 운명인데도 스스로 한의의 길로 들어설 만큼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는 선각자였다. 어려서는 담헌 홍대용의 실학사상에 심취하였고, 그의 영향으로 양명학의 대가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양명학이란 중국 명나라 중기 사람인 양명 왕수인이 이룩한 신유가철학으로 송대에 확립된 정주학과 대립적인 성격이 있어 심학이라고도 불린다.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으로 앎과 행함이 하나이니 이른바 지행합일이 강조된다. 양명학의 성격을 보다 극명하게 설명하자면 맹자의 실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들, 나아가서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청대의 실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탓에 조선에서도 양명학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유홍기의 경우는 인식과 실천이 하나라는 의미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홍기가 국제정세에 능통하고 조선의 개화를 그 누구보다도 앞서서 생각할 수가 있었던 것은 미래를 향한 진취적인 사고와 정세를 분석할 수 있는 조직적이고도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였고, 특히 청나라에 자주 출입하는 역관 오경석과 같은 죽마고우와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석학의 대가였던 오경석은 청나라에 다녀올 때마다 수많은 전적들을 가지고 왔다. 유홍기는 그의 주선으로 개항사상에 눈뜰 수 있는 전적들을 섭렵할 수가 있었으므로,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격동적인 국제정세를 비록 문자로나마 터득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오경석에 의해 조선의 개화에 눈뜨고 있었던 박규수로서도 그와 마주 앉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노라면 언제나 새로운 사실에 눈뜨고 있다는 희열에 빠지곤 하였다. 후일 고균기념회에서 간행한 "김옥균전"에는 유홍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대치 선생 유홍기의 집은 장교와 광교 사이에 삼각정에 이르는 외나무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서 지금의 관철정으로 가는 좁은 길이 있는데 대치 선생의 집은 바로 그 좁은 길가에 있다. ^5,5,5^ (중략) ^5,5,5^ 대치 선생은 원래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의를 업으로 삼았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학문으로서의 사학에 조예가 깊어서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했으며, 또 세계 각국의 역사에도 두루 통했다. 변설은 유창하고, 신체는 장대하였으며, 홍안백발, 언제나 활기 찬 행동으로 일관하였다.
유홍기와 오경석의 우애는 그야말로 남다른 데가 있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 중인계급이면서도 가계가 같은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또 어려서부터 중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지금의 관철동)에서 함께 뛰놀면서 학문을 익히고 견문을 넓혔다. 오경석이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서재를 '천죽재'라고 하자, 유홍기는 이에 뒤질세라 자신의 서재를 '송죽재'라고 할 만큼 두 사람의 친분은 지극하였고, 따라서 선의의 경쟁이라는 면에서도 앞뒤를 다투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자, 그러면 "한양유씨세보"를 살펴보자. 내가 에세이 형식의 읽기 쉬운 역사 얘기를 쓰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유홍기의 가족사항을 적은 한자투성이의 "한양유씨세보"를 제시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어서다. 이미 경험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유홍기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그의 생몰이 확실하지 않다는 등 터무니없는 말로 독자를 호도하고, 또 그의 가족사항에 관해서는 아예 거론조차도 하지 않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으로 아는 사람(심지어 학계에서조차)들이 뜻밖으로 많다. 이같이 무책임한 풍조는 마침내 조선 개항사를 주제로 한 이름있는 작가들의 역사소설에도 유홍기의 생몰과 가족사항에 관해서는 당연히 그려 낼 수 없게 하였고, 심지어 개항사에 기여한 인물만을 추려서 엮은 서책에서조차도 그의 '생몰이 확실치 않다'고 적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이건 정말로 뉘우치고 고쳐야 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근한 예가 되겠지만, 이웃나라 일본에는 당대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쓴 "용마가 간다"라는 대하소설이 있다. 명치유신의 성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자신의 젊음을 아낌없이 불태웠던 선각의 랑사,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를 추적하는 내용이지만, 료마가 자신의 자매들과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은 물론 그가 밟았던 전국 각지의 풍물이 현장감 넘치게 그려진 탓으로 자칫 논픽션으로 착각될 정도의 가치 있고, 또 재미있는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사카모토 료마라는 걸출한 선각자가 있었고 그의 꿈과 고독으로 점철된 고군분투에 힘입어 마침내 살장연합이라는 개항세력을 이끌어 내게 된다. 막부타도라는 공동의 전선을 펴게 된 살마번과 장주번의 연합은 개항을 외쳐 온 인재의 보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선각의 준재들에 의해 미개했던 일본이 국제정세에 눈뜨게 되었으며, 마침내 개항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감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일본의 청소년들은 사카모토 료마를 선각의 전형으로 존경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료마에 버금가는 꿈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때문인가, 사카모토 료마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에는 어김없이 그의 동상을 세워서 오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그의 선각이 얼마나 고독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던가를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에게 선각자의 꿈을 심어 주어야 하는 것은 학문적, 교육적 차원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예술적인 차원에서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한자투성이의 "한양유씨세보"를 여기에 제시하여 유홍기라는 걸출한 선각자의 가계와 가족사항을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아 두고자 하는 것이다. 유홍기는 순조 31년 10월 14일에 역관인 아버지 유익소와 어머니 김해 김씨와의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같은 역관인 최영원의 따님을 지어미로 맞이하여 슬하에 외동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이 족보에 적혀진 내용으로 보아서는 유홍기의 가계가 비록 중인이라고 하더라도 반가와 통혼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특히 유홍기의 두 사위를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작은 사위 김효철은 신분이 같은 역관출신의 가문에서 맞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큰사위 이승준의 경우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승준의 아버지 이인현이 무과에 급제하였다면 비록 서반이라고 할지라도 반가의 가문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백의정승으로 예우 받았던 유홍기의 인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그가 추구하였던 신분제도의 타파에 동조한 가문이 있었음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의원 유홍기의 호는 대치, 사람들은 그의 학덕과 인품을 받들어 백의정승 유대치 선생이라고 불렀다. 금석학의 대가 오경석은 박규수의 연행을 수행할 정도의 이름 있는 역관이었고, 이동인은 봉원사에 승적을 둔 행동파 승려였다. 당시의 신분제도로 본다면 의원, 승려, 역관은 모두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던 중인이었으므로 이들의 개항사상은 조정이나 사대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초기 개항사상은 번져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던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박규수가 평양에서 금의환향하여 예문관 제학과 한성판윤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는 동안 재동에 위치한 그의 집에는 조선의 개항을 이끌어 나갈 나이 어린 귀공자들이 모여들게 된다. 열 다섯 살의 유길준, 열두 살의 금릉위 박영효, 스물 두 살의 김옥균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사대부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준재들이었고 특히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였다. 박규수는 이들 사대부가의 귀공자들을 중인인 유홍기, 오경석, 이동인 등의 문하로 보내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어 갈 역군으로 다듬고자 하였다. 귀공자들은 비로소 "해국도지", "영환지략", "중국견문록" 등과 같은 새로운 문물이 적힌 서책을 대하게 되면서 보다 넓은 세계로 향한 꿈을 키우게 된다. ------ 2 18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선주는 미국인 프레스턴이었고, 덴마크인 선장 페이지와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그리고 청국인 통역 이팔행 등을 포함하여 서양인 5명, 청국인 13명 등 총 23명의 승무원 중에는 다섯 사람의 흑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흑인을 오귀자라고 불렀던 일부 조선의 지식인들까지도 그 몰골을 처음 보는 지경이었고, 또 신식대포가 뿜어내는 화력에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1866년 7월 12일부터 같은 달 24일까지 13일 동안, 대동강을 피로 물들였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병인양요'의 개막을 알리는 이양인과의 본격적인 접촉이자, 조선 개항사를 여는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었다. 물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 부민들의 화공으로 참혹한 종말을 맞았지만, 바로 이 점이 흥선대원군의 자부심에 불을 질렀다는 점에서 우리 근대사의 진로를 대단히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 프랑스함대가 내침하여 천하의 요새임을 자랑하던 강화도를 점령하여 쑥밭으로 만드는 이른바 '병인양요'가 발발했다. 프랑스군 병사들은 외규장각에 보존된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프랑스군이 강탈해 간 외규장각의 전적은 전체 3백 40여 책 중에서 1백 91종, 2백 97책이나 되었는데 대개가 '왕실의궤'류의 귀중본이었다. 함대 사령관 로즈가 본국의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서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적, 과학적 견지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물건들을 수색, 수집하였다.
이 문장으로 보면 저들의 조선 문화재약탈은 치밀한 계획하에서 이루어진 야만적인 행위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역사는 무심히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그로부터 1백 28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고 난, 지난 1994년 9월에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내한하여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휘경원 원소도감의궤" 상권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돌려 주면서 '영구 대여'라는 구차한 명분을 달았으나, 실상은 자국의 떼제베(TGV) 고속전철이 한국의 경북간 고속전철로 채택되기를 기대하는 염원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역사가 지나간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맥락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병인양요'로부터 5년 뒤인 1871년. 이번에는 미국함대가 내도하여 다시 강화도를 유린한 '신미양요'의 진화가 일었다. 조선으로서는 어재연 장군 형제를 비롯한 4백여 명의 장병들을 잃어야 했던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미국은 스스로 이 '신미양요'를 일러 '미국의 전쟁 사상 가장 작은 전쟁'이라고 했고, 또 '승리는 승리였으나 누구 한 사람 자랑할 것도 못 되었으며, 누구 한 사람 기억에 남겨 두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자평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사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신미양요'를 기점으로 도성의 변화한 거리와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서 나라를 보위한다는 이른바 개항과는 거리가 먼 양이, 보국 정책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1백 24년이 지난 지금도 강화도의 광성보에는 미해병들에 의해서 쏘아진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때의 결전을 실감케 하고 있으며,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4백여 명의 무명 순절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서 있어 무심히 지나는 길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때를 전후하여 명치유신에 성공한 근대 일본정부는 왕정회복의 기치를 펄럭이며 공공연하게 정한론을 거론하였고, 조선과 충돌할 수 있는 전단을 찾는데 혈안이 되더니 마침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점령하는 등 극동의 정세도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1875년 8월. 유신 일본국은 '운양호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무력 도발을 감행하며 조선침략의 마각을 드러냈고, 뒤이어 '강화도 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조선땅에 일본인들의 상륙이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저들의 공관보다 앞서 일본 불교의 포교를 빙자한 사찰이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점이다. 일본국 교토에 본찰을 둔 히가시홍간지에서 승여 오쿠무라 엔싱과 그의 여동생인 오쿠무라 이오코를 부산포에 보내 동본원사 부산별원을 개원하게 한 것이었다. 오쿠무라 엔싱은 일본국 구주의 나가사키 현에 있는 고덕사의 주지였는데, 이 고덕사의 역사에도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덕사는 임진왜란 때 부산포에 있었던 일본 사찰이었다. 그 사찰을 오쿠무라 엔싱의 13대조 할아버지 오쿠무라 소신이 개창 하였다면, 장장 3백여 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13대 선조의 유훈을 다시 이어받은 것이 되지를 않겠는가. 1591년 도오툐미 히데요시를 돕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오쿠무라 소신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조선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가라쓰 땅에 절터를 정하고, 번주 데라사와의 허락을 얻어 고덕사를 세운 것은 언제든지 조선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소망 때문이었는데, 그로부터 3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뜻을 이룬 셈이다. 오쿠무라 엔싱과 함께 조선땅으로 건너 온 그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의 존재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녀의 행적을 살펴보면 비록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장부의 기상을 넘어서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오쿠무라 이오코는 일본인 낭사들과 더불어 국사를 논할 만큼 남성적이며 정치적인 성향이 강했고, 이미 세 번에 걸친 이혼 경력이 있으며, 정한론자들과도 가까이 지내면서 조선 진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여장부였다. 후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스스로 종군하기도 하였고, 일본국으로 돌아가서는 '일본애국부인회'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금릉위 박영효가 일본땅에 망명하였을 때는 그의 통역이며 여비서요, 간호원임을 자처할 만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오라비 오쿠무라 엔싱이 자필로 적고 있다면, 조선 개항사를 거론하면서 오쿠무라 남매의 활동을 추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두 남매가 명치유신을 이끌어 낸 근왕파의 일원으로 분류된다면 그들의 조선 진출이 정치적으로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지를 않겠는가. 오쿠무라 엔싱이 조선에 머무는 동안, 히가시홍간지의 별원은 전라도 광주에도 개설되었고, 함경도의 원산별원도 문을 열게 된다. 오쿠무라 엔싱은 조선에서의 포교활동을 세세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조선국포교일지"라는 일기체의 귀중한 기록에는 당시 조선국의 사정도 심심찮게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고종 15년 4월 9일에는 부산포의 용두산을 포위하고 호랑이 사냥을 했다는 시를 남기고 있어 당시 부산포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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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호랑이는 잡지 못했어도 이 시로 미루어 1백 18여 년 전의 용두산이 얼마나 숲이 울창한 심산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예의 "조선국포교일지"에는 개화당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유홍기의 모습도 그려져 있으며, 특히 이동인의 밀항과 일본에서의 활동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어 조선개항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 3 이동인은 밀항을 해서라도 일본땅으로 건너가 존황토막이라는 기치를 펄럭이며 저들의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비결이 무엇이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일본국의 저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이동인에게 오쿠무라 엔싱 남매가 부산포에 상륙하여 사찰을 열었다는 정보는 백만원군이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었다. 1878년 6월 2일부터 이틀간에 걸쳐 이동인은 히가시홍간지 부산별원을 찾아가 오쿠무라 엔싱과 양국간의 관심사를 주고받으며 친불을 두터이 하였고, 그해 12월에 이르러서는 부산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군함 비예호에 승선하여 신식 군함의 위력과 설비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서는 일본으로의 밀항을 더욱 서둘러 단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동인은 오쿠무라 엔싱 남매에게 애원하듯 매달리며 일본국으로의 밀항을 성사시켜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만난 자리에서도 자신의 밀항이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더욱 부드럽고 순조롭게 할 것임을 집요하게 설득하였다. 해가 바뀌어 1879년 6월, 서울에 다녀 온 이동인은 김옥균, 박영호 등에게서 전별금으로 받았다는 금봉을 증표로 제시하면서 자신의 밀항이 어느 개인의 소망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일본으로 가야 하는 필연적인 사유를 오쿠무라 남매에게 강조해 보인 것이었다. 마침내 그해 8월, 오쿠무라 엔싱의 주선으로 이동인은 일본국으로 밀항할 수 있게 된다. 더구나 오쿠무라 엔싱과 동행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동인을 태운 일본군함이 구주의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여 정박하는 동안, 오쿠무라 엔싱은 그의 안전을 위해 서양식 양복을 입기를 권했고, 일본식 이름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한다. 이동인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여 조선인 최초로 서양식 양복을 입게 되었고, 아사노 게이잉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일본국 교토에 도착한 이동인은 진종본묘의 거찰임을 자랑하는 히가시홍간지의 대침전에 머물면서 일본어의 수련에 몰두하였고, 진종의 법통과 교리의 터득에도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 4월 5일 급기야 득도에 성공한 이동인은 진종의 승려가 되어 도쿄로 진출하여 아사쿠사별원에서 기거하게 된다. 아사쿠사별원은 조선통신사가 머무는 대찰이어서 이동인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고, 실제로 사절로 온 김홍집과도 여기서 만나게 된다. 도쿄에서의 이동인은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밀항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촌각도 헛되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특히 주일 영국공사관의 2등 서기관 어네스트 사토와의 교유는 그 자신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후일 조선외교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미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종 17년 5월이라면 한미수교조약이 체결되기 2년 전의 일인데, 그러한 시기에 조선의 개화승과 영국의 직업외교관이 마주 앉아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주목하고도 남을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네트스 사토는 이동인과의 첫 만남을 이로부터 100년 뒤에 공개된 영국정부의 외교문서 '사토 페이퍼'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80년 5월 12일. 오늘 아침 아사노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찾아왔다. 그는 조야라는 이름이 조선야만(Korean Savage)이란 뜻이라고 재치있게 설명하면서, 세계를 돌아보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개화시키기 위해서는 비밀리에 일본에 왔노라고 말했다. 그의 일본어는 서툰 편이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외국의 문물이 엄청나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돌아가서 조선인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유럽의 건물이나 그 밖의 흥미있는 사진들을 구입하고자 했다. 또한 영국을 방문하기를 열망하였다. 그는 자기가 서울 본토박이라고 하면서, 서울에서는 쯔(tz)라고 발음하지 않고 츠(ch)라고 발음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요일 아침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동인과 어네스트 사토의 극적인 만남을 상당히 소상하고도 흥미있게 기술하고 있음을 볼 때, 두 사람은 초대면인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동인이 영국을 방문하기를 열망하였다는 대목이 그 점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며, 또 조선말의 발음을 교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어네스트 사토가 이미 조선어를 학습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사토 페이퍼'는 다시 이어진다.
1880년 5월 15일. 나의 조선인 친구가 다시 왔다. 그는 조선이 수 년 내에 외국과의 관계를 맺게 될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 정부를 전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5,5,5^ (중략) ^5,5,5^ 그는 한, 일 간의 무역은 전적으로 유럽 상품을 거래하고 있으며 조선이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하게 되면 일본과의 무역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면서 영국이 조선과 교역할 생각이 없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영국으로서는 어느 나라와도 교역관계를 갖기를 열망하지만, 원하지 않는 나라에게 교역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며, 교역을 원치 않는 나라에 사절을 보냈다가 사절이 거절당하고 돌아오게 되면 영국으로서는 이 모욕에 대해 보복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한 나라에는 사절을 보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조선이 교역관계에 들어갈 의욕을 보일 때까지는 그대로 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878년에 내가 가지고 갔던 문서의 사본을 보고 내 이름을 익혀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3시간 가량 있다가 갔다. 나는 오는 20일 시계를 사기 위해서 그를 요코하마에 데려가기로 약속했다. 그는 금, 석탄, 철 및 연해의 고래 등 풍부한 조선의 자원을 개발하는 일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좋은 인삼과 나쁜 인삼의 견본을 나에게 주었는데, 유럽의 의사들이 인삼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인삼이 조선의 중요 수출품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토 페이퍼'는 더 계속 되지만 이쯤에서 줄이기로 한다. 그러나 일본국의 명치유신을 주도하였고, 일본국 유신정부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모두 영국에 유학했던 사람들이다. 이를 모를 까닭이 없는 이동인 이라면 어네스트 사토와의 교유를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였는지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도쿄에서의 이동인의 활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경응대학의 설립자이자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면서 일본 조야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후쿠사와 유키치와 교유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어네스트 사토의 주선일 것이라고 믿어지지만, 이를 계기로 후일에 이르러 김옥균 등이 후쿠사와의 후원을 받게 되었고, 유길준과 유정수가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 되어 경응의숙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 되어 경응의숙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설립자 후쿠사와 유기치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는 등 일본 지식인들과의 유대관계를 맺게 되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개화의 견문을 넓히고 일단 귀국한다. 그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수많은 서적을 김옥균, 박영효 등이 밤을 세우면서 읽었다는 서재필의 회고문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가 가지고 온 서적이 많았는데 역사도 있고, 지리도 있고, 물리 화학과 같은 것도 있었으며, 그것을 보기 위해서 3, 4개월 간 그 절에 자주 들렸지만 당시 이러한 책은 적발되면 사학이라 해서 중벌에 처해졌기 때문에 한 장소에서 장시간 독서할 수가 없어, 그 다음에는 동대문 밖의 영도사라는 절에서 독서하고 다시 봉원사로 옮겨가는 등, 이와같이 되풀이하기를 일 년이 넘어서야 그 책들을 모두 판독하였다. 그 책들은 모두 일본어로 씌어 있었지만 한자를 한자 한자 더듬어 읽으면 의미는 거의 통했다. 이렇게 해서 책을 완독한 바, 세계의 대세를 거의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도 타국과 같이 민중의 권리를 수립해야겠다는 생각이 솟아났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개화파로 등장하게 한 근본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를 이끌어 주었고, 우리는 그러한 책을 읽어 그 사상을 몸에 익혔으니 봉원사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인 것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동인은 고종 임금을 배알하게 된다. 배불숭유하는 나라의 승려가 임금을 배알하기 위해 궐문을 들어섰다면 중벌을 받아서 마땅한 시절이지만, 어찌되었거나 고종은 친히 이동인을 인견하여 일본국의 변화와 서구문물의 실상을 세세히 들은 다음, 그에게 금괴 세 개와 국왕의 신임장을 들려주며 다시 일본국에 다녀올 것을 명한다. 이 밀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으면 고종 스스로, "부산에서 떠나면 남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으니 원산에서 떠나라."라고까지 몸소 당부를 하였겠는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이동인은 어네스트 사토에게 군함을 구입하겠다고 교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이 고종의 뜻인지 이동인의 개인적인 욕망인지는 확실치 않거니와 내용도 소상히 전해지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이동인은 어네스트 사토의 소개로 고베에 주재하고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영국 외교관(영사)인 애스톤을 만나 우의를 다졌고, 또 어네스트 사토는 주일 영국대리공사 케네디에게 이동인을 소개하면서 그를 조선에 있어서의 영국의 대리인으로 삼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일본 땅에서의 이동인의 활동은 비밀외교관의 구실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행동파 승려였던 이동인이야말로 개항과 수구의 물결 사이에서 혼돈을 거듭하던 당시의 조선에서 개화의 필요성과 함께 외교의 중요성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고종 임금의 자문에 응하게 되면서는 그의 위치가 급격히 부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곧 개화세력이 열망하던 신분의 벽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원임훈구와 시임대신들 모두에게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곧 이동인에 의해 조선의 외교정책이 주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탓이었을까. 개화승 이동인은 애석하게도 암살로 목숨을 잃게 되지만^5,5,5^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많은 사서가 민씨일문이나 흥선대원군쪽의 소행일 것이라는 짐작을 적고 있을 뿐이라 안타깝기 한량없는 노릇이지만, 실상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의 상실을 우려한 청나라 의 자객에 의해, 혹은 조선의 자주외교 노선을 차단하기 위해 일본의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 4 역사는 픽션보다 더 진하고 강한 드라마를 잉태하면서 미래를 향해 줄기차게 흘러간다. 나는 평생을 픽션의 이치와 효용의 방법을 몸에 익히면서 살아온 극작가의 한 사람이지만, 역사가 빚어내는 절묘한 사실이 픽션의 위력을 훨씬 넘어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수없이 체험하게 되면서 극작가의 능력에 한계를 느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역사의 흐름에도 법도가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를 관장하는 신은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를 감시하고 있으며, 나는 기꺼이 그의 감시하에 들기를 원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 2세대들에 의해 주도된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로 끝난 쿠데타였지만,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연출한 열정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갑신정변'에는 픽션 작가의 능력을 비웃으면서 고조되는 서스펜스가 있는가 하면, 드라마의 법칙이랄 수 있는 기승전결의 흐름을 빈틈없이 진행하면서도 극의 상승과 하강 그리고 반전까지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에 픽션의 한계를 넘어선 한 편의 명작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고종 21년 10월 17일 유시. 우정국 청사의 낙성을 기념하는 성대한 연회가 시작되면 안동에 있는 별궁이 방화로 인해 화마에 휩쓸리게 되고, 이를 신호로 연회장에 참석한 수구세력들을 차례로 참살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되어도 안동별궁에서의 방화가 여의치 않게 되자 이에 당황한 김옥균, 박영효 등 정변의 주도세력들은 연회장 근처의 초가집에 불을 지르면서 민영익의 몸뚱이를 난자하는 것으로 불안한 출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허둥지둥 창덕궁으로 달려간 정변의 주도세력들은 고종과 중전민씨를 비롯한 왕실의 윗전들을 경우궁으로 이어하게 하면서 일본군의 호위를 왕명으로 요청한다.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그렇게 약속한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출동하여 경우궁을 호위하는 것이 청나라의 병진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정국의 연회장에서 민영익이 피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청나라 진영의 원세개는 중전 민씨와의 접촉을 시도하면서 일본군을 섬멸할 작전수립에 임한다. 이때 이미 '갑신정변'의 양상은 일본공사관과 청나라 군진간의 대립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10월 18일. 김옥균 박영효 등은 고종의 탑전에 나아가 지난밤 민영익, 민영욱, 민태호, 조영하 등을 참살하게 된 불가피함을 고하면서 새로운 내각을 임명하여 조정의 면모를 일신할 것을 강요, 조각의 내용을 공표하였다. 그리고 조정이 일신되었음을 알리는 이른바 '신정강' 14조를 발표하였으나, 일시에 혈족을 잃은 중전 민씨는 창덕궁으로 환궁할 것을 강청하면서 청나라 군진에도 도움을 청한다. 일본군과 청나라 병사들의 충돌이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긴박한 사정이었다. 고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하자는 중전 민씨의 강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기에 김옥균, 박영효 등을 설득하여 우선 계동궁으로의 이어를 서둔다. 계동궁은 신정부의 영의정에 제수된 이재원의 집이었다. 계동궁으로의 이어를 마치자, 중전 민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다시 강청하고 나선다. 계동궁이나 경우궁이 모두 협소하여 불편하기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에 있어서는 2백여 명의 일본군으로는 창덕궁을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나, 1천 5백여 명의 청나라 병사들은 진격하기가 쉬울 것임을 중전 민씨는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본군의 선발대가 먼저 창덕궁으로 떠나고, 고종의 어가를 호위하기 위한 1백여 명의 전영군과 나머지 일본군이 전열을 가다듬는 와중에서 중전 민씨는 청군의 출병을 청하는 서찰을 적어 심상훈에게 건넸다. 마침내 운명의 날인 10월 19일. 창덕궁은 아침부터 초연 속에 묻혔다. 청나라 병사 1천 5백여 명이 화력을 앞세우며 창덕궁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중과부적이었던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쿠데타를 주도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은 고종 임금을 모시고 옥류천으로 피했으나 여기서 대왕대비를 비롯한 중전 민씨의 일행이 북묘로 피했다는 보고를 듣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고종의 어가가 위험을 피해 다시 옥류천 뒤의 북장문으로 옮겨졌을 때, 청군과의 접전을 포기한 일본군의 패잔병과 공사 다케조에가 달려왔다. 이젠 마지막 대책을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강화도로 몽진할 것을 눈물로 간청하였고, 고종은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전황을 불리하게 느낀 다케조에 공사는 정변의 주역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전하!" 누군가가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하자 고종의 용안도 물기에 젖었다. 통한의 작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제 고종의 타전을 떠나면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을 것이지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기로 하였고, 홍영식과 박영교는 궁원에 남아서 신하된 도리를 다하기로 하였다. 떠나가는 김옥균 등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고종의 어가가 청나라 병진으로 떠나가자, 20여 명의 조선 무감들이 홍영식과 박영교에게 달려들어 매질로 목숨을 앗아냈고, 자식이 개화당의 수괴였음을 알게 된 영돈녕부사 홍순목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종사에 속죄하는 결연한 최후를 마친다. 근대화된 새로운 국가를 세워서 세계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였던 '갑신정변'이 이렇게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자,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개항사상을 가르쳤던 백의정승 유홍기도 행방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이후 유홍기를 만났다는 사람은 아직 없고, 그의 최후를 적은 기록이 없는 것도 후학의 마음을 저리게 하지만, '갑신정변'의 후유증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길고 잔혹하게 이어지게 된다. ------ 5 일본군 병사들에게 호위된 다케조에 공사와 김옥균 등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간신히 일본공사관에 당도하였으나, 거기도 이미 난장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공사관 직원들의 가족과 거류민 3백여 명이 몰려와서 북적대고 있었고, 분노한 조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으로 달려와 투석, 방화를 자행하면서 충동을 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일단 인천으로 철수하여 기회를 보리라고 다짐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에게 공사관 직원들이 입던 양복을 건네 주며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일본인들에게 섞여서 일본 공사관을 빠져 나가자고 한다. 거절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오후 2시, 공사관의 대문이 열리면서 1백여 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허공을 향해 총격을 시작하면서 철수작전을 강행하였고, 이들이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21일 새벽이었다. 이들을 피신케 할 일본 선박 치도세마루는 이미 제물포항에 입항해 있었다. 인천에서의 사정도 이들에게는 여의치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비롯하여 이미 죽고 없는 홍영식을 오적으로 규정하고, 조병호, 홍순학, 독일인 뮐렌도르프를 인천에 급파하여 다케조에 공사를 윽박지르며 그들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조선국의 역적이다. 지체없이 우리에게 인도하라!" 이에 당황한 다케조에 공사는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하선, 자수해 줄 것을 청하면서 그것이 곤경에 처해진 일본국과 자신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강변했다. 배신도 이만저만이 아닌, 교활하고 파렴치하기까지 한 태도의 돌변이었다. 김옥균, 박영호 등은 울분을 삼키며 애원하였다. 여기서 하선하게 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케조에 공사는 이미 조선의 고관에게 인도를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이 뻗쳤다. 치토세마루의 선장인 쓰지 가쓰사부로가 다케조에 공사의 파렴치한 행태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선장의 권한으로 승선을 허락하며, 안전을 책임질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조선의 개화를 주도하였던 젊은 준재들은 치토세마루의 선저에 몸을 숨긴 채 언제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르는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된다. 대역부도의 죄인으로 몰렸던 개혁파 인사들이 일본국으로 도주하자 조선 조정은 그들의 가족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옥균의 아내 유씨 부인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충청도로 끌려가 관비 생활을 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되고야 만다.
"조선의 비극"을 쓴 맥켄지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 갑신정변이 실패하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소동 전체가 개혁파의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처사 때문이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 내에 너무나도 많은 일을 성취하려 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경험이 부족한 일본인 협력자들도 그들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어느 쪽에 있어서도 개운치 않은 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의 압력을 격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조선국 내의 중국파 즉 수구파의 세력을 증대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 당시 중국은 아직 보수적이었고, 그리하여 참다운 개혁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 6 역사를 읽으면서 편견의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특히 어떤 인물의 해석이나 평가에 편견이 작용하게 된다면 그들과 관련된 사건을 보는 시각도 편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김옥균이 친일의 거두었다는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은 일본정부가 사주를 했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 된다. 이 같은 편견의 결과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주도한 자주적인 개항의지를 모독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마침내 제나라의 역사를 비하하는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는 얼마 전 어느 일간지의 편집국장을 지낸 이 나라 최고의 지식인이 '김옥균이야말로 일본제국의 앞잡이였다'고 열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꾸만 허황해지는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바로 그와 같은 편견이 식민지 사관보다 더한 해악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불과 1백여 년 전의 인물을 거론하면서 건전한 역사해석을 그르칠 정도의 편견에 빠져든다면 우리 역사학계의 인물사적인 연구가 얼마나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었던가를 입증하는 것이 된다. 비록 망명에는 성공을 했으나, 일본땅에서의 김옥균은 두 가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첫 번째 고통은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자객들의 추적을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김옥균을 암살해야 하는 자객의 임무를 띠고 처음 도일한 사람은 장은규였고, 그 다음이 지운영 그리고 이일식, 또 그 다음이 홍종우, 권동수, 권재수 등으로 이어졌다.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김옥균의 처단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고통은 사태가 이 지경에 되었음을 반증이나 하듯 일본 정부에서도 김옥균의 처리를 골칫거리로 여기면서 그를 냉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찾아낸 궁여지책이 자객 지운영을 추방, 귀국시킨다는 조건으로 김옥균에게도 퇴거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김옥균이 미국으로 가려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여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지정한 기일까지 여비를 마련하지 못하게 되자, 또 한 번의 궁여지책으로 김옥균은 이세산에 있는 미쯔이 가문의 별장에서 연금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거기서도 두 번째로 정한 기일까지 여비 마련이 어렵게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하라 섬이라는 절해고도로 강제 추방을 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김옥균은 이에 대해 완강한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일개 망명 정치가의 힘으로, 더구나 일본 정부의 냉대를 받고 있는 처지로는 그들의 단호한 조처를 변경할 수가 없었다. 오가사하라 군도는 동경에서 태평양 남쪽으로 1천Km나 떨어져 있는데, 부도, 모도 등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 되어 있는 절해고도로, 요즘 취항하고 있는 초현대식 호화여객선으로도 편도에 28시간이 걸리는 아득히 먼 곳이었기에, 김옥균을 태운 당시의 돛단배는 무려 21일간을 항해하고서야 오가사하라 군도의 부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김옥균을 오가사하라 섬으로 유폐하면서 당시의 일본국 내무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오가사하라 섬을 관장하는 가나가와 현 지사에게 보낸 비밀 명령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 김옥균이 우리 영토 안에 체류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치안을 방해하고 또한 외교상 장애를 가져 올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 본 대신은 특별히 위임받은 권한에 따라 명치 19년 6월 11일부로 명령서를 발송하여 귀하에게 명령하니 김옥균으로 하여금 일정한 힘을 사용하는 것도 가하다. 김옥균에게는 속히 퇴거를 결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김옥균이 지정한 기간에 자력으로 우리 제국을 떠나지 않으므로 귀하가 본 대신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하여 먼저 김옥균을 억류처분하는 것도 승낙한다. 본 대신은 이 시점에서 또다시 명령을 내리니 김옥균을 우리 제국 영토인 동경부영하 오가사하라 섬에 호송하도록 하며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동도를 떠날 수 없다는 취지를 김옥균에게 전달하고, 동경부당국에 인도할 것. 이 명령서에 의한 전기의 권한을 귀하에게 부여함.
이 명령서는 일본국 내무대신의 명의로 된 비밀문서이며, 또 행정명령서다. 여기에 적힌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김옥균은 일본국 정부로부터 비호를 받은 것을 고사하고 굴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따라서 김옥균은 '일본제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조선의 젊은 내셔널리스트임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 7 김옥균은 오가사하라 섬에서 유폐와 같은 세월을 보내면서도 섬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게 된다. 고매한 인품과 나무랄 데 없는 학덕으로 소학교의 어린이들에게는 선생님이나 다를 바가 없었고, 섬사람들은 그를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서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가사하라 서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뭐니뭐니해도 와타라는 일본인 소년과의 만남이었다. 와타 소년은 김옥균을 아버지라고 무르며 평생을 따르며 모실 것을 맹세한 것이었다. 진순신은 소설 "일청전쟁"에서 김옥균과 와타는 수박으로 인연을 맺었다고 적고 있으며, 김옥균은 무척 수박을 즐겼다고도 적고 있다. 김옥균운 오가사하라 섬에서 3년 남짓한 유폐생활을 보내고 나서 이번에는 북해도로 옮겨진다.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북해도도 절해고도에 못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이윽고 고종 27년(1890), 김옥균은 외형상 자유로운 몸이 되어 동경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조선인 자객들의 기승은 도를 더할 뿐이었다. 이때 도일한 자객이 이일식이었고, 그에게는 박영효의 목숨도 앗아 내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홍종우가 이일식에게 포섭이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귀국한다 해도 자신의 진로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김옥균에게 접근을 시도하고 있던 중에 이일식에게 포섭이 된 것이었다. 결국 홍종우는 김옥균의 암살계획에 가담함으로써 자신의 입신을 꾀한 셈이었다. 김옥균의 처리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조선 정부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기에 이르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울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로 밀어낼 궁리를 하게 되지만, 그를 보낼 만한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떠나갈 김옥균은 더욱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김옥균과 이홍장의 면담을 주선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기로 하였다. 당시 이홍장의 지위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었으니 실로 막강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김옥균과 이홍장이 서로 만나서 조선의 장래에 관해 의논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명분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본 정부는 이홍장의 양아들인 이경방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1890년 이경방은 여서창의 뒤를 이어 주일 청국공사의 지위에 있다가 1893년 7월, 이홍장의 부인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공사직을 사임하고 본국 땅 연호 근방에서 휴양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경방이 김옥균에게 양부 이홍장과의 회담을 주선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정부가 파놓은 덫에 걸려든 것이었다. ------ 8 김옥균이 일본땅 고베에서 상해로 가기 위해 우편선인 사이쿄마루에 오른 것은 고종 31년(1894) 3월 23일이었고, 그는 이와타 슈사쿠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김옥균이 일본땅에 망명해 있은 지도 어언 9년, 그는 사지로 떠나가고 있으면서도 이홍장과 만나 조선의 미래를 토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김옥균이 탄 사이쿄마루에는 그의 호위 겸 서생으로 데리고 다니던 와타와 통역을 맡을 오보인이 함께 타고 있었고, 김옥균의 목숨을 앗아낼 홍종우도 승선해 있었다. 사이쿄마루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고베를 떠난 지 4일 뒤인 3월 27일이었다. 이들은 공동 조계의 철마로에 있는 '동화양행'이라는 여관의 2층에 여장을 풀었다. 동화양행은 일본인 요시지마 도쿠사부로가 경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부연할 것은 우리 나라에서 간행된 통사류의 역사책에는 김옥균이 투숙했던 '동화양행'의 위치를 대부분 미국 조계라 쓰고 있으며, 간혹 프랑스 조계라고 쓴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미 김옥균이 상해에 도착하기 여러 해 전에 미국 조계와 영국 조계가 합쳐져서 공동조계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김옥균운 도착한 다음날인 3월 28일에 바로 그 '동화양행'의 2층 방에서 홍종우의 총탄에 쓰러지고야 만다. 그를 호위하고 있어야 할 와타가 외출 중에 일어난 참사였다. 이때 김옥균의 나이 44세. 그를 살해한 홍종우는 물론 체포된다. 일본의 상해 총영사가 외무대신 무쯔에게 김옥균의 암살을 보고한 문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김옥균의 시체에는 세 군데의 총창이 있음. 하나의 왼쪽 관골 밑을 관통하여 뇌에 이르렀고, 하나는 등쪽의 왼쪽 견골의 밑에 박힘.
김옥균의 죽음이 조선 조정에 알려지자 조병직을 원세개에게 보내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돌려 줄 것을 요청했고, 일본은 나름대로 감옥균은 일본이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마땅히 일본으로 송환되는 것이 옳다는 여론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옥균의 시체는 호위 겸 서생이었던 와타에게 인도 된다. 와타는 그들이 타고 온 사이쿄마루로 김옥균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었다. 일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반전된다. 조계 경찰의 태도가 돌변한 때문이었다. 이홍장이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이홍장은 김옥균의 시신과 홍종우를 응분의 죄가로 처벌할 것과 다른 하나는 김옥균의 시신에 형벌을 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그가 목숨을 잃은 지 열흘 뒤인 4월 7일 청국군함인 위정호에 실려 상해를 떠났고, 닷새 뒤인 4월 12일 일에 인천항에 도착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다시 복잡해지기에 이른다. 김옥균의 시신이 양화진 민방에 안치되자 조선 조정은 병사들을 보내 이를 지키게 하였고, 일본 특명 전권공사 오오시마는 본국의 훈령이라 하며 김옥균의 시체에 가해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조선 조정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 문제는 청나라에서도 논의되고 있었다. 주청 영국 특명 전권공사 오코너도 조선 국민의 격양된 감정의 폭발을 염려하여 공관을 설득, 김옥균의 시체를 조속히 매장하고, 홍종우를 중용하지 않을 것을 조선 정부에 권고하고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하기로 결정했다. 김옥균은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시체가 되어 돌아왔는데도 또 한 번의 모진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사지는 떨어져 나갔고, 목은 효수된다.
"모반대역부도죄인 김옥균 당일양화진두불대시능지처참."
그토록 개화된 근대 정부의 수립을 염원하던 풍운아 김옥균의 처참한 종말이었다. 이 같은 조선정부의 조처에 엉뚱하게도 일본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김옥균이 처음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부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냉대했었다. 그를 국외로 추방하려 했던 일본인들이 이번에는 김옥균에게 가형한 조선 정부를 비방하고 나서는 이중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김옥균 추도회 또는 김옥균 기념회, 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도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일본측의 기록에 따르면 4월 21일에는 간다니시키정 금휘관에서 '김옥균사건 연설회'가 열렸고 4월 23일에는 정계 유력자 1백여 명이 모여서 '대외경파대간친회'라는 모임이 아사쿠사에 있는 본원사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성황이었다고 되어 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작태를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일본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모진 냉대에 시달리고 분노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상해로 떠나게 된 것도 일본 정부에서 내몰았던 것이었는데, 그의 추모를 빙자하여 조선 정부를 비방하는 것도 달갑지 않지만, 김옥균의 무덤이 일본땅에만 두 개씩이나 있어야 할 까닭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오야마의 외인 묘지에 우뚝 서 있는 김옥균 묘의 비석에는 박영효가 비문을 짓고 이준용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 그 비문은 유길준이 쓴 것이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때 유길준은 조선에서의 또 다른 쿠데타에 연루되어 일본정부로부터 오가사하라 섬의 모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김옥균이 유폐되었던 바로 그 절해고도에서 김옥균의 비문을 써야 하는 유길준의 심정은 착잡함을 넘어서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김옥균의 묘는 본향구입의 진정사에 있는데, 여기에는 김옥균의 머리칼이 묻힌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명성황후 시해, 그 '여우사냥'의 비밀
*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되도록 빨리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지만 미처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그 반대쪽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역사는 준엄한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 번 경험하였다. 졸저: "양식과 오만"에서
1 조선조는 태조 이성계에서 순종까지 27명의 임금이 5백 19년간 조선반도를 통치하는 것으로 파란 많았던 왕조의 막을 내리지만, 여기에 다섯 사람의 추존 임금이 추가 되어 형식적으로는 32명의 임금이 있었다. 추존 임금이란 왕위에 오른 아드님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님을 높여서 왕위에 올려 모신 경우를 말한다. 성종의 아버님이었던 덕종, 인조의 아버님인 원종, 영조의 아드님이었던 진종, 장조, 그리고 순조의 아드님이었던 문조의 다섯 분이 추존 임금이다. 여기서 유념해 둘 점은 추존 임금에게는 '몇 대'라는 순서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세계는 27대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전의 경우는 다르다. 중전의 자리를 곤위라고 한 데서 중전을 곤전이라고도 부르지만, 임금이 27명이 있었다 하여 중전도 27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전이 세상을 떠나면, 곤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 하여 새 중전을 맞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양가의 규수를 간택하는 경우도 있고, 후궁 중에서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맞아들인 중전을 계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경우는 중전의 수가 임금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43명이었고, 여기에는 폐비가 되었던 성종비 윤씨(연산군의 생모)와 숙종비 장옥정(장희빈)은 포함되지 않는다. 왕권이 확립된 봉건전제시대의 중전은 국모의 예우를 받는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위세가 막강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당사자의 성품이 온유하고 강경함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의 교차가 클 것이지만, 우리에게 민비라고 불리는 명성황후의 생애처럼 파란과 불행으로 점철된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명성황후의 불행은 간택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전으로 간택되기 위해서는 되도록 명문거가의 출신이어야 하고, 사가의 부모가 후덕하고 덕망이 있어야 하며, 형제자매들의 우애가 돈독해야 함, 당사자의 행실이 가지런해야 하는 등의 수많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경우는 처음부터 이에 반대되는 조건이 간택의 사유가 된 것이었다. 장김(안동 김씨)에 의해 저질러진 60년 세도에 치를 떨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또다시 외척의 발호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처음부터 가세가 빈한한 집안의 규수를 중전으로 간택하리라고 다짐하였다. 명성홍후가 부대부인 민씨의 척분이라면 관향이 여흥, 흠잡을 곳이 없는 명문이다. 그러나 일찍 양친을 잃은데다가 형제자매마저 없었고, 가세가 궁핍하여 척분들까지 신통치를 못했다. 흥성대원군 이하응은 민규수의 이 같은 약점을 노렸기에 자신의 처남인 민승호로 하여금 그녀의 양오라비로 삼아서 중전으로 간택하였다. 아무리 나이가 어렸어도 총명하고 영특하였던 명성황후에게는 수치스러운 상처로 새겨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명성황후는 열세 살 어린 나이로 곤위에 올라 첩첩산중과도 같은 중궁전에 갇혔고, 소년 고종이 궁인 이씨의 거처를 드나들게 되면서는 비록 어린 보령이었지만 독수공방으로 인한 고독과 정한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춘추 스물 한 살 때에 이르러 대망의 원량을 생산하여 온 왕실을 들뜨게 하였다. 정조 10년 5월 열하룻날에 문효세자가 보령 다섯 살로 세상을 뜬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네 분의 임금이 바뀌면서 8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원자에게로 왕위가 이어진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 기쁨은 더욱 헤아릴 길이 없었으나,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갓 태어난 원량에게는 항문이 없었다. 하늘의 시새움인가. 강보에 싸인 원량이 대변불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성황후의 반대를 무릅쓰고 갓 태어난 원량에게 산삼을 다려 먹이게 함으로써 금지옥엽과도 같았던 원량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뜬다. 시아버님 흥선대원군을 향한 명성황후의 반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왕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완화군(영보당의 소생)이 무럭저럭 자라고 있었음에랴. 명성황후는 가슴에 새겨진 통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다시 회임 하였다가 공주를 생산하지만, 그 공주 또한 겨우 여덟 달을 살고 세상을 버렸다. 명성황후는 며느리로서의 불행, 지어미로서의 불행, 어머니로서의 불행^5,5,5^ 그 모든 통한의 불행을 중전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는 것으로 보상받고자 하였던 철의 여인이었다. ------ 2 명성황후의 불행과 고통은 정치적으로도 잠잘 날이 없었다. 명성황후에게 통한으로 점철된 오욕의 세월을 안겨다 주었던 것은 고종 19년 6월에 발발된 '임오군란'이었다. 이 때 그녀의 연치 32세, 범상한 사람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수모를 겪게 된다. 무위영에 소속된 구 훈련도감 병사들에게 열세 달이나 밀려 있던 녹미 가운데서 겨우 한 달치의 양곡을 지급하게 되었는데, 쌀에서 냄새가 나고 모래가 섞였다 하여 구 훈련도감 병사들이 항변하자 선혜청의 관리들은 가증스럽게도 항의하는 병사들에게 매질을 가하면서 더 큰 불상사를 자초하였다. 가뜩이나 탄압과 핍박에만 시달려 온 병사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폭도화된 병사들은 부패의 온상이었던 선혜청을 때려부수고, 외척의 두령이자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를 주살하였지만 분노는 더욱 달아오를 뿐이었다. 그들은 경기감영으로 달려가 무기고를 습격하였다. 무장한 폭도들은 임금의 거처인 창덕궁을 습격하여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면서 무엄하게도 명성황후의 시해를 기도하였다. 이미 조정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은 폭도들에게 짓밟혔고, 창덕궁은 함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난장판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감지한 명성황후는 상궁들에게 휩싸인 채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무에청 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구사일생으로 창덕궁을 빠져 나왔으나 피신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녀는 다시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응식, 민긍식 형제의 집으로 옮겨졌으나, 거기도 안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다시 여주를 거쳐 충청도 장호원에 이르러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게 된다. 임오군란을 교묘히 이용하여 권토중래에 성공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성황후가 이미 폭도들에 숨졌음을 선포하고 장례준비에 돌입한다. 명성황후의 생매장을 시도하는 흥선대원군의 독선이었으나, 군란을 수습한 그였기에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국모의 장례를 서둔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에 접한 명성황후의 분노와 상심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존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임오군란은 청나라 병사들에 의해 수습의 실마리가 잡히고, 아이러닉하게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그토록 철통같이 믿었던 청나라 장수들에 의해 그들의 군진으로 유인되었다가 중국땅 천진으로 볼모가 되어 끌려가게 된다. 나라의 주권을 유린되고, 국토는 다시 청나라와 일본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임오군란'이 수습되는 와중에서 고종은 충청도 장호원에 사자를 보내 지어미 명성황후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조정 공론을 거쳐 영의정을 보내 정중히 환궁하게 한다. 피눈물을 쏟아야 했던 수모의 세월을 감내하면서 중궁으로 돌아온 명성황후는 더 강한 자신의 모습을 들어내는 것으로 통한의 아픔을 보상받고자 하였다. 그것은 정치표면으로 등장하여 뭇 사내들을 호령하는 일일 것이었다. ------ 3 어떤 개인에게도 경험의 축적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한 국가의 발전에도 경험의 축적은 중대한 의미를 갖게 한다. 거기서 국가기능과 관리의 노하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개항하는 과정인 '명치유신'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 성공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의 개항과정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명치유신이 성사되어야 하는 근원적인 명분은 장장 3백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도쿠가와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고하자는 이른바 '존황토막'이라는 선동적인 깃발을 올린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도쿠가와막부의 부패와 탄압에 시달리던 사족(사무라이)과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궐기할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한 3백여 회의 무력충돌을 치르어야 하는 뼈아픈 혼란도 훌륭하게 극복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존황토막'을 주도한 선각자들이 그대로 개항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명치유신의 성공이 곧 개항과 개혁으로 이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체험이 신생 일본국을 번영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또 그 체험이 오늘의 일본을 지탱하는 노하우가 돈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 비한다면 우리 민족의 개항과정에는 '존황토막'과 같은 혁명적인 기치를 올릴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왕정을 타도하자는 기치를 세우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충이 되는 것이었고, 사대부를 지배계급으로 하는 이른바 신분의 벽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해도 발벗고 나서야 할 상민, 천민들이 머뭇거리기만 할 뿐, 스스로 궐기하고자 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인간적으로 대해 준 상전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한국적인 정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기에 조선의 개항은 외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개항은 자주개항의 3대 요소라고 일컬어지는 항구의 개항(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 철로의 개설(산업화를 앞당기는 일), 은행을 설치하여 새로운 금융제도를 확립(편리한 삶을 누리게 하는 일)하는 등 자주적인 개항을 실행해야만 체험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인을 외세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나라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경험과 경쟁력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던 것이다. 물론 '동학농민혁명', '갑신정변'과 같은 자주적인 개화의지가 분출된 일도 있었으나 그 모처럼의 기회마저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점은 진실로 뼈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명치유신'이 성공하자 수많은 외국인 사절들과 장사치들이 일본땅으로 몰려들게 된다. 그것은 서양의 문물이 밀려드는 소용돌이기도 하였다. 근대적인 학교가 세워지면서 서양식 양복이 성행되고, 석유를 사용하는 램프가 쓰여지는 등 풍물의 급격한 변화도 병행될 수밖에 없었다. 서양식 사교춤인 댄스가 추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서구열강의 풍속인 댄스파티가 외교의 방법으로 등장하게 되자, 일본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외무대신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댄스파티를 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이름하여 '녹명관'이라 하였고, 일본정부의 고관부인들에게 애원하듯 설득하여 그녀들에게 댄스를 교습하게 하면서까지 서양의 문물을 근대국가 건설에 유용하게 쓸 줄 알았다. ------ 4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주도되었던 양이, 보국정책의 빛이 바래면서 조선정부도 일본국과 새로운 방식의 수교를 하게 되었고 뒤이어 미국과도 수교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조선땅에도 미국인 사절들이 들어오게 되었지만, 워낙 완고하고 가난했던 조선땅이라 서양의 문물이 싹틀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들은 예수교의 전파를 위해 조선인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서양의 문물이 싹트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역시 서양의 의술이었다. 조선땅에 발을 들여 놓은 첫 양의, 그가 바로 26세의 미국인 알렌이었다. 알렌, 그는 미국 오하이오 주 멜라웨어 출신이다.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신학과를 거쳐, 북장로교 외국선교부 의료선교사의 자격으로 중국 상해에서 의료선교사로 활약하다가 고종 18년 9월 22일에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 푸트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우정국 청사의 낙성을 연회장('갑신정변'의 시작)에서 온몸에 칼을 맞은 민영익을 치료하게 됨으로써 일약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민영익의 몸에 난 칼자국은 무려 서른 여덟 곳, 아무도 그가 살아날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은 없었다. 수술이라는 치료술이 없었던 조선땅에서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봉합하는 대수술에 성공한 것이었다. 민영익이 누구인가. 명성황후가 신임하는 사가의 장조카였다. 그 민영익이 서양 의술로 살아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고, 고종 내외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면서 전의를 대신하게 된다. 그것은 또 알렌이 하는 일에 대한 조선 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알렌은 곧 안련이라는 조선이름을 쓰게 되면서 1년 뒤인 고종 22년에는 조선 최초의 서양병원이자 의사 양성소인 광혜원을 세우고 의사와 교수로 활동하였고, 고종 22년에는 조선조정의 참찬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고종 27년에는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활약하다가 마침내 1897년부터는 주한 미국공사 겸 서울주재 총영사가 되어 미국의 이익을 위해 엄청난 봉사를 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처음부터 서양의 문물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알렌이라는 선교의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민영익을 살려내는 의술을 보여 주었고, 또 그가 아닌 다른 선교사들이 키니네를 사용하여 불치의 병으로만 알았던 학질을 예방하고 치료한다는 사실에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곁으로 홀연히 다가선 또 한 사람의 서양 여성이 손탁이었다. 그녀는 손탁이라는 한국명을 쓰면서 명성황후를 사로잡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창덕궁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첫 서양여성이 되었다. 조선에 있어서의 서양문물^5,5,5^ 서양인들의 생활풍습이 사대부가를 앞질러 왕실에 전파된 것은 손탁이라는 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탁의 개인사는 좀 복잡하다. 그녀의 혈통은 프랑스였으나 국적은 독일이었고, 활동무대는 러시아였다. 그녀가 러시아인으로 오인되는 것은 당시의 주한 러시아 공사인 웨벨의 처제였기 때문이다. 웨벨 공사가 조선에 부임한 것이 고종 22년 8월 25일이니까 손탁이 조선에 온 것도 그 무렵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서양 문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명성황후에게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황홀한 의상이었고, 음악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32세의 손탁의 아름다운 용모에서 풍기는 교양과 서구적인 매너는 명성황후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교량역할을 담당하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므로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창덕궁에 서양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한 응접실, 서양식 침실은 물론 서양 요리가 등장했던 것은 당연했고, 특히 고종이 즐겨 마셨던 커피도 그녀에 의해 추천되었다. 명성황후도 그녀를 위해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 호텔'의 탄생이었다. 명성황후는 정동 29번지에 있는 왕실 소유의 대지 184평의 집 한 채를 손탁에게 하사했다. 손탁은 여기에 2층 양옥으로 된 새 집을 짓고 손탁 호텔을 개업했다. 손탁 호텔은 단순한 숙박업소만은 아니었다. 손탁 자신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그 건물의 아래층을 '정동 구락부'라는 사교장으로 공개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개화의 물결이 거세게 불고 있었으므로 개명한 사람들이 몰려와 커피를 마시며 서양 음식을 즐기게 되었다. 또 그것은 서양식 사교 분위기를 익히는 일이기도 했다. 이 '정동 구락부'에 모여들었던 면면들을 살펴보아도 그 의미를 짐작하고 남는다. 물밀 듯이 들어와 있던 각국의 공사를 비롯한 외교사절들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민영환, 서재필, 윤치호, 이학균, 이상재 등 당대 최고 지성인들의 사교장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앞을 다투어 '정동구락부'로 모여들었다. 세계의 정세를 살피면서 조선의 개화를 앞당기자는 것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앞에서 거론한 일본의 '녹명관'과 아주 흡사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정동 구락부'가 러시아공사 웨벨의 거처였다는 점에서, 또 손탁의 인기에서 비롯되는 친로파의 소굴이었다는 점이다. 이완용, 이윤용, 이범진 등은 웨벨 공사와 더불어 여기서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기도했다. 그러자니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화제는 손탁에 의해 명성황후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명성황후는 자연스럽게 친로노선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시절이라 놀란 것은 일본 공사관이었다. 일본 공사관은 명성황후의 제거를 기도하기에 이른다. 친로노선으로 기우는 조선 조정의 분위기를 일본쪽으로 돌려 놓기 위한 특단의 조처가 아닐 수 없었다. ------ 4 1895년(고종 23)의 여름은 길고 잔인했다. 전국 각처에서 창궐한 콜레라로 무려 4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었지만, 예방이나 치료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때라 서울천지는 그대로 연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무렵에 학제의 개혁이 있어 '소학교령'과 '한성사범학교령'이 공포되어 성균관의 명망이 쇠퇴되기에 이르자 민심까지 뒤숭숭한 판국이었다. 이같이 어려운 시기에 주한 일본공사의 경질이 있었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임으로 새 일본전권공사 미우라 고로가 부임해 온 것이다. 신임공사는 7월 15일에 창덕궁의 장안당에서 고종을 배알하고 국서를 올렸다.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예비역 육군중장에 정삼위 훈일등 자작의 지위에 있는 강골의 무장이었다. 이 같은 강골의 미우라가 조선주재 일본공사가 되어 부임하게 된 것에는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날로 실추되어 가는 일본국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일본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모종의 음모를 결행하려는 속셈이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 요동반도를 손에 넣기는 하였으나,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합세하여 그것이 동양평화를 해친다고 맹공하자, 일본은 이에 굴복하여 배상금 3천만 원과 교환으로 요동반도를 되돌려 주기에 이르렀고, 그후 요동반도는 조차의 형식으로 러시아의 수중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니 조선 조정을 위세를 잃어 가는 일본을 멀리하고 새로운 세력인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와 같은 조선 조정의 정책변화가 중전인 명성황후의 입김으로 척족인 민씨일문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무엄하게도 조선국의 국모를 제거하겠다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이었다. 이 엄청난 음모를 실행해 옮기기 위해서는 이노우에 가오루와 같은 민간인 조선공사보다 강력한 공사, 작전능력을 갖춘 강골의 무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때 미우라 고로는 온천 지방인 아타미의 한 병원에서 신병을 치료하면서 일본국 외무성으로부터 조선공사로 취임해 줄 것을 교섭받게 된다. 미우라는 조선정책을 자신에게 모두 맡길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고, 그 조선에 명성황후의 시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 5 미우라 고로의 부임에는 시바, 쓰키나리와 같은 민간인이 막료로 따라와서, 쿠마모토 국권당에서 경영하는 한성신보사의 감독관으로 나와 있던 아타치, 쿠니도모와 같은 지식인들과 후지가츠, 야마타 등의 민간인 그리고 우익단체인 천우협의 호사키, 다케다 등과 합세하여 음모를 진행하려는 무리를 이루었고, 여기에 조선의 군부와 궁내부의 고문으로 있는 오카모토 류노스케까지 가담하여 '명성황후 시해'의 비밀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특히 사건을 주도한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신상을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그가 단순한 일본인 관리거나 랑인쯤으로 착각한다. 바로 여기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호도하는 함정이 있는 것이다.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본시 일본군 포병소좌로 쿠데타를 주도하였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문무의 신동이라고 불리웠다는 사실이 우리를 몸서리치게 하지만, 사형의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는 그를 살려내어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보내려고 한 일본정부의 용이주도한 계획에 또 한 번 몸서리치게 되는 것이다. 오카모토와 동향인 외무대신 무쓰는 옥중에 있는 오카모토에게 폐병이 들었음을 알리기 위해 극심한 기침을 쏟아 놓으라는 밀명을 내린다. 그것을 증거로 오카모토는 가석방을 허가 받게 되고 뒤이어 조선정부의 내무고문이 되어 조선땅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었다. 육군중장 출신의 강골인 미우라 공사가 작전의 신동이라고 평가받는 포병소좌 출신의 오카모토라는 걸출한 참모에게 '명성황후 시해'라는 비밀작전을 수행하게 하면서 암호를 '여우사냥'이라고 했다면 이는 군사작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웃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진행하면서도 미우라 공사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는 남산에 있는 일본 공사관에 틀어박혀 불상 앞에 앉은 채 염불만 외고 있었으니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그를 염불공사로 얕잡아 보는 과실을 저지르게 하였다.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계책은 절묘하였다. 그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서는 흥선대원군의 묵은 감정을 자극하여 그를 사건의 중심으로 끌어들여야 하고, 그래서 조선인에 의해서 저질러진 사건으로 위장한다는 것이었다. 가공하게도 이 계책에 동조한 조선인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이주회, 이두황, 우범선 등이었다.
8월 16일. 마침내 국모시해사건의 비밀작전이 행동으로 옮겨진다.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공덕리 별장에 은거하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은밀히 찾아간 것이었다. 당시 공덕리 별장은 명성황후 쪽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오카모토의 방문목적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작별인사로 위장되어 있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에게 거사계획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약조문을 제시했다.
첫째, 대원군은 궁중에 들어가서 사태정리는 꾀하나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둘째,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고 그 밖의 개혁파를 기용한다. 셋째, 이재면, 김종한을 궁내부대신 및 협판에 임용한다. 넷째 이준용(대원군의 손자)을 일본에 유학을 보낸다.
흥선대원군은 이 네 가지 조건을 지그시 되씹어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왕비는 노국공사와 결탁하고 있어 대궐의 경비가 삼엄하고 이를 민씨의 족당이 지휘하고 있는데^5,5,5^ 그대들이 어떻게 나를 입궐하게 하고자 하는가."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실패할 까닭이 없소. 질풍노도의 기세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5,5,5^" "이달 스무 날이 지나서 거사할 것이니 며칠 더 기다려 주시고 거사 당일에 전하를 모시러 오겠습니다." 비록 문서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며느리자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은연중에 풍기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이를 승낙했다는 사실은 그때로부터 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연치 76세. 노탐일 것일까. 설혹 노탐이라고 하더라도 이해될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임오군란'의 와중에서 살아 있는 명성황후의 장례를 서둘게 했던 일이 상기될 뿐이다. ------ 6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 별장을 물러나와 곧바로 인천으로 향한다. 조선정부의 방심을 유도하자는 면밀한 작전이었다. 그가 인천에 숨어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다. 군부대신 안경수가 미우라 공사를 찾아와 일본 교관이 조련한 조선훈련대를 해산하겠다고 통고한 것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훈련대가 해산되면 흥선대원군의 입궐이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명성황후의 시해작전에도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황급히 스기무라 서기관에게 명하여 인천에 있는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그 일당들의 귀경을 명했고, 호리구치 영사관보를 불러서는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마중하여 작전계획을 앞당기도록 명했다. 이때의 일을 히로미사 지방재판소의 예심판사가 작성한 예심결정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5,5^ 피고 미우라는 경성수비대의 대대장 바야하라에게 훈련대를 조정하여 대원군의 입궐에 대한 모든 일을 지휘하게 했다. 그리고 피고 아타치와 구니토모를 공사관으로 초치하여 관련자를 규합하고 용산으로 달려가서 대원군의 입궐을 호위할 것을 명하면서, 우리가 처한 20년 내의 화근을 뿌리뽑는 일이 실로 이 일에 있음을 믿고, 입궐하면 황후폐하를 살해할 것을 교사했으며^5,5,5^ 한편 피고 호리구치는 말을 달려 용산에 이르렀고, 피고 하기하라는 비번인 순사들에게 사복을 입고 도검을 착용하여 용산에 집합하라 명하고 자신도 달려갔다. ^5,5,5^ 피고 아사야마는 이주회를 만나 오늘밤 대원군을 입궐하게 한다는 것을 알리고, 그로 하여금 관련 조선인을 규합하여 용산으로 가게 하고, 오카모토를 총지휘자로 하여 공덕리에 도착, 이주회의 일행과 함께 다음날 오전 3시경 대원군의 교여를 호위하고 출발했다.
이와 같은 경우에 따라 경복궁을 범궐하려는 무리들인 일본 낭인들의 몰골은 어떠했는가. 역시 앞의 글에 이어 다음과 같이 적어 놓고 있다.
일행 30여 명은 용산의 쇼시, 기타니의 양 점포와 일본경찰서에서 잠시 휴식하고, 밤 12시가 진서 결속을 마치고 공덕리로 향했다.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허리에 칼을 찬 사람도 있었고, 몽둥이를 든 자, 짚신을 신은 자, 양복을 입고 밀짚모자를 쓴 자, 그 해괴한 모양은 초적폭도의 일단과 같았다. 일국의 국모를 시해하려는 무뢰배의 몰골로는 아주 제격이지만, 외교공관에서 주도하는 비밀작전으로는 한심한 지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증언하는 당시 공덕동의 밤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공덕리로 가는 길은 양쪽으로 커다란 버드나무의 가로수가 서 있어 그 그림자가 땅 위에 늘어져 있었고, 달빛은 싸느랗게 밝아지고 바람은 찼다. 오른쪽으로는 남산의 수목이 솟아 보이고 왼쪽으로는 한강의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8월 20일 새벽 3시. 이윽고 노구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거처에서 나와 교여에 올랐다. 시간이 이처럼 지체되었던 것은 흥선대원군이 입궐을 망설인 탓으로 되어 있다. 국모이자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해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일흔 여섯 살의 노탐, 그 순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눈 닦고 찾아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격앙된 탐욕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다는 생각, 추하고 더럽다는 생각밖에 들지를 않는다. 흥선대원군을 태운 교여의 앞뒤는 경성수비대의 장병 4백여 명이 호위하고 있었고, 이들과 합세한 조선훈련대의 제2대장 우범선(식물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 길을 잘못 들어 2시간 가량 지체했던 탓으로 이들이 경복궁에 도착한 것은 새벽 5시, 여명이 트여 올 무렵이었다. 일본인 낭인들이 경복궁의 담장을 뛰어넘는 범궐을 감행하자 경복궁의 수비대는 대장 홍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의 지휘로 출동한 시위대와 힘을 합쳐 총격전을 벌이며 사투하는 듯했으나, 홍계훈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고 안경수가 도망가자 대원들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지는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승기를 잡은 일본인 낭인들은 흥선대원군의 교여를 호위, 광화문을 지나 근정전 앞에 당도하여 고종의 배알을 청하는 한편, 경복궁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대로 지옥도나 다를 바가 없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상궁과 내시들은 살인귀로 돌변한 일본인 낭인들과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길 뿐이었다. 이때, 명성황후의 침전은 경복궁의 북쪽인 건청궁의 곤령합이었다. 미친 듯한 왜인들의 발길이 여기를 놓칠 까닭이 있을까. 처음 얼마 동안 명성황후는 상궁들에게 섞인 채 방안에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침입자의 눈에는 누가 명성황후인지를 판별할 수가 없었다. 궁내부대신 이경식은 문득 명성황후의 신변에 위험을 느꼈다. 그는 건청궁을 누비며 명성황후를 찾아헤메다가 미친 듯이 날뛰는 일본인 낭인들에게 발각되면서 무참하게 살해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명성황후와 상궁들은 거처를 뛰쳐나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명성황후는 사력을 다해 달아나려 했으나, 옥호루의 근처에서 일본인 낭인들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서 목숨을 잃는 통한의 최후를 맞게 되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건 100년째가 되는 1995년에 이르러 당시에 사용되었던 일본도가 일본땅 큐슈에서 발견되었고, 그 도검의 칼집에 '순식간에 여우를 해치우다'라는 글자까지 새겨져 있었다면 그날의 참상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다치스카가 일본의 스에마츠 법제국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명성황후의 시신을 능욕한 듯한 구절마저 보이고 있어 일본인 낭인들의 무도한 작태가 어느 지경에 있었는지도 알게 된다.
왕비를 끌어 내어 두서너 군데를 칼질한 다음 나체로 만들어 국부검사를 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니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함이라^5,5,5^.
이를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일국의 국모가 타국의 무뢰배들에 의해 칼을 맞고, 옷이 벗겨지며 그 시신의 국부까지 저들에게 희롱당했다면^5,5,5^, 그래서 불태워졌다는 사실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가. 춘추 44세, 척분이 빈한하다 하여 중전으로 책립된 명성황후지만 조선왕조의 왕비 중에서 명성황후만큼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 여인이 또 있을까. 더구나 조선의 근대화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점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것은, 그것도 일본국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임은 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후의 전말은 이 시간으로 사형이 된 친위대의 부위 윤석우의 재판기록이나 또 다른 목격자의 진술을 따르면, 이날 아침 윤석우가 광화문, 건춘문의 순시를 마치고 옥호루 근처에 이르렀을 때, 시체 한 구가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사관풍의 이만성이라는 자에게 물으니 '저것은 궁녀의 시체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를 의아히 여긴 윤석우는 제2대대장인 우범선에게 보고하면서 '저같이 지밀한 곳에서 시체를 태우고 뼈다귀를 남기는 따위의 결례가 있어서는 아니될 것으로 압니다'라고 항변하듯이 말했다. 이에 대해 우범선은 '시체가 다 타면 근처를 깨끗이 치우고, 덜탄 찌꺼기가 있으면 연못 속에 버리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석우는 흩어진 유골을 수습하여 연못에 버리지 않고 근처 숲에다가 묻었다고 되어 있다. 이같이 처참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을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건청궁에서 자신의 아들인 고종과 마주 앉아 사태의 수습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명성황후 시해범의 괴수 미우라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역시 히로시마 재판소에서의 그의 진술을 요약하면 이렇다. 20일 야반에 미우라는 공사관의 누각에서 스기무라 서기관과 통역관 등 세 사람이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경복궁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자, 일이 되어가는군."라고 그가 말했을 때, 고종의 시종이 달려와 말했다. "큰일났습니다. 서둘러 입궐해 주십시오." 시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도 미우라의 대답은 태연했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큰일났습니다. 꽤 많은 사상자들도 있는 모양이올시다." "허, 큰일났군. 곧 간다고 전해올리게." 그리고 입궐을 서둘렀다. 이 기록은 미우라 자신의 진술이므로 그가 얼마나 교활한 자인가를 스스로 입증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그의 진술은 계속된다. 미우라가 어전에 당도하자 고종은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고종의 밑에는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미우라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옥체에는 별고가 없었습니까?" 그때 고종을 보고 앉았던 노인이 미우라 쪽으로 홱 방향을 돌렸다. "뭣하는 노인인가?" 미우라가 그렇게 묻자, 통역이 대답했다. "대원위 합하십니다."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완전히 말려든 것이라고 믿었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 아닌가. 미우라 공사는 금후 외국공사들이 배알을 청하는 일이 있어도 윤허하지 않겠다는 고종의 다짐을 받고 나서 흥선대원군과 함께 자리를 떴다. ------ 7 아침이 되자 각국의 공사들이 새벽에 있었던 참극의 진상을 알기 위해 벌떼같이 일어나 고종의 배알을 청했다. 서양각국의 공사들이 지난밤에 있었던 참상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현장인 건청궁에 두 사람의 외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미국인 교관 윌리엄 매키 다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러시아인 기사인 세레진 사바틴이었다. 이들은 일본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양관에서 기거하고 있었기에 그 참상을 목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이들 두 사람의 발설로 사건의 개요가 알려지면서 외국인 공사들의 분노가 뒤따랐지만, 이미 미우라 공사와 약조가 되었던 까닭으로 고종은 그들과의 면담에 응하지 않은 채 이른바 제2차 김홍집 내각으로 일컬어지는 친일내각으로 조정을 개편하였다. 참극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틀 뒤인 22일에는 더욱 기막힌 일이 있었다. '국정에 간섭하여 정치를 어지럽힌 왕비 민씨를 서인으로 삼아 폐출한다'는 조칙이 내린 것이었다. 물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해묵은 감정의 응어리가 터져 오른 것이었지만, 고종도 세자도 여기에 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흥선대원군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으로 하루 뒤인 23일에 이르러 '왕태자의 효성과 정리를 생각하여 폐서인 민씨에게 빈호를 특사한다'는 정정조칙이 다시 내려졌다. 한편, 서양 각국의 공사들이 분노하고, 세계의 여론이 비등할 기미가 보이자 일본정부로서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서둘러 외무성의 정무국장 고무라 슈타로를 두령으로 한 진상조사단을 조선으로 떠나보낸 것은 사건 이틀 후인 22일이었고, 그가 주한 변리공사에 임명된 것은 29일이었다. 나는 지난 1991년 일본국 동경에 있는 '외교문서자료관'에 들러 당시에 작성된 고무라 슈타로의 보고문서를 비롯한 '한국 왕비 살해에 관한 자료'라는 아주 두툼한 문서철을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최초(양력 10월 8일 오후 2시)의 전보를 받아 쓴 문서가 있었다. 글씨는 삐뚤삐뚤 곤두박질 치고 있어 받아 쓴 사람의 놀라워하는 모습이 뇌리에 그려지는 기막힌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낭인들이 범궐하여 건청궁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붉은 점선으로 표시한 경복궁의 평면도도 있었고, 거기에는 다이와 사바틴이 현장을 목격한 위치까지도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난날의 '역사'를 채찍으로 읽으면, 지혜롭고 가지런한 삶을 누릴 수가 있는데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가까운 이웃나라에 보존된 공식문서를 살피는 일은 고사하고라도 도처에 산재된 귀중한 자료를 모아서 취합, 분석하는 일조차도 게을리하고 있다. 이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겨줄 것을 챙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고 있음일 것이다. ------ 8 조선 조정은 9월 2일에 이르러서야 조선 정부의 군부고문이었던 오카모토 류노스케, 시바 시로 등 일본인 낭인 30여 명에게 퇴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주도한 주한 일본국 공사 미우라 고로의 휘하에서 일하고 있었던 스기무라 서기관, 구스노세 중좌, 구니이타 통역관, 하기하라 경부 등의 4명은 본국으로 소환하도록 조처하였다. 동시에 일본의 사법성에서는 안도 겐기치, 해군성에서는 이슈잉 소좌, 육군성에서는 후쿠시마 중좌 등을 파한하여 사건의 진상과 전모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교활하게도,
^5,5,5^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일본인 낭인들에게 부탁하여 조선 정부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므로 일본 공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라는 터무니없는 공식발표를 하는 등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 계속되었다. 어쨌건 국제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퇴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을 태운 배는 사건 열이틀 뒤인 10월 20일에 인천항을 떠났는데, 이들은 배 위에서 또다시 승리감을 불태우면서 고성방가하였다고 스스로 기록하였으니 파렴치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들을 태운 배는 관문해협을 지나 히로시마의 우스나 항에 입항하여 동부검역소의 앞에서 닻을 내렸고, 낭인들은 배에서 내려 검역을 위한 목욕을 하면서도 고성방가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 스스로의 기록이다. 명성황후 시해범들인 낭인들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수십 명의 정복 경찰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들을 체포했다. 히로시마 재판소 검사국의 영장에 의한 집행이었다. 미우라 공사를 주범으로 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심리한 히로시마 재판소는 예상했던 그대로 증거불충분을 내세우면서 피고인 전원을 무죄석방하였다. 사건 당일 흥선대원군을 호위하여 입궐한 훈련대 제2대대장인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망을 갔으나, 고종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전 경상감사 고영근을 일본에 보내 그를 살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고영근은 일본땅 구레시에서 일본여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고 있었던 우범산을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그때 4살이었던 우범선의 아들이 후일의 식물학자 우장춘 박사였고, 또 그는 아버지가 저지른 과실을 속죄하기 위해 아내와 자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구환경이 열악한 모국으로 돌아와 실로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진실로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른바 을미사변이라고도 불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개요와 진상을 살펴보면서 국력이 따르지 않는 외교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며, 또 우리는 꽤나 제 나라의 역사에 대해 무심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성하게 된다. ------ 9 아무리 국력이 미미했고, 아무리 국제정세에 어두웠기로 어찌 그런 수난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비관은 말할 나위 없고 그 처리 과정에 있어서도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무기력에는 통분이 앞설 따름이다.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으면서 조선에서의 러시아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손탁의 좌절과 실망은 이루 헤아릴 길이 없었고, 러시아 공사관은 또 다른 음모를 꾸며서라도 실추된 위신을 다시 찾고자 했다. 모두가 휘청거리는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국의 실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이후 조선 조정은 제3차 김홍집 내각의 주도하에 양력의 사용, 종두법의 시행, 단발령의 실행 등 급격한 개혁정책을 펼치고 나서자 민심은 날로 흉흉해지고, 일본세력에 대항하는 의병들이 전국에서 궐기하게 된다. 사정이 이같이 급박해지자 조정은 친위대까지 지방으로 보내야 하는 지경이었다. 친러세력들에게는 호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무엄하게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모시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계획하게 된다. 조선의 왕실을 일본세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이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순종은 한밤중에 여인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다. 이 수치스러운 일을 주도한 사람들이 앞에 거명한 젊은 친러파 인사들인 이완용, 이윤용, 이범진 등이지만, 여기에 손탁이 깊이 관여한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아관파천'은 또 다른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총리대신 김홍집, 농상공대신 정병하, 탁지부대신 어윤중 등은 폭도화된 난민들에게 피살되었고, 유길준, 장박 등은 일본국에 망명하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과 순종은 침실과 접견실이 서양식으로 되어 있는 거처에서 서양식 생활을 하게 된다. 그들을 수발한 사람은 엄상궁(영왕 이은의 생모)이었다 해도, 손탁의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파란 눈의 서양 여인 손탁이 자신의 이름을 딴 손탁 호텔을 운영하면서 거기에 '정동 구락부'를 만들어 조선의 개화에 실로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면서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가다가 다시 러시아로 옮겨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25년, 향년 71세였다. 그후 손탁 호텔은 이화학당에서 매입하였다가 1971년부터는 서울 예술고등학교가 그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 또 러시아 공사관의 건물은 그 일부가 정동에 위치한 옛 MBC문화방송국 건물의 뒤쪽에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아관파천'으로부터 백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 한국은 소련과 국교를 다시 정상화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소련 정부는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터를 다시 쓰겠다는 의사를 개진했다고 한다. 역사의 흐름이 참으로 묘미 있는 것은 이 같은 일에서도 다시 볼 수가 있지 않은가. ------ 10 옛 사람들이 삶의 지표로 삼았던 성리학의 본분은 지행이었다. 배워서 익힌 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선조와 같은 봉건전제시대에서도 말과 행동이 다른 판서나 정승보다 아는 바를 가지런히 실행하였던 중인, 천민들을 백의 정승이라고 칭송하면서 더 존경하였다. 지행하기를 가르치는 스승이 많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정작 지행을 수범해 보이는 스승을 만나기는 옛날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 그런 연유로 나는 채찍으로 읽는 '역사'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지행하는 어려움을 애써 배우고 있다. 역사를 적은 전적을 세세히 읽게 되면 지행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가르친 선현들의 행적을 살펴볼 수가 있기에 지행에서 얻어지는 결과가 무엇인지도 아울러 알게 되는, 이른바 삶의 규범을 터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의 사수를 앞장서서 주도하였던 학봉 김성일의 경구는 진실로 음미해 볼만하다.
나의 평생에 한 마디의 말을 체득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허물을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스승이요, 나의 좋은 점을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해적이라는 그 말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대개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그리 지행할 것을 다짐하게 되고, 또 이미 지행한 바 있는 학봉 김성일의 인품에 감동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아첨하는 말에 현혹되고, 직언하는 사람을 원수같이 미워하게 되는 것이 또한 사람의 상정이다. 그러므로 배워서 익힌 바를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된다. 현실의 삶이나 인품을 경계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지행'해야 될 말은 얼마든지 있다.
학문을 하는 자는 오직 정성을 다하는 것과 오래 계속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요, 오래 계속하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조선조 최초의 백과사전이랄 수 있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체험적인 고백이자 충고지만, 이 말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삶의 지표로 삼아서 지행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역사는 이미 있었던 지난날의 일을 적어서 앞날의 일을 예견하는 것이기에 배워서 익힐 만한 체험적인 가르침의 보고가 아닐 수 없으며, 또 지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세세히 적어 놓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소홀히 하고서는 국가도 개인도 온전할 수가 없다. 세종대왕은 훌륭한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역사를 살피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다. 대개 정치를 잘하려면 반드시 전 시대의 치란의 자취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자취를 살펴보려면 오로지 역사의 기록을 상고하여야 한다.
얼마나 기막힌 말인가.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혼돈의 해결책이 오직 역사를 살펴보는데 있음을 알려주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또 세종 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열어 가는 첩경이고도 남는다. 나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 아니하고서는 수천 년의 역사가 이토록 온전하게 흐를 수가 없을 것이다. 역사에는 한때의 잘못이 가장 온당했던 것으로 적힌 곳도 있지만, 그 잘못은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가 웅징을 받았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나는 또 '역사'를 채찍으로 읽으면서 평생의 규범으로 삼아 왔다. 그것은 스승의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하는 이치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연표)
1. 태조(1392--98) 2. 정종(1398--1400) 3. 태종(1400--1418) 4. 세종(1418--1450) 5. 문종(1450--52) 6. 단종(1452--55) 7. 세조(1455--68) 덕종 8. 예종(1468--69) 9. 성종(1469--94) 10. 연산군(1494--1506) 11. 중종(1506--44) 12. 인종(1544--45) 13. 명종(1545--67) 덕흥대원군 14. 선조(1567--1608) 원종 15. 광혜군(1608--23) 16. 인조(1623--49) 17. 효종(1649--59) 18. 현종(1659--74) 19. 숙종(1674--1720) 20. 경종(1720--24) 21. 영조(1724--76) 장조, 은언군, 전계대원군 22. 정조(1776--1800) 23. 순조(1800--34) 익종 24. 현종(1834--49) 은신군, 남영군, 흥선대원군 25. 철종(1849--63) 26. 고종(1863--1907) 27. 순종(1907--10) 강, 은
* 점역자 설명: 위 계보에서 연보가 없는 왕들은 왕세자 혹은 부원군 등이며, 왕과 더불어 실정을 한 경우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