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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경가회는 모교인 개포동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관 4층강당에서 51회 동문인 이윤경 미카엘라님의 강의를 들었읍니다. 미카엘라 동문은 1972년 일가족이 도미하였다가 작년 7월 영구 귀국하였으며, 원래 computer science전공 이었으나 뉴욕의 포담대학에서 종교학을 다시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뉴욕의 Westchester community college에서 세계종교학을 강의 하였읍니다. 오늘의 강의는 칼 라너 (Karl Rahner)의 사상을 중심으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평신도의 역할 이었읍니다. 다음은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강사 이윤경 미카엘라 동문은 강의에 앞서 지난 3월 19일에 즉위하신 새 교황 프란치스코 1세 님의 취임미사강론을 소개하였읍니다. 취임일은 성 요셉축일인데 요셉성인은 성모님과 예수님과 교회의 보호가 그분의 성소였다고 하셨읍니다. 보호자의 성소는 크리스챤 이기 이전에 모든 인간에서 주어진 것이며, 보호자의 성소의 보호대상은 모든 창조물, 모든 아름다움, 가족의 존중과 친구들과의 우정의 지속이며, 가난하고 약한자를 돌보는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특히 경제적 여유있는 사람들은 더 보호자의 책임이 크다고 하셨읍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즉 우리자신이 선함(goodness)과 온유함 (tenderness)을 유지할수 있도록 해야한다는것 입니다. 하느님을 무조건 믿고 신앙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선하고 온유해야 보호자가 될수있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는 미움, 시기 질투 자만심인데 이런것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고 파괴하게 됩니다. 선함과 온유함은 spirit 이 강하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정신이 강해야 타인을 연민의 정으로 볼수있고 열린마음으로 대할수있는 사랑의 실천 능력이 있읍니다. 이것은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며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 입니다. 유식한 단어나 신학을 논하지 않은 쉬운 말씀이었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역사상 21번째의 공의회 였으며 많은 변화를 가져온 공의회 입니다.
< 지난 2000년간의 가톨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봅니다.>
AD1c는 순회설교를 하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신후 제자들은 복음을 쓰는한편 지중해 연안에서는 신앙의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다른 지역에서도 특성있는 공동체들이 생겨나는 시기였읍니다. 4복음 사가들 중에서 마태오복음은 유다인 공동체를 위한 복음이었고 마르코복음은 로마에 있던 공동체 그리고 루카복음은 그리스계통 신자들을 위한 복음으로서 각각 특성있게 기록되었읍니다. 이복음들을 종합해보면 그리스도를 더 입체감있게 만날수 있게됩니다.
AD2C-7C 에는 교회가 그리스문화권으로 이동하면서 철학적 논란이 일던 시기였는데 그무렵 예수님은 창조된 인간이라고 하는 아리우스의 이론을 이단으로 결정하고 AD325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님은 신이며 인간이다 라는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였읍니다. 그후AD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님은 온전한 신이고 온전한 인간 이시다" 고 확정하였읍니다.
그후 15-16 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란은 그만하고 그분의 은혜를 중요시하라고 하며 전통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자 교회는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새로운 문제를 외면하고, 교리의 manual을 만들어 그것을 외우는것이 신자의 의무라고 하여 신앙생활이 건조해졌으며 새로운 통찰을 무시하였으나 20C 에 와서 예수님의 삶을 조명하며 그분의 인간성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자신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교황 요한23세가 개최하고 바오로6세가 이어 진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는 20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혁명으로서 현대화를 수용하는 교회가 됩니다. 비오9세 가 개최한 바티칸 1차 공의회는 현대화를 비난하였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작되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는 완벽한 집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사 (성사 = 하느님의 은총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것) 이며, 우리 인간도 하느님의 성사 이며, 교회는 순례
자 이며, 기도하며 배우는 교회이며, 세상과 분리되지 않고 세상과 함께하면서 세상을 책임지는 교회라고 하였읍니다.
2, 교회의 상대성 - 교회밖에서도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며, 교회는 삼각형 구조가 아니라 원형구조이며, 사회와 더불어 공동선을 이루어야 한
다고 하였읍니다.
3, 평신도 공의회라고 할 정도로 평신도의 위상을 높입니다. - 사제나 성직자에게 자신의 의견표시없이 순종하는것이 아니라 , 평신도인 우리모두가 주체가 되어 개개인 의 주체의식을 가지고 각자가 거룩한 부름을 받은 성소자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것 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평신도에게 성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이제 평신도는 삶으로 선포하고 사제는 평신도들의 영광을 보조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평신도들의 적극적 참여가능하도록 전례형식이 변화되었으며, 사목이란 하느님 백성 모두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인류에 봉사하는것으로, 믿음뿐아니라 희노애락이 모두 합하여 사목의 대상이 됩니다. 평신도 사도직이란 단어가 출현하였는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셔서 소망과 사랑으로 세상을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사회에 참여하면서 우리각자가 자기자리에서 자기의무에 충실하면서 --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것 입니다. 이 평신도 사도직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신것 입니다.
여기에서 사도직은 1 사제직 2,예언직 3 왕직을 포함하는데 사제직은 예를 들면 우리가 어느자매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볼때 그 자매가 내가 그것을 감지한다는것을 알면서 두사람사이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느끼면서 다른이들도 그것을 보게되면서 세상을 성화시키는것 입니다. 예언직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것이며, 왕직은 하느님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는 소망을 가지고 작은일이라도 하는것이 왕직의 수행입니다. 이러한 변화에서 위기와 혼란의 시기가 초래되었읍니다. 지적 영적 감정적으로 준비안되어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사제성소의 감소와 사제직을 떠나는 사제들이 많았으나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의 수는 증가되었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상이 의미하는바와 그 이후의 신학적 변화>
강사인 이윤경 동문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근간을 제공한 칼 라너의 신학과 그 이후의 변화를 생각하는 시간이 기도가 되는 시간이었다고 하였읍니다. 새 교황님과 같은 예수회원 사제인 칼 라너(Karl Rahner 1901-1984)의 신학은 인간이 출발점이며, 수많은 공의회 문헌의 90%에 영향을 주었읍니다. 인간은 초월적 신비체(supernatural existential)이며 인간은 누구나 출생부터 초월적 신비체로서, 하느님은 인간 누구에게나 하느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수 있는 은총을 인간의 조건으로 주셨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때 능력을 받아들일수 있는 능력을 누구에게나 주셨으나 자유의지로 no 라고 할수있으며 이를 죄라고 할수 있읍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주셨기에 (self communicating God) 하느님은 giver이며 gift가 되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쉽게 구입할수 있는것을 선물하지만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선물이 되십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고 인간은 유한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칼 라너의 인간은 유한과 무한의 사이에 놓여있고, 하느님이 주셔서 받았으므로 이미 우리는 무한하다고 단언 할수 있으며 그래서 초월적 신비체가 됩니다.
인간의 영은 진실을 향하여 무한대로 갈망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갈망은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이 갈증으로 하느님께 다가갈수 있는것 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질문하면서 또 무한대의 질문을 만들면서 나는 누구이며,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가를 생각하면서 초월적 신비체가 됩니다. 칼 라너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간성을 함께 봅니다. 하느님께서 self communication으로 당신자신을 주셨음으로 인간성은 하느님의 은총과 분리될수 없읍니다.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볼수있으며 그것을 못보는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self communication을 받은 인간은 신성하며 신성하다고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은 얼마나 더 신비로운 분이신가? 그리고 얼마나 한상 더 주기를 원하시는가? 하느님은 자신을 주고싶어 안달 하시는 분이고, 인간은 무한한 갈망으로 안절부절 하는 존재인데, 예수님은 이 두가지가 만나 합쳐진분이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일때 그가 질문하고 사랑하고 갈망하고 희망할때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것 입니다.
칼 라너 신학의 정의에 의하면 삼위일체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근원이신 분은 성부이시며, 자기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분은 성자이시며, 우리모두를 일치시키는 사랑으로 인식되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간성의 완전한 만남이며, 하느님 모상으로 만들어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생각할때 인간의 존엄성을 이해할수 있으며, 인간을 무시하면 하느님을 무시하는것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간이 존엄해졌으며 인간이 들어올려져서 존엄해졌다는 사실이 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의 본질입니다. 중세이전에는 완덕은 지식이 있어야 가능한것 이었으나 현대에 는 완덕은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될때 존엄함을 알게 될때 자유로워 지며, 타인의견에 좌지우지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데 사랑안에서 결정해야 합니다. 자유는 앞이보이지 않고 공허함을 느낄때가 있는데 이는 당신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조건을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 공허함을 어떻게 처리할것인가는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자아실현입니다. 거절인가 순종인가 ? 우리의 공허함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드러내고 덮어주신 선물입니다. 칼 라너가 정리한 우리의 삶은 자유의지 안에서 하느님 은총과 죄 안에서 갈등하는것인데 그 갈등은 우리성장을 위한 동력입니다. 갈등은 긴장속에서 팽팽할때 효과적으로 열매를 맺을수 있읍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될수 있는 적당한 탄력(length at rest)이 좋겠지요. 우리가 하느님께 no할때 우리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것이 되어 자아실현을 못하게 되며, 그것이 하느님의 힘을 제한하는것 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도전과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야 하며, 삶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내힘으로 하려고 하면서 고생할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안에 계심을 기도하며 잊지않는 삶은 축복이며, 하느님이 자신을 선물로 주셨으므로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런데 지은죄에 집착하며 자신을 단죄하면 그때 내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수 없습니다. 자유로워짐은 내적 권위가 있을때 가능하며, 자유롭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때, 내 의견을 분명하게 말 할수 있게 되며 나의 삶도 표현할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을 확실히 표현할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은 신학자만 하는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하느님은 온유하신 분이며, 내가 쥐고 흔드는 분이시며 나의신앙은 ~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른이의 신앙도 존중할수 있읍니다. 자꾸 바뀌는 신앙을 그때마다 이야기할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셨기에 --- 하느님은 다양하게 체험되는 분이기에 절대적이고 상대적으로 ---
그리고 우리는 사회건설을 위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보다나은 사회건설을 위하어 사회제도 변화에 열정을 가지고 작은 힘이라도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태면 이런일은 사도직 수행이 될수 있습니다.
첫댓글 이윤경 미카엘라 님의 강의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행복함을 알도록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윤경 선배님께서 공학박사, 종교학박사 2개의 타이틀을 가지신 것이 특별했으나 중요시 안 했는데 어제 'emptiness'를 말씀하실 때, 확~ 느껴지는 것이 있었어요. 아~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하고요.
유 선배님의 요약을 100% 기대하고 강의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전체의 흐름을 소홀히 하는 저를 또 발견합니다. 안그러게 생겼나요? 이렇게 완벽한 교재가 있는데요.
유병숙님께 감사드립니다.
참석을 못했는데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항상느끼는것이지만(병숙아!) 어떻게 그렇게 전달할수있을까? 정말 능력이 놀랍다!그리고 이윤경 이카엘라님의 강의내용으로보아 그분의 신앙과 하느님께대한 사랑을 볼수있았고 내게도 정리가 된부분도 있었어, 정말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