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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열 시집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 출간
김진열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으며, 2019년 {애지}로 등단했다. ‘동서문학상(시, 수필 부문), ’경북일보 문학대전‘, ’산림문학상 수상‘, ’KT & G 문학상 대상‘, ’전국 여성문학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
김진열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의 시세계는 가난한 인간들의 삶의 애환을 노래한 시들이며, 신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산문시의 진수를 선보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가난의 대물림, 출신성분의 대물림, 비단실을 짜야만 하는 육체노동의 대물림을 노래하고 있는 [누에는 수의를 입지 않는다], 실직과 구직 사이에서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 젊은 가장의 절규를 노래하고 있는 [남극일기], 집도 관, 공공기관의 직장도 관, 비행기도 관, 죽음도 관이라는 [관], 신분의 차이, 즉 남편과 아내의 역전된 관계를 노래하고 있는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 자칫 도둑의 엉덩이를 받쳐줄 뻔했던 밤을 노래하고 있는 [달에는 문이 있다]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김진열 씨의 인식의 깊이는 빈부의 문제와 신분의 차이와 삶의 현장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주목하고, 그의 시적 재능을 말들의 경연장으로 연출해낸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과 함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인 구조는 메아리 효과를 낳게 되고, 이 메아리 효과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으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여자의 아버지가 사준 아파트는 평범한 회사원인 남자의 능력 밖으로 넓다 몸 풀기 동작에 고양이자세까지 끝냈다 여자가 쁠리레를 할 때 세탁기는 삐삐삐 세탁이 끝났음을 알린다 집을 떠났을 때가 가장 명랑하다는 남자*가 세탁물을 바구니로 옮긴다 거실에서의 동작은 바뀌어 드미 쁠리레로 이어진다 팔을 집어넣고 빨래를 꺼내던 남자, 윽 소리를 내며 놀란다 여자의 하얀 팬티가 진한 회색으로 변했다
흰 빨래는 희게 해야 한다던 말에, 받았던 상처가 아직 딱지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얼핏 돌아보니 발끝을 바닥에서 끌어 한 쪽 다리의 무릎을 펴고 밀어내고 있다 바뜨망 탄듀라고 했던가 불현듯 흰 빨래와 검은 빨래의 구분이 잘못되었을 때 여자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던 동작을 연상시킨다 큰 숨을 내쉬며 여자의 가위질에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색깔이 바뀐 팬티를 쓰다듬는다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서 설치한 거실의 바 위에 다리를 올린다 입 꼬리를 올려가며 여자의 눈이 노려보는 발끝에 회색 팬티가 걸리는 상상, 남자의 심장이 빨리 뛴다 세탁실에서 빨래를 꺼내던 남자가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 챈 여자의 침묵은 연기다 입 꼬리 더욱 올라가고, 고통은 지그시 누리는 환희로, 뜨겁게 쏟아지는 머릿속 박수를 들으며 백조의 잔걸음이 이어진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남은 빨래를 꺼낸다 빨래 바구니는 팔을 굵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남자는 소리 없이 소파에 앉는다 호두까기 인형 음악이 흐르고 눈을 감는다 좀 전에 여자의 티셔츠를 툭툭 털어서 널었던 것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 몸으로 표현한 환상적인 안무였다 일주일 동안 입었던 자신의 팬티 6장을 연거푸 널었던 것은 여자와 보조를 맞춘 발레리노의 턴을 위한 기초였다 그 동작 속에 떠오르는 알라스꽁을 거실에서 꿰면, 몽환적인 스토리는 완성되는가 여자는 빠세 를르베를 연습한 뒤 도도하게 서서 땀을 닦는다
남자의 시선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행복이 빵처럼 부푼다
*세익스피어의 말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 전문
여자는 예술(발레)을 위해 살고 예술을 위해 죽으며, 순수예술을 위해서는 남자(남편)를 개같이 학대하는 것은 물론, 이혼까지도 불사할 태세다.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돈이며, 돈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대중들의 찬사와 박수를 받는 백조의 여왕을 꿈꿀 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남자는 돈이 없기 때문에, 그날 그날이 그날 그날인 평범한 회사원에 지나지 않으며, 아내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집 바깥에서 자그만 명랑함을 향유할 수가 있다. 누가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누가 순수예술을 하고, 누가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말하는가? 언제, 어느 때나 최종심급은 돈이며, 돈을 가진 자가 순수예술을 하고,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말하고, 그의 하나님과도 같은 은총에 의해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
발레하는 여자는 부의 세습에 의해서 순수예술을 하고, 만인들의 연인이자 우상을 꿈꾸지만, 빨래하는 남자는 기껏해야 빵 몇 조각의 최하 천민의 생활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몸과 영혼까지도 팔아버린다. 빨래하는 남자는 씨받이이며, 성적 욕망의 도구이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하인에 불과하다. 김진열 시인의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는 돈에 의해서 남녀의 관계가 역전되고, 돈 많은 여자는 순수예술을, 돈 없는 남자는 자기 자신의 몸과 영혼을 팔아버리고 끊임없는 착취와 학대와 육체노동에 시달리게 된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술은 사치의 아이들(패륜아들)이고, 모든 사회적 천민들은 이 사치의 아이들의 행패에 시달린다. 인생이 예술이라고 할 때,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타락이 생겨난다. 순수예술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폭력에 기초해 있고, 이 폭력을 행사할 때만이 ‘잔인성의 아름다움’이 활짝 피어난다. 모든 식물들, 모든 곤충들, 모든 동물들까지도 폭력적인 서열제도를 이루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예술을 위해 복무하고, 순수예술의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예술은 ‘잔인성의 아름다움이다’라고, 김진열 시인은 역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진열 시인의 [관]의 시적 화자는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며, 그는 열네 번째 해외출장에서 귀국길에 오른 사람이다.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출발하여 11시간 비행을 마치면 인천공항이고, 그의 가방에는 빨랫감과 아내에게 줄 향수 한 병, 그리고 수많은 자료들이 들어 있다. 밖은 침침하고 삭막하고 두꺼웠다. 그는 수많은 생각들, 즉, 너무나도 완벽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해외출장을 왔던 것이고, 그 결과, 관에서도 인정할 수 있을만큼의 성과도 얻었다. 시간은 아직 남아 있어,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몽상에 잠긴다.
현관문에 들어서니 아내가 서 있고, 천정이 낮고 벽이 코앞이었다. 집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가득한 관이었고, 아내는 어린 시절 큰절하면 학용품값을 곧잘 주시던 큰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집도 관이고, 직장도 관이고, 비행기도 관이다. 삶도 관이고, 꿈도 관이고, 죽음도 관이다.
출장가방을 꾸려주던 아내의 뒷모습이 선하고, “나눌 수 없어 혼자 느끼고 들어가는 통로는 체온을 벗어난 허공으로” 그를 내몬다. 비행기도 원통형 관이고, 11시간 비행 끝에 차를 타고 도착한 집 역시도 또다른 관의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김진열 시인의 [관]은 그의 인생관이며, ‘관觀의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크지 않은 성과이지만 관에서 인정하기에 충분했다”의 관은 벼슬관官이 되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 가득한 관은 널관棺이 된다. 현관은 문을 뜻하는 관關이 되고, 여기는 원통형 관은 널관棺이 되고, 큰아버지가 들어가신 관도 널관棺이 된다. 관에 대한 더없이 진지하고 근본적인 성찰은 인생관(볼관觀)이 되고, 이 인생관이 최고급의 사유인 ‘관觀의 철학’으로 상승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관에서 태어나 관에서 살며, 관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관에는 수많은 오솔길과 샛강이 있고, 이 관이라는 우주에는 수많은 삶의 양상과 놀이가 있다.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프랑크푸르트까지 날아갔던 관, 크지 않은 성과이지만 충분히 그의 신분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관, 깊고 익숙하며 참기름처럼 고소한 관,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학용품값을 주시던 큰아버지가 들어가신 관, 원통형 관을 타고 돌아와 또다른 삶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향해 가게 하는 관----, 아아, 우리들의 인생에는 얼마나 다종다양한 관이 존재한단 말인가! 관은 집이고, 텃밭이고, 놀이터이다. 관은 사무실이고, 무덤이고, 대자연의 우주이다.
김진열 시인의 ‘관觀의 철학’은 깊이 있는 성찰이며, 위대함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출발하여 11시간 비행, 인천공항이다 빨랫감과 아내에게 줄 향수 한 병, 자료들로 채워진 무거운 가방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날아갔었다 밖은 침침하고 삭막하고 두꺼웠다 이번이 열네 번째, 발을 붙일 수 없는 캄캄한 곳에서 희망은 계속되었다 크지 않은 성과지만 관에서 인정하기에 충분했다 시간은 남아 있어 옷매무새 가다듬고 주먹을 쥔다 여기는 입구, 꿈은 밖에서 계속 된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아내가 서 있다 천정이 낮고 벽이 코앞이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 가득한 관이다 깊고 익숙한 분위기가 아늑하다 어린 시절 방학 때 놀러가서 큰절하면 종이 돈 작게 접어 공책 사라며 쥐어 주시던 큰 아버지께서 관으로 들어가셨다는 아내의 브리핑, 현관은 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출장 가방을 꾸려주는 아내의 뒷모습이 익숙하다 나눌 수 없어 혼자 느끼고 들어가는 통로는 체온을 벗어난 허공으로 나를 내몬다 여기는 원통형 관이 될 것이고 비행기는 걱정 없이 구름 위로 치달을 것이다
12시간을 날아서 도착할 그 곳은 관의 시작, 관의 입구는 또 어떤 한계를 보여줄까 ----[관] 전문
강 건너 불구경도 아름답고, 밤이 없는 남극의 백야 현상도 아름답다. 모든 말과 말들의 향연은 극한지역에서의 향연이고, 극한지역에서의 향연이기 때문에 더욱더 아름다운 명문장들, 즉,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으로 타오른다. 앎은 언어를 선택하고, 언어는 그 인식의 힘으로 어떤 사물과 사건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즉,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천길 벼랑 끝의 소나무와 독수리처럼 어느 누구도 감히 해낼 수 없는 기적을 연출해낸다. 시의 토대는 생존의 벼랑끝이고, 시인은 생존의 벼랑끝에서 삶의 묘기를 펼쳐보이는 모험가와도 같다.
김진열 시인의 [남극일기]는 실직과 구직 사이에서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 젊은 가장의 절규이며, 이 절규가 남극의 백야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실직과 구직 사이의 무대를 남극으로 상정하고, 그 가상의 극한지역에서의 생존투쟁을 너무나도 아름답고 극적인 명문장들을 통해서 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며, 시인의 앎의 깊이와 정비례한다. 많은 아는 자가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고, 많이 아는 자가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시를 쓰게 된다. 말과 삶은 하나이고, 말의 축제는 삶의 축제이며, 시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다.
2개월 후 둘째가 태어난다 얼음과 눈이 덮인 빙하, 영하 30도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손 부장도 박 차장도 극지 탐험을 떠났다 손을 벌릴 유일한 혈육 극락조자리 누나, 지구인이 공유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남편의 사업실패로 제7대륙의 공룡 화석을 찾아 이민을 떠났다
판구조론을 벗어나, 8번째 이력서를 낸 곳에서도 썰매의 끈이 끊어졌다 영하 40도에서 돌아오는 길, 술 취한 남자가 놀이 빙산 크레바스에 빠질 때 탐험대원 지갑 속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욕이 얼어붙어 고드름이 된다 쇄빙선이 멀미를 하고, 폭풍 속에서 회오리치는 친구들의 얼굴이 하늘에서 환청으로 얼어붙는다 기지 도착 전 시계視界의 끝까지 흰색과 청색을 이룬 횡단보도, 잔물결이 만드는 작은 파도소리, 멀리 헤드라이트 불빛, 빙하의 붕괴, 뛰어들고픈 충동
현관에 본부를 차린 아내가 쏘아 붙이기 시작한다 지금 그렇게 헤매고 다닐 때야? 영하 50도까지 떨어진다 새끼 펭귄이 슬그머니 물속으로 숨는다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혀 탈출구가 없다 인형을 끌어안고 쓰러진다 백야다
---[남극일기] 전문
----김진열 시집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