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와 수필 문학
(이동민의 ‘수필 문학의 키치적 성격’에서 발췌)
1. 키치의 일반적 성격
키치라는 말은 저속하다는 뜻이 강하다. 특히 하층민들의 취향을 두고 상층민들은 우스꽝스럽다며서 불쾌하게 여기면서 차별화 하는데서 키치라는 말이 생겼다. 경제적인 요소가 키치를 규정하는 데 하나의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적인 요소보다는 문화적인 요소가 강하다. 이를테면 졸부가 자신의 부를 과시할 생각으로 미적 한계를 넘어 설 때는 오히려 천박하게 보인다. 이 천박함을 키치로 보았다. 그 시대의 미적 정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의해여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수필에서 키치적 요소를 찾는다는 것은 누가 수필을 쓰며, 이런 수필을 어느 계층이 즐겨 읽는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 수필을 쓰는 작가는 대부분이 부르주아지 계층이다. 시민계급으로 지칭되는 그들은 대체로 서민계급으로서 스스로 오늘의 자기 위치를 쌓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상류 계층의 미적 감수성을 흉내 내면서 수필에서도 키치적 표현들이 나타난다.
키치라는 말에는 부정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고급이 아닌, 엘리트가 아닌, 진짜가 아니고 가짜인, 진품이 아니고 조악한 것, 특정한 양식을 하지 않고 다만 편안함만을 충족시켜 주는 것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키치 문화가 번성한 시기가 부르주아지 사회의 부흥기와 일치한다. 경제 부흥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을 양산했다. 인간의 노동이 기계로 대치되고 여유 시간을 가진 중산층은 소비를 찾아 나섰다. 문화도 소비 활동 속에 들어가므로 예술에 대한 욕구도 왕성해졌다. 실용적인 효용성을 중시하는 물건에도 장식성을 가미하여 미적 느낌을 갖도록 한다. 미적으로 장식된 물건은 신분 상승에 대한 강한 욕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산층은 아직까지는 고급 예술을 향유하기에는 모자라는 보통 사람들이다. 아직은 상류 사회로 진입하지 못한 작은 사람이다. 이들은 신분상승을 과시하고 싶어서 소비시장을 기웃거린다. 이들이 먼저 목표로 삼아 공략하는 상품은 키치적인 것들이다. 즉 키치 예술은 보통 사람들을 겨냥하여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고급예술은 초월적인 미를 주장하고 있다.(상당히 추상적이고 지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키치 예술은 초월이 아닌 현실에서 행복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비싼 고급 주방기를 찬장에 진열하고 행복해 한다든지, 비싼 밍크를 걸치고 행복해 하는 따위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서 편안한 느낌이 키치의 중심적 특징이다. 현실에서 추구하고, 존재하고, 유행하는 경향이다. 그러므로 창조와 초월적인 미(형이상학적인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키치를 비난한다. 따라서 키치라고 말할 때는 조금은 저질스럽다는 뉴앙스를 풍기므로(지적이고,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 못하다는) 비난의 뜻이 함의되어 있는 용어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떠나서 혼자서 고고한 예술가는 존재하기 어렵다. 대중의 취미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브로흐는 ‘모든 예술에는 키치적 흔적이 담겨 있다.’라고 하여 키치를 예술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말하기도 한다. 중산층은 자기들을 조금이나마 아늑하게 느끼게 해주는 안락한 삶을 지향한다. 일상 생활에서 안락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중산층에게 적합한 예술이 된다. 편안하다는 느낌이 키치적의 특성으로서 정서적인 느낌이다. 이것은 중산층의 삶의 목표와 잘 맞아 떨어진다.
우리는 교양 있는 사람을 위한 예술과 배우지 못한 사람의 예술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교양 있는 사람은 키치적인 것을 경멸하지만 키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 좋아하는 예술을 경멸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수필이 다른 문학 장르의 사람들로부터 폄하를 당하는지 모른다. 쇼펜하우어도 키치를 낮추어 보았다. 그는 예술적인 것과 흥미로운 것으로 나누면서, 흥미로운 것은 감상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예술로 이해하여 낮추어 보았다. 그가 네델란드 정물화를 저급하게 보는 이유로 관조를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과일이나 식탁은 식욕을 돋우다는 것이다. 수필을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글로 쓰면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가 된다. 그럴까? 이 것은 두 취향의 차이를 존중하면 단번에 해결되는 문제이다. 오늘의 미학이 차이를 인정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수필과 다른 장르는 취향의 문제이지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솔로몬은 대중을 속물스런 취미를 가졌다고 말함으로, 키치 예술은 대중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대중사회란 중산계급의 특성을 바로 자신의 특성으로 삼고 있는 사회이다.
대중이란 익명성의 집단이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대중예술은 여러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문화 민주주의 입장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드르플레스는 현대의 대중문화와 키치는 동의어와 같다고 했다. 수필도 고급 예술이 아니고 대중들이 즐기는 문학으로 분류를 한다면 수필도 키치적이 된다.
문화예술적인 관점에서 키치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낭만주의이다. 경제적으로 승리한 중산층(부르조아지)은 행복하고 달콤한 분위기를 추구한다. 또한 부드러움, 달콤함과 마찬가지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것과 감상성도 바로 키치이다. 감상성은 낭만주의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국적인 분위기(엑조틱한)도 낭만주의이 특성다. 키치에도 적용된다.
요약하면 키치는 중산층과 대중성과 낭만주의를 특성으로 한다. 수필도 중산층과 대중성과 낭만주의를 요소로 한다. 따라서 수필은 좋은 의미로 키치적 속성을 가진다.
2. 문학에서의 키치적 성격
키치가 중산층의 문화성격을 지녔으므로 중산층이 느끼는 심리 상태가 키치문학의 한 특성이 된다. 어느 정도 부의 축적을 이룬 그들은 이제는 자기도 어느 만큼의 행복을 누릴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낭만주의적 심리상태가 내면에 깔려 있으므로 쾌적함을 좋아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편으로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가치에도 순응함으로(부르조아지는 보수적 성향을 띤다는 뜻이다.) 가정적인 분위기를 심리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관능적인 것에 대한 욕구도 버리지 못하는 이중성이 중산층의 특징이기도 하다. 낭만주의적 취향으로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중산층의 정서에 맞아지기도 한다. 이국적인 정취와 함께 향토적이고 전통적인 가치에도 매달리는 이중성을 보인다.
중산층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려는 보수성향의 심리가 강하다. 그래서 현실 부정과 진보 성향이 강한 전위적인 예술에는 강 한 저항감을 느끼기도 한다. 따라서 키치 문학은 전통성과 대중성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대중성이라고 하더라도 민중예술에는 적대적이다. (머릿띠 두르고 햇불을 들고 괭꽈리를 치는 따위의) 중산층 사회에 대항하는 예술형식은 부르주아지의 시민사회의 눈으로 보면 파렴치하고, 부도덕하다. 참여하는 사람은 구제불능의 인간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젊은이의 문화를 천박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 수필도 대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키치 문학은 과거지향적인 성향과, 대중성이 함축된 낭만주의에 강한 친화성을 보인다. 따라서 작품 속에는 전통적으로 수용되어 온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우리나라라면 유교적인 보수 가치를 이념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낭만주의적 분위기를 묘사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문장 하나를 예로 든다면
“그녀는 솔잎 냄새가 가득한 숲속에 위치한 하얀 빌라에 살고 있으며 그 앞 바다는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 물결이 출렁이고 있다.”
“꿈이 고요하게 흐르는 해질녘”
이런 문장들이 자주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극단적인 감정중심주의로서의 키치는 냉엄한 현실의 표현에는 부적합하다. 즉 현실도피를 위한 면모가 곧잘 나타난다. 일상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무의미함과 진부함을 벗어나 환상적이고 즐김의 장소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회상에 빠져드는 경우가 아주 많다.
너무 유명하여 이미 대중화되어버린 고급 예술작품들, 예로서 밀레의 저녁종의 복제품을 걸어두고 즐긴다. 윤동주나 소월의 시를 음미한다. 따라서 키치는 상당한 정도로 낭만주의의 진부한 형태로 볼 수 있다.(M. 칼리니스크의 ‘키치와 모더니티’에서 --) 우리의 수필에는 부평초 같은 인생이라든지, 유수와 같은 세월 따위의 유행가 가사 같은 표현을 하는 수가 있다. 흔히들 상투적인 언어 구사라고 말한다. 이것도 키치적 표현이다.
키치문학에 나타나는 논리구조는 모든 시련 속에서 자신들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사랑에 충만되고, 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키치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도덕적이어서 나무랄데 없는 인격의 소유자이다. 우리 수필에서는 등장 인물(주인공이고, 화자이고, 작가 자신인)이 훌륭한 인격자로 서술되는 이유이다. 이러다 보니 우리 수필은 서정성이 짙어지고, 스스로를 미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무리 키치적 속성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이런 표현은 독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므로 가급적 피해야 한다.
우리 수필은 여러 면에서 키치적인 성격이 아주 강하다. 그러나 막상 당신의 수필은 키치적이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키치를 막연히 저질스럽고 나쁘다라고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치는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속성이 있다. 광범한 계층에서 좋아한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키치는 기존의 가치에 도전장을 던지는 것과 같다. 로마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키치가 크게 유행했다. 중세의 가치관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키치가 나타날 사회적 여건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제 수필이 이 시대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대표적 문학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주장한다. 우리의 수필에 있는 키치적 요소를 무조건 비난만 하지 말고 수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받아들일 요소는 받아들이자.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키치적 요소를 수용함으로 수필의 키치화를 벗어나자는 주장을 한다. 수필을 대중화할 수 있는 속성들은 받아들이지만 글이 천박하게 되는 것은 피하자. 어떻게? 수필을 쓰는 우리가 찾아보아야 할 과제로 삼자.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고전 수필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제가 1998년에 이 글로 수필과 비평지에서 제 1회 수필평론 공모에 당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