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우수 경칩이 지나서인지 완연한 봄날씨다. 집 옆 굿모닝 공원을 가로질러 판교역 부근에서 버스를 타고 사당으로 행했다. 20여 년 전 같은 세관에서 근무하던 동료들 모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교통이 편리하여 접근성이 좋고 다양한 식당들이 밀집해 있는 사당역 부근은 서울 남부권 단체 모임의 메카 중 하나이다. 칠 년 전에 대학교 동문들과 관악산 산행을 한 후, 사당역 부근 '*나무골'이라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함께 들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신록이 눈부시게 빛나던 오월이었다.
"만발한 배꽃처럼 이야기꽃이 만발했던 *나무골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섰다. 자리를 옮기는 일행과 악수하고 전철역으로 향한다. 아직 해는 중천에 있다. 빌딩숲 그늘에 부는 바람이 얼굴로 달아오른 막걸리 열기를 날려 주어서 좋다. 사당역 사거리 모퉁이 쉼터에 앉았다.
까페의 다정한 사람들, 모이를 쪼는 비둘기, 아이스크림 가게, 지나는 사람들, 햇빛과 바람까지도 평소 번잡스레 보이던 사당이 달리 보인다. 몇 잔 걸친 막걸리가 마법을 부렸는지 마음은 여유롭고 세상은 온통 아름답다. 날마다 오늘 같다면 사당을 사랑하게 될 듯 싶다." _2018.5월 '관악산과 배나무골' 中
모임 시간까지 한 시간여 전에 사당역에 도착했다. 사당역 지척 남부순환로 2076에 위치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을 둘러보려고 넉넉히 시간을 안배했던 것이다. 미술관은 대한제국(1897-1910) 때인 1905년에 준공된 벨기에영사관 건물로 원래는 회현동 2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전주의 양식의 아담하고 미려한 이 건물은 1919년 벨기에 영사관이 충무로로 옮긴 후, 일본 요코하마(橫濱) 생명보험회사, 일제 강점기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광복 후 해군과 상업은행 등으로 주인이 바뀌었었다.
상업은행이 영사관 터에 사옥을 짓고자 1981년 10월에 영사관 건물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여 복원했고, 2004년에 서울특별시에 무상으로 임대함으로써 2004년 9월 2일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으로 변신했다. 1977년 사적(제254호)으로 지정된 탓에 철거를 면하고, 이 자리에 온전히 모습을 보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당 전철역 지하통로 6번 출구로 나섰다. 따스한 날씨 때문인지 두툼한 외투 차림 일색이던 거리의 행인들 옷차림이 제법 많 가벼워진듯 보인다. 지척에 있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으로 발을 옮겼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지나 독립과 한국 전쟁 등 고난과 역경의 우리 근대사를 지켜보며 온전히 살아남은 건물을 대하는 감회가 색다르다.
Every town
Has its ups and downs
Sometime ups
Outnumber the downs
But not in Nottingham
......
애니메이션 영화 <로빈훗>의 삽입곡 가사처럼 어떤 마을이든 나라든 흥망성쇠를 피해 갈 수는 없겠지만, 500여 년을 이어온 조선왕조의 끝은 외세와 이에 동조한 매국노에 의한 침탈과 능욕의 허망한 결말이었다.
본격적인 외세 침탈은 위정척사 사상에 기반하여 1860년대까지 이어오던 쇄국정책 기조가 거세게 밀려드는 서구열강의 수호통상 요구에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시작되었다.
1876.2.27일 강화도조약, 1882년 5.22일 조미수호조약과 6.6일 조영조약, 1882.10.17일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 1883.11.26일 조독수호조약, 1884.7.7일 조러수호조약, 1886.6월 조불수호조약 등을 통해 열강들은 조선의 주요 항구 개항, 거류권 확보, 전신 가설권,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등 경제적 이권을 침탈해 갔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열강의 침탈을 막고 자주독립과 왕권을 수호하려던 고종의 노력은 1910년 일본의 강제합병으로 좌절되고 만다. 현재 진행중인 우-러 전쟁이나 세계 각지 경제적 약소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강대국들의 경제적 이권전쟁은 구한말 우리가 겪었던 상황과 조금도 다를바 없어 보인다.
6,70년대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 경제성장을 거쳐, OECD 반열에 올라선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기적과도 같은 역사를 써 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칠레 FTA를 시발로 2024년 12월 기준 22개 59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등 전 세계로 '경제영토'를 확장해 왔다. 무비자 방문 가능 나라의 수로 여권의 순위를 매기는 '헨리 패스포트 지수(Henley Visa Index)' 기준으로 싱가포르에 이어 일본과 공동으로 2위에 올라있기도 하다.
당리당략에 빠져 민생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권과 비상계엄 이후의 어수선한 정국에도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지하 1층·지상 2층의 건축총면적 1,569.58㎡인 미술관 내부는 외관과 마찬가지로 갓 지은 건물처럼 말쑥하고 단아했다. 미술관 1층에서 전시중인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제하의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작품들과 2층의 '건축의 장면(frames of architecture)' 전시물을 둘러보았다. 잔디와 수목으로 꾸민 정원을 가진 미술관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자못 삭막한 도심에 청량감과 휴식을 제공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미술관을 뒤로하고 관악산 기슭 비탈의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의 가닥을 잡아가며 '*산별곡' 식당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골목길 담벼락에 붙어 있는 '사당동 예술인마을' 관련 안내자료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술인마을 지명은 한국예술인총연합회와 서울특별시가 1969년에 남부순환로에 접한 남현동 1058의 6, 1066의 1호 예술인아파트 3동을 지어 예술인들에게 분양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름만 남고 예술인들은 거의 떠났다고 한다.
그중에는 '최순애(1914-1998), 이원수 선생 부부'라는 제하에 두 분의 사진도 눈에 띈다. 그 옆에는 1925년에 찬생한 최순애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요 '오빠 생각'의 악보와 가사가 함께 붙어 있다. 이 부부도 예술인마을에 정착했었나 보다.
'오빠 생각'은 방정환 선생이 발간하던 아동잡지 <어린이>에 입선된 동시로, 1925년 당시 12세이던 최순애가 일본관헌의 요시찰 인물로 돌아올 줄 모르는 여덟살 위 오빠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라 한다. 이듬해인 1926년 4월, 마산의 16세 소년 이원수(1911-1981)는 <어린이> 잡지에 '고향의 봄'이 입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원수는「어린이」에 실린 '오빠 생각'을 보고, 최순애와 팬레터를 시작하여 10년 동안 펜팔 교제 끝에 1936년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니, 동화보다 더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_최순애 詞 <오빠 생각> 1절
골목길을 지나 '*산별곡' 식당으로 들어서니, 먼저 도착한 반가운 얼굴 네댓 분이 밝은 미소로 반긴다. 사당역 부근에서 누군가와 함께 했던 옛 기억들은 모두 풋풋하고 은근하고 따스하다. 이날도 닭볶음탕에 탁주를 반주삼아 그런 기억 하나를 더 보탠 호젓한 날이었다.
@참고: wikipedia, 한국장로신문 [신앙산책] “오빠생각”과 “뜸부기 할머니”('23.8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