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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어원은 그리스어로 '번제'라는 뜻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화장시킨 범죄의 역사이다. 히브리어로는 재앙을 뜻하는 '쇼아'라고도 불린다.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이유는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그 이유가 유대인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29는 세계 대공항이 오면서 더욱 피폐해진 독일은 자본가와 은행가의 이미지가 있던 유대인에게 대한 반감이 폭발하게 되었다.
2 악의 보편성
독일의 민간인은 이미 반유대주의 사상이 컸으므로 자발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참여했다. 내무부는 유대인의 출생기록을 제공했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업인들은 유대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대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또한 대학교는 유대인 교수를 해고하고 철도회사는 수용소행 열차를 운영하고 화장 회사는 대규모 화장터를 지원했으며 제약회사는 생체실험에 참가했다. 이처럼 그 시대에 유대인들을 향한 악은 보편적이었다.
3 가짜 뉴스로 선동하다.
공산화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유대-볼세비즘설과 유대인이 세계 지배를 꾸민다는 음모론과 유대인이 기독교 아이를 죽여 피를 마신다는 설, 매음굴 포주가 유대인이라는 설, 동성애 영화들의 풍기문란의 주범이 유대인이라는 설, 1차 대전에 유대인이 징병을 거부했다는 설, 유대인이 담배를 도래시켰고 담배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설등 수많은 가짜 뉴스들을 통해 언론을 선동했으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사람은 히틀러이다.
4 빼앗아 주면 된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빼앗아 독일인들에게 나누어주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심각한 아이러니는 나치당원중 가난한 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부르주아 계층이었고 부르주아가 부르주아 계층을 좌파 논리로 깍아내렸던 것이다. 말하자면 '내로남불'과 비슷한 것이다. 이들의 경제적 환상은 유대인의 것들을 모두 빼앗아 독일인에게 주면 경제가 좋아질거라 믿었으나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학살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학살만이 목적이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경제 정책이 실패할 것을 알고 하는 사람은 없다
5 홀로코스트의 진짜 원인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를 히틀러가 유대인을 혐오하고 증오했기 때문이라고 가톨릭의 책임을 히틀러에게 전가하고 단순화하고 싶어하지만 그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사실 많은 나라들이 자발적으로 나치의 계획에 찬동하고 개입했다.
처음에 중세 가톨릭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유대교 신자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그다음 세속 세계 지도자들이 선언했다.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라울 힐베르크)
독일 민족 운동의 최종 목표는 기충충이나 다름없는 동유럽 유대인들을 모두 쓸어내는 것이었다. (나치당 기관지 1922.3.10)
유대인 천민 집단을 남김없이 절대적 절멸을 시켜야 한다. (Das Schwarz Korps)
# 폴란드에서는 유대인들을 모두 성당에 집결시킨 후 학살을 위해 수많은 가스차에 태워 질식사 시켰다. 그곳 성당에 한 여인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죽은 이유는 "빌라도에게 예슈아의 피가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하라"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정색을 하며 말한다. 유대인의 죽음에 독일인이든 폴란드인이든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다는 것일까 유대인 스스로 자초한 일인가?... 그리고 이 여인의 논리가 맞는가?... 중요한 것은 반유대주의의 시작은 분명 가톨릭이라는 것이다.
6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1933년 나치당이 집권했다 4월 유대인 상점에 보이콧이 시작됬고 6월 유대인이 공직에서 추방되고 노동 수용소 설치가 시작됬다.
1935년 시민권이 박탈되었다.
1936년 전문직(변호사, 의사, 교수직)에서 제외되었다.
1938년 11월 9일(루터 생일 전날) 유대인 대박해가 시작되었고 게토 설치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법적 권리 상당부분이 박탈되었다.
1939년 2차 세계 대전 발발, 4월까지 유대인 재산의 강제 매각 실시
1940~1945 게토 실시
1941년 유럽 유대인 전멸 결정
1945년 독일의 패전, 600만명이 죽고 6만명이 살았으며 종전후 1달안에 1만명이 사망했다.
이처럼 급격하게 핍박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었다.
7 육군 소장의 증언
일요일이었죠. 사람들은 1.5킬로미터로 줄을 섰어요. 줄은 조금씩 움직였죠. 처형 대기자들이었습니다. 구덩이로 다가가면서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죠. 대충 이 정도 아래 지점에서 장신구와 짐 가방을 내놓아야 했지요. 그걸로 헐벗은 우리 민중들에게 옷을 사 주겠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조금 더 걸어와서 이제 옷을 벗었죠. 숲 앞 500미터에 이르면 발가벗어야 했어요. 속옷이나 팬티는 입도록 했고요. 여자와 아이들뿐이었죠. 두 살 짜리도 있었습니다. 기관총 사수들은 그 일이 무리가 되어서 매시간 교대를 했죠. 차라리 그자들이 억지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이었다면! 아니었습니다. 그자들은 추잡한 말을 내뱉었죠. "자, 또 예쁜 유대인 계집이 온다."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네요. 새빨간 내의를 입은 예쁜 소녀 말이에요.
(발터 브룬스 독일 육군 소장의 증언. 브룬스 소장은 1941년 5월 1일부터 이듬해 5월 1일까지 독일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8 빨치산 연대 정치위원의 증언
우리가 여자를 흔들어 깨우자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고 여자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어…… 여자는 독일군이 자기와 자기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들려줬어. 놈들이 여자의 다섯 아이들을 총살시키겠다며 헛간으로 끌고 갔어. 하지만 헛간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면서 아이들을 먼저 쏘아 죽였지. 놈들은 아이들을 쏘면서 재미있다는 듯 낄낄댔어…… 젖먹이 막내아들만 남았는데, 파시스트가 '아이를 위로 던져라. 그러면 내가 총으로 쏘아 맞히겠다'고 몸짓을 해 보였지.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렸어. 아이가 죽어버릴 만큼 세차게…… 자기 자식을…… 독일군 손에 죽게 두느니 차라리 그렇게 한 거야…… 여자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얼굴을 들고 사느냐며 자기가 갈 곳은 저세상뿐이라고……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벨라루스 고멜 지역의 소련군 제225빨치산연대 정치위원 알렉산드라 니키포로브나 자하로바의 증언)
9 가스 학살의 시작
어느날 발터 라우프 SS대령은 한적한 교회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시동끄는 것을 깜빡 잊었고 잠에서 깨보니 배기가스에 중독되어 사지가 굳어 꼼짝 못하고 죽을 뻔 했다.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가스실 방식 살해 방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했고 이후 홀로코스트의 상징과도 같은 처형 방식이 되었다.
2012년 폐쇄된 북한 함경북도 회령 수용소도 생체실험 목적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10 더 많은 학살을 위해 가스실을 개발함
하켄홀트 하사는 엔진을 가동했다. 28분 뒤 소수만이 살아 있었고 32분 뒤 모두 사망했다. 치의사들이 들어와 금니와 치관을 빼냈다. 그 시체들 한가운데에 비르트 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가 되어 희생자들의 금니와 귀금속으로 가득한 통을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 황금의 무게를 느껴보시오! 이게 어제랑 그제 얻은 것들이오. 당신은 우리가 매일 얼마나 얻는지 모를 거요. 돈, 다이아몬드, 황금들 말이오. 직접 와서 보시오!"(게르슈타인 보고서)
기존에 쓰던 가스 밴의 작은 용적으로는 이송되는 희생자들을 전부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나치는 가스 밴을 개량하여 가스실을 개발했다. 이 아이디어를 최초로 내놓은 이는 베우제츠의 소장이었던 크리스티안 비르트 친위대 대위, 그리고 설계자는 로렌츠 하켄홀트 친위대 하사였다.
11 가스실은 효율적인 학살방법이 되었다.
간수들은 희생자들에게 이곳이 환승역이라고 이를 없애기 위해 목욕을 시켜준다는 핑계로 자발적으로 탈의하도록 유도하고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에 희생자들을 몰아놓고 배기가스를 주입해 살해했다. 가스실에 디젤 엔진을 부착하고 공회전 시켜 질식하게 했으며 4개의 수용소에서만 약 200만명이 사망했다. 그것도 단 몇개월만에 폴란드 유대인들을 거의 절멸시키면서 효율적인 학살 방법으로 평가되었다.
12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된 수용소였는가?!
가스실을 다시 한번 개량하는 과정에서 일산화탄소 대신 치클론 B를 이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독일은 마구간 방역용으로 위 살충제를 납품받아 석유보다 공급이 넉넉했고 이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였다. 더욱이 배기가스보다 더욱 싼 값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독일 언론들은 대량의 살충제가 공급되는 것을 보고 나치가 수용소를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하는 것 같다는 기사를 쓰는 짓을 했다. 기사도 검열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밖에 쓸 수 없었다.
13 왜 시오니즘이 나치와 협력하였는가?
나치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밝혀지기 이전에, 처음에는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초기에 홀로코스트는 시오니스트들에게 유대인 국가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유대인을 이주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1년 1월 11일 나치에게 군사협약을 제안한다.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이 이스라엘 건국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치는 영국과 적대적이었고 유대인을 추방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맹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츠하크 샤미르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독일의 계획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유대인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 사이에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 이는 나치의 진짜 계획이 절멸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14 전부가 죽는 것보다 소수라도 살려야 할까?
샤미르는 나치에게 독일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추방하고 물자를 지원해주면 나치 독일의 우방이 될것을 명시했다. 그러나 당연히 나치는 이 편지를 무시했다. 후에 샤마르는 이스라엘 7대 총리가 되었다.
그는 후에 유대인 전부가 죽는 것보다는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나치와 협력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도 엄청난 논란일텐데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 격이니 더욱 논란이 되었다.
15 1864명의 유대인을 살린 것인가? 학살을 묵인한 것인가?
1944년 유대인 위원회 소속 카스트너는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협약을 맺었다. 협약의 내용은 1864명의 유대인을 살려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나머지 80여만명의 유대인 학살은 묵인한 결과가 되었다. 그들이 수용소에 어떤 의미로 가는지 알리지 않은 것이다. 카스트너는 모든 유대인이 죽는 것보다 일부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43만명이 넘는 유대인이 죽도록 놔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16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
카스트너는 나치에게 목숨값을 지불하기 위해 유대인 150여명의 부자들에게 경매를 통해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권리를 팔았다. 이 협약이 알려지기 전에 그는 홀로코스트로부터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폭로되자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 죄로 유죄 선고를 받고 1957년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당했다 그후 법원에서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으나 이미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17 홀로코스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
홀로코스트는 수용소를 해방시킨 연합군에 의해 상세히 조사되었다. 생존자들의 증언, 영상 필름, 수용소 근무자들의 진술, 증거물들, 나치의 명령서, 영상기록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입증되었고 가해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네오나치, 일부 나치 전범의 후손들, 반유대주의자들은 홀로코스트 비극을 폄하하고 축소시키며 심지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8 네오 나치의 아이러니
네오 나치는 자신들을 '나치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인종차별, 반유대주의, 백인우월주의를 나타낸다. 아이러니한 점은 나치는 엄밀히 말하면 아리아인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아리아 중심주의 였지 백인 우월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같은 백인이라도 적대적이라면 탄압하고 학살했다.
19 증거 인멸을 위해 많은 수용소를 완벽히 파괴했다.
폴란드에 있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는 도착 즉시 모두 학살하는 수용소였다. 이곳에서 75만~90만명이 학살되었다. 사망률은 99.993%에 달했다. 그곳에서 탈출한 67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이 수용소는 고작 13개월동안 운영되었고 1943년 증거 인멸을 위해 시설 전체가 완벽히 파괴되어 기록은 사진 몇장뿐이다. 다른 절멸 수용소들과 강제 노동 수용소들도 마찬가지이다. 해방직후 그 참상에 분노한 미군의 일부 병사들은 항복한 SS병사 약 50명을 학살했다.
# 수많은 유대인들이 처음에서 모두가 절멸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몇개월 동안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기다가 죽였으며 그 시체들은 너무 많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시체들로 인해 벌레가 쓸어 유대인들이 동족의 시체를 처리하도록 했다. 불도저로 한꺼번에 처리하기도 했고 화장장 기계들은 하루 10시간씩 가동하여 매일 400구씩 처리하였으며 틀리들, 안경들, 신발들, 가방들 심지어 머리카락들도 쌓여 있고 당시 유대인들의 팔에 번호를 새겨 놓아 구별했다.
현재 베우제츠 절멸 수용소는 60만명이 학살된 현상에 세워진 추모지이다.
유대인들이 살았던 집에는 그들의 출생과 이름등을 적은 동판을 붙여두었는데 그런 집이 상당히 많다. 폴란드의 경우에는 주로 도심지에는 유대인들이 살았고 변소가 있는 변두리에 폴란드인이 살았다고 한다. 폴란드의 90%가 유대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1941년 갑자기 사라지고 폴란드인들이 유대인들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화장장 시신을 태우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존더코만도가 은밀히 촬영하였으며 살인 공정 장면이 촬영된 4개뿐인 사진 중 하나이다.
20 정신나간 유대인 판정법
나치의 유대인 판정법은 조상까지 봐서 유대인 혈통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유대인이라고 간주하는 정신나간 기준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몇 대조 조상 할아버지가 유대인이어서 유대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래서 히틀러가 집권 전부터 한참 유대인을 욕하고 다녔지만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에 있다가 봉변을 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은 유대인이기 전에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1 만만한 희생양들
당시 유대인들은 국가가 없어 합법적 보복이 불가능했다. 즉 법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만만한 희생양들이었다. 만약 정식 국가였다면 피해 금액 요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치 고관들은 친구나 지인이 유대인이면 그들을 학살에서 빼주기도 했다. 심지어 히틀러도 그랬다. 히틀러의 어머니를 유대인 의사가 치료해주고 치료비를 깎아주기도 해서 그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1940년까지 히틀러의 특별 보호를 받았고 "모든 유대인이 블로흐 같았다면 유대인 문제는 있을 수가 없다"라는 발언까지 했다.
결국 나치 기준으로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조상들 가운데 유대인이 있는지 몰랐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살해당하게 된 것이다. 당사자들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22 혈통에서도 완벽한 아리아인
1935년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다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서 1등을 한 아기가 있다. 그 부모에게는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고 이 아기의 사진은 게르만의 우월성을 알리는 선전 잡지와 포스터에 실리기도 하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아이는 유대인 혈통이다. 유대인임에도 노란색 별을 붙이고 다니지 않았고 철저하게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숨기고 살았다. 그리고 간 크게도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다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 나갔다. 유대인인 자신들의 아이가 최고의 아리아인으로 선정될 줄 전혀 몰랐다. 실제로는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가 대회에 부모 몰래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부모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틀킬까봐 사진 작가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으나 작가는 알면서도 나치들을 놀리기 위해 했다고 한다. 심지어 '소위 완벽한 아리아인 아기'는 각종 엽서 디자인으로 발탁되기도 하여 온 독일에 얼굴이 알려지기도 했다.
23 유대인 한스 이야기
한 유대인 소년 한스가 있었다. 그의 부모는 신분을 세탁하는 데 성공하여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고, 독일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살게 되었으며, 한스도 "아리아인으로 인정받은" 다른 독일인 아이들과 함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루는 교사가 말하길, "내일은 골상학적, 그리고 유전학적 측면에서 우리 게르만족이 얼마나 우월한 인종인지 배울 거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스는 겁이 덜컥 났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유대인인 것이 들통나면 학교에서 퇴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소문으로만 어렴풋이 들리는 강제 수용소라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 아닌가? 갑자기 병을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으면 그 또한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와 그의 부모는 크게 걱정하면서 살얼음판 같은 하루를 보냈고, 결국 그 다음 날 한스는 덜덜 떨면서 등교를 했다. 그리고 결국 수업이 시작되었고 한스는 줄자와 계측기로 한스의 키와 두상 형태를 측정했고, 체중계로 체중을 검사하고, 또한 유전자를 검사했다. 이윽고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스는 동프로이센 지역 바이킹 계통의 아리아인이네요! 아주 우월한 혈통이구나, 한스!"
한스는 크게 안심함과 동시에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속으로 계속 헛웃음만 나왔다.그는 종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24 우크라이나인들을 선동한 독일
친위대 우크라이나인 국방군이 5일간 3천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주로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학살했지만 이처럼 우크라이나인들이 협력한 경우도 많았는데 그 이유는 독일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소련의 탄압으로 폴란드계 유대인에 의해 우크라이나인들이 희생됬다고 선동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분노한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체적으로 독일군에 협력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반데라의 영향력이 커질것을 우려한 독인은 우크라이나인들 또한 마무 박해하여 복잡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25 유대인 학살이 계속되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유대인들은 계속 학살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면서 귀금속, 돈, 돈될만한 물건들을 차지하고 가질 수 없는 토지나 집, 공장은 폴란드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유대인들이 돌아오자 토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폴란드인들이 돌아온 유대인들을 죽이거나 추방시킨 것이다. 살아돌아온 유대인이 고향에 있는 자기 집을 되잧으려 하자 그 집을 차지하고 있는 새주인은 그 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독일에 지배당하거나 협력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있었다.
수용소에서 탈출하거나 해방되자 굶주려 있던 유대인들은 연합군이나 민간이들이 주는 음식을 먹다가 조사곽란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26 수용소의 실상을 믿을 수 없었다.
1944년 7월 소련이 수용소를 점령하면서 처음으로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의외로 연합군은 해를 넘겨 수용소에 도달해서야 뒤늣게 실상을 알았다. 엽합군도 이런 참극에 놀랐고 사령관들은 도무지 믿지 못해 수용소를 직접 보러 방문하기도 했다. 이를 보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했다.
27 계속되는 반유대주의 거짓 뉴스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발레스타인의 분쟁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탄압한다는 기사를 보고 과거 나치랑 다를 바가 없다는 비난을 한다.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 않지만 '불쌍한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날아가 버렸다.
또한 '정말 600만이 죽었나'라는 책에선 실제 이 수치가 너무 부풀려졌으며 최대 40만을 넘지 않는다고 써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의 저자가 영국의 네오나치들이다. 이들은 인종차별 성향을 보이며 당연히 객관적인 시각따윈 없고 어떤 역사학자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는 자신의 동족을 죽도록 하여 이스라엘이 병원이나 유치원을 공격한다는 여론전을 하는데 현재도 거짓 뉴스를 통한 반유대주의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선동되지 말아야 한다.
28 왜 유대인에게만 배상하고 사과하는가?
어떤 사람은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배상한다고 감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독일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학살은 미안해 하면서도 공식적으로 배상이나 사과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은 영향력이 약한 저개발국가들이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국제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배상과 사과를 한 것이 아니냐라는 비난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힘을 가져야 함은 당연하다. 이처럼 독일이 선한 나라라서가 아니라 사실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배상한 거라 볼 수 있다.
29 가해자들의 증언
유대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1천만 명의 유대인, 아니 세상의,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만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한 놈에 불과했을 겁니다. 나는 나치 당원들과 똑같이 생각했으며, 함께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 최고사령부 독일군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엄청난 개혁의 전쟁이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 사상의 세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견제 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유대인과 그들의 악당들의 인종 감염 세균을 모두 직접적으로 근절하는 것이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1941년 3월 28일 라디오 연설)
전 제가 한 행동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전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치려고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그곳에 있었지요.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소장, 프란츠 슈탕글
한 독일군 포로는 전쟁 당시 아버지와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자신은 독일 내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죽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아버지는 이런 짓을 계속 벌이면 언젠가는 보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30 피해자들의 증언
난 내 눈을 의심했다. 20세기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치 중세를 보는 듯 했다. (중략) 이런 변화는 불과 몇 시간 안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하고 아껴 온 이 나라와 사람들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했다. 난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독일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몇 시간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갑자기 깨달은 것일 뿐이다. 한때나마 이들(독일인)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적의를 감춰왔던 이들을 신뢰한 것이 부끄러웠다. 순간 이 거리, 아니 전 도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때 기분은 형언하기가 어렵다. (에드빈 린다우)
구덩이가 커서 마치 여기 파인즈 호텔의 수영장 같았지. 그리곤 헝가리 유대인들을 실은 열차가 계속 도착했단다. 그래도 이 구덩이에 쳐 넣어지기 전에 가스실에서 끝을 본 사람은 운이 좋은 편이었어.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으니까. 거기서 일하던 죄수들은 산 사람, 죽은 사람 가릴 것 없이 휘발유를 퍼부었지. 그리고 불타는 시체에서 나온 기름을 다시 퍼부어 가지고 더 잘 타게 했단다.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31 제 3자의 증언
라인강을 건너 독일에 들어서자 갑자기 중세시대에 온 것 같았다. 나는 20세기 대명천지에 그 잔혹한 범죄들이 어떻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미군 병사의 증언
근처에 수용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위장해놔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도 저기 바로 밑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몰랐거든요.
신원미상의 독일인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무덤을 파게 했다. 그 독일인들도 모두 거기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나는 당신들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쳐줬다.
미 육군, 레슬리 브라운 병장
32 초대교회 교부들의 반유대주의 가르침
('기독교와 히브리 유산' 컨콜 디아사 출판, 마빈 R. 윌슨저)
*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는 유대인과 유월절을 지내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들을 죽인 사람들과 공범이다.
* 존 크리소스톰은 유대인은 일하는데 쓸모 없고 도살하기에 적합하다. 부정부패와 온 세상의 암병이다. 그들 안에 악마가 살고 있다. 유대인 자신이 악마이기에 유대인과 회당을 증오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을 미워할 권리가 있다.
* 터튤리안은 예슈아의 죽음에 대해 유대 민족 전체에게 책임이 있다.
라고 교부들이 가르침으로 반유대주의를 키워온 것을 알 수 있다.
33 십자군 전쟁이라는 열매
십자군은 무슬림들을 미워하고 증오했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증오했다. 수천의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깃발'로 말이다. '그리스도여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노래하며 회당에 불을 질러 유대인들을 산채로 태워 죽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라는 이름은 협박처럼 느끼고 위협을 느끼는 이유이다.
34 메시아 히틀러의 길을 예비한 루터
히틀러는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르친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심지어 루티루저 목사는 '그리스도가 히틀러를 통해 오셨다. 우리의 구원자가 오늘날 오신것을 안다'라고 선포할 정도였다. 히틀러는 가톨릭 신자였으며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처럼 신봉되고 높여지는 인물이었다. 히틀러는 홀로코스트를 마틴 루터의 생일 11월 9일에 시작할 정도로 그의 추종자이며 제자였다.전범 재판에서 가해자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변호했다. '종교 개혁의 아버지인 루터가 말한대로 했을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말했길래 이러한 히틀러같은 메시아가 나온 것일까? 스스로 히틀러같은 메시아를 자신의 가르침으로 낳게 될 줄 알았을까? 어쩌면 루터 또한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약 1500년 동안 반 유대주의 교부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35 예슈아를 유대인이 죽였는가?
예슈아를 죽이고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요7:17-19 행7:52,53) 외면적 유대인이 아닌 내면적 유대인이 중요하다고 바울은 말했다 진정한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슈아를 죽인 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겉은 유대인이었지만 내면은 이교도였던 것이다.(롬2:25-29)
36 다시오실 예슈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
말세에 성도들은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고 예슈아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는 자들이다. (계14:12)
또한, 거룩한 남은 자손으로 용과 전쟁할 자들도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고 예슈아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계12:17)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구약이나, 예슈아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교부들의 가르침처럼 율법을 거절하는 가르침은 반유대주의를 갖게 하고 히틀러와 같은 적그리스도를 예비하지만 율법을 준행하는 가르침은 참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한다.
37 죄를 피해자에게서 찾지 마라
모세가 태어날 때 남자 아이들을 모두 물에 던졌다. 이스라엘이 잘못해서인가? 예슈아께서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에 2살 아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였다. 누구의 잘못이었는가?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는 죄를 피해자에게서 찾으면 안된다. 죄는 가해자에게서 찾아야 한다.
38 여호와의 날에 온 민족을 심판하실 것이다.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는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을 여호사밧 골짜기에 모아 이스라엘을 위해 심문할 것이다. 그러니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씀하고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워졌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이 여호와께서 시온에 사시는 줄 알 것이며 예루살렘은 거룩할 것이며 더이상 이방인은 그 가운데 통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정체성이 아닌 유대인의 정체성으로 살아야 거룩한 땅이 우리의 유업이 될 것이다.(요엘3:2-17)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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