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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세기 선교상황
교회 상황
A. 로마카톨릭교회
로마는 5세기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은 이후에 비잔티움의 정치적 라이벌 이었던 게르만족의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054년 분열 이후 로마 대관구는 교회정치 행정적으로 로마 주교인 교황을 중심적으로 교황중심적 왕정체제와 같은 단일체제의 기독교회(Christemdom)로 발전하였으며, 지리적으로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전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으며, 신학적으로는 스콜라주의를 형성. 고딕식 교회건물이 유럽에 퍼지고 교황 Innocent III (1160-1216)에서 교황권의 정점에 도달했다가 Boniface VIII (c. 1234-1303)에서 쇠퇴하기 시작한다(1302년 칙령 "Unam sanctum"을 통해 교황의 우선성을 선포한 것부터 쇠토로 들어감). 1309-1377년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시기이다. 교황은 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주함으로써 프랑스 왕의 통제아래 있게된다.
1378-1417은 대분열시대로서 2-3명의 교황이 서로 자신이 교황임을 주장한다. 이 시기에 신비주의가 유럽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특히 독일에서 강하게 나타난다(Meister Eckhardt의 영혼의 불꽃, Catherine of Siena의 신비적 결혼, 1305-1314년 단테는 당시의 기독교에 대상으로 희곡(Divine Comedy)을 쓴다. 그리고 John Wycliffe는 옥스퍼드를 영국의 영적인 중심지로 만들고 성경을 권위와 진리의 유일한 출처로 본다. 이로인해 1382년 옥스퍼드에서 축출된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평신도 설교자를 훈련하여 성경을 퍼트린다. 1398년 John Hus 는 프라그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하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퍼트린다. 1414 -1417년 콘스탄스회의(Council of Constance) 대분열을 마무리하고 존 후스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고 존 위클리프를 정죄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의 문제가 정치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 반면 토마스 아켐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쓴다. 1451년 프랑스 여성 농부 Joan of Arc가 마녀라는 명목으로 화형당하낟. 1453년 동로마가 멸망하고 성소피아성당이 이슬람 사원이 된다. 같은해 Johann Gutenburg는 인쇄술을 발명하고 처음으로 성경을 인쇄한다. 1479년 스페인에서 이단재판소가 교황의 허락아래 왕에 의해 세워진다. 1498년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설교자인 Savonarola가 개혁을 회치다 화형당한다. 그런데 이 플로렌스는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고 Brunelleschi, Donatello, Michelangelo, Botticelli, and Leonardo da Vinci 등은 기독교적인 주제로 중요한 작품활동을 하기도 하나 교황권의 지지자가 된다.
B. 동방정교회
4세기부터 11세 기에 이르기까지 콘스탄티노플은 東方 기독교의 중심지였을 뿐만이 아니라,東 로마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반면에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분열이 일어나던 당시, 동방 정교회 세력은 '신로마'로 불리며, 기독교 문명세계의 수도로 인정받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여 중동, 발칸반도, 및 러시아에 분포되어 있었다. 동방의 4개 대관구(콘스탄틴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는 사도시대부터 그러했듯이 집단 지도체제를 (the collegiality)중심으로 교회체제를 운영하였으며, 7-8세기에는 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을 이미 받았고, 이어서 터어키의 이슬람군대의 위협으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겪는 가운데 신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형성하였으며, 게다가 1453년 동 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 이 터키 모슬렘군대에 의하여 무참히도 파괴당하고 멸망당한 역사적 사건 이 후에 동방 정교회 세계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추정되는 지도력을 가진 나라는 러시아뿐이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도 이미 터키에 의하여 정복당하였으며, 그 나머지 정교회 지역들도 오래 전에 모슬렘 세력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C. 아시아교회: 13-14 세기 교회는 몽골제국 치하에서 생존했다.
1. 기독교의 상황: 팍스 몽골, 기독교의 확장을 위해 길을 열어준, 짧은 기간의 상대적인 塵??대륙의 통합, 그리고 종교의 자유, 비단길을 따라 Herat, Samarkand, Kashgar, Almalik(or Tangut), Navekath(위구르 경내), 북경에 독립적인 대주교구 설정.
a. Keraits(Turko-Mongolian) 선교: 12세기 혹은 13세기에 전 종족이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종족은 훗날 한 몽골족의 시시한 족장이며 징기스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를 친절히 대해주었다. 12세기말 케레이트족의 기독교 족장인 Toghrul Wang Khan)은 테무친의 보호자가 되었다. 실제로 이 사람은 프레스터 요한의 이야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나중에 징기스칸에 의해 정복당했으나 케레이트 네스토리안은 징기스칸의 성문법인 야사(yasa or yasak)의 많은 부분을 체계화시켰다. 그리고 결혼관계를 통해 몽골 황실에 기독교의 뿌리를 내렸다. 징기스칸은 케레이트를 병합한후 토오릴의 동생 자아 감보의 세딸을 가족으로 맞이한다.
Ibaka-beki -징기스칸의 아내
Bektulmish- 징기스의 장남 Jochi의 정실
Sorkaktani- 징기스칸의 4남 Tolui의 아내(3아들은 나중에 몽골의 대칸, 중국의 황제, 일칸)
b. 몽골제국: 13세기는 아시아 기독교의 전성기
Jochi-바투 Golden Horde(ordu는 군주들이 머무는 천막을 말한다. horde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며 유목민은 군주의 천막을 중심으로 이동한다) 사후 기독교인 아들 사르탁이 승계한다.
Chagatai-트랜스옥시아나와 Turkestan을 포함한 동부중앙아
Ogetai(2대 대칸)-kuyuk(3대 대칸)
Tolui(핵심부 통치자)-기독교도 왕비 Sorkaktani 와의 소생 중 3명이 칸에 오름
몽케-4대 대칸(기독교인을 아내로 맞이함) 세계정복의 꿈 가짐
쿠빌라이-중국 정복, 5대 대칸, 원황제
훌라구-무슬림 페르시아 정복하고 일칸국 창시자됨
몽케의 막내동생 아릭 부케-기독교인/ Then Arabuccha came out to meet his brother the Chan, and the monk and we perceiving that he would have to pass beside us, advanced toward him with the cross. He recognized us, for he had been previously to our oratory, and held out his hand and made the sign of the cross at us like a bishop. 루브룩의 기록에서
소르칵타니 베기-사후 성녀로 숭배와 제사의 대상으로 승화된다.
대립관계: 첫째와 넷째- 둘째와 셋째
1) 원나라에서 기독교
쿠빌라이의 집권(1260-1294): 종교에 대한 혼합주의적 관대함, 동생 아릭부케는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자신과 뜻을 같이한 몽골 기독교인 모임과 기독교 비밀 결사의 도움으로 쿠빌라이와 권력 투쟁(1260-1264)을 하나 실패한다. 그리고 쿠빌라이의 사촌이자 기독교도인 Nayan은 1287년 중앙아 통치자 카이두의 반란에 동참하여 군기에 십자가를 달고 싸웠으나 졌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하지 않는다. 쿠빌라이는 몽고 전통에 따라 모든 종교에 관대하였다. 그 이유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것에 있었다. 쿠빌라이는 샤머니즘에 기초를 두면서도 자신의 불교도 왕비를 따라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밀교형태). 그러나 무슬림을 제국의 재정과 조세징수 분야에 사용하고 유교 사당을 수도에 세우고 황제숭배를 포함한 조상숭배를 장려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옹호하기도 한다.
쿠빌라이는 고도로 문명화된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중재자를 통하여 통치하는 형태를 취했으므로 기독교인을 포함한 외국 관료들의 힘을 신장시켰다. 원 제국은 4계급으로 통치하였다. 즉 제1계급은 몽고적 특권계급, 제2계급은 이방인들로서 제색목인(여러종류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라하는데 한족이 아닌 신하들과 모사들이다. 중앙아와 서아시아인들, 페르시아인들. 마르코 폴로같은 서양인들이 속했다. 제3계급은 북중국인이며 제4계급은 남중국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계급에서 제1과 제2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289년 쿠빌라이는 늘고있는 기독교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만들었고 쿠빌라이의 모사 이사(Ai-hsueh, 서아시아 출신으로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점성술과 의학을 공부한뒤 구육시대에 관도에 올랐고 쿠빌라이기 즉위한 뒤 1273년에 정섬과 의학을 담당하는 부서-후일 광혜원-를 관장했고 일칸국의 아르군에게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275년 황실도서관에 해당되는 비서감을 관할)라는 네스토리안 기독교도 사무를 총괄하는 승복사의 장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유명한 한림원의 승지가 되어 수세기에 걸쳐 유명한 전중국의 학문적 역할을 했다. 그는 황제에게 행하는 현명한 충고로 유명했다. 그의 5 아들이름은 엘리야, 덴하, 흑총, 기와르기스(조오지), 루가 등이었고 고관을 역임했다. 원서(Yuan Shi)에 따르면 이 기관은 동방교회를 관장하며 그 장은 원제국에서 위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그리고 원서에는 1289-1320년 동안 72개의 교회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330년 경 원제국내 네스토리우스교도의 수는 3만명정도이며 매우 부유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타난 네스토리안의 분포도
사마르탄트, 카슈카르(자신들이 교회와 종교를 가지는 투르크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오 약간있다), 야르칸드(주민들은 마호메트교를 믿지만 일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도 있다), 탕구트(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일부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이고 사라센들도 있다), 긴긴 탈라스(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우상숭배자들과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들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다), 숙주(기독교도도 있고 우상숭배자들도 있다), 감주(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기독교도들도 있는데 그들은 이 도시에 세 채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가지고 있다), 에르주울(대부분의 주민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이고 우상숭배자와 마호메트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링주(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며 마호메트를 숭배하기도 하고 약간의 기독교도들도 있다), 에그리가야(사람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의 교회도 세 채가 있다).
남송이 멸망한후 남중국에도 기독교가 확산된다. 대표적인 예가 마르세르기스의 일곱교회이다. 마르 세르기스는 네스토리우스교도, 1277년 양자강 하류에 있는 진강로 총관부의 부다루가치로 임명되어 5년 재임하면서 그곳에 여섯군데에 교회를 건립했고 항주에도 한 군데에 교회를 세운 인물이다. 동기는 꿈에 계시였다. 그가 세운교회는 다음과 같다.
(a) 대흥국사: 철옹문 근처에 있던 자신의 사택에 세운 것으로 원명은 Bash Humra 즉 머리된 교회
(b) 운산사: 서진에 있는 수토산에 지은 것으로 원명은 Tash Humra 즉 반석교회
(c) 취명산사: 수토산위치, 원명은 Duta'ur Humra 즉 안쪽에 위치한 교회
(d) 사독안사: 단도현 개사에 세운 것, 원명은 Talui Humra 즉 거울교회
(e) 고안사: 등운문 밖 황산에 세운것, 원명은 염카야 훔라
(f) 감천사: 대흥국사 옆에 위치. 원명은 Mar Giwargis Humra 즉 마르 기와르기스교회
진강부에 교회와 기독교인 거주(인구의 1%)했고 주교가 초청받아왔다(불국에서 마르카시야마르시레문아피스코파)
기독교도는 진강외에도 양주, 천주, 장주등지에도 확인된다.
만주와 고려에서의 기독교: 12세기초 요금 교체기에 기독교가 만주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고 교려에 들어와 활동하던 네스토리우스 교도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있다(1300년 정도행성의 평장사로 임명되어온 기와르기스(활리길사)).
2) 중앙아 몽골에서의 기독교
대칸 경쟁에서 패배한 차카타이는 중앙아를 누비며 유목민으로 산다.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동서양의 대상 교역로를 장악하나 1269년 두부분으로 나뉜다. 즉 동, 서 투르키스탄이다. 그리고 1266년 여섯째칸인 무바락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동투르키스탄은 오그타이계 카이두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샤머니즘을 고수하였으나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기독교도나 이슬람교도를 보호해주었다.
서투루키스탄은 차카타이 후손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들은 점점 타쉬켄트, 보카라, 사마르칸트로 집중되면서 국가 행정은 무슬림 관리들에게 맡겼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이미 9세기부터 이슬람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큰 도시에서 기독교인과 교회가 존재했다. 전쟁외의 모든 부분은 이슬람의 영향력 속에 있었다. 1301년 카이두 사후 동투르키스탄의 많은 부분이 서투르키스탄에로 편입되었고 기독교는 점점 더 무슬림에 의해 압박을 받게 된다.
1326년 도미니칸 선교사인 Mancasol의 도마가 방문하여 사마르칸드에 세례 요한을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자 교황은 도마를 사마르칸드의 감독으로 임명한다. 1334년 통치자 부잔은 네스토리우스교에게 교회를 재건할 수 있게 했고 프란시스칸이 차카타이 칸국의 수도 알말릭에서 사역하게 했다. 차카타이 칸국의 마지막 칸인 칭쉬(1334-1338)은 카톨릭을 옹호했으나 살해 당한다. 칭쉬의 사후 알말락에서 기독교인들이 대량 학살된다(알말릭의 감독 리차드와 여섯명의 프란시스칸 순교). 마리뇰리의 방문으로 교회 하나를 세울수 있었고 세례를 행하고 설교하였다. 이시쿨 호수 부근 차카타이 칸국의 핵심부에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다(1249년과 1345년 사이에 죽은 공동묘지 발굴).
2) 몽골 페르시아(일칸국)에서의 기독교
Hulegu(1256-1265): 기독교인 도쿠즈 카툰(토오릴의 손녀로 톨루이의 부인이었다가 톨루이사후 훌라구에게 인계됨)을 아내로 맞이한다. 도쿠즈 카툰은 서방원정시 훌레구를 동행한다. 압바스조를 공격할 때 몽골군의 첨병대 지휘관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며 서방으로 이동시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 지방의 기독교를 믿는 종족들이 대거 합류. 1258년 바그다드를 멸망시킬때 교회로 피난한 기독교인은 보호되었다. 새로운 콘스탄틴으로 부상된다. 1259년 기독교 장군이 이끄는 후레구의 군대는 시리아를 접수하였다. 그리고 십자군에 의해 개척된 지중해 해안의 기독교 통치자와 연합으로 무슬림 이집트를 점령하려고 진군한다. 그러나 이집트에 패배한다. 이유: 1. 1259년 대칸 몽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권 승계 문제로 후레구는 1만여명의 군사만 남기고 몽골로 철수, 2. 몽골왕실의 내분, 3. 십자군들의 배신(몽골보다 무슬림 이집트를 도움), 4. 살라딘 사후 이집트는 노예전사들이 주축이 세운 터키왕조인 마멜룩조에 의해 전문적으로 준비된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시리아에서 떠나 유프라테스로 돌아갔다. 쿠빌라이의 대권승계후 페르시아로 돌아온 훌라구는 수도를 Maragheh로 정하고 관대한 페르시아인 역사학자 Juvani를 바그다드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후레구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감을 가졌으나 말년까지 세례받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기독교보다는 불교로 개종했을지도모르는 샤머니스트 절충주의자였다. 1265년에는 후레구와 기독교인 아내 도쿠즈와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Makika가 사망한다.
훌라구의 아들 Abaqa(1265-1282)은 이슬람으로 둘러싸인 국제 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기독교국과 동맹을 맺기위해 비잔틴의 황제 Michael Paleologus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고 로마의 교황과 아라곤의 제임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사절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별 외교적 성과는 없었다. 아바카의 부인 Kotai는 기독교인이었고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이 시기의 중요인물: 바르 헤브레우스(1226-1286) 역사학자이며 1264년 페르시아 야곱파 대주교로 임명된다. 야곱파 신도들에게 소망과 신뢰를 주었고 파괴된 야곱파 교회를 재건하였다. 몽골 왕정의 신뢰를 얻었으며 1284년 성직체제를 재편하면서 12명의 새주교를 서품하였다. 그는 네스토리안과 상호관계성을 좋게 하려고 노력했다(교회일치운동).
Ahmad Teguder(1282-1284) 기독교도인 Kutai 카툰과 훌레구사이에 태어났고 세례를 받고 니콜라스라는 영세명을 가졌다. 그러나 칸 취임식에서 자신의 이슬람 개종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Ahmad라는 이슬람 이름을 얻었다. 기독교를 탄압. 분개한 장군들은 무슬림보다 아바카의 장남 Arghun의 주위에 집결하였고 Teguder는 처형되었다.
Arghun(1284-1291) 호라산의 태수요 아바카의 아들로서 불교도와 기독교의 지원으로 테구데르를 제거하고 칸이됨. 아르군의 부인 우룩 카툰은 케레이트족으로 도쿠즈 카툰의 질녀이자 기독교도였다. 또 다른 부인은 툭탄인데 아바카의 후실이었는데 기독교도였다. 1287년 교황과 유럽의 기독교 왕국에 네스토리안 랍반 소마를 파견하였다. 1289년과 1290년에 무슬림 이집트에 대한 기독교 유럽과의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Arghun의 죽음과 1291년 예루살렘에 있던 십자군의 라틴 왕국의 최후 요새가 이집트인들에 의해 함락되면서 십자군 전쟁은 끝난다.
중요인물: 마르 야발라하 3세: 본명 Mark, 1245년 내몽골의 토잔에서 부제였던 바이엘의 네 아들중 막내로 출생, 웅구투(Ongut)족이다. 신심이 깊었고 종교적 수련을 위해 북경에서 은둔자로 유명한 랍반 소마을 찾아가서 수도사된다.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하여 순례하다가 1280년 35살에 Cathay 와 Ong의 대주교로 임명된다. 1281년에 네스토리안 총대주교로 임명된다. 몽골제국의 터키적 요소와 몽골적 요소를 결합하였고 페르시아, 중국, 동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모든 요소를 결합하여 전아시아의 총대주교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랍반 소마: 북경에 살던 순회사제 위구르족 시반과 아내인 케암타사에에서 태어났다. 늦게까지 자식이 없어서 오랜 기도와 금식 끝에 얻은 아들이었으므로 이름도 Bar Sawma 즉 금식의 아들이다. 어려서 신심이 깊었고 북경의 한 교회의 집사로 있었다. 20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은둔자되기로 결심하여 3년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다. 북경의 대주교 마르 기와르기스에게서 체발을 받고 수도원에 들어가 7년간 수행하다 산중의 동굴에 들어가 은거한다. 마르코스를 제자로 받고 그의 제안으로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한다. 1287년 로마로 파송된 몽골 외교관이며 감독
Gaykhatu(1291-1295): 아르군의 동생, 친기독교적 입장을 유지, 바이두에 의해 살해당함.
Baydu(1295) 훌레구의 손자, 마지막 기독교도 칸.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임을 공헌하고 십자가 목걸이를 매고 다녔지만 무슬림이 무서워 무슬림에게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말했다. 바이두가 정권의 중요한 자리를 기독교인에게 주자 불만을 품은 무슬림은 호라산에 세력을 둔 아르군의 아들 가잔을 설득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케 하며 반란을 일으켜 바이두를 처형한다.
Mahmud Ghazan(1295-1304) 불교도였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무슬림의 지지를 받아 바이두를 몰아내고 칸이됨. 이슬람이 다시 페르시아의 공식 종교가 된다. 일등공신 나우르즈는 모든 교회와 불교사원과 시나고그를 파괴하고 사제들을 능욕하고 공납과 세금을 바치게 한다. 총대주교 야발라하 3세는 감금당하고 고문당한다. 가잔은 일 칸이 아니라 이슬람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대칸과 독립된 위치에 있음을 나타낸다. 무슬림은 기독교도를 핍박하고 1297년에는 아르빌에서 대학살을 감행한다. 그 외 바그다드, 하마단, 타브리즈, 마라게에서도 교회가 파괴되었다.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박해와 무질서로 가잔은 기독교도를 보호해주기도 한다.
Oljeitu, Muhammad Khudabanda (1304-1316): 가잔의 동생, 어머니는 케레이트의 공주 우룩 카툰, 어려서 세례도 받고 니콜라스라는 세례명도 받았으나 성장해서는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기독교에 대해 냉담, 마음으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1307년 기독교국 그루지아의 왕과 백성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명령하고 교회를 파괴하라는 명을 받았다. 1310년에 아르빌의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번 대학살당함, 기독교도를 거의 보호해주지 못한다.
아부 사이드(1316-35): 마지막 군주. Oljeitu의 아들, 12살에 일칸이 된다. 기독교도를 보호할 여력없었다. 분열의 늪에 빠지고 5개의 속국으로 갈라졌다.
1317년 총대주교 야발라하는 사망하고 14세기 말 기독교는 쇠락하였다.
c. 인도의 기독교
6세기 이전에는 인도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 총대주교의 권위와 시리아어, 네스토리안 신학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7세기에 페르시아 교회의 대주교구로 승격되면서 구조적인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7-8세기에 인도의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10세기에 정치적으로 일종의 독립적인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2. 기독교의 쇠퇴(13세기 전성기, 14세기 쇠퇴기, 16세기 소멸기)
동아시아에서 1294년 쿠빌라이의 죽음, 서아시아에서 1295년 일칸 가잔의 이슬람에로의 개종은 아시아 기독교의 쇠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흑사병으로 네스토리우스교의 공동체 파괴(이시클 호반 부군의 공동묘지와 600여개의 비석은 1337-9년의 흑사병에 대한 증거),
14세기 말 광신적 무슬림인 티무르의 30년에 걸친 정복전으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아의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와 동서간의 교역단절. 티무르는 냉혈적인 잔인함과 정치적 계산하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 힌두교도들을 학살하였다.
1368년 원의 멸망후 명대의 기독교는 명대 중반까지 존재했으나 16세기 중반에는 거의 사라진다(기독교인은 무슬림이나 유대인인이나 불교도로 흡수되고 교회는 불교사원으로 바뀐다).
몽골족에서는 1578년 알탄 칸이 티베트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몽골인들에게 개종을 강권하기 전에는 기독교가 잔존했다. 서아시에에서는 14세기 말 티무르의 공격과 학살로 신자들은 우르미아 호수와 반 호수 사이에 있는 히카리 산지로 피신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총주교 선출방식이 특정 가문에서 세습되는 형태로 바뀐다. 총대주교는 독신이므로 숙질계승이 이뤄지고 이로 인한 암투로 교단은 분열된다: 신파(교황청과의 연맹 추진)와 구파(전통적인 교단의 독립성을 고수)로 분열된다. 구파가 카톨릭으로 선회하자 신파는 반카톨릭으로 선회한다. 1843년 쿠르즈족과의 충돌로 10만 신도가운데 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차 대전중 쿠르드족과 터키정부의 탄압으로 4만 신도들이 히카리 산지를 떠나 이라크 북부의 모술 평원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독립국을 세우려는 희망으로 연합국에 협조하며 터키와 싸웠다. 그러나 전후에도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에 흩어져 살았다. 이라크 독립후 이라크의 지배를 거부하고 시리아로 들어가려던 신도들은 입국을 거부당하고 귀환도중 이라크 정부군과 쿠르즈족, 베두인들이 공격으로 거의 몰살당한다. 신파에 속하는 총주교 마르 시몬은 1940년 시카고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동방 앗시리아 교회’로 알려진다. 이라크 영내에 남아있던 신자들은 바그다드에 근거를 둔 구파 총주교의 감독을 받게 된다.
15세기 말 페르시아 총대주교가 외곽으로 피하여가자 인도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 교회와의 관련성이 소멸된다. 교회는 쇠퇴하여가며 로마카톨릭의 거대한 선교물결과 조우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a. 서아시아에서의 쇠퇴원인: 페르시아교회의 신학은 종교 통합적이기보다 배타적이었다. 그리고 시리아 종교와 비잔틴 종교와의 관련성에 대한 의혹은 있었으나 로마적이라거나 외래적이지 않았다. 페르시아교회는 늘 자신들을 로마나 비잔틴교회와 신중하게 분리해왔다. 그리고 몽골인들에게 네스토리안은 페르시아적으로 보였고 무슬림보다 더 많은 신용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력이 사회의 지도력보다 열등한 것과 정부의 의존은 심각한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일 칸국 지배층의 이슬람으로의 개종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기독교의 보호장치가 사라져버리자 서아시아에서 기독교는 몰락을 경험한다(이슬람의 도전).
b. 동아시아에서의 쇠퇴원인: 중국적 관습과 이념에 물들어서 종교적 활력의 상실(한화), 카톨릭 선교로 인한 내부 균열(네스토리우스교나 카톨릭이나 선교의 대상은 한인이 아니라 외지인이었다. 그리하여 카톨릭이 선교한 주된 지역은 네스토리우스교의 근거지였던 북경과 천주, 양주, 항주 등이었다).
3. 아시아교회의 특징과 쇠퇴원인
a. 특징
1) 철저한 훈련-수도원적 교육
2) 복음전도의 열정
3) 적응
b. 쇠퇴원인: 장벽을 돌파하지 못했고 협곡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타자성과 외래성이 기독교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1) 교회의 고립: 초기 아시아교회(에뎃사를 중심한 시리아시대 250년 이전)는 주변의 교회의 분리되고, 고대 아시아교회(니시비스와 셀루키아 테시폰을 중심한 페르시아시대 661이전)에는 기독교 서방뿐아니라 시리아교회와 분리되고, 중세 아시아교회(바그다드를 중심한 아랍시대 14세기말이전)는 교구의 지리적 광대함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교구간의 분리가 심화되고, 근대 아시아교회는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와 분리되어 하나의 소외된 종파로 여겨졌다.
2) 기독교인의 인구 비율: 아시아 교회는 아시아의 역사를 변화시킬수 있는 충분한 숫자의 신자를 가지지 못했다. 1000년까지 서방의 기독교인수는 3천 500만명 정도이며 동방의 기독교인수는 1천 200만명 정도였다. 숫적으로 소수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박해: 4세기의 가혹한 페르시아의 박해, 일종의 소수종족으로 간주되어 끊임없는 받는 사회적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이익.
4) 권력자에의 의존: 아시아 교회는 서방의 콘스탄틴같은 인물이 없었다. 제국의 호의를 일시적으로 받은적은 있으나 국가종교로 등장하지 못했다. 기독교의 운명은 비기독교인 통치자의 관대함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초기 몽골시대외에는 권력자들이 비기독교적일 뿐 아니라 반기독교적이었다. 아시아 제국은 소수 종족을 핍박하기보다 통제하면서 허약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소외로 인해 교회는 확장보다 생존에 초점을 두게 된다. 기독교 게토.
5) 종교적 내향성: 아시아에서 기독교는 외래적이었으나 타자성을 강하게 가졌다. 인도에서 기독교인들은 시리아인으로 불렸고, 남인도에서는 하나의 카스트와 같은 공동체가 되었다. 페르시아에서도 기독교인은 교회예배용 언어가 시리아어여서 시리아인으로 불렸다. 아시아교회는 종족적 입장에서 소외된 것이 아니라 종교문화적인 입장에서 소외되었다. 당나라에서 기독교는 시리아교나 페르시아교로 불렸다. 교인은 현지인이 주였으나 지도자는 페르시아인이었다. 몽골에서도 기독교는 페르시아교나 어떤 부족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우주성을 가지고 현지에 뿌리내리고 토착화가 되지 못했다.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서구에 가서 서구의 종교가 되었던 것과 반대로 다른 아시아권에서는 문화적 패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기독교의 타자성과 외래성이 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근대 제국주의적 서구선교의 결과로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6) 아시아 종교와의 조우: 서방에는 이방종교가 사라져갔으나 아시아에는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한다. 이들은 강력한 국가종교가 되어 기독교로의 개종을 반대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거대한 사회적, 지적, 종교적 장벽을 구축하였다.
7) 교회의 분열: 7세기의 니시비스 학교의 분열, 다투는 감독들, 확립되지 못한 성직자들의 삶과 체제는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가진 권력자들의 개종을 막았다.
8) 신학적 미성숙-서방에는 기독교 신학이 철학의 도전으로 인해 성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신학을 발전시킬수 있는 도구가 없었다. 기독교에 대한 종교의 도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기독교는 신학을 성숙시킬 여유와 도전을 가지지 못했다.
III. 선교적 확장
1300년 기독교인 인구의 23.9%(백인 66%, 비백인 34%), 복음화율 27%, 성경번역 26개언어
1400년 기독교인 인구의 24%(백인 75%, 비백인 25%), 북음화율 27%, 성경번역 30개언어
1500년 기독교인 인구의 19%(백인 92.6%, 비백인 7.4%), 복음화율 21%, 성경번역 34개언어, 총 순교자 9,200,000명(누적 기독교인의 0.3%)
A. 인디아 선교
1292년-93 년: 중국으로 가던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은 인도에 온 최초의 로마 카톨릭 성직자, 13개월 머물면서 성도마 묘지를 방문하고 1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을 남김.
1319년 : 중국으로 가던 4명의 프란시스칸이 봄베이의 살세트 (Salsette)에서 무슬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323년 : 포르데논의 오도릭(Odoric of Pordenone)이 자바, 보르네오, 수마트라에 가다.
1329년 : 퀼론 (Quilon)의 주교 카탈라니의 요한(John of Catalani).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접촉들일 뿐이었다. 특히 인도의 남서지방에의 동방 전례를 따르는 크리스찬들과 함께 그러하였다.
1321년- 1330? : 도미닉 Jordanus는 무슬림 선교를 위해 세워진 도미닉의 society of wanderers의 일원으로 페르시아의 Tabriz에서 선교한 프랑스인이다. 인도를 목적으로 와서 선교한 최초의 로마 카톨릭 선교사이다. 구자랏에서 선교하여 한 3마을에서 137번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면서 네스토리안 교회의 불화가 생기면서 1328년에 교황 요한 22세에게서 케랄라의 Quilon의 감독으로 서품 받는다. 그는 무슬림을 개종시켜야 했고 네스토리안들을 카톨릭에 연합시켜야 했다.
B. 아프리카 선교
1270년경: 아비시니아 (Abysinia)에의 도미니코 회원들.
1300년경: 도미니코 회원들이 모잠비크에 도달하다.
1351년: 깔멜회원 베르나르도가 까나리 (Canaries)인들의 초대 주교가 됨.
1419년: 마데이라(Madeira)가 '그리스도의 교단(The Order of Christ)‘에게 임무를 맡기다.
1456년: 또한 미래의 모든 포르투갈 식민지들에게.
여기서도 역시 이러한 이니시어티브들은 대단히 소박한 것들이었으며, 앞으로 다가올 보다 위대한 일들의 전주곡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제한된 그러나 중대한 영향과 그리고 자기들의 강한 교계적인 조직 안에 진실된 성과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선교들은 후에도 잘 지속될 수 있었으며 다만 박해하에서만 소멸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들과 가장 본질적으로 성취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 교황권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국경들을 넘어선 교회의 확장을 증진시키기 위한 의무로서 활발히 실행되었고 보다 더 잘 이해되었다 : 그리고 성 루이와 같은 군주들은 선교적 노력을 효과적으로 지지하는 일에 관여했으며, 새로운 수도회들인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선교를 자기들의 일반적 사도적 성소의 가장 집중적이고 영웅적인 형태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고려하여, 「기사 수도회」 (Societates Peregrinantium)를 만들었는데 자기들 고유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그룹들은 교황들에 의하여 영적인 총애를 받았었다. 대학들은 아직 크리스찬 세계에 속하지 않는 문화들과 언어들을 연구할 필요성을 주목하게 되었다. 예, 아라비아어 강좌. 그리고 미래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과업을 위하여 방법적으로 준비되어져야 했다. 무르시아 (Murcia)에서의 언어학교들 (O.P) : 미라마르 (Miramar)에 있는 아라비아어 학부 때때로 교사들은 선교체험을 실제적으로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레이몬드 륄, 혹은 그의 뒤를 이은 루브?의 요한과 같은 이들이 있다.
교회내에서 선교는 그 가치가 보다 잘 인식되어지게 되었으며, 보다 잘 조직되었고 보다 더 전문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향상들은 덜 바람직한 요인들에 의해서 상쇄되었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전체적으로 이전처럼 열광적이진 못했다. 왜냐하면 외교인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너무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 때 전투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군대들은 선교적 대화에 있어서 그들이 참여하는 데에는 기꺼이 응하지 못했다.
C. 로마카톨릭의 대몽골선교: 몽골의 야만성에 서방기독교는 매우 놀라지만 이슬람을 대항한 연합의 가능성으로 최후의 십자군을 희망하였다. 그러므로 대몽골 선교는 정치적인 목적이 종교적인 목적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정치적인 목적은 몽골의 침입에 대한 예방이며 종교적으로는 개종을 목적으로 했다. 선교사들은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수도원주의와 달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교를 분명히 강조하는 가난과 구제를 서약한 걸식 수도회였다. 이들은 본질상 선교공동체였다. 1242년에서 1342년 어간의 선교는 길고 긴 여행이 수반되었다. 이들은 재정적으로 황제의 도움을 받았고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었다. 몽골의 종교정책은 관대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파를 따라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무슬림에게서 개종자를 찾지 못했으며 불교도에게서 많은 수의 영세자를 얻었으나 바른 기독교인으로 살지 못함을 보게된다.
카톨릭은 경교보다 더 외래적인 인상을 주었고 원의 멸망과 함께 몽골의 보호를 받던 외국인에 대한 학살과 외래종교의 박해로 소멸되었다.
a. 탁발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John of Plano Carpini 1245-1247) 교황 이노센트 4세(1243-54)에 의해 파송된 프란시스칸으로서 같은 프란시스칸 폴란드인 베네딕(Benedict the Pole)과 함께 여행하여 몽골에 도착한 최초의 서방 선교사, 바투를 만나 대칸 구육에게 압송되고 네스토리안에 둘러싸인 대칸을 발견한다. 몽골의 개종가능성에 대한 낙관적인 소식을 가지고 리용의 교황에게 돌아왔다.
b. 탁발수도사 포루투갈의 로렌스(Lawrence of Portugal, 1245- ?) 프란시스칸, 카르피니에 의해 파송되고 몽골 야영지에만 도착한 것으로 사료됨
c. 탁발수도사 롬바르디의 안셀름(Anselm of Lombardy 1247-1250) 도미니칸
d. 탁발수도사 롱구미유의 앤드류(Andrew of Longumeau, 1249-1251) 도미니칸
e. 탁발수도사 루브룩의 윌리암(Wiiliam of Rubruck 1253-1255) 프란시스칸, 교황의 두 번째 사절로서 카라코룸에 가서 대칸 몽케를 만난다.
f. 폴로가의 2 형제: 선교사 없는 첫 여행(1260-1269), 원나라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
쿠빌라이는 이들을 환대했고 그들의 왕들과 나라에 대해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이 돌아갈 때 백명의 선교사를 요구하는 서한을 교황에게 보냈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건으로 다음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종교성과 교리들에 정통한 지혜로운 사람들...... 그들은 일곱가지 기술들을 알아야 하고 그의 백성을 가르칠 충분한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다른 모든 종교들의 오류들을 그와 그의 숭배자들, 그리고 다른 모든 계급의 백성들에게 변증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의 종교성과 그 교리들이 그 외의 다른 모든 종교들보다 우수하며 진리에 더 근접해 있음을 사리에 맞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폴로가의 2형제는 쿠빌라이의 서한을 교황 그레고리 10세에게 전달하나 두명의 도미니칸 선교사(Nicolas of Vicenza, William of Tripoli)만을 파송한다. 폴로가의 2형제와 17세 마르코와 선교사들과 동행한 두 번째 여행(1271-1295)을 시작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중앙아에서 발발한 전쟁에 심히 낙심하여 중도에 포기한다. 그리하여 폴로가의 3명만 중국에 1275년 도착한다.
g. John of Montecorvino (1291-1328): 1246/7년 태생으로 26세에 프란시스칸이 되기전에 황제 프레드릭 2세의 군사로, 행정관으로 의관으로 활동했다. 8년후 1280년에 몽골 페르시아로 선교사 파송받는다. 선교활동 마치고 이탈리아로 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90년경 프란시스칸 수도회는 동양 선교를 위해 두 개의 교구를 조직하였는데 북 타타르와 동 타타르가 그것이다. 요한이 파송받은 곳은 동타타르며 그는 인도를 거쳐 북경에 이르는 길고 험한 여행을 해야했다.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한 직후 북경에 도착한 요한은 새황제 티무르의 환대를 받는다. 반면 경교도들은 반기지 않는다. 북경으로 오는 과정에서 웅구트족의 수령 기와르기스를 만나고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기와르기스로 인해 상당수의 웅구트족이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회가 선다(로마교회 Ecclesia Romana, 1299년 기와르기스사후 네스토리우스교로 회귀). 이에 대해 경교도들은 분노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의 사절이 아니라 첩자요 마술사요 백성을 미혹케하는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1299년 북경에서 카톨릭 교회를 세울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1305년에 6000명의 개종자를 얻게 되었고, 1306년에 두 번째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작은 학교하나를 세워 7-11세 사이의 아이들을 가르쳤다(선교의 주된 대상은 알란족 군사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알란족은 원래 카스피해와 카프카스 북방에 거주하던 사람들로서 몽골치하에서 대칸의 친위군으로 기용되고 원대 후기에는 조정의 군사력을 장악하며 군주의 폐립에 간여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다). 1307년 교황 클레멘트 5세에 의해 북경의 대주교로 임명받았고 총대주교에 해당하는 모든 극동 지역의 감독으로 임명됐다. 남중국선교하요 자이툰(천주)에 교구형성. 1318년 교황 요한 22세는 아시아를 두개의 선교구역으로 나누었고 하나는 프란시스칸 수도회에(북경에 대감독교구두고, 나머지 하나는 도미니칸 수도회에 맡겨 관할케 했다(페르시아의 수도 Sultaniyeh).
h. 프란시스칸 선교 보강 (1307-1311): 교황에 의해 계속적으로 프란시스칸이 파송되었다. 1307년 7명의 프란시스칸 수도사를 보좌주교로 파송(인도에서 무슬림에게 4명이 피살되고 1313년 북경도착은 3명 제라르, 페레그린, 앤드류), 1310년 12월 피렌체 출신의 피터를 주교로 임명하여 보냈다. 1311년에 제롬과 토마스라는 사제를 파견했다.
i. 탁발수도사 Odoric of Pordenone(1322-1328) 1265년 생으로 프란시스칸 수도사이며 유럽에서 인도를 거쳐 중국남부에 도달하는 오랜 여행으로 1322년 자이툰에 도착하여 사역하였다. 1330년 귀환하면서 기록한 여행기는 유명했으며 1331년 사망했다.
j. John of Marignolli(1342-1346) 북경의 임명된 마지막 감독, 1338년 5월에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에게 앤드류라는 사람이 알란인으로 보이는 15명과 함께 찾아와서 몽골의 마지막 대칸인 토곤 테무르(순제, 1333-1368)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 이 편지는 상호간의 서신교환과 축복기도를 요청하고 있었다. 또한 북경에 거주하는 기독교도 알란인의 수령이름의 서신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는 몬테코르비노의 후임자 파견요청이 있었다. 교황 베네딕투스 12세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리 대학교의 교수역임한 니콜라 보네를 북경 대주교로 임명하고 마리뇰리의 요한을 포함한 32명의 프란시스칸을 보낸다. 1338년 12월에 아비뇽을 출발하여 나폴리-콘스탄티노플(니콜라 보네의 귀환)-흑해 북안의 카파-킵차크 칸국의 수도 신 사라이-중앙아의 알말릭-하미와 탕구트-1342년 32명의 사절단은 북경에 도착한다. 마리뇰리는 1346-7년경 천주에서 배를 타고 귀환(인도양에서 후르무즈도착-육로로 지중해 동부연안- 키프로스-1353년 아비뇽 도착).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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