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세 신극온(辛克溫) 한성판윤(漢城判尹)공에 대하여
신극온(辛克溫) : 한성판윤(漢城判尹_정2품) 영산신씨 초당공파
제12세 극온(克溫)공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며 경복궁 창건의 주역으로 초당공파 파조 좌찬성(左贊成_종1품) 영산부원군 혁(革)의 증손이며, 조부는 좌정승(左政丞_정1품) 원경(原慶)이다. 공은 부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_정1품) 귀(貴)와 모친 광주노씨의 7남매중 셋째로 태여났다.
고려 공민왕 5년(丙申 1356생)이며, 형극공(克恭)은 중추부사 전주부윤, 아래 동생 극례(克禮)는 영의정 정난좌명 1등공신 증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嶺義政_정1품) 극례(克禮), 그 아래 동생 극량(克良)은 황해감사 셋째 동생은 개국원종공신 호조정량 증 자헌대부 형조판서(刑曹判書_정2품) 극경(克敬)이다.
조선초기 당대에 한 집안에서 가장 많은 현관(顯官)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가히 왕대 밭에 왕대 난다는 고사가 실감나는 가문이다. 문재(文才)가 탁월했던 극온공(克溫公)은 고려 공민왕 22년(癸丑 1373생)에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셨다.
공께서는 1392년 고려 왕조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정도전과 함께 새로운 왕조 건설에 참여하셨다. 특히, 조선이 개국한 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정도전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셨으며,현재의 도성 자리가 잡히고 정도전이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할 때, 공사의 총 책임자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셨다.
태조조에 한성판윤(현서울특별시장)에 제수된 것은 아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이다.
한성판윤은 한성부의 행정과 사법의 총책임자로써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특별시장과 서울특별시 지방검찰청장을 겸임한 것에 해당된다.
공께서는 1398년(太祖 7년)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왕자들 사이의 골육상쟁의 비극인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도전과 함께 태종 이방원에 맞서 싸우시다. 실각을 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 있다.
"강계권,한규,정신의,정진,강택,이조,오몽을,이수,신극공(辛克恭),장윤화,홍유룡,신극온(辛克溫),유은지,유연지,박기,강중경,김주등은 직첩을 빼앗고 땅과 노비를 몰수 했으며, 공께서 직첩을 빼앗기고 땅과 노비를 몰수당한 것은 쿠테타로 실권을 장악한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앉히기 위하여, 그에게 맞서던 정도전과 가까운 세력들을 축출한 것이다.
이때 극온공의 동생인 극례(克禮) 상장군은 태종 이방원 편에 가담하여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사공신이 되셨다. 조선조 초에 정부요직에 계셨던 형제분께서 서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한 분은 실각하시고 또 한분 정사공신이 되신 것은 안타까운 역사라 하겠다.
사거(死居)하신 해는 불분명하고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청주곽씨 안양공 판서 연성의 따님이다. 공의 자 희필(晞必)은 행양지현감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이고, 손자 주(鑄)는 무과급제 후 여러 도와 개성 전주의 절도사, 관찰사, 유수,병,형,공조참판,병조판서(兵曹判書_정2품)을 역임하였고, 네 임금을 모신 4조 공신의 영광을 누렸다.
경기 포천시 선단리에 세거하고 있는 영산신씨 포천종회의 종인들은 초당공파 제12세 극온공(克溫公)의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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