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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한상원목사
예배자답게 예배드리며 살아요 = 역대하27;1-9(171203)
PW : 믿음 BIW : 예배드리라. AG : 여루사
TS : 믿음이란 영과 진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설교를 길게 하시기로 유명하신 목사님이야기
설교를 길게 하시기로 유명하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주일예배 시간에 목사님께서 한참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성도가 설교도중에 나갔다가 한참 뒤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목사님 ; “어디 갔다 왔나요?”
성도님 ; “머리 깎으러요.”
목사님 ; “왜 예배드리기 전에 안했나요?”
성도님 ; “그땐 머리가 짧아서 할 필요가 없었죠.”
많은 분들이 목사님의 설교가 길다고, 지루하다고 투정부리면서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 나라에서는 아무리 길고 지루하다고 해도 그런 설교라도 들어보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중국과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설교다운 설교를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루 온 종일 설교를 듣고 싶어합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설교를 듣고 싶어합니다.
우리들은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길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루하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길어도, 지루해도, 짧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오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목사님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P4.
웃시야 왕에게 문둥병, 나병에 걸리면서 웃시야 왕은 더 이상 왕으로서 백성들을 통치하지 못하게 된다.
웃시야 왕은 궁궐에서 벗어나서 별궁을 만들어서 별궁에 갇혀서 거주하게 된다.
웃시야 왕이 살아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왕으로서 백성들을 통치하지 못하게 되면서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위에 올라서 백성들을 통치하게 된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더라.”고 소개하고 있다.
웃시야 왕의 여러 부인들 중에서 요담 왕의 어머니가 ‘여루사(Jerusha)’라는 여인이다.
곧 여루사의 남편이 웃시야 왕이다.
여루사 여인은 웃시야 왕의 아내이면서 요담 왕의 엄마이다.
요담이 어머니, 곧 웃시야 왕의 아내는 여루사라는 여인이다.
여루사는 사독의 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루사는 사독대제사장의 후손으로 태어난 여인이다.
사독 대제사장은 다윗 왕을 도와서 통일 왕국을 이루었고, 아비아달 대제사장이 파면되면서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사독대제사장의 후손들로 구성된 사람들이 중간기 시대를 걸쳐서 예수님 시대에는 사두개인, 사두개파로 형성되어진다.
D4.
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여루사 여인이 사독의 딸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여루사 여인이 제사장 가문의 딸로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사역을 감당하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제사 중심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여인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루사 여인은 제사장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늘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항상 정결하게 하나님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다.
제사장의 삶이란 일반인들의 삶과는 뭔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생활하는 방법도, 언어생활도, 가정생활도,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다.
다른 삶이란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제사 드리기 위해서 준비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철저하게 정해진 규율과 제도 안에서 한 점 흐트러짐이 없도록 살아간다.
부모님과 형제들 사이에서 이런 규율된 삶을 살면서 자랐기 때문에 여루사 여인은 자연적으로 잘 규율되고 정결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하고 잘 길들여진 삶을 살면서 자란다.
오늘날 목사님의 자녀들도 많이 개방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목사님의 자녀들에게서 보여주는 어떤 독특한 삶의 방식, 삶의 냄새,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무언가 모르지만 일반 아이들과 뭔가 달라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목사님의 자녀들은 잘 정돈되고 흐트러지지 않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힘들고 어려운 목회현장에서 살아오면서 딸들은 목사님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목사님의 사모님이 되는 경우가 많다.
목사님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힘들고 어렵게 목회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절대로 목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목회의 길로 가는 경우가 많다.
사독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루사 여인은 자연스럽게 제사장 가문의 여인들의 삶을 몸에 익히면서 자란다.
② 유대왕가의 며느리, 아내, 엄마로 세워주시는 하나님.
여루사 여인은 사독 제사장의 딸로 태어나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으로 자라게 하신 하나님은 유대 왕가를 하나님 중심의 제사드리는 나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제사에 아주 익숙하게 훈련된 여루사 여인을 아마샤 왕의 며느리로, 웃시야 왕의 아내로, 요담 왕의 엄마로 세워주신다.
여인으로 태어나서 한 나라의 왕비계열에 오른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요 기쁨이다.
여루사 여인은 성숙하여 웃시야 왕과 결혼하여 유다 왕가의 며느리가 된다.
여루사 여인은 제사장 가문의 잘 정돈된 삶의 스타일과 유다왕가의 며느리가 되어 왕가의 철저한 규율이나 정해진 궁궐의 제도에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된다.
여루사 여인은 웃시야 왕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웃시야 왕을 내조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왕, 제사 중심의 왕으로 내조한다.
여루사 여인의 남편 웃시야 왕은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 중심의 왕이다.
웃시야 왕은 아무래도 아내인 여루사의 조언을 잘 귀담아 들으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왕으로 살게 된다.
너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몰두하다보니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루비콩 강을 건너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최대의 실수가 되어 교만한 왕,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를 받게 되는 왕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웃시야 왕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에 매진했던 왕이다.
웃시야 왕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드린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웃시야 왕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것은 성전 성소에 있는 분향단에서 오직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분향을 자신이 직접 드리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받아서 문둥병자, 나병환자가 되는 것이다.
여루사 여인은 남편 웃시야 왕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왕으로 세워드리고, 아들 요담 왕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왕으로 세워간다.
34절에서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루사 여인은 남편뿐만 아니라 아들에게도 신앙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여인이 된다.
여루사 여인이 남편과 아들을 비롯한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친정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 제사 중심의 신앙생활, 잘 규율된 정결한 삶을 사는 여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시댁인 왕가에도, 자녀들에게도 신앙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여인이 될 수 있었다.
여루사 여인은 남편 웃시야 왕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열심히 너무 특심하여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단에 분향드리려고 했던 것 때문에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되는 참사를 보면서 얼마나 참담했을까?
웃시야 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요담왕은 아예 성전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요담왕은 아버지 웃시야 왕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 웃시야왕이 하나님 앞에서 징계와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아예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들 요담은 아버지 웃시야왕과 조상들의 삶을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 웃시야 왕이 직접 성전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을 드리려고 하다가 큰 화를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전 성소에 대하여 심한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그래서 성전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한다.
요담은 25살에 유다 왕이 되어서 16년 동안 통치하고 41살 꽃 다운 나이에 죽는다.
L4 & B4
여루사 여인이 제사 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삶을 잘 배우고 익혔다는 증거이다.
여루사 여인의 삶은 예배의 삶이다.
오늘 우리들이 여루사 여인을 통해서 배워야할 신앙생활은 얼마나 예배의 삶이 중요한가하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지는 예배를 어떻게 드리며 사는가를 유심하게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예배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면 토라, 모세5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바로 제사 때문에 발생한다.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때문에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만큼 예배가 중요하다.
제사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제사가 있는가하면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는 제사가 있다.
예배에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가 있는가하면 하나님께서 전혀 영광을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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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5경 중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제사에 대하여 기록한 레위기를 모세5경의 정중앙에 배치시키고 있다.
레위기를 중심으로 제사는 왜 드려야 하는지, 제사의 필연성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레위기 앞에서 배치시킨다.
제사를 드리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지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민수기와 신명기를 레위기 뒤에 배치시키고 있다.
어쩌면 모세5경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한 권만 뽑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레위기가 가장 중요한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제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 고 고 고 고대시대에는 인간의 의식수준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성경의 중심 지역을 이루고 있는 중동지역 뿐만 아니라 우리 한반도에도 절대적인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았던 시절이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삶을 살았던 시절이다.
오늘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정당한 것처럼 주장하지만,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지 않고 일치시켜서 목사이면서 동시에 시장의 일도 겸해서 일했던 사람이다.
성경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일치시킨다.
곧 정치를 떠난 종교도 잇을 수 없고, 종교를 떠난 정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인은 정치가 신앙이요 신앙이 정치라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그것이 지극히 성경적으로 옳은 삶의 방식이다.
제정일치의 삶을 살았던 고고고고시대, 성경의 시대에 중동지역에는 다양한 족속들이 거주하면서 각 족속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제사 드리는 것을 최우선적인 삶으로 인식하며 살았다.
블레셋은 다곤, 모압은 그모스, 암몬은 몰렉, 가나안 땅은 바알과 아세라, 시돈은 아스다롯 등등 자기 민족들만이 믿는 신들을 위하여 제물을 드리면서 제사를 드린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히브리민족,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제사드리는 민족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택하시고 부르셨다.
태양신 RA를 비롯하여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애굽이라는 곳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을 시키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의 돌판과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특별한 장소인 성막을 만들게 하신다.
특별히 아론의 가문을 구별시키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민족으로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면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민족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5경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레위기이듯이,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은 바로 하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삶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하나님은 여루사 여인을 통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배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 주고 싶어하신다.
예배의 삶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사독제사장의 딸, 여루사 여인을 우리 신앙인들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의 삶, 예배의 삶을 살려고 하면 몇 가지 주의할 점들이 있다.
① 예배의 장소와 시간이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예배는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꼭 성막, 성전에 있는 번제단에서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성막, 성전에 있는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에는 반드시 제사장이 제사를 집례해야만 한다.
제사장이 아닌 일반인이 성막,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게 되면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어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아론의 후손 제사장들만이 모든 제사를 관장할 수 있다고 한정해 버리면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이 드린 제자들이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드린 제사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은 유다지파 출신이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일반지파 출신은 제사장이 될 수 없다.
엘리야도 디셉 사람이라고 성경에서 설명한다.
디셉 지역은 요단강 북편에 있는 길르앗에 있는 지역이다.
그러기 때문에 엘리야 선지자도 정확하게 어느 지파 출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론계열의 제사장 출신은 아니다.
다윗왕이나 솔로몬 왕이 제사를 드릴 때에 성막,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기브온 산당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 특별하게 세워진 번제단에서 1000번제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다른 제사도 드린다.
성막, 성전에는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이 아닌 일반 지파 출신이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하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심판하신다.
성막이나 성전에 있는 번제단에는 반드시 제사장만이 제사를 집례하고 드릴 수 있다.
다른 일반인들은 성막이나 성전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얼마든지 제사를 드릴 수 있다.
성전에서 상번제를 드릴 때에는 공식적으로 하루에 두 번 번제를 드린다.
아침 번제와 저녁 번제를 드리게 된다.
아침번제는 동쪽에서 태양이 솟아나는 시간, 곧 일출을 보면서 아침 번제를 드린다.
저녁 번제는 오후 3시에 드린다.
오후 3시보다 늦어질 경우에 번제를 드리다가 해가 질 경우 하루가 아니라 이틀이 되어버리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서산에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저녁번제를 드려야만 하기 때문에 오후 3시에 저녁번제를 드린다.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은 양이나 소나 염소나 비둘기 제물을 준비하여 온전하게 제물을 태우면서 번제를 드린다.
번제 외에 다른 제사들,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제사들은 번제 드릴 때 번제와 함께 드린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예배는 어디서든 언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예배는 현대교회가 일반적으로 드리는 주일낮예배, 오후예배 및 저녁예배, 수요일 예배, 금요예배, 새벽예배와 같은 공적인 예배를 드린다.
교회가 정한 정기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적인 예배도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
종종 공적인 예배만 예배드리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공적인 예배든, 사적인 예배든 예배는 예배이다.
모든 예배는 정말 중요한 예배,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어떤 예배를 드리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믿음의 고백을 드리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믿음의 고백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이미 예배가 아니다.
예배는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 동반되어져야 한다.
공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기본적인 믿음은 하루 온 종일, 24시간, 1주일 내내 삶의 예배, 생활예배를 드리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일터나 직장, 사업장에서나 어디서든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믿음의 식구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신앙인의 삶 자체가 예배드리는 삶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은 삶이나 생각이나 의식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예배의 삶을 바울사도는 로마서12장에서 영적예배의 삶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영적인 예배의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도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이다.
Lordship, Discipleship, Coram Deo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② 예배의 대상이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얼마든지 제사드릴 수 있다.
중동지역에서 블레셋 족속은 다곤신을, 모압족속은 그모스신을, 암몬족속은 몰렉신을, 가나안 땅과 아람족은 바알과 아세라신을, 애굽은 RA신을 섬기면서 제사 드린다.
우리 한민족은 소위 띠를 말하는 12지신, 용왕신,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성황당, 삼신할멈, 땅, 토지, 지역 등등 각각 신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제사를 드린다.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다 똑 같은 제사가 될 수 없다.
제사를 드리더라도 그 제사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큼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제사의 대상으로 삼아서 제사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지 않고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섬기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은 곧바로 질투하시는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시기까지 하시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다.
이처럼 우리들의 예배도 오직 성삼위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대상이어야 한다.
성삼위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들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성삼위하나님만이 우리 신앙인이 드리는 예배의 대상이다.
하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만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이다.
성삼위 하나님이 아닌 것들은 철저하게 배제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만이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의 대상이다.
③ 예배자의 자세이다.
예배자의 기본적인 자세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 자신은 누구인가?’하는 자신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자신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피조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매우 중요하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중요하다.
‘자신이 누구인가?’하는 정체성도 없고, 믿음도 없이 예배시간에, 예배의 장소에 나와서 드려지는 예배에 동참한다 해도 이미 예배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를 하나님께서 흠양하시는가?’하는 것이다.
아무리 다양한 제사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흠양 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제사가 되고 만다.
제사는 드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제사가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흠양하시고 임재하심으로 응답하시는 제사가 되려고 하면 제사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드려야 한다.
그런 것처럼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어떤 믿음의 자세로 드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신앙인은 예배를 준비한다. 예배를 사모한다.
예배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
예배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받고자 한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자 한다.
우리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여호와 하나님, 하늘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으로 예배드리고 있다.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 우리 예수님께, 우리 성령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입을 열고 찬양 드리며, 기도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면서, 예물을 드리면서, 봉사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참된 마음과 믿음과 영혼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좋아하시고 인정해 주시고, 축복해 주신다.
하나님은 참되게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예배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온전하심, 정결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자랑하고 영광받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자들에게 은혜와 능력을 입혀 주시고, 축복으로 덧입혀 주신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축복으로 덧입혀짐을 입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과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거룩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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