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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뉴스 스크랩 미국 중앙은행 FRB- 국제 금융세력의 개인 사설은행
귀족남자 추천 2 조회 60 12.02.22 03:5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는..
 현재 미국내 12개 연방중앙은행의 통괄기관으로 워싱턴에 위치해 있으며,
 1918년에 제정된 연방준비법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처음에는 연방준비국
 이라고 불렀지만 35년 은행법으로 연방 준비제도이사회로 개칭되었습니다.

 이 FRB의 주요 역할은  화폐발행.지폐 발권은행으로서 달러를 발행하고,
 재할인율등 금리결정,재무부 채권매입과 발행,지급준비율 결정등을
 하며  이를 위해서 연 8회 연방 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개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중앙은행이 미국 정부에 소속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국제금융재벌이 소유한 개인사설 은행입니다.
 미국은 현재 이 FRB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빌려쓰고 있는 채무국이며,
 미국 정부에는 달러에 대한 화폐발행 권한이 아예 없습니다.

 따라서 달러가 필요할 경우에는..국민이 납부할 미래의 세금(국채)을
 연방준비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그것을 기준으로  달러를 발행하게 됩니다.
 화폐는 크게 채무화폐와 비채무화폐의 두 종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채무화폐는 현재 주요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달러처럼 실제로는..
 종이에 불과하여 자체적인 가치가 없는 것을 정부 법률 또는 명령에 의해
 화폐로 확정히여 통용하는 것으로 채무를 담보로 발행되는 화폐입니다.

 비채무화폐는 금은등 그 자체로 실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을 화폐로서
 유통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재산과 소유를 나타냅니다.때문에 특정국가
 등에서 만든 규약이나 법률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세계에서 통용되고,
 채무화폐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채무화폐인, 달러가 발행되었다는 것은  채무가 발생하였다는
 말입니다.즉 중앙은행이 조폐국에서 인쇄한 지폐를 제작 원가에 사들이면,
 정부는 FRB로 부터 발행된 달러를 액면가(지폐제작 원가가 아닌)로 빌리고
 빌린 원금은 빚으로 남으며, 천문학적이 이자까지 복리로 내어야 합니다.  
 
 미국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그 이자를 충당하고 있고, 이자수입은 다름
 아닌 달러를 만들어내는 은행의 몫이며 채무원금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공적자금 투입(연준이 정부에 빌려주는 돈)이나 유동성을 시중에
 직접 푸는 정책등은 이런 국가의 FRB 부채를 확대키는 정책이 됩니다..

 FRB에 대한 주요 내용들을 아래에 정리해 보았습니다.대략의 내용을
 읽어 보시고 미국 달러와 중앙은행에 대해서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아래 관련 중요한 책자들도 함께 소개해 놓았으니 꼭 읽어 보십시요.
 로스차일드,록펠러를 비롯한 세계 금융자본이 전쟁과 돈으로 전세계를
 지배해온 오랜 역사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실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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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한국 기사 출처: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
기사 원제: 미국 정치와 경제 좌지우지하는 금권 통치기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지구상에서 통용되는 미화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 중앙은행의 공식 명칭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FRB: Board of Governors of Federal Reserve System)’이다. 우리나라가 조폐창을 통해 원화 지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FRB의 존재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면 미국 정부에 예속된 공기관 성격의 은행이 아닌 개인 사설 은행이다. 제3세계의 약소국의 중앙은행도 아니고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FRB. 세계의 경찰이라 불리는 초유일 강대국 미국은 아이러니 하게도 FRB로부터 돈을 빌려쓰고 있는 채무국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FRB는 국제금융재벌이 운영하는 개인 소유 은행이지만 형식적으로 FRB 의장을 지명하는 권한은 미국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FRB가 사유 재산임을 직시하면 미국 정부가 그 경영인을 임의로 바꿀 권한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 대통령이 FRB 의장을 지명하는 것은 겉치레일뿐 실상 신임 FRB 의장의 선임 권한은 FRB 내부 이사회를 통해 결정된다. 미국 대통령은 거저 짜여져 있는 절차에 따라 공식적인 발표를 대신해주는 대변인, 즉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FRB 설립 원치 않았다




1913년 미국 정부가 FRB 설립을 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용인하기까지는 설립을 막기 위한 역대 정치인들의 노력과 설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은행가들의 암투로 얼룩져 있다. FRB를 설립한 금융자본은 겉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인 J.P모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유럽의 금융재벌들이 80%에 가까운 지분을 나눠 독점하고 있다.

 FRB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유럽의 금융재벌들은 영국은행, 프랑스은행을 통합한 유럽연합(EU)의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소유주이기도 하다. FRB는 바로 유럽의 거대한 국제금융재벌이 장악한 사설 금융기업이다.

미국이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막대한 유럽의 사설 금융자본재벌은 미국 경제권을 사유화하기 위해 부단한 로비와 정치인들을 매수하는 금권 조직을 총동원해왔다. 경제의 중점이라 할 수 있는 은행은 선(先)침투 대상이었다. 그들은 수차례에 걸쳐 정부의 권한에 맞먹는 사설 중앙은행 설립을 시도했다.

그 연대기를 살펴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다분히 음모적이고, 처절할 정도로 집요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일부는 유럽의 거대 금융자본조직의 유혹을 뿌리치고, 개인이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끈질기게 싸웠다.

최초의 미국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킨 미국 독립의 선각자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4대), 앤드류 잭슨(7대), 아브라함 링컨(16대), 존.F.케네디(35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총알 한방 쏘지 않고 사설 중앙은행을 설립해 미국을 송두리째 삼키려 하는 거대 금융자본조직의 모든 불합리한 수단과 방법을 물거품으로 만들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앞장섰다. 따라서 이 문제에 개입한 미국 대통령들은 항상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고, 대부분 비극적인 종말을 맞아야 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음에도 이들 미국 대통령들이 개인 소유의 사설 중앙은행이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갖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는 동일했다.

1832년 제7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당시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관장했던 사설 중앙은행이었던 ‘미국 제2은행’에 대해 “우리 정부의 이익금이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8백만 이상의 은행 주식을 외국인(유럽 금융자본조직)이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것이어야 할 은행의 구조가 오히려 우리의 자유와 독립성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회의 돈을 관리하면서 우리 국민의 자주성을 ‘외국인이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적에게 막강한 군사력이 있는 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골고루 적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부자나 가난한자를 공평하게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현 정부는 그런 자격이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미국 경제와 국권이 달린 화폐 발행처인 중앙은행이 개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극구 막으려 했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노력은 막강한 부를 이용해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총동원한 국제금융재벌조직에 의해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금융자본을 원천적으로 소유하려 했던 국제금융재벌조직은 독립전쟁 중 군수물자로 거부(巨富)가 된 R. 모리스(현 J.P모건의 창업자)를 내세워 1781년 ‘북미은행(The Bank of North America)’을 설립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북미은행이 무너지자 재차 제1미국은행(1790년)-제2미국은행(1816년)을 다시 설립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벌였다.

이러한 미국 정부와의 반대에 부딪히는 과정을 거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한 결과, 1913년에 연방준비지급법안이 의회를 통과되면서 마침내 미국 화폐를 발행하는 사설 중앙은행인 FRB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는 곧 미국 정부와 화폐발행권을 둘러싸고 벌인 팽팽한 줄다리기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도 했다.

FRB는 금권 통치를 기나긴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듯 사설 중앙은행 설립을 반대했던 프랭클린, 제퍼슨, 매디슨, 잭슨, 링컨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을 전리품처럼 미국 달러 지폐에 새겨 넣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통화발행권을 쥔 FRB에게 돈을 빌어다 쓰고 갚아야 하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1년에 1조 달러였던 미국의 빚은 18년만인 1998년 말경 6조 달러로 늘어났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는 천문학적 빚을 갚기 위해 FRB의 눈치를 살피며 오히려 지배당하고 있는 처지다.


1907년 대공황과 FRB 탄생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5년 10월 24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올해 1월 말로 임기를 마감한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왼쪽)이 참석한 가운데 새 FRB의장에 벤 버냉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의 지명을 발표하고 있다.

190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890년에 제정된 ‘셔먼독점금지법’을 부활시켰다. 셔먼독점금지법은 뉴욕을 중심으로 전미지역에 경제독점 네트워크를 형성하던 J.P모건을 견제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법은 1890년 7월에 제정된 미국 최초의 독점금지법으로 미국 내 주 단위 및 외국과의 금융거래와 상업의 독점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시 루즈벨트는 이 법으로 유럽에서 J.P모건으로 유입되는 M.A로스차일드 금융재벌의 자본을 차단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 내 금융자본이 유럽의 거대금융자본조직과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을 상대로 반격에 나선 J.P모건은 미국 정부를 속이고 고의적으로 대공황을 유도했고, J.P모건과 M.A 로스차일드 그룹은 이 사건을 발단으로 미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려 다시금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밑 작업을 암암리에 벌여 나갔다.

당시 미국의 소규모 은행들은 과다한 대출로 지급준비금의 1%도 안 되는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고객이 1백 달러를 은행에 맡겼을 때 1달러 정도만 되돌려 줄 능력이 없었다. 이같은 상황을 악용해 거대 은행 J.P모건은 미국 내 대부분의 은행들이 파산직전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여론은 J.P모건의 생각대로 적중해 은행에 돈을 맡긴 민간이 자금을 회수하려는 시도가 빗발쳤고 결국 시중의 일반은행들은 일제히 도산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때 J.P모건이 나서 금융권의 안정화를 위한 중앙은행 설립을 주창했다. 정치권과 학계, 언론을 매수해 동조하는 여론을 형성했다. 그 결과 1907년 미 의회는 경제 공황의 원인 조사를 위해 ‘국가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ly Commission)’라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위원회는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2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의 중앙은행 등을 대상으로 운영방식과 소유 지분에 대한 벤치마킹에 들어갔다. 이들 유럽의 중앙은행들은 이미 M.A로스차일드 금융재벌이 몇몇 개인 금융재벌과 손잡고 소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올드리치 의원은 이를 본뜬 사설 중앙은행 설립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M.A로스차일드 금융조직의 지시를 받던 J.P모건이 이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FRB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올드리치’ 법안은 사설 중앙은행에 대해 최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연방정부의 직속 기관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명칭이 ‘연방지급준비금법안’으로 변경돼 의회에 상정됐다.

FRB 조직은 미전역을 보스턴, 필라델피아, 뉴욕, 클리블랜드, 리치먼드, 애틀랜타,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댈러스, 샌프란시스코 등 12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위치한 FRB 본점에는 이를 대표할 7명의 이사진을 선출해 여기서 추대된 대표 회장 1명에게 관리책임을 맡겼다.

FRB 본점에 있는 7명의 이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에서 인준하도록 되어 있다. 임기는 14년이고, 일단 임명된 이사와 대표회장은 어느 누구도 해고할 수 없다. 새 이사의 임명 터울은 2년이다.


연방 정부의 감사도 받지 않는 FRB

FRB의 위력을 전 세계적으로 실감하게 만들었던 전임 FRB의장 앨런 그린스펀.

세상은 한때 그를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렀다. 그의 말 한마디에 뉴욕 월스트리트는 물론 전 세계 증권가가 요동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 달러의 통화량을 마음대로 조절할 권한을 가진 그는 그야말로 세계 금융시장의 황제였으며, 세계의 초유일 강대국 미국 대통령도 간섭할 수 없는 전 세계의 경제대통령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FRB 의장의 힘이 이 정도로 비대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1920~1931년까지 미 하원 금융통화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루이스 맥파든 의원은 “국제 금융가와 국제 산업가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세계를 노예화시키는 ‘초(超)국가가 바로 FRB”라며 맹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 그는 FRB의 소유주가 ‘국제 금융가’라는 점을 주지시키며 그들이 미국인이 아닌 유럽인이라고 폭로했다.

1960년대 하원 금융통화위원회 의원장을 지낸 라이트 패트먼 의원 역시 “오늘날 미국에는 사실상 2대의 정부가 존재한다. 하나는 헌법상 정식으로 만들어진 정부이고, 또 하나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누구와도 협조하지 않는 독립적인 정부이다. 그 정부는 바로 의회가 헌법에 따라 관리해야 할 미국의 화폐를 가지고 마음먹은 대로 세력을 휘두르는 연방지급준비제도이사회(FRB)”라고 말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정부는 지금도 FRB를 감사할 권한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FRB가 한해 소모하는 예산과 지출이 얼마이며, 어디에 사용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미 의회에서 끊임없이 감사의 칼을 들이대려 할 때마다 FRB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한 로비와 법적 수단을 동원해 이를 막아왔다.

이 같이 막대한 금권을 이용해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그 중심에 FRB가 있다. 오랜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금융자본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FRB 지하금고에는 막대한 량의 금괴들이 쌓여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국의 달러를 금덩어리와 동일한 가치라고 신봉하게 만들어 놓고 유통시키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미국의 지폐는 자신들이 찍어내는 것이기에 쌓아둘 공간조차 아까운 한낱 종이에 불과한 것이다.

FRB뿐만 아니라 EU의 유럽중앙은행(ECB)를 소유하고 세계를 움직이는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하는 국제금융자본조직. 그 정체를 파헤친 수십, 수백 권에 달하는 역사서와 기록들 속에는 그들의 출발이 환전꾼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 미루어 FRB의 실제 주인은 미국 태생의 3대 금융가(家)인 록펠러, 골드만삭스, 레먼을 포함해 유럽의 국제금융그룹인 M.A 로스차일드, 와벅, 라자드, 쿤룹, 시프 등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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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를 원가에 사들여서는 이자까지 붙여 정부에 빌려준다!!


지폐를 원가에 사들여서는 이자까지 붙여 정부에 빌려준다!! 사립 은행이 중앙은행의 역할을 할 때 발생하는 폐해는 특정 세력이 경제를 멋대로 좌우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 밖에 좀
더 커다란 문제가 있다.

'불량국가'를 제외하면 전 세계 독립국들의 중앙은행은 통화발행권을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특권에 따라 중앙은행은 국가의 조폐국이 인쇄한 지폐를 제작 원가나 다름없는 가격에 사들인다. 그러면 정부는 중앙은행으로부터 액면가에 그 지폐를 빌린다.

그리고 그 결과 이자 지급 의무가 발생하는 것이다.역사 속에서 사리사욕에 불타는 자본가들과 양심 있는 정치가들은통화 발행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미국에서도 건국 이래 8차례에 걸쳐 통화 발행권이 양자 사이를 오갔는데, 현재는 자본가들이 1913년이래 단물을 빨고 있다. 이 통화 발행권이야말로 금융 자본가들이 그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
이고 강력한 수단인 것이다.

독립한 나라의 통화 발행 권리를 역사상 가장 처음 획득한 곳은1694년에 시작된 영국은행이다. 그리고 이 영국은행도 결국은 유럽의주요 국가의 중앙은행과 마찬가지로 로스차일드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만다. 지금은 구미뿐만 아니라 선진국, 개발도상국 할 것 없이 전 세계의 모든 독립 국가의 중앙은행이 그들의 지배를 받고있다 - p.170


로스차일드 "내게 국가의 통화 공급 통제권을 달라"


이 통화 발행권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유럽의 모든 중앙은행을
지배하는 계기를 만든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조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Mayer Amschel Rothschild(1744 ~ 1812) 다.

그는 자신의 다섯 아들을 프랑크푸르트와 런던,파리,빈,나폴리에 보내 그곳에서 중앙은행을 만들게 함으로써 로스차일드 번영의 기초를 만든 인물이다. 이런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내게 통화 공급권을 통제할수 있는 권한을 달라.그러면 누가 법률을 만들든 상관없다."
영국은행을 통해 이 특권의 달콤함을 깨달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을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인것이다. - p.172


소득세를 징수하는 국세청(IRS)은 헌법위반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은행이 통화 발행권을 쥐고 있다.
정부는 돈이 필요하면 연방준비은행에서 빌리게 되며, 때마다 이자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미국 정부는 조폐국에서 인쇄된 모든 지폐에 대해 이자를 내야 할 의무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재의 연방준비제도가 설립되었을 당시(1913년), 정부가 내야하는 이자가 거액이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문에 금융 자본가들은 그때문에 금융 자본가들은
당시 정부를 끌어들여 국민의 세금으로 이자를 충당하도록 제도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이전에 대법원에서 헌법 위헌으로 판결 내렸던 '소득세 징수'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고 이 소득세 징수를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국세청-IRS인 것이다.
국세청도 연방준비은행과 같은 해인 1913년에 설립되었다. - p.183

 

오늘날까지도 미연방준비은행이 사실 민영 중앙은행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이른바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FRB)'이란 '연방'도 없고, '준비금'도 없으며
'은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대부분은 당연히 미국 정부가 달러를 발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에는 화폐발행 권한이 아예 없다. 1963년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로 미국 정부는 그나마 남아있던 '은 달러'의 발행 권한마저 빼앗겨 버렸다. 미국 정부는 달러가 필요할 경우 국민이 납부할 미래의 세수(국채)를 민영은행인 연방준비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연방준비은행권'을 발행하게 한다. 이것이 곧 '달러'다. - p.100

높은 가격을 매기려면, 연방준비은행은 금리를 인하해 신용을 확대하고 활황 증시를 만들기만 하면 된다. 상공업자들이 그런 식의 금리 환경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연방준비은행이 제멋대로 금리를 인상해 활황을 멈추게 할 것이다.

연방준비은행과 이를 소유한 은행가들은 가벼운 금리 조작을 통해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처럼 시장가격이 조금씩 기복을 보이게 할 수 있으며, 금리 변동을 크게 함으로써 시장 가격 파동을 가져올 수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 그들은 금융 상황의 내부 정보를 확보했기 때문에 장차 일어날 변화를 사전에 다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정부도 이런 특권을 준 적이 없었다. 소수 특권 계층만 갖는 가장 기이하고도 위험한 시장 정보의 선점이었다.이 시스템은 민간 소유이며, 출범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돈을 이용해 최대의 이윤을 얻는 데 있다.

그들은 언제 경제공황을 촉발해야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할지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언제 경제위기를 끝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금융을 장악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은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최고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찰스 린드버그. 하원의원

유통되는 연방준비은행권 1달러는 연방준비은행에 1달러의 빚을 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통화보고서>, 은행 및 통화위원회

절대 다수의 미국인은 국제 금융재벌이 대출을 해주는 구체적 방식을 알지 못한다. 연방준비은행의 계좌는 단 한 번도 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 그 계좌는 완전히 의회의 통제권 밖에서 움직이며, 미국의 신용공급을 조종하고 있다.-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상원의원

당신이나 나나 수표를 쓰기 위해서는 계좌에 수표 지급을 위한 충분한 금액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방준비은행이 수표를 쓸 때는 계좌에 돈이 전혀 없다. 그들이 수표를 쓸 때는 화폐를 발행한다.-보스턴 연방준비은행

연방준비은행 지역은행은 정부기관이 아니라 독립된 민간 소유이며, 지방이 통제하는 회사다.
-루이스(Lewis)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건의 제9순회법정의 판결 사례, 1982년

연방준비은행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기관이다. 내가 들어본 의회연설 중에서 우리 국가가 사실상 국제 금융재벌들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연방준비은행이 미국 정부의 기관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정부기관이 아니라, 민간 신용대출 독점기관이다. 연방준비은행은 자신과 외국 사기꾼의 이익을 위해 미국 국민을 착취하고 있다.-맥패든(McFadden), 하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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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지킬 섬 : 미연방준비은행의 발원지
 
1910년 11월 22일 밤, 한 대의 기차가 뉴욕 근교로부터 남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중 한 칸은 완전히 밀폐되었고, 모든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칸에 타나 사람들은 모두 미국의 중요한 은행가들이었으며, 그들 중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차의 종점은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는 조지아 주의 지킬 섬이었다.

조지아 주 지킬 섬은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겨울철 휴양지로 즐겨 찾는 곳이다. J.P. 모건을 위시한 경제계 거물들이 지킬 섬에 사냥 클럽을 세웠는데, 지구상 6분의 1의 부가 이 클럽 회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 회원권은 양도가 안 되고 계승만 가능하다. 어느 날 클럽 측은 누군가 이 클럽을 2주간 사용할 텐데, 그 기간에는 어떤 회원도 출입을 금지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클럽의 모든 직원은 대륙에서 선발해 오며, 이곳에 도착하는 손님에게는 이름만 부르는 것이 허용되고 성을 호칭할 수 없었다. 클럽 주변 80킬로미터 반경에 대한 기자들의 출입도 통제했다.
모든 준비가 진행되고 손님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 비밀회의의 참석자 중에는 다음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 넬슨 올드리치(Nelson Aldrich)-상원의원, 국가화폐위원회 의장, 넬슨 록펠러의 외조부
 
* A. 피아트 앤드루(A. Piatt Andrew)-미국 재무부차관보
 
* 프랭크 밴더리프(Frank Vanderlip)-뉴욕 내셔널시티은행장
 
* 헨리 P. 데이비슨(Henry P. Davison)-JP모건 사장
 
* 찰스 D. 노턴(Charles D. Norton)-뉴욕 퍼스트내셔널은행장
 
*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JP. 모건의 오른팔
 
* 폴 와버그(Paul Warburg)-독일 유대계 이민자, 1901년 미국에 옴, 큰롭 사(Kuhn Loeb and Company)사장,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과 프랑스 대리인, 미연방준비은행의 총 설계사, 미연방준비은행의 1대 이사

 

이렇게 쟁쟁한 거물들이 그저 사냥이나 하겠다고 작은 외딴섬까지 행차했을 리는 없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중요한 문건인 ‘연방준비은행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폴 와버그는 전문가답게 은행 업무의 세세한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각종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일일이 대답해줄 뿐 아니라, 자세한 역사적 내력까지 막힘없이 설명해주었다. 모두가 은행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고개를 숙였다. 폴은 자연스럽게 문건의 주요 기안자이자 해설자가 되었다.

넬슨 올드리치는 참석자 중 유일하게 금융의 비전문가였다. 그는 문건 내용이 정치적 요구에 정확히 들어맞아 의회에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책임을 맡았다. 다른 사람들은 각 은행 그룹의 이익을 대표했다. 이들은 폴이 제기한 방안을 두고 아흐레 동안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의견 일치를 보였다.

1907년의 은행위기 이후 미국인의 눈에 비친 은행가들의 이미지는 형편없었다. 은행가가 제정에 참여한 법안을 감히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의원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부득이 뉴욕에서 외딴섬까지 가서 문건의 초안을 작성하기로 한 것이다. 초안에서는 중앙은행이라는 명칭이 문제가 되었다. 제퍼슨 대통령 시절부터 중앙은행이라는 이름은 영국의 국제 금융재벌과 비밀리에 결탁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에 폴은 ‘연방준비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러나 명칭에 상관없이 새로운 문건으로 탄생하는 은행은 중앙은행의 직능을 그대로 유지했다. 미연방준비시스템도 잉글랜드은행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보유한 주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거액의 이익을 창출할 것이다. 앞선 두 중앙은행과 미연방준비시스템의 차이점이 있다면, 주식 가운데 원래 20%를 차지하던 정부 지분이 없어지고 ‘순수’한 민영 중앙은행으로 거듭났다는 점이다.

연방준비은행에 힘을 실어주고자 폴은 이를 관장하는 문제에서 교묘한 방안을 제시했다.
 “의회가 미연방준비은행을 통제하고, 정부는 이사회 대표 자격을 가진다. 그러나 이사회의 다수 구성원은 은행협회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나중에 폴은 마지막 제안 부분을 “이사회 구성원은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다.”라고 정정했다.

그러나 이사회의 진정한 기능은 ‘연방자문위원회’가 관장하며, 연방자문위원회와 이사회는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토론’한다. 연방자문위원회의 구성원은 연방준비은행의 이사 12명이 결정하는데, 이 점은 의식적으로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

폴이 직면한 또 하나의 난제는 뉴욕 은행가들이 연방준비은행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숨기느냐 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이래 미국 중서부의 중소 상인과 농장주들은 금융위기의 쓴맛을 톡톡히 본 터라 동부 출신 은행가들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의원들은 은행가들이 주도하는 중앙은행을 지지할 수 없었다.

폴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개의 연방준비은행 지점으로 전체 시스템을 구성한다는 기발한 해결 방안을 설계했다. 금융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 화폐와 신용대출이 뉴욕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서 각 지역에 미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한다는 것은 중앙은행의 업무가 뉴욕에 집중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데 불과하다.

폴의 선견지명은 미연방준비은행 본부를 빈번하게 지령을 주고받는 금융 수도 뉴욕이 아니라 거기서 멀리 떨어진 정치 수도 워싱턴에 두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럼으로써 뉴욕 은행재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다소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의 또 다른 고민은 연방준비은행의 12개 산하 지역은행의 관리자를 선출하는 문제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넬슨 올드리치가 의회에서 쌓은 경험을 십분 발휘했다. 그는 중서부의 의원들이 뉴욕 은행가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통제가 잘 안 되는 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지역은행의 이사는 의회에서 간여하지 않고 반드시 대통령이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법적으로 큰 모순이 있었다. 헌법 제1장 제8절에 의회가 화폐의 발행과 관리를 담당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회를 배제하면 미연방준비은행이 처음부터 헌법을 위반한다는 허점을 보이게 된다. 과연 이 문제는 나중에 의원들이 미연방준비은행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렇게 많은 준비 끝에 이 법안은 엄연히 미국 헌법의 분권과 상호 견제를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출현했다.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가 심의하며 독립 인사를 이사로 임명하고 은행가가 고문이 되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설계였다.


월가의 7인 : 연방준비은행의 막후 추진자

 
월가의 7인은 현재 미국 대부분의 인프라산업과 자원을 관장하고 있다. 그 중 J.P. 모건, 제임스 힐(James Hill), 조지 F. 베이커(Gorge F. Baker, 뉴욕 퍼스트내셔널은행장)는 모건 그룹에 속해 있다.

나머지 네 사람은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윌리엄 록펠러(William Rockefeller), 제임스 스틸먼(James Stillman, 내셔널시티은행장), 야곱 쉬프(Jacob Schiff, 쿤롭 사)로서 스탠더드오일 씨티은행 그룹(Standard Oil City Bank Group)에 속한다. 그들이 구성하는 자본의 핵심 축이 미국을 통제하고 있다.
-존 무디(John Moody). 무디스인베스터스서비스(Moody’s Investors Service)창립자, 1911년
 
월가의 7인은 미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한 진정한 막후 조정자들이다. 그들 상호간의 협력과 유럽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밀한 도움으로 마침내 미국판 잉글랜드은행이 세워진 것이다.





새롭게 떠오르는 모건 가
 
모건은행의 모태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조지 피바디 주식회사(George Peabody and Company)다. 조지 피바디는 원래 미국 볼티모어에서 건제품을 취급하는 상인이었으나,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1835년 영국 런던으로 진출했다.

금융업이 유망하다고 판단한 피바디는 그곳에서 일부 상인들과 머천트뱅크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업종은 당시 유행하던 ‘고급 금융’이었다. 고객은 주로 정부나 대기업과 부자들이었다. 그들은 국제 무역 대출을 제공하고, 주식과 채권을 발행하며, 대형 상품을 취급했다. 이것이 오늘날 투자은행의 전신이다.
 
머천트뱅크(merchant bank)
어음 인수 또는 증권 발행을 주요 업무로 하는 은행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퍼니(Brown Brothers & co.)
알렉산더 브라운이 설립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재벌로서, 미국 자본주의 초기 발달단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
 
피바디는 볼티모어의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퍼니의 영국 지사를 통해 영국 금융계에 쉽게 진출했다. 얼마 후 그는 뜻밖에도 네이선 로스차일드 남작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세계 은행가를 좌우하는 네이선과의 만남을 마치 교황이라도 만나는 양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황송해했다.

피바디를 만난 네이선은 단도직입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비밀홍보 대리인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에서 재산가로 이름을 떨치면서도 미움과 조롱을 받고 있었다. 런던의 귀족 계급은 네이선을 업신여기면서 그의 초대를 번번이 거절했다.

비록 로스차일드가 영국에서 세력을 떨친다고는 하나 귀족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네이선이 피바디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겸허함과 인덕을 높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인인 피바디가 앞으로 쓸모가 많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물론 피바디는 네이선의 제의를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홍보에 필요한 모든 지출은 네이선이 부담했다. 피바디의 회사는 순식간에 런던에서 유명한 사교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매년 7월 4일에 피바디가 주최하는 독립 기념 파티는 런던의 귀족들 사이에 이미 큰 행사로 자리 잡았다. 손님들은 그토록 호화롭고 웅장한 파티 비용을 몇 년 전만 해도 무명의 보통 상인이던 피바디가 부담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1854년까지만 해도 조지 피바디는 100만 파운드급 은행가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000만 파운드를 벌어들여 미국의 중량급 은행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사실 피바디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책동한 1857년의 경제위기 가운데 미국 철도 채권과 정부 채권에 대규모로 투자했다가 영국의 은행가들이 투매할 때 큰 손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잉글랜드은행이 파산 직전에 있는 그에게 80만 파운드의 신용대출을 긴급 제공해 기적적으로 소생할 수 있었다. 그러더니 그 동안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던 피바디가 모든 재산을 털어 당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미국의 국채들을 사들였다.

1857년의 경제위기는 1837년 당시 10년을 끌던 불황과 달랐다. 미국 경제가 불과 1년 만에 불황의 늪을 빠져나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피바디의 수중에 미국 채권들은 그를 슈퍼급 부호로 빠르게 변신시켜주었다. 이는 네이선이 영국 채권을 사들이던 1815년의 상황과 유사하다. 정확한 내부 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다면 파산의 악몽에서 막 깨어난 피바디가 미국의 채권을 그토록 과감하게 사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피바디는 방대한 사업을 물려줄 후계자 문제로 늘 고심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젊은 주니어스 모건(Junius Morgan)을 영입했다. 피바디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주니어스 모건이 사업을 물려받았으며, 회사 이름도 주니어스 S. 모건 사로 바꾸었다.

회사는 여전히 런던에서 경영했다. 나중에 주니어스의 아들 J.P. 모건이 회사를 물려받은 후 미국 지사의 이름을 JP모건이라고 지었다. 1869년, J.P. 모건과 드렉셀은 런던에서 로스차일드 가문과 만났다. 모건 가는 조지 피바디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관계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1880년, JP모건은 철도공사의 구조조정을 위한 비즈니스 활동에 대량의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891년 2월 5일, 로스차일드 가문과 영국의 다른 은행가들이 모여 비밀 조직인 ‘원탁회의그룹’을 설립했다. 미국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때 앞장선 장본인이 모건 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원탁회의그룹은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 CFR)’로 이름을 바꿨고, 영국의 원탁회의는 ‘왕립국제문제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RIA)’로 개명했다. 영, 미 양국 정부의 주요 관리들은 대부분 이 두 협회에서 배출되었다.

1899년, J.P. 모건과 드렉셀은 영국 런던으로 가서 국제 금융재벌들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쪽 수석 대리인으로 선출되었다. 런던회의 결과 뉴욕의 모건, 필라델피아의 드렉셀, 런던의 모건 그렌펠, 파리의 모건아르제앤드컴퍼니, 독일과 미국의 와버그가 로스차일드 가문과 완전히 연계를 맺게 되었다.

1901년, J.P. 모건이 5억 달러라는 높은 가격에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시가 10억 달러가 넘는 초대형의 미국 철강회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가 세워졌다. J.P. 모건은 당시 세계 초고의 갑부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시전국경제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자기 회사 주식 가운데 9%의 지분만 보유했다고 한다. 명성이 자자한 모건도 알고 보면 무대에 나선 광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석유 왕 록펠러
 
록펠러는 미국 역사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가장 냉혹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그의 이름은 자연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는 석유회사 스탠더드오일과 떼어놓을 수 없다.

록펠러가 석유산업에 뛰어든 역사는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1861~1865년)로 거슬러 간다. 1870년에 아메리카 스탠더드오일 회사를 세울 때만 해도 사업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으나, 클리블랜드 내셔널 시티은행의 대출을 받은 이후로 그는 사업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찾은 듯했다. 특히 악의적 경쟁이 판치는 곳에서는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몸담은 석유제련업종은 단기적으로 볼 때 수익이 높았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업체끼리 제살 깎아 먹기 식의 악성 경쟁이 성행했다. 록펠러가 여기서 살아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인정사정 없이 경쟁자를 짓밟아버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우선 그의 조종을 받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한 회사를 통해 현금을 주고 낮은 가격에 경쟁사를 사들이는 것이다. 만약 제안을 거절하면 무자비한 가격전으로 보복을 하는데, 그 경쟁은 상대방이 굴복하거나 파산까지 가야 끝이 났다. 이렇게 해도 효과가 없을 경우 록펠러는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경쟁업체의 직원들을 구타하거나 경쟁사 공장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경쟁사가 몇 안 남게 되었다. 이 같은 독점 행위는 동종업계의 분노를 불러왔지만, 뉴욕 은행가들은 그의 회사에 큰 흥미를 느꼈다. 독점을 선호하는 은행가들은 록펠러가 독점을 위해 저지르는 고도의 집행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점점 강해지는 미국을 제압하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차라리 유럽의 국왕 한 명을 제압하는 것이 민선 정부를 통제하는 일보다 훨씬 쉬웠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자 로스차일드 가는 미국을 통제할 계획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금융업에는 모건은행과 쿤롭 사가 있었지만 공업계에서는 아직 적당한 대리인을 찾지 못하던 차에, 록펠러의 모든 행동은 로스차일드 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금융 쪽으로 대량 수혈을 해준다면 록펠러가 좁은 클리블랜드 지역쯤은 훌쩍 뛰어넘는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금융 전략가인 쿤롭 사의 야곱 쉬프를 록펠러에게 보냈다.

 1875년, 쉬프는 록펠러의 다음 확장 계획을 직접 자문해주었으며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로스파일드 가는 모건은행과 쿤롭 사를 통해 미국 철도운수업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쉬프는 ‘사우스임프루먼트컴퍼니(south Improvement Company)라는 회사를 차려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에 대해 운반비를 대폭 할인해주었다.

다른 제련회사들은 일단 운송 원가에서 록펠러의 상대가 안 되었으므로 얼마 안 가 쓰러졌다.
이렇게 해서 록펠러는 미국 석유산업을 완전히 독점하고, 명실상부한 ‘석유왕’이 되었다.


로스차일드의 금융 전략가 야곱 쉬프

 
로스차일드 가문과 야곱 쉬프 가문의 인연은 17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스차일드는 가족을 이끌고 프랑크푸르트의 한 5층 아파트로 이사해서 쉬프 가족과 몇 년간 함께 거주했는데, 이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같은 독일 유대계 은행가인 양가는 이미 100년 넘게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865년, 겨우 열여덟 살의 야곱 쉬프는 영국 로스차일드은행에서 얼마 동안 수습행원으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미국에 있는 유럽 은행가 대리인 간의 이익을 조정함으로써 미국의 민간 중앙은행 제도 수립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또 다른 목적은 유럽 은행의 대리인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아 양성한 다음 정부나 법원, 은행, 기업, 언론 등 요직에 심어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1875년 1월 1일, 야곱은 쿤롭에 입사하고 회사의 핵심 인물이 된다. 강력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쿤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은행으로 성장했다.


철도 왕 제임스 힐

 
철도 건설은 금융에 대한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인프라사업이다. 거대한 미국의 철도산업은 상당 부분 영국과 유럽의 자본시장에 의존해 발전했다. 유럽에서 발행하고 통제하는 철도 채권이 미국 철도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직접적 수단이었다.
 
1873년, 국제 금융재벌들이 갑작스레 미국에 대한 금융 긴축 작전을 실시함에 따라 미국 채권의 투매 열풍이 불어오자 철도 채권도 그 태풍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79년, 한차례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미국 철도 최대의 채권자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어떤 철도회사라도 망하게 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기선으로 운송하는 석탄채굴사업으로 일어난 제임스 힐은 금융재벌의 도움을 받아야만 철도업계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모건은 그의 든든한 금융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모건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그는 1873년의 위기를 겪으며 많은 철도회사가 도산하는 틈을 이용해 다른 회사를 인수, 합병하고 규모를 확장했다.

1893년에 이르러 미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를 보유하겠다는 제임스 힐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하지만 중서부 철도의 통제권을 손에 넣으려 할 때 강력한 적수를 만났다. 록펠러 재단이 뒤를 봐주는 유니언퍼시픽철도(Union Pacific Railroad)가 기습을 해온 것이다.

유니언퍼시픽철도의 대표 해리먼(Harriman)은 비밀리에 제임스의 노던퍼시픽철도(Northern Pacific Railroad) 주식을 사들였고, 제임스의 회사가 해리먼에게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해리먼이 4만 주만 더 확보하면 게임 끝이었다. 당장 제임스는 유럽에서 휴가 중이던 모건에게 긴급 구조를 요청했고, 모건은 록펠러의 도전에 대해 즉각 역공에 나섰다.

일순간 월가는 노던퍼시픽철도의 주식 쟁탈전으로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 한 주당 가격은 1,000달러까지 치솟았다.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면 그 중 한 마리는 다치게 마련이다. 부작용을 염려한 국제 금융재벌들이 중재에 나서면서 양측은 싸움을 덮었고, 최종 결과는 합병이었다. 그들은 지주회사인 노던증권회사(Northern Securities Company)를 공동 설립해 북부의 모든 철도회사를 손아귀에 넣었다.

지주회사를 설립하던 그날, 미국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key)가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취임했다. 노던증권회사는 신임 대통령 루스벨트의 강한 반대로 1890년 통과된 반독점법 ‘셔먼법’에 따라 강제 해산되었다. 좌절을 겪은 제임스는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콜로라도에서 텍사스까지의 철도를 사들였다. 1916년에 세상을 떠날 때 제임스 힐의 재산은 5,300만 달러였다.


반독점법

독점에 의해 발생되는 부당한 거래의 제한과 독점 그 자체를 배제 또는 규제하기 위한 법률로, 미국의 셔먼법이 그 시초다.


와버그 형제

 
1902년, 폴과 펠릭스 와버그 형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으로 이민했다. 은행가 출신 집안의 형제는 은행 업무에 훤했는데, 특히 폴은 당시 금융의 최고 전문가라고 할 만했다. 폴의 재주를 높이 산 로스차일드는 유럽전략연맹의 와버그은행으로부터 형제를 빼내 인재가 필요한 미국에 배치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에서 민영 중앙은행을 추진했으나, 100년이 다 되도록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폴이 주요 공략 임무를 계승한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폴은 선발대인 야곱 쉬프의 쿤롭사에 들어가 쉬프 처제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동생 펠릭스는 쉬프의 딸과 결혼했다.

루스벨트와 윌슨, 두 대통령을 보좌한 금융 고문 개리슨은 두 형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올드리치의 계획이 전국적인 원성과 반대에 부딪히는 상황에서 폴 와버그는 미연방준비은행 법안을 재구성했다. 이 두 계획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기발한 지혜는 모두 런던에 있는 알프레드 드 로스차일드의 머리에서 나왔다.
 



미연방준비은행 설립의 전초전 : 1907년 금융위기
 
1903년, 폴은 유럽 중앙은행의 ‘앞서가는 경험’을 미국에 소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을 야곱 쉬프에게 전달했다. 이 문건은 곧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오늘날의 씨티은행)의 제임스 스틸먼 행장과 뉴욕 금융계에 전해졌다. 폴의 참신한 아이디어에 사람들은 마치 정수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미국에 민영 중앙은행을 줄곧 반대하는 정치 세력과 민간 세력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공업계와 중소업주들 사이에서 뉴욕 금융계 인사들의 평판은 아주 형편없었다. 의원들은 은행가들의 민영 중앙은행 설립 제안을 몹쓸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피해 다녔다. 이 같은 정치 분위기에서 은행가에게 유리한 중앙은행 법안을 통과시키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이렇게 불리한 정세를 뒤엎기 위한 거대한 금융위기는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구성되었다.
먼저 신문과 언론에 새로운 금융 개념을 홍보하는 글을 대량으로 게재했다. 1907년 1월 6일에는 ‘우리 은행 시스템의 결점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폴의 글이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폴은 미국 중앙은행 제도 설립을 제창하는 선봉에 섰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곱 쉬프는 뉴욕 상공회의소에 “신용 자원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중앙은행을 세우지 않으면 장차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837년, 1857년, 1873년, 1884년, 1893년과 마찬가지로 금융재벌들은 경기가 과열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거품 현상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 또한 시중에 돈을 많이 풀어서 생기는 필연적 결과였다. 이 모든 과정은 금융재벌이 어항 속에 물고기를 키우는 것과 같았다.

금융재벌들은 마치 어항에 물을 붓듯 시중에 돈을 풀어 경제주체에게 대량으로 화폐를 주입했다. 돈을 풀면 각계각층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욕심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서 부를 창출하는데, 어항 속의 물고기가 각종 양분을 열심히 흡수해 점점 살이 오르는 것과 같다. 금융재벌들이 수확의 시기가 왔음을 알고 어항의 물을 빼면, 물고기들은 잡혀 먹히는 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항의 물을 빼고 고기들을 처분하는 시기는 몇 개의 대형 은행들만 알고 있었다. 한 나라가 민영 중앙은행 제도를 설립한 이후로는 은행재벌들이 물을 대고 빼기가 더 수월해지므로 수확도 한층 많아질 것이다. 경제의 발전과 쇠퇴, 재산의 축적과 증발은 모두 은행재벌들이 진행하는 ‘과학적 사육’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다.

모건과 그의 배후에 있는 국제 금융재벌들은 이번 금융위기로 예측되는 성과를 정확하게 계산했다. 첫째,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는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사실’로 증명할 것이다. 둘째, 소규모의 경쟁 금융기업을 도산시켜 합병한다. 특히 자산신탁회사, 즉 투신사는 은행가들의 눈엣가시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오랫동안 군침을 흘려온 중요 기업을 손아귀에 넣는 것이다.
당시 잘나가던 투신사들은 은행이 못하는 업무를 많이 다뤘으며 정부의 규제도 느슨했다.

이런 이유로 투신사들은 사회자금을 지나치게 흡수하고, 리스크가 큰 업종과 증시에 투자했다. 1907년 10월 위기가 터질 때까지 뉴욕의 은행 대출 절반 정도가 고수익을 내는 투신사에 흘러 들어가고, 투신사는 그 돈을 리스크가 큰 증권과 채권에 투자하는 바람에 금융시장에는 극도의 투기 바람이 불었다.

몇 달 전부터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휴식을 취하던 모건은 국제 금융가들의 빈틈없는 계획을 듣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투신사인 니커보커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가 곧 파산하리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은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뉴욕 전체를 휩쓸었고, 돈을 날릴까 걱정하는 투자자들이 인출을 요구하며 몰려드는 바람에 투신사마다 북새통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투신사에 즉시 대출을 상환하라고 독촉했고, 양쪽에서 시달리던 투신사들은 하는 수 없이 증권시장에서 돈을 빌렸다. 그러자 대출 금리는 단숨에 150%까지 치솟았다. 10월 24일, 주식 거래는 거의 중단 상태였다.

이때 모건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뉴욕 증권거래소장이 모건의 사무실로 찾아와 구조를 요청했다. 소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오후 3시 전에 2,500만 달러의 결제를 막지 못하면 최소 50개의 거래 기업이 파산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증권시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후 2시에 모건은 긴급 금융인 회의를 소집했고, 16분 동안 은행가들은 돈을 모았다. 모건이 즉시 증권거래소에 사람을 보내 금리 10%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자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긴급 구조 자금은 바닥이 났고, 금리는 미친 듯 치솟았다. 8개의 은행 및 투신사가 이미 도산했다. 모건은 뉴욕 청산 은행으로 달려가서, 임시 화폐로 어음을 발행해 현금 부족을 해소하라고 요청했다.

11월 2일 토요일, 모건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을 실천에 옮겨 파산의 위기에 몰린 무어&실리(Moore&Schley)사를 구제하기로 했다. 2,500만 달러의 채무 때문에 도산을 눈앞에 둔 이 회사는 테네시석탄 철강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무어&실리가 도산한다면 뉴욕 증시는 완전히 붕괴할 테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모건은 뉴욕 금융계의 거물급 인사들을 자신의 도서관으로 불렀다. 상업은행 대표들은 동쪽 서재에, 투신사 사장들은 서쪽 서재에 있게 했다. 그들은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자신들의 운명에 초조해하며 모건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모건은 테네시석탄철강회사가 보유한 테네시 주, 앨라배마 주, 조지아 주의 석탄 및 철강 자원이 장차 자신이 창건한 철강의 거두 U.S.스틸의 독점적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해주리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반독점법의 제약 때문에 모건은 이 군침 도는 먹이를 삼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위기가 모처럼의 합병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이다.

모건의 조건은 무어&실리와 다른 금융회사들을 살리고자 투신사들이 2,500만 달러를 추렴해 붕괴를 막고, U.S.스틸은 무어&실리로부터 테네시석탄철강회사의 채권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극도의 조바심과 파산 압박에 몰려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자고 기진맥진한 투신사의 사장들은 어쩔 수 없이 모건에게 백기를 들고 그 조건을 수락했다.

마침내 테네시석탄철강회사를 손에 넣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건의 앞에는 또 하나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독점법을 강력히 추진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11월 3일 일요일 밤, 모건은 워싱턴으로 사람을 급파해서 다음 주 월요일 오전 증시개장 전에 대통령의 허락을 얻으라고 지시했다. 금융위기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평생 모은 저축을 날린 시민들은 연일 분노를 터뜨리는 상황이었다. 극심한 위기를 느낀 루스벨트는 부득이 모건의 힘을 빌려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했고, 결국 승인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때가 월요일 증시 개장을 불과 5분 앞둔 시간이었다.

뉴욕 증시의 주가는 이 소식에 다시 급상승했다.모건은 겨우 4,500만 달러라는 헐값으로 테네시석탄철강회사를 인수했다. 무디스의 설립자 존 무디의 평가에 따르면, 이 회사의 잠재적 가치는 최소한 10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모든 금융위기는 오래 전부터 준비된 정확한 각본에 따라 발생하며, 번쩍거리는 은행 빌딩은 하나같이 수많은 파산자의 희생 위에 지어진다.


금본위제에서 법정화폐로 : 은행재벌 세계관의 대전환




19세기 말 이래 국제 금융재벌의 돈에 대한 인식에는 또 한 번의 비약적 전환이 있었다.
기존의 잉글랜드은행 모델은 국채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고 정부의 채권과 은행의 발권을 연동시켜 채무 규모를 점점 확대시킴으로써 은행가들이 거액의 수익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금본위 체제에서 은행가들은 인플레이션을 극도로 반대했다. 어떤 화폐라도 평가절하되면 은행가의 이자 수입에 직접적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구상은 대출업으로 이자를 챙기는 비교적 원시적 방법으로, 재산의 축적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결함이 있었다.

설사 지급준비금 제도를 사용하더라도 금융재벌들의 날로 커지는 배를 채우기에는 여전히 모자랐다. 특히 황금과 백은이 천천히 증가하기 때문에 은행의 대출금 총량에 상한선을 책정해놓은 셈이었다.
 
지급준비금 제도

은행 예금의 일정 비율을 지급준비금으로서 중앙은행에 강제적으로 예금시켜 그 비율을 상하로 조절해 통화량을 조정하는 제도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할 무렵, 유럽의 은행재벌들은 이미 더 효과적이고 더 복잡한 법정화폐 체제를 모색하고 있었다. 법정화폐(fiat money)는 황금과 백은이 대출 총량에 상당한 제약을 미치는 국면에서 완전히 탈피해 훨씬 융통성 있고 은밀하게 화폐를 통제할 수 있게 했다.

화폐 공급을 무한대로 늘려 얻는 수익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대출 이자의 손실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알게 된 은행가들은 갑자기 법정화폐의 가장 열렬한 제창자로 변신했다. 그들은 화폐 유통량을 급증시켜 저축자들로부터 거액의 재산을 빼앗았다. 통화 팽창은 은행이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제 경매하는 방식보다 훨씬 그럴듯했으므로 국민의 저항감을 최소화할 뿐 아니라, 그런 사실을 잘 모르게 할 수도 있었다.

은행재벌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인플레이션 관련 경제학 연구는 순수 수학 게임의 궤도로 진입해갔다. 지폐 발행의 증가에 따른 통화 팽창(currency inflation)의 개념은 오늘날 가격 상승에 따른 통화 팽창(price inflation) 개념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이제 은행재벌의 치부 수단에는 원래의 지급준비금 제도, 화폐와 국채의 연동 외에 또 하나의 강력한 도구인 인플레이션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은행은 황금의 수호자에서 황금의 천적으로 드라마틱한 변신을 한 것이다.

통화 팽창에 대해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John Keynes)는 따끔하게 꼬집었다. “정부는 이 방법을 이용해 눈에 띄지 않게 국민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 100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이러한 절도 행위를 발견해내기 어렵다.”

엄밀히 말해 미국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 기관은 미연방준비은행이지 정부가 아니다.


1912년의 대선 열풍

 
화요일에 프린스턴대학 총장이 여러분의 주지사로 당선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1912년 3월에 그는 대통령에 연임되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랍비 와이즈(Rabbi Isaac Wise)의 뉴저지 연설 중. 1910년
 
훗날 윌슨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참모를 지낸 와이즈는 2년 전에 대통령 대선 결과를 정확하게 예언했다. 심지어 그로부터 6년 후의 대선 결과까지 정확히 예측해냈다. 그에게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은행가들의 치밀한 사전 책략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재벌들의 예상대로 1907년의 금융위기는 미국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국민은 투신사에 분노를 품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월가 금융 세력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은행 파산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했다. 금융 독점을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전국을 휩쓸었다.

프린스턴대학의 우드로 윌슨 총장은 금융 독점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의 프랭크 밴더리프 행장이 한 말을 들어보자, “나는 프린스턴의 우드로 윌슨 총장에게 편지를 써서 만찬회 연설을 부탁했다. 그 연설이 중요한 기회임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상원위원 넬슨 올드리치도 그 자리에서 연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친구 윌슨 박사는 뜻밖에도 올드리치 상원의원과 같은 자리에서 연설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당시 여야에 상관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다. 40년 동안 의회에서 활동하면서 36년간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권력이 막강한 상원 금융위원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존 록펠러의 장인으로 월가 금융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08년, 올드리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은행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연방정부와 주정부와 지방정부의 채권과 철도 채권을 담보로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금융계 입장에서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위험은 정부와 국민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은행가들이 그 열매만 따 먹겠다는 발상이었다. 월가의 이처럼 교묘한 수법이 놀라울 뿐이다. 이 ‘긴급화폐법’은 5년 후 미연방준비은행법의 기초가 되었고, 올드리치는 명실상부한 월가의 대변인으로 인식되었다.

우드로 윌슨은 1879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버지니아대학에서 법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886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02년 프린스턴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학구열에 불타던 윌슨은 금융 독점에 대해 큰 목소리로 반대해왔다. 당연히 금융계의 대변인인 올드리치를 반길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학술적 열정과 이상주의만으로는 금융업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메울 수 없었다. 윌슨은 월가의 은행가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수법에도 완전 문외한이었다.

은행가들은 윌슨의 단순하면서도 이용하기 쉬운 특징에 주목했다. 게다가 그는 사회가 인정하는 금융 독점 반대 운동가가 아닌가! 이처럼 참신한 이미지의 인물은 그야말로 보기 드문 보배였다. 은행가들은 윌슨에게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그를 이용할 날만을 기다렸다.

마침 뉴욕 내서널시티은행의 클리블랜드 도지 이사가 윌슨의 프린스턴대학 동기였다. 1902년 윌슨이 순조롭게 프린스턴 총장에 임명된 것은 든든한 재력의 도지가 뒤에서 도운 결과였다.

이렇게 조금씩 관계를 다진 다음, 도지는 은행가들의 책략대로 윌슨이 대통령감이라는 소문을 월가에 퍼뜨렸다. 총장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을 갑자기 대통령감이라고 떠받드니, 윌슨이 내심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여기에도 대가는 따랐다. 이때부터 윌슨과 월가와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었다. 얼마 후 윌슨은 월가 큰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1910년 뉴저지의 주지사로 당선된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윌슨은 여전히 정의감에 불타는 어조로 월가의 금융 독점을 비난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자신의 자리와 정치적 미래가 완전히 은행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은행가들은 윌슨의 비난을 이상할 정도로 용인했으며, 쌍방은 일종의 미묘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묵계를 유지했다.

윌슨의 명성이 날로 높아질 즈음, 은행가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그의 대통령 경선 비용을 모았다. 도지는 뉴욕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윌슨 선거 자금 모금 사무실을 차리고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자신은 1,00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헌금했다. 그 후 은행 직접 송금 방식으로 은행가에서는 많은 정치 자금을 모았는데, 그 중 3분의 2가 월가의 큰손 7인이 내놓은 정치 헌금이었다.

대통령 경선 후보에 이름이 거명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윌슨은 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네.”라고 썼다. 이때부터 윌슨은 완전히 금융재벌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민주당 후보인 윌슨의 어깨에는 민주당의 염원도 실려 있었다. 몇 년간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민주당 측도 권력에 대한 목마름으로 윌슨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윌슨이 넘어야 할 산은 현직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다. 당시 전국적 지명도에서 딸리는 윌슨에 비해 태프트 대통령은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자신 있게 연임에 도전한 태프트가 올드리치 법안에 대해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태프트의 전임 대통령인 루스벨트가 갑자기 경선 참가를 선언한 것이다. 루스벨트가 선택한 계승자이자 같은 공화당 소속의 태프트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 루스벨트는 노던증권회사의 해산으로 명망이 높아졌고, 반독점법 추진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은 태프트의 표를 상당 부분 잠식했다.

사실 이들 세 후보자는 모두 은행재벌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은행재벌들이 가장 통제하기 쉬운 윌슨 쪽으로 암암리에 기울 뿐이었다. 월가의 계획에 따라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윌슨은 가볍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는 1992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로스 페로에게 지지표를 많이 뺏기는 바람에 신예인 빌 클린턴에게 패한 경우와 비슷하다.


B프로젝트

 
금융계 거물들은 지킬 섬에서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빈틈없는 직업적 본능으로 두 가지 계획을 준비했는데, 하나는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양동(陽動)작전을 주도해 반대파의 주의력을 그쪽으로 집중시키는 계획으로 공화당의 지지를 받았다. 또 하나는 B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작전인데, 공격의 핵심은 사실 이쪽에 있었다. B프로젝트가 바로 ‘연방준비은행법’이며, 주요 추진 세력은 민주당이었다.

사실 이들 두 계획은 이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었다.
대통령 선거도 이러한 핵심 목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올드리치 상원의원과 월가의 결탁 관계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당시 월가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팽배한 가운데 그가 내세우는 금융 개혁 법안이 부결될 것은 확실했다.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오랜 시간을 보낸 민주당은 그 동안 줄곧 금융 독점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여기에 참신한 이미지의 윌신이 가세하니, 모든 것이 민주당이 지지하는 연방준비은행법을 관철할 좋은 기회였다. 1907년의 금융위기로 금융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는 양당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민의에 ‘순응’한다며 은행재벌들이 공화당을 희생시키고 민주당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는지도 모른다.

금융재벌들은 대중을 좀더 미혹하고자 내용이 별반 다를 바 없는 두 방안을 따로 내놓고 서로 공격하게 하는 고단수를 썼다.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제일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는 민주당의 제안이 은행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다고 지적하고, 이는 정부에도 불리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본위제에 어긋나는 법정화폐 정책은 은행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잡지 <네이션(Nation)>은 1913년 10월 23일 이렇게 지적했다. “올드리치 선생이 반대하는 황금 기반이 없는 정부의 법정화폐는 본인이 1908년 제안한 긴급화폐법으로 해결할 일이다. 그는 정부가 사실상 화폐 발행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연방준비위원회가 화폐 발행을 전권으로 장악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올드리치의 제안에 대한 민주당의 비난은 국민의 눈을 뜨게 했다. 그들은 올드리치가 수호하는 것은 월가 금융재벌의 이익과 독점적 지위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제시한 연방준비은행은 이 같은 독점 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취지에서 비롯되었으며, 지역이 나뉘고 대통령이 임명하며 의회가 심의하고 은행재벌이 전문가의 의견을 제공하는 상호 제약 및 분권 분립 체제의 완벽한 중앙은행 시스템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 사무에 어두운 윌슨은 순진하게도 이 방안을 통해 월가 금융재벌들의 독점적 금융 구조를 깰 수 있으리라고 굳건히 믿었다.

올드리치와 밴더리프, 그리고 월가의 총력을 기울여 반대한 덕분에 민주당이 내세운 연방준비은행법은 오히려 대중에게 호감을 얻었다. 은행재벌들이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하면서 안으로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교란 작전은 어찌나 교묘한지 무릎을 칠 정도였다.


금융재벌들의 꿈이 이루어지다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됨과 동시에 B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윌슨이 백악관에 입성한 지 겨우 석 달이 지난 1913년 6월 26일, 버지니아 하원의원인 은행가 카터 글래스(Carter Glass)가 정식으로 B프로젝트를 하원회의에 부쳤다. 이른바 ‘글래스 제안(Glass Bill)’이었다. 그는 중앙은행 같은 자극적인 용어를 피하면서 연방준비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했다. 9월 18일, 글래스 제안은 대부분 하원의원이 제대로 살펴볼 틈도 없이 표결 결과 287대 85로 통과되었다.

상원에 제출된 이 제안은 ‘글래스-오언제안(Glass-Owen Bill)’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원의원 로버트 L. 오언(Robert L. Owen) 역시 은행가였다. 글래스-오언 제안은 상원에서 12월 19일 통과되었다. 이때 두 제안에는 아직 손볼 곳이 40여 군데나 남아 있었는데, 상하 양원에서는 크리스마스 1주일 전까지 중요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이듬해나 돼야 재토론이 가능했으므로, 이 법안에 반대하는 주요 의원들은 대부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워싱턴을 떠나고 없었다.

이때 의회에 임시 사무실을 차리고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던 폴 와버그는 때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날치기 통과를 계획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한 시간마다 의원들이 찾아와서 다음 계획을 논의했다. 12월 20일 토요일 밤의 연석회의에서 의견이 다른 몇몇 부분을 일치시켰다.

당시 의회에는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크리스마스 전에 미연방준비은행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심지어 백악관 측에서도 12월 17일에 이미 초대 연방준비은행 이사의 명단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할 정도였다. 그러나 20일 밤이 되도록 몇 가지 핵심 부분에서는 여전히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12월 22일 월요일에 연방준비은행법을 통과시키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연석회의는 은행가들의 독촉에 일요일인 21일에도 회의를 열기로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휴회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20일 한밤중이 되도록 상하 양원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 중에는 지역은행의 숫자, 황금 준비금의 비율, 국내의 국제 무역 거래 시 화폐 결산, 준비금 수정 제안, 미연방준비은행에서 발행한 화폐가 상업은행의 준비금이 될 수 있는지 여부, 정부 채권의 연방준비은행 화폐 발행 담보물 비율, 인플레이션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가운데 21일 하루를 보낸 이튿날, 22일 월요일 자 <뉴욕 타임스> 1면에는 ‘화페 제안이 오늘 법으로 제정될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의회의 효율을 찬양하는 문구로 가득 차 있었다. “연석회의는 비교도 안 되는 신속한 속도로 양원 제안의 견해차를 좁혔으며, 오늘 새벽에 모든 작업을 마쳤다.”

<뉴욕 타임스>는 그 시간이 대략 월요일 새벽 1시 30분에서 4시 사이라고 보도했다. 모든 미국인의 하루하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중요한 법안은 이렇게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의원은 수정한 부분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고, 당연히 수정안은 제출할 엄두도 못 냈다.
 
* 22일 새벽 4시 30분, 마지막 문건을 인쇄하러 보내다.
* 오전 7시 정각, 원고의 마지막 교정을 마치다.
* 오후 2시, 인쇄가 끝난 문건이 의원들의 탁자 위에 놓이고 오후 4시의 회의 개최를 통지하다.
* 오후 4시, 회의가 시작되다.
* 오후 6시 정각, 마지막 연석회의 보고서를 제출하다. 이때 대부분의 의원은 이미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우고, 회의장에 남은 의원은 몇 명에 불과하다.
* 저녁 7시 30분, 글래스가 20분 정도 연설한 다음 토론으로 들어가다.
* 밤 11시, 표결이 시작되고 298대 60으로 하원에서 통과되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23일, 상원에서 표결한 결과 43대 25(27명 불참)로 ‘연방준비은행법’이 통과되다. 월가를 의식한 윌슨 대통령이 상원에서 연방준비은행을 불과 한 시간 만에 통과시키고 정식으로 법안에 서명하다.
 
순간 월가와 런던 금융시티는 환호성에 휩싸였다.
이날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의원은 하원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연방준비은행법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신용을 부여 받았습니다.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한 순간부터 금권이라는 이 보이지 않는 정부는 합법화될 것입니다. 국민은 당장에야 잘 모르겠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국민은 다시 ‘독립선언’을 해야 금권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금권은 최종적으로 의회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이 의회를 속이지 않으면, 월가는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국민의 의회를 가졌다면 국민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회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는 바로 화폐 체제 법안인 연방준비은행법입니다. 이 은행법의 통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악랄한 입법 범죄입니다. 양당의 지도자들이 밀실에서 담합해 국민이 정부로부터 이익을 얻을 기회를 앗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은행가들은 이 법안에 호평으로 일관했다. 아메리칸내셔널은행의 올리버 샌즈(Olover Sands)행장은 열정에 넘친 평론을 했다.
 
화페 법안의 통과는 국가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줄 것이며, 이 법안의 운영은 상업 활동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보편적 번영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연방준비은행 탄생의 일등공신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1914년 7월 잡지 <인디펜던트(Independen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연방준비은행법이 나오기 전에는 뉴욕의 은행가들이 뉴욕 지역의 자금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 전체의 은행 준비금을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미국 정부와 100년에 걸쳐 벌인 치열한 힘겨루기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미국의 화폐 발행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으로 끝났다. 잉글랜드은행 모델이 미국에서도 성공적으로 복제된 것이다.
 

"한 위대한 공업 국가는 신용 시스템으로 단단히 통제된다. 이 신용 시스템은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 이 나라의 발전과 우리의 모든 경제 활동은 완전히 소수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가장 악랄한 통치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게는 더 이상 자유로운 발언권이 없으며, 죄를 다스릴 사법권도 없다. 이제 다수 의견으로 선거하는 정부가 아니라 극소수의 지배권을 가진 자의 강압으로 움직이는 힘없는 정부다.

나라의 많은 상공업계 인사는 하나같이 모종의 대상을 두려워한다. 보이지 않는 이 권력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은밀하며, 얼마나 무소불위하고, 얼마나 상호 결탁이 잘되어 있으며, 얼마나 철저하고 완벽한지 사람들은 감히 이 권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못한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 28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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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화폐전쟁(CURRENCY WAR)

쑹훙빙 저

 
화폐전쟁은 발간 당시 화제를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입니다.
로스차일드 가에서 시작된 국제 금융재벌들이 세계 경제와 전세계를 보이
않는 곳에서 지배해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워털루 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배후에 이들이 있음을 밝히며,그들이 어떻게 한나라 경제와 정치 운명을 장악하고 재산의 흐름과 분배를 통제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화폐 발행권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였던 미국의 대통령과 미연방준비은행.
1929년 미국 경제 대공황이 일어난 이유, 황금이 국제적 기축통화일수 밖에없는 이유, 중동 석유가 미국 달러에 미친 영향, 일본 경제가 1990년대 장기 침체에 빠진 이유, 한국이 IMF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 아시아 금융 위기의 배후 조종자 등을 밝히며 세계 경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
합니다.또 세계를 통치하는 엘리트 그룹이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끊임없이
금융 전쟁을 일으키는 수단과 그 결과를 재현합니다.

미국에서 금융 전문가로 활동하는 저자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를 보며,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방대한 정부 문헌과 법률 문서, 개인 서신과 전기,
신문 잡지에 실린 글에서 서양의 굵직한 금융 사건을 찾아냈고, 글쓰기에 돌입했으며 제작팀을 구성해 그 작업을 완료하는데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습니다.10년에 걸친 취재와 고증 끝에 비로소 [화폐전쟁]이 발간되었습니다.

시중에 화폐전쟁 3.0이란 책이 있는데..언뜻 보면 화폐전쟁 최신판으로 착각을 합니다만 저자도 틀리고 내용도 완전 다른 책이니 참고하십시요.


인터파크에서 판매되네요.링크해드립니다.
화폐전쟁(CURRENCY WAR)
 




[도서명]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2권세트)

기쿠카와 세이지 저 

 
저자는 미국에서 30년 이상을 거주하며 단순 추론이 아니라 철저한 자료의
입증을 바탕으로 세계정부수립 세력의 배후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이상의 시간동안 록펠러와 로스차일드 가가 거대자본을 가지고
어떠한 형태로 미국과 세계에 전쟁과 경제,사회적 혼란으로 발생시켜 왔는지객관적인 자료,증거들을 토대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아주 최근까지의 미국의 상황 역시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CDS(Credit Default Swap)등 또 다른 경제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사용될
수단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두 권이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그들이 일으켜온 대표적 사건들과
세계정부수립의 관계가 통합적으로 완벽하게 정리되실 것입니다.
머리말에 '엘고어의 지구온난화와 개구리 이야기'를 하며 호감있게 보았다고
언급하는 것은 저자의 통쾌한, 극단적인 반어법으로.. 몰라서 칭찬했다고
오해마시기를 바랍니다..탄소세에 관한 부분도 책 중간에 언급됩니다.


인터파크에서 판매되네요.링크해드립니다.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도서명] 경제 저격수의 고백 2

존 퍼킨스(John Perkins) 저

 
아이슬란드 국가 부도, 에콰도르의 모라토리엄 선언,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과 그 해결책을 제시한 책입니다.이 책의 저자 존 퍼킨스는 과거 경제 저격수로 활동했던 경험으로..
최근의 경제 위기는 제3세계와 세계의 자원 보유국에서도 탐욕을 못채운
미국의 거대자본 기업들이 착취와 사기를 일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대 자본주의 지배 계층이 어떤 식으로 전 세계적 위기를 불러일으켰는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경제 저격수의 수법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엄격한 환경 기준, 사회 기준, 진실을 강조하는 광고등을
비롯하여 과거 대중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기준을 준수하도록

1.기업을 압박하는 법률을 폐지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
2.개인, 기업, 정부에 엄청난 금액의 부채를 떠넘기는 방법,
3.공익시설, 감옥, 기타 ‘공공’ 기관을 민영화하는 방법,
4. ‘국토방위’라는 명분 아래 경찰의 감시 권한을 강화하는 방법
5.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유지를 사용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경제 저격수의 고백]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저자 존 퍼킨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총체적인 위기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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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저격수의 고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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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3.01 12:37

    첫댓글 경제저격수의 고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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