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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전병금목사/하나님 보시기에 (창 1:1-5)
여러분은 한번쯤 '열린 음악회'라는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저는 거기에 참여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환한 표정으로 함께 노래 부르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교회의 예배가 바로 저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둡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힘들고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열린 음악회'나 여러 오락프로그램은 잠시나마 위안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통해 영원한 기쁨과 참 생명을 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예배에 '열린 음악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큰 은혜와 감격을 체험하는 환상을 가져보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속에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천지창조'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삶 또한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물러가고 새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우리 강남교회가 어두운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참된 위로와 기쁨과 생명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무(無)로부터의 창조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창 1:1-2). 이를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도 땅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혼돈'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토후'인데, 이 말은 아무런 형태도 갖추어져 있지 않거나,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공허하다"는 말 또한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란 의미는 이 세상이 아직 조화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고, 무질서하고 텅빈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또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말에서 "흑암"과 "깊음"이라는 단어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말입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본래 땅이 존재했다는 말은 편의상 땅이라는 용어를 썼을 뿐, 이 세상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상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이 세상은 무의 상태였습니다. 텅 비어 있고 공허한, 아무것도 아닌 상태였습니다. 그런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의 삼라만성을 만드셨습니다.
오늘날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 놓은 과학의 발달은 엄청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보아도 하나님의 창조는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양수에 감싸여 있는데, 이로인해 외부 충격으로부터 태아를 보호하고, 여러 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후 열 달이 되면 양수가 터져서 아이가 나와야 할 길을 깨끗하게 청소해 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배꼽을 통해서 먹고 배꼽을 통해서 배설하고 배꼽을 통해서 숨을 쉬던 태아가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순간에 입으로 먹고, 코로 숨쉬고, 밑으로 배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의문을 가지고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는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분이 대답하기를 "그러니까 제가 이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더랍니다.
구약에는 '창조하다',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바라' '아사' '야차르' 이렇게 세 가지로 나옵니다. '바라'(bara, creat)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순수한 의미의 창조를 가리킵니다. '아사'(asa, make)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욱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야차르'(yachar, form)는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사물을 새로 완벽히 조성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문도 각 단어의 뜻에 따라 정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인간을 주어로 해서 사용할 수 없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라'입니다. 이 단어의 주어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즉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 놀라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을 발견해 낸 것이거나, 이미 있는 것을 변경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는 모두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빛이 있으라"하시니까 빛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돈'이 없으면, '명예'가 없으면, '힘'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 곧 '나의 나됨'을 확인시켜 주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닙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는 말씀처럼,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를 유로 만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성전 건축에도 재정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무'에서부터 '유'를 창조하는 믿음입니다. 이번 성전건축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창조신앙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성전 건축도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모든 걸 맡기시길 바랍니다.
2. 창세 이전에 계신 하나님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2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혹은 "하나님의 바람"(the Wind of God)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바람"이라는 말보다는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분명한 표현입니다. 즉, 신약에서 말하는 "성령"(Holy Spirit)과의 연관성이 이미 창세기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신약 시대에야 비로소 활동하신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성경은 성령께서 이미 구약 시대부터 여러모로 활동하였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운행하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하프'인데 이 말의 원뜻은 "알을 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어미 새가 알을 소중히 감싸 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을 인간이 살아갈 장소를 조성하시기 위해 소중하게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닫기 이전부터 우리를 감싸안으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계십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루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귀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을 향하고 주만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주만 바라볼찌라').
사람들은 뭔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깊은 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찬송가 427장 3절은 이것을 경험한 이의 고백입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리빙스턴이 처음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배를 탈 때였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그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부두까지 나왔습니다. 몇 몇 친구들은 그가 여행하게 될 아프리카에서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상기시키며 조심하기를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리빙스턴에게 영국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진지하게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은 성경을 펼쳐서 큰 소리로 읽어 주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는 그 친구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이라네. 그러니 나와 주님을 보내주게나."
여러분이 가고 있는 그 길은 결코 여러분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본문 4절에 보면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4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좋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tob)인데, 창세기 1장에 7번이나 나오는 말로, 영어로는 'good'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위대한'(시 11:2), '놀라운'(욥 37:14), '완벽한'(신 32:4), '아름다운'(전 3:11)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출애굽기에서 요게벳이 모세의 '준수함'을 보았다고 했는데(출 2:2), 이때 '준수하다'는 단어도 '토브'입니다. 모세를 준수하다고 표현한 것은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평가하시기에 좋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평가 기준은 외모, 학력, 경제력, 권력 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평가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처럼(3절),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때,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은 보다 아름답고 조화로워 질 것입니다.
직장을 잃은 한 남자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지라드라고 하는 유명한 사업가를 찾아갔습니다. 일거리가 있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지라드씨는 하루치 일거리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문 밖에 쌓여 있는 벽돌을 저기 저 구석 나무 밑에 쌓아 놓으시오!"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친 남자는 보수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다시 지라드씨를 찾아가 일거리를 청하자 그는 어제와 비슷한 일을 맡겼습니다. "어제 나무 밑에다 옮겨 놓은 벽돌을 문 밖에 쌓아 놓으시오!" 이렇게 하기를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남자는 단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시키는대로만 일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지라드씨를 찾아갔을 때 그는 다른 일거리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수고했소. 오늘은 다른 일을 해야 할 것 같소. 여기 현금을 줄테니 재목상에 가서 건축 자재를 구입해 오시오." 그는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받아들고 재목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지라드씨가 부탁한대로 재목을 구입하였습니다. 한편 그곳 상인들은 낯선 사람이 많은 액수의 현금을 지불하고 건축 자재를 사가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어보았습니다. "실례하지만 어느 회사에서 오셨습니까? 처음 뵙는 분인데요." "예, 저는 지라드씨의 대리인입니다. 그가 시키는대로 일을 하는 중입니다." "지라드씨가 이렇게 큰 현금을 맡기다니, 대단한 신임을 받는 분이군요." 그가 지라드씨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찮은 일을 시킬 때 말없이 순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사느냐,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냄새든지 풍깁니다. 기독교 신자는 그 어디에 있어도 예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대기업 총수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어떤 분은 대기업 총수 냄새보다 예수 냄새가 납니다. 그 분의 화제는 회사의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재벌 회장 냄새나 실업가 냄새보다 예수 향기가 납니다.
그런가하면 이름만 말해도 다 아는 유명한 어떤 목사에게는 예수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냄새가 납니다. 또 기업가 냄새가 나는 이가 있고, 점쟁이 냄새가 나는 이가 있습니다. 또 예수 믿는 집사인데 회사 안에서 예수 믿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신자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얼마나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많은 식당에서 식기도하나 제대로 못하는 신자, 친구들이 많은 곳에 예수 믿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고 어쩔 수없이 음주와 흡연을 하면서 어울리는 신자 모두 예수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향기가 나타나야 합니다. 실상 냄새란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혼돈과 공허 속에 머물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우리의 삶을 위대한 삶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금년에는 예수 향기가 나는, 축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