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위스콘신 챔피언의 성모발현: 착한 도움의 성모님
[성모발현 당시의 전후관계]
1871년 10월 8일 북미의 역상서 최악으로 기록된 산불이 발생했음.
화염은 위스콘신 주 북부와 미시간 주 위쪽으로 번져
백만 에이커의 산림과 목초지를 불태우고 1,400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서쪽으로부터 한랭전선이 다가오면서 작은 산불을 부채질한 강풍을 몰고 왔으며,
산불은 점점 더 거대한 화염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페시티고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페시티고 화재'(Peshtigo fire)로 명명된 이 산불은
미국의 역사에서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위스콘신의 로빈슨빌 마을까지 화염이 근접하게 되자,
주민들은 10년 전에 신축된 성당,
그러니까 1861년 신축된 성당에 대피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벨기에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28세 처녀 에이델 브리스에게
1859년 10월 성모님께서 처음으로 발현했던 곳이다.
'착한 도움의 성모 성당(Chapel of Our Lady of Good Help)로 알려지게 된 그 성당은
화염이 휩쓸고 지나가는 바로 그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성당 안으로 모여들어 성모상이 있는 성소 주변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릅을 꿇고 성모님께서 화재를 방지해 줄 것을 밤새도록 기도했다.
그런 다음 기적이 일어났다. 폭우가 쏟아져 화염이 진화되었고
다음 날인 10월 9일 아침에는 성당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한
잿더미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에이델의 성모발현' 12주년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면을 역사적으로는
"재의 바다에 떠 있는 에메랄드빛 초록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염은 성당 주변의 그 어떤 것도 불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당의 담장 바깥은 까맣게 불타버렸지만 안쪽은 그대로였다.
성당과 부속학교는 목재건물이어서
당연히 불타버렸어야만 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에이델의 성모발현 이야기에 의구심을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게 되었다.
[성모발현]
성모발현을 최초로 목격한 에이델 요셉 브리스(Sister Adele Joseph Brise)는
1831년 1월30일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사고로 한쪽 준의 시력이 상실되어 고통을 받았다는 것과
빈약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에이델 수녀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어린이같은 믿음과 열정 및 겸손한 신앙생활로 잘 알려진 에이델은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최대한의 헌신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벨기에의 우르술린 수녀원(Ursuline Convent)에 입교하기를 원했던 에이델 수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와 부모님께 순종했으며 1855년 6월9일 가족을 따라
조국 벨기에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위스콘신의 그린베인 만에 정착했다.
한마디 불평 없이 에이델 수녀는 이스콘신의 황량한 북쪽 변경에서
개척적인 이민자로서의 힘든 생활을 했다.
240 에이커에 달하는 가족의 농장에서 파종하고 수확하는 일을 그들어야 했고
제분소에 곡물을 날라야 했고 어린 남매들을 돌보고 가르쳐야 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발현하실 때처럼
소박하고 겸손한 시골처녀인 에이델 수녀를 선택하여 발현하셨던 것이다.
[성모발현: 첫 번째]
에이델은 1859년 10월 초순 어느 날, 몇 가지 곡물자루를 머리에 이고
제분소로 가기 위해 나무 숲길을 걷고 있었다.
이 길은 현재 '착한 도움의 성모 성당'이 자리 잡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이어져 있었다.
집에서 1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에이델은 단풍나무와 미국솔송나무 사이로
하얀 옷을 입고 허리에 노란 띠를 두른 아름다운 부인을 보게 되었다.
그분은 머리에 별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있었고
금빛 웨이브의 긴 머리는 어깨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다.
에이델이 올려다보자 그 부인은 하얀 구름을 뒤로 하고 천천히 사라졌다.
제분소에서 돌아올 때에는 그 부인은 물론 어느 것도 볼 수 없었다.
에이델이 이러한 목격담을 부모님께 말했을 때,
그들은 그 부인이 기도를 필요로 하는 연옥에서 온 영혼일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성모발현 : 두 번째]
1959년 10월 9일 일요일,
여동생 이사벨 및 이웃에 사는 반더 니센 부인과 함께 셋이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성당으로 가는 길에
에이델은 똑같은 장소에서 그 부인을 다시 보았다.
너무나 놀란 에이델은 거의 나무라는 말투로
"아, 그 부인이 또 있네" 라고 말했다.
에이델은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었다.
이사벨과 반더 니센 부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에이델의 표정으로 볼 때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아마도 기도가 필요한 가련한 영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몇 분을 기다리자, 에이델은 그 분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첫 번째 발현 때처럼 그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사라졌으며
에이델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엷은 안개나 흰 구름 뿐이었다.
미사 후에 에이델은 흰 옷을 입은 한 부인의 모습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에 대해서 고해성사를 하게 되었고
고해를 들은 윌리엄 베회프 신부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고해소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베회프 신부는 천상의 메신저라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고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러한 발현을 다시 보게 되거든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구시며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라고 물어보라고 했다.
더 많은 용기를 갖게 된 에이델은 성당에 같이 갔던 다른 두 명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으며
성당구역을 청소하고 있던 성인 남자가 동반해주었다.
[성모발현: 세 번째]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이들 모두가 바로 그 '신성한 지점'에 가까워졌을 때,
에이델은 다시 한 번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다.
그 부인의 주변에 천상의 빛이 너무나 밝게 빛나고 있어서
에이델은 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천상의 빛과 그 아름다움 모습을 보고 에이델은 그 부인의 무릎아래 엎드렸다.
그리고는 성당의 신부님이 일러준 대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구시며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라고 물었다.
그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천국의 모후, 성모 마리아이며, 죄인들의 참회를 위해 기도한단다.
너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너는 오늘 아침 영성체를 모셨는데 참 잘한 일이다만 더 많이 해야만 한다.
보편적인 고해를 하거라.
그리고 죄인들의 참회를 위해 영성체를 하거라.
그들이 참회하지 않고 속죄하지 않는다면,
내 아들이 분명히 그들을 벌하게 될 것이다."
"에이델, 그게 누구니?" 라고 반더 니센 부인이 물었고,
여동생 이사벨은 울먹이면서
"왜 언니처럼 우리들도 그 부인을 볼 수 없어?" 라고 말했다.
에이델은 성모 마리아의 현존 앞에 함께 있었던 자신의 두 사람에게
"무릎을 꿇자" 고 말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들을 친절하게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축복받을 것이다.
너희들은 여기서 게으르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네 동료들은 내 아들의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지 않느냐?"
"존경하는 성모님, 제가 무엇을 더 할수 있을까요?" 라고 에이델이 여쭙자,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 황량한 나라에 있는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
그들이 구원을 위해 알아야만 하는 것을 가르쳐라."고 대답했다.
[성모님의 메시지]
에이델은 "그러나 너무나 아는 게 부족한 제가
어떻게 그들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에게 아동용 '교리문답서'를 가르쳐라.
손으로 성호를 어떻게 긋는지, 성찬례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등을 가르쳐라.
그것이 바로 내가 네가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가거라, 아무것도 두려워 말거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그런 다음 성모 마리아께서는 발아래에 있는 세 사람을 축복하기라도 하듯이
손을 들고 천천히 사라졌으며, 에이델은 놀라움에 전율하면서 땅에 엎드렸다.
[성모발현 이후 에이델의 삶]
에이델은 발현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50마일을 걸어 다니면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아동용 '교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을 허락받는 대가로
그것을 허락해준 이웃들의 집안일을 해주었다.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서를 가르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하는 방법,
성호를 긋는 방법, 사랑과 감사와 주님을 찬미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마침내 에이델은 가톨릭계 학교를 세웠으며 아이들 또한 에이델에게 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에이델이 어떻게 학교를 세울 정도로
많은 자금을 모금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 했으며 그럴 때마다
에이델은 자신이 성모 마리아께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셨다고 말했다.
몇몇 다른 여성들이 에이델의 직무수행에 합류하긴 했지만
그들은 그 어떤 공적 직함을 갖지 않았다.
전통적인 신앙에 심취해 있던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독자성을 계속 유지했고 그 어떤 서약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이델 수녀는
'여성재속프란치스코회'(Third Order Franciscan Women)을 전개함으로써,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더 많이 실천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에이델 수녀의 아버지 램버트 브리스는 성모발현 장소에 작은 경당을 지었으며,
그후 1880년에 벽돌로 된 경당이 다시 지어졌다.
이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장소에 있던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경당의 제대를 앉혔다.
에이델 수녀는 조롱과 의심에 직면하게 되었고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어떤 때는 '맥주노점판매사들'이 성모상 가까이 다가와
성당과 에이델에게 침침한 불빛을 비추기도 했다.
마침내 당시의 주교는 성당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고
모든 열쇠꾸러미를 자신이 보관했다.
그리고 에이델 수녀에게는 성모발현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주교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에이델 수녀는 성당의 모든 열쇠꾸러미를 주교에게 건네주면서
교육의 결여로 인해 상실될 수도 있는 영혼들을 주교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에이델의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은 주교는
모든 열쇠꾸러미를 되돌려주면서 훌륭한 일을 계속하라고 격려했다.
말년에 수많은 시련을 겪은 후에 에이델 요셉 브리스 수녀는
66세의 나이로 1896년 7월5일 세상을 떠나 경당 부근의 작은 교회묘지에 안장됐다.
착한 도움의 어머니(Our Lady of Good Help)성지
Our Lady of Good Help Apparition receives formal approval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형제 님 덕분에 부자입니다~🙏🏻
고운 밤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겨울이 다가온 듯 건강관리 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