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적 대의명분에 따른 친일파 처벌은 당시 국민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실무를 알건모르건 - 오늘날의 대학교
졸업에 해당하는 -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2만 5천여 명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는 것을 지켜본 이승만은 여수·순천 반란으로 인해 신생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국가 안보의 가치를 중시하여 친일파 처벌을 막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다른 이유로 친일파에 대해 유화적이었는데, 예를 들어 초대
미국대사 무초는 정부의 구성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파 처벌법에 우려를
나타냈다. 초대 국무총리로 청산리 대첩의 영웅인 이범석은 항일 투쟁 경력을 가진 자신과
이승만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친일파를 용서할 자격이 있다면서 친일파들에게 반공과 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논리로 이범석은 1949년 1월에 발족한
반민족특별위원회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정치학자 서희경은 이승만이 국가 정통성보다는 국가안전의 문제에 더 중점을 두고
위기의 리더십을 발휘하였지만, 한편으로 설득과 타협의 정치적 자질이 부족하여 대결의
리더십에 치중하였고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의 활동을 거치면서 자신에 대한 지지를 소진하기
시작하였다고 지적한다. 이와 유사한 의견은 당시에도 있었다. 제헌 국회의 조현영 의원은
정부의 반민특위 탄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현 정부는 민족반역자에게 정부를 갖게 하고 친일 반역자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산당의
앞잡이, 민족 분열을 일으키는 악질 도배로 몰아감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은 결국 반민특위를 해체했다. 비판자들은 그 이유로 친일파야말로 그의 눈에 가장
확실한 반공 세력으로 비쳤고 그들이 그의 집권과 정권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4.19 혁명 당시 학생 운동의 지도자였던 이기택은 이승만이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건국 초기에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일제 부역자를 등용한 것은 그의 가장 큰 죄과 중 하나라고 말하였다.
또 사회학자 김동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반민특위 해체로 인해 시대적 과제였던 식민 잔재
청산이 좌절되었다고 지적한다. 형식적으로는 일제 부역 세력이 친미 정권의 주역으로 옷을
갈아입었으며, 내용적으로는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의 법적, 도덕적 초석이 될 수 있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원칙,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본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공산 세력이 이로 말미암은 민족주의적 분노를 반란의 주된 명분으로
삼게 되고, 또 좌익 사상을 추종하지 않는 많은 양민들조차 좌익의 반란에 동조하거나 이를
방조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간도특설대 출신의
김백일이나 부일 경찰로 악명이 높은 김종원 등을 기용해 사건의 수습을 맡기는 실책을
저질렀다. 즉 이들이 행사한 폭력이 다시 원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은 가뜩이나
물적, 경제적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나마 국가 건설에 동원할 수 있었던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마저 손상되는 악순환을 겪었던 것이다.
- 이택선 저, ‘우남 이승만 평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