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열린 곳으로 분다고 합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엔 길도 열려 있게 마련입니다. 인천시민을 사랑하는 인터넷신문 ‘i-view’가 새로운 기획 ‘바람결 따라 골목길 걸어’를 연재합니다. ‘바람결 따라 골목길 걸어’는 이 시대 인구 300만의 인천이란 도시의 속살을 만나는 특별기획입니다. ‘i-view’는 인천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 동네’를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 삶의 이야기와 자연을 만나고, 문화유산, 집, 전통시장 같은 공간과의 대화도 시도할 것입니다. 인천의 하늘 아래 우리 인천시민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땅과 마을의 참모습을 그려보겠습니다. <편집자> |
시곗바늘은 벌써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7시에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영아는 2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철민이 자신을 찾는 전화가 왔는지 다방주인에게 여러 차례 물어보았지만 주인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2시간 내내, 철민은 출입문과 전화가 놓인 카운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담배만 뻑뻑 빨아댔다. 밤 10시부터 야근이 잡혀 있었으므로 철민은 곧 공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탁자 앞 청자 담배를 집어든 철민이 곽을 구겨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렸다.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켠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순간.
“따르르릉, 따르르릉!” 카운터 전화벨이 울렸다. 철민의 시선이 전화 쪽으로 쏠렸다. “강 사장님 계시나요? 강철민 사장니~임~” 철민이 카운터로 달려가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영아였다. “철민씨, 미안해요. 오늘 갑자기 야근을 하게 됐는데 도저히 전화 걸 시간이 없었어요. 이제야 쉬는 시간이라 연락드려요. 전 가신 줄 알고 혹시나 해서 전화했는데 계셨네요….” 철민은 허탈하면서도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내일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잡은 뒤 철민이 다방 문을 나섰다. 등 뒤로 박카라의 ‘예설 아이 캔 부기’(Yes sir I can boogie)가 흘러나왔다.
▲세월천사거리는 ‘영아다방사거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영아다방은 부평공단 노동자들의 애환을 달래주며 50여 년 간 자리를 지켰으나,
7~8차례 주인이 바뀌다 지금은 헤어컷 전문점이 들어섰다.
다방이름 거리에 붙인 ‘영아다방 사거리’ 지금도 회자
지금은 미용실로 바뀐 청천동 179번지 ‘영아다방’은 청천동의 랜드마크로 50여 년을 흘러왔다. ‘동양장사거리’처럼 ‘영아다방사거리’(세월천사거리)라는 고유명사가 생겨났을 정도다. 개인이 운영하는 업소명칭이 거리이름으로 만들어진 사례다.
영아다방을 애용했던 사람들은 부평4공단과 인근 노동자들이다. 온통 논밭이던 땅에 하나 둘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다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다방 인근 동양철강, 은반지공장 등은 보통 3교대 근무를 했는데 새벽에 교대하는 사람들이 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다방 앞에 줄을 서기 일쑤였다.
가수 이선희가 라이브공연을 했다는 얘기도 있고 보면 영아다방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곳 주인은 8번 정도 바뀌었으며 지금은 헤어컷 전문점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아다방 4거리는 여전히 청천동의 지명으로 사용되는 중이다.
▲영아다방의 옛 모습(부평구청 제공)
▲영아다방의 현재 모습
청천동은 아니지만 영아다방 건너편 산곡동 백마장엔 ‘봉다방’이 있다. 원적로 315번길 30번지에 자리한 봉다방은 1974년 문을 열었는데, 당시 주인 최정숙(84)씨가 여전히 쌍화차와 커피를 팔고 있다. 최 대표는 “2층이 살림집이라 건강관리를 위해 오전 10시쯤 문 열고 오후 6,7시에 문을 닫는다”며 “손님들은 거의 오지 않으며 사람 사는 얘기하러 오는 또래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영아다방, 봉다방을 비롯해 1980년대 다방은 온갖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플랫폼이었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다방은 중요한 만남과 소통의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청춘남녀가 맞선을 보고, 금전문제로 다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업 얘기가 오가는 곳이 그 시절 다방의 풍속화다. 남자손님들은 다 ‘아무개 사장님’으로 통했다. 다방의 대표메뉴인 계란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를 마시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산업화 이끈 동서식품, 아남전자 등 쟁쟁한 기업 한 때 즐비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인 부평공업단지(한국수출4단지)는 1965년 6월16일 지정돼 올해로써 54주년을 맞았다. 도시 외곽 농지에 들어선 부평산단은 70~80년대 수출산업 전진기지로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평공단은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로 조성돼 산업화를 이끌었다.
한독, 삼익악기, 동서식품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들이 다수 입주했으며
현재는 IT산업 중심의 아파트형공장지대로 변신 중이다.
부평산단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컬러TV를 생산한 아남산업, 가발과 시계를 생산한 한독, 기타와 피아노로 유명한 삼익악기, 카세트 생산업체인 한국생사, 최대 의류업체였던 진영산업 등이 포진했었다. 맥심커피를 생산하는 ‘동서식품’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평공단이 IT산업단지로 변화를 시도한 시기는 2000년대다. 이후 2014년까지 첨단산업(61.6%), IT업종(39%), 기업연구소 144개사가 입주했다. 도심형 첨단산업단지로의 변신이었다. 이를 포함해 부평공단엔 현재 기계, 전기전자, 석유화학 업체 953개가 생산 활동을 하고 있다. 대일소재(주), ㈜제이맨, 한국산업단지공단 부평사무소 자리인 부평테크시티 등을 중심으로 아파트형공장들도 하나 둘 들어서는 중이다.
부평공단은 처음 조성하자마자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준다. 1968년 7월부터 공장을 가동한 코리아크리스탈공업사를 비롯한 3개 업체는 5개월 만에 79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한다. 이듬해엔 14개 업체가 수출목표 500만 달러의 40%를 초과한 703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으며 1970년엔 50개 업체가 2,317만 달러의 수출을 달성한다.
▲초창기 경인고속도로 전경. 사진 왼쪽이 부평공단 부지이다. (부평구청 제공)
▲부평공단이 들어서기 전 누군가가 그린 부평공업단지 예정 위치도(부평구청 제공)
이 같은 성과는 그러나 부평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부평지구가 공단조성지로 확정된 뒤 인천수출산업공단은 부평지구 국유지 1만5000여 평을 평당 670원에 매입했다. 그러나 사유지 16만4,000평은 절반 가격인 평당 325원에 사들인 정부는 국익과 공익이란 미명 아래 농사밖에 모르던 부평사람들에게 아픔을 안겨주었다. 조성공사 과정에서도 부당노동행위가 발생한다.
부평공단 조성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8만5,000여명이었는데 1966년에 반영해야 할 정부보조금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임금을 구호양곡으로 대신 지급하기로 했으나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200t의 구호양곡 배정을 약속했으나 실제 배정한 양은 72t에 불과했다.
공단 밖 소규모 공장 ‘마찌꼬바’, 양계 키우던 '청천농장'
부평공단이 건설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평공단 노동자들의 근무여건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열악했다. 1980년대 부평공단의 임금은 최저생계비의 50%에도 못 미친 반면, 노동시간은 전국 평균치보다 주 당 2~4시간이나 많았다. 한국노동자들은 당시 주 55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은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온다.
▲수백 개의 중소업체들이 제품을 생산하는 청천공단은 과거 음성나환자들이 닭과 돼지를 키우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곳이다.
1970년대 경공업의 여성노동자들로 시작된 노동운동은 1980년대 들어 중공업, 대공장의 남성노동자들의 운동으로 확산된다. 이들은 임금인상과 민주적 노동환경의 조성, 노동자인권선언에서부터 근로기준법 준수, 두발자유화, 생산직과 사무직 간 작업복과 명찰 차별철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선방안을 요구했다.
한 때 공장 노동자들을 가리켜 ‘공돌이’ ‘공순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노동자들의 삶은 힘겹고 고단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야학에서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했다. 야학은 교회나 성당 같은 종교시설이 운영했는데 부평4동성당의 ‘성심야학’과 백마교회의 ‘백마야학’이 유명했다.
공단 밖엔 ‘마찌꼬바’란 작은 공장들이 있었다. 길거리(まち)와 공장(こうば)을 합친 일본어로 상가 지하나 윗층,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작은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큰 공장들의 하청을 받기 위해 공장 배후 골목엔 기계, 봉제, 요꼬(섬유계통으로 스웨터나 모자를 짜는 업종) 공장들이 어지럽게 들어섰다. 적게는 4~5명에서 많게는 20여명의 종업원을 두고 기계를 돌렸다.
▲청천동은 현재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된 상태로 사람이 사는 집과 빈 집들이 공존하고 있다. 철문 틈 사이로 수돗가에 놓인 함지박과 절구가 눈에 들어온다.
청천농장이라 불리던 곳이 있었다. 현재 인천나비공원 뒤쪽의 중소기업 밀집지역이다. 원적산 중턱 넓은 산골마을이던 이곳엔 양계마을, 청천농장이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1950년대부터다. 1961년 12월, 정부는 이곳에 음성나환자촌을 조성해 그들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했다. 동아일보 1976년 2월 11일자 신문엔 ‘’천형‘ 딛고 선 청천농장’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음성나환자들이 황무지를 개간해 닭 15만 마리와 돼지 1000여 마리를 키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때 음성나환자들이 가축을 키우던 청천농장엔 중소기업체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해 지금의 청천공단이 되었다.
박영근 ‘솔아…’, 김민기 ‘상록수’, 영화 ‘파업전야’ 등 노동예술 꽃피워
부평공단이 있다 보니 70~80년대 부평엔 노동운동을 위해 찾아온 위장취업자, 공활(공장활동) 세대,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결집해 있었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대의 아픔을 시로 달래준 박영근 시인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나비공원
부평 신트리공원에 있는 시비에 새겨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그의 작품이다. '아침 이슬', '늙은 군인의 노래'로 유명한 김민기가 1977년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일할 때 동료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작곡한 곳도 부평이다.
갈산동 소재 한국금속에서 촬영해 1990년 개봉한 영화 파업전야는 당시 노동문제를 묘사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88년 2월이 시대적 배경인 이 영화는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개봉 직후 제작자가 구속되고 상영금지처분이란 탄압이 이뤄졌으나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원적산과 마제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이름 붙여진 청천(淸川)동. 사람들이 마시고 목욕하고 물고기를 잡던 하천은 복개됐고, 공업용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더 이상 맑은 물은 볼 수 없지만, 이 동네엔 여전히 맑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글· 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