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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21편 1절-4절: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1절-2절: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은 입으로 말하기 마련이다.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라고 했는데 왕의 소원이 무엇이겠느냐?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소원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소원은 무엇일까? 구약시대의 다윗은 왕이다. 그는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는데,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구한다면 무엇을 구하겠느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뭘 구해야 하겠느냐?
대한민국 백성들이 지금 뭘 구하느냐? 안 믿는 사람들은 지금 뭘 구하느냐? 뭘 구하면서 사느냐?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부자로 살 수 있는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교인들은 무엇을 구하느냐? 안 믿는 사람들과 달라야 하는 거냐, 같아야 하는 거냐? 달라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돈 많이 달라. 부자 되게 해 달라. 장사를 해도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 회사를 해도 돈 많이 벌게 해 달라’ 이런 걸 구하는 사람이 많다. 이건 이름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그 속 중심은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거다.
일반사람들도 생각이 있는 사람은 인간 대 인간을 볼 때 사람의 껍데기 위주로 보느냐, 마음을 보고 ‘사람이 좋다. 나쁘다’ 하느냐? 마음을 본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 주님도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한다면 이건 하나님의 사랑 밖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다.
구약시대로 올라가서 다윗은 백성을 가르치는 왕인데, 이 왕이 하나님께 구한다면 뭘 구하겠느냐? 그리고 지금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 등이 자기 나라 백성들을 어떻게 해 줄 마음으로 뭘 구하느냐? 자기 나라가 못 사는 걸 구하겠느냐, 잘 사는 걸 구하겠느냐? 잘 사는 거다. 그래서 선거 때가 되면 ‘날 밀어주십시오. 그러면 잘 살게 해 주겠습니다’ 하며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런데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거냐?
그러면 지금 여기 섰는 목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 같으냐? 1. 예수 믿는 우리 교인들이 세상에서 부자 되기를 바란다? 2.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자녀이니 생각하고 마음을 품고 소원 목적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똑같은 정신과 마음을 품기를 원한다? 이 목사가 어느 것을 구하겠느냐? 만일 첫째 것을 구한다면 쫓아내야 한다. 이건 목사가 아니다. 교회의 목사가 첫째의 마음을 가지고 교인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면 그 교인들의 신앙 믿음은 다 죽어버린다.
사람은 하나님을 배워야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거다. 성경은 하나님 당신을 닮으라고 기록을 한 거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로 배워야 하나님을 닮는 거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 싶으냐? 그렇다면 시장의 장사꾼에게로 가거라. 돈 버는 방법을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배워라. 이치를 말하는 거다.
구약시대의 다윗 왕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을까? 솔로몬 왕은 무엇을 구했느냐? 다윗 왕은 누구를 사랑했느냐? 하나님을 사랑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분의 말씀을 받는 거다. 성경에 보면 다윗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꿀처럼 여겼다. 그래서 이 말씀을 먹고 백성들에게 말씀통치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이 말씀의 통치를 받으니 수준이 높아지는 거다.
이 세상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고 하는데 누구 마음대로? 네가 하나님이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걸 보시고 ‘너 건방지구나’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난 안 아프다. 난 건강하다’ 절대로 이런 소리 하지 말아라. 이런 소리 하자마자 하나님이 치실 거다. 왜냐? 네가 건강한 게 누구의 덕인 줄 아느냐? 누구의 은혜로 사는 줄 아느냐 그 말이다. 자기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치고 하나님 앞에 안 얻어맞는 사람이 없다.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에 보면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무엇이 되기에 애를 써야 하겠느냐? 가난하게 되기를 애를 써야 되느냐? 예수님처럼 닮는 면으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도덕성을 닮는 면으로 나가면 모든 상황 사건을 잘 다스려 나가게 된다. 이게 예수 믿는 원리다.
그런데 목사님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굉장히 높이 본다. 목사라고 하면 공부를 많이 해서 머릿속에 든 것이 많을 것이고, 많은 사람을 만나니 사람의 마음을 잘 알 것 같은데 목사의 생각과 마음이 높지를 못해서 교인들을 잡고 싸우는 목사가 많다. 그러면 이 마음이 누굴 닮은 거냐?
하나님을 닮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갈수록 차츰차츰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지식을 닮아가고, 지혜를 닮아가고, 그리고 자기 몸 안의 못된 마음을 잘 다스리고, 그 다음에 자기 몸 밖의 모든 것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나가는 거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그런데 교회마당은 번질나게 밟으면서 자기 마음 하나 못 고쳐서, 자기 성질 성격 하나 못 고쳐서 마귀의 시험에 빠지고, 부부끼리 싸우고, 교인들끼리 싸우고.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왕은 왕으로서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왕에게는 지식이 필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백성을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백성들이 임시적인 것을 받고 임시성적인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영원한 것, 썩지 않을 것을 받아서 썩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살게 하는 거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진리지식의 말씀에서 나오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이 백성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백성이 되도록 다스릴 수 있다. 그래야 백성들도 왕의 지혜를 배우고 지혜로운 백성이 되는 거다. 지혜로운 인도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혜롭게 만들더라.
솔로몬 왕은 지혜의 왕이었다. 솔로몬 왕의 이 지혜를 들으려고 에디오피아의 여왕이 보물을 배에 가득 싣고 솔로몬을 찾아왔다. 솔로몬에게 와서 왕궁의 계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계단이 얼마나 높은지? 그 계단을 보고 ‘아, 당신의 백성들이 복되도다’ 라고 했다. 이건 뭘 말하는 거냐? 백성들이 지혜의 왕 밑에서 지혜를 배우니 나라에 도둑놈이 없어지고, 부지런하고, 지혜롭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고, 절제하고. 이웃 왕이 와서 이런 걸 보고 부러워한다.
그러니까 층계가 높다고 하는 것은 그 도덕성의 인격의 위치가, 신분이 굉장히 높다는 의미로서의 얘기다. 그래서 복되다고 하는 거다. ‘돈이 많아서 복되다. 인물이 잘나서 복되다’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의 인품, 지혜지식, 그 인격성을 보고 복되다고 하는 거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로구나’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보면 악한 왕들이 많은데, 예를 들면 애굽의 바로 왕이 왜 악한 거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붙잡아 놓고 일을 죽도록 시켜서 애굽을 건설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일에 종을 삼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어디로 끄집어내는 거냐? 좀 고생스럽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가도록 이끌어 낸다.
바로 왕이 다스리는 애굽의 도시가 좋으냐,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가 좋으냐? 그런데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애굽의 정신이 많이 들어있는 자들은 광야로 나와서도 자꾸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부뚜막에서 고추장 넣고 부추 넣고 참기름 넣어서 비빔밥 해먹던 생각이 자꾸 나서 도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역을 일으키다가 저주를 받아 죽었다.
하나님의 종은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지 말라고 하고, 거짓 종은 세상에서 복을 많이 받아서 잘 살라고 한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서 세상에서 잘 살려면 일을 죽도록 해야 한다. 이치가 그렇다. 잘 사는 게 나쁜 거냐? 그런데 잘 사는 목적으로 들어가 있으면 예수 믿는 일을 못한다.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못 갈아 넣는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를 못한다. 예수를 믿어도 부자 되기에 애를 쓰는 사람은 굉장히 인색하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릴 줄도 모르고, 그 다음에 성도를 위해서 돈을 쓸 줄을 모른다.
‘돈 돈’ 하는 사람은 돈에 인색하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을 위해서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일을 위해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장사꾼이 물건을 파는 족족 번 돈을 다 은행에 넣는다면 그 가게는 점점 팔 물건이 없게 된다. 그러면 결국 그 가게는 망하는 거다. 이건 돈만을 위해서 장사는 하는 거다.
장사가 잘 안 되는 가게는 팔고 있는 푸성귀가 말라 들어가면 다른 물건을 사가는 사람에게 가져다가 먹으라고 하면서 공짜로 주는 맛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아깝다고 그냥 놔두면 시들어진 그걸 누가 사가느냐? 안 팔리면 어차피 버릴 것인데도 버릴지언정 남에게 그냥 주지 못하는 가게에는 손님이 안 간다. 이런 사람은 본전을 생각을 해서 다른 물건을 팔 때도 일절 안 깎아준다. 그러나 장사가 잘되는 집은 그 가게주인이 사람을 위하는 쪽으로 많이 들어가 있다.
악한 왕은, 거짓 종들은 일을 죽도록 시킨다. 하나님의 옳은 지도자는 교인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넣고 하나님의 정신을 넣는 훈련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왔으니 집이 있느냐? 농사를 지을 수 있느냐?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살기가 막막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40년 동안 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신발이 닳았다고 했느냐, 안 닳았다고 했느냐? 안 닳았다고 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신발이냐? 세상 인간의 말로는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왜냐? 성경은 계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신발을 신으면 이건 안 닳고 안 떨어지는 거다. 이 신발을 신고 아무리 광야 길로 여행을 해도 안 떨어진다. 말씀을 먹고 말씀으로 무장이 된 이것은 만능의 능력이라.
만능의 능력이 뭔지 아느냐? 말씀의 능력이다. 진리의 말씀은 칼도 되고, 방패도 되고 안 되는 게 없다. 이게 만능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다. 하나님은 방패도 되시고, 보호자도 되시고, 이스라엘이 싸움을 하면 먼저 튀어나가서 싸우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인들을 보고 ‘너희들은 순종만 하라’고 하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군과 싸울 때 항아리에 횃불을 집어넣고 떠들기만 하고 항아리를 부수기만 하라고 하는 말씀에 순종을 하니까 적군들이 잠을 자다가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고, 벼락 치는 소리가 나고, 사방은 불이 난 것처럼 훤하니 앞에 있는 사람조차 정확히 보이지를 않으니까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어서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 장면이 나왔다.
성경을 보면 전쟁을 하는 방법도 있다. 영적인 전쟁도 들어있지만 육적인 전쟁에서 머리 쓰는 것도 들어있다. 그래서 내 욕심 같아서는 한국백성들이 이 진리로 예수를 믿으면 정말 복된 백성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어찌하든 거짓말로 속여먹고, 군대에 안 가려고 하고, 안 보내려고 하니 이거 틀렸다.
악한 지도자는, 악한 인도자는, 악한 목사는 백성들에게, 교인들에게 일만 시키니 그 백성이, 그 교인이 영리하고 똑똑해지겠느냐, 미련해지겠느냐? 미련해진다. 세상에서 이런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는 무엇을 구해야 되겠느냐? 잠:에도 많이 있다. 금은보다 지혜를 구하라. 지혜자가 되라. 지혜자가 되면 지혜 속에는 일도 있고 돈도 있고 다 있다.
사람 사는 곳이면 전부가 일할 곳이다. 그리고 일이 있는 곳은 다 돈이 있는 거다. 그런데 자기가 지식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서도 힘 안 들이고 편하게 돈 많이 버는 것만 찾고 있으니 그러는 자기보다 날고뛰는 사람이 먼저 그런 곳을 차지하는 거다.
요즘 ic침 하나에 신문의 내용을 엄청나게 저장할 수 있는 걸 삼성에서 개발했다고 하는데, 이걸 개발한 사람이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그걸 연구하면서 ‘이걸 개발하면 돈을 엄청나게 버는데’ 하는 걸 먼저 생각하면서 연구를 했겠느냐? 돈을 먼저 생각하면 일을 못한다. 돈을 생각하면 부자로 못 산다. 돈을 먼저 생각을 하면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부자가 되는 거냐? 왜 그렇게 어리석으냐?
우리교회 교인들은 뭘 구할까? 지혜? 돈? 쌀? 차? 나는 가난해서 아파트라고 하지만 다 낡고 좁은 곳에서 사는데, 서너 명만 집안에 들어가면 서로 부딪힌다. 그래서 ‘복 복’ 하는 분들은 나처럼 가난한 목사를 좋아할 리가 없을 거다. 어느 교회인지는 모르지만 그 교회 목사님이 어떻게 사는지 사는 집을 본 교인도 한 명도 없는 모양이다. 이건 이북보다 더한 거다. 우리 집은 교인들이 마음대로 올 수 있다. 그 대신 와서 보고 가난하게 산다고 흉은 보지 말아라.
다른 분들은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할 런지 모르겠지만 여기 섰는 나는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의 성품을 구하고, 우리교인들도 그러기를 바라고, 그것을 주고 싶다. 세상이라는 세상은 나그네 세상이기 때문에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는데 이게 죽을 때까지 연속이다. 그럴 때마다 피해를 보지 않고 넉넉히 이기고 나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정말 옳은 성도다. 이게 참 예수 믿는 사람이다.
현재 자기에게 가난이 허락이 되어있고 어려운 사건 환경이 허락이 되어있는데 이걸 왜 줬는지 깨달으려고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한 채 그 어려운 사건을 거둬가 달라고만 한다면 거둬가고 안 거둬가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얼마나 신경이 쓰일까? 예를 들면 자식이 공부를 안 해서 아버지가 문을 잠가놓고 두들겨 패기 시작할 때 우리교인들 같으면 무릎을 꿇고 ‘아버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 게요’ 한다면 아버지 마음이 눈 녹듯이 스르르 풀리겠는데 이 아들이 이리로 피하고 저리고 피하고 하면 매를 때리는 아버지가 괘씸해서 괘씸죄까지 더해서 닥치는 대로 때리는 거다. 이러면 어떻게 되겠느냐? 맞는 자기만 더 아픈 거다.
주위의 환경 때문에 마음에 고통이 오거들랑 먼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잘못됐는지 그걸 잘 심사를 하라. 모르면 지혜를 달라고 하고. 안 그러면 시험에 든다. 시험도 이중 삼중으로 들어가게 되면 참으로 고통스럽다. 시험 얘기가 나왔으니까, 아무리 늦어도 예배시작 전 5분 전에 와라. 늦으면 시험에 걸린다.
내가 청년 때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그 새까만 눈동자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성경을 가르치느라고 내 돈 들여서 뻥튀기도 사서 주고 과자도 사서 주고 했다. 그런데 다른 교사들은 ‘바쁘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며 늘 늦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맞으면 나오고, 안 맞으면 안 나오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 남아돌아가는 찌꺼기를 가지고 예수를 믿는 거다. 남아돌아가는 찌꺼기를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도 너를 찌꺼기 대우를 해주실 거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섬기되 네 몸과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서 섬기라고 했다. 정성을 다해서 섬기라고 했다. 그러니까 전 인격을 다해서 섬기라는 거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냐? 그런 자에게 하나님 당신 자신을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다. 이러면 그 성도는 어떻게 되는 거냐? 신처럼 된다.
자기가 진리의 말씀을 잘 받아서 말씀의 사람으로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하면 하나님도 나를 높이신다. ‘어떻게 하면 최고로 높여줄까?’ 하고 안달을 하신다. 이런 성도를 올려주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이 났는지 성경에 보면 욥을 높여주고 싶으셔서 아무나 견디지 못할 큰 사건을 주셨다. 높여주려면 구름에 태우면 높아질 텐데 왜 사단을 동원해서 고통을 주었을까? 욥이 아니면 그만한 고통을 견딜 자가 없다. 이겨낼 사람이 없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이 올려주시려고 하실 때 아무나에게 시험을 하는 게 아니다.
3절: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주의 아름다운 복은 썩어지고 불타질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신령천국의 영광스러운 존영성을 입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처럼 높이 높이 영광스러운 것을 말한다. 성경에 보니 이 복을 아는 자를 물리쳤다고 했느냐, 영접했다고 했느냐? 영접했다.
저를 영접하시고, 그 다음에 뭘 씌워? 개털 모자를 씌운 게 아니라 정금 면류관을 씌웠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하나님의 신령한 복,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 하나님의 정신을 가지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이것을 복으로 아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신다는 거다.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운다고 했는데 면류관은 누가 쓰는 거냐? 미련한 사람이 쓰는 거냐,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 쓰는 거냐? 영리한 사람이다. 그리고 왕이 면류관을 쓰고, 경기에서 일등을 하면 면류관을 씌워주고, 남보다 일등이면 면류관을 씌워준다. 이 세상에 면류관의 종류가 많다.
정금 면류관을 씌워준다는 것은 최고의 존영자로 대우해준다는 말이다. 높여준다는 말이다. 왜냐? 미워서? 사랑스러워서? 사랑스러워서다. 우리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기차간이나 길에서 학생들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걸 볼 때 그게 사랑스러우냐? 그걸 누구에게 배운 거냐? 어른들에게서 배웠고, 자기 아버지로부터 배운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면, 어떻게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 앞에 사랑스럽게 보여지겠느냐?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주님의 것을 자기 복으로 여기는 자는 주님이 그를 영접해 주고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준다. 구약에 보면 다윗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4절: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생명을 구했다고 했는데 무슨 생명을 구했을까? 어디까지 가는 생명을 구했을까? 영원한 생명을 구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대우를 받으면 안 죽고 오래 오래 영원히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다윗도 밥 먹고 숨 쉬는 자연생명을 연장해달라고 구한 것일까? 영원한 장수를 구했다. 그러면 이게 뭐냐? 영생을 구한 것이다. 영생이 되는 생명을 구했다.
그런데 우리가 ‘영생’이라고 할 때 그냥 영생으로 알고 있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옥에 있어도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이니 이것도 영생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행복과 기쁨의 극치로 영원히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다윗 왕이 생명을 구한 것은 단순히 영생이 아니라 영적 영인의 실력 면이 들어있는 존영과 영광중에 영원히 기쁨과 쾌락의 극치의 행복의 누림의 영생이다.
우리가 무슨 생명을 구하느냐? 벽에 똥칠을 하도록 오래 오래 사는 걸 구하느냐? 이렇게 사는 건 정말 무서운 거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자기가 어떻게 죽을 런지도 모른 채 세상걱정 근심을 앉고 있으면 치매에 걸리기 딱 알맞다. 자기 머릿속에, 자녀들 머릿속에, 그리고 이웃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생각을 넣어줘라.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배울수록 그만큼 하나님을 닮는 거다.
하나님의 머리가 치매에 걸리겠느냐? 아니다. 물론 우리가 죽을 때 어떻게 죽을 런지 모르는 거지만 그러나 평소에 머리를 더럽히면 안 된다. 그러니까 미리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자기 머릿속에 세상이 가득 들어있도록 하면 너는 틀림없이 고생을 하게 된다. 사람이 만들어지기를 네 스스로가 너를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거다. 네가 그렇게 하는 거다.
성경에 보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가르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른도 그래야 한다. 집에서 테레비만 계속 보고 있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성경을 많이 봐라. 아버지가 나서서 ‘우리 성경을 봅시다’ 하고 가족이 둘러앉아서 한 장씩 돌려가며 읽어나가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보기 좋겠느냐?
사람은 깨달아야 한다. 못 깨닫는 사람은 세상 사는 맛이 안 난다. 사람을 보고 깨닫고, 가난 속에서 깨닫고, 일을 보고 깨닫고,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보고 깨닫고, 보기 싫은 사람을 보고 깨닫고. 깨달음의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다. 못 깨닫는 사람은 길 가는 강아지를 잡고도 싸우는 사람이 돼버린다. 사람이 못 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