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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22, 주학교회
다시 주학교회의 이야기로 돌아와, 주학(周鶴)교회는 부산, 경남지방의 다른 지교회들처럼 교회앞에 숫자가 붙지 않는다. '초량12교회'에서 학생들이 많이 전도되어 학생신자가 점점 증가하는 바람에 차츰 불어나는 학생들을 더 수용할 수가 없어 학생들만을 위하여 별도로 설립한 교회가 주학교회다.
원래 '초량12교회'는 장년층의 신도들외에 학생회가 별도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학생들 숫자가 2-30명은 족히 되었다. 교주 노광공이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한 후 그의 둘째아들인 노영구가 2대교주의 자리에 앉은 이후 대내외적으로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이래 조부님 (노광공)이 다시 부활해서 살아 돌아 올것만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참으로 치료 불가능의 마약 증세요, 아편 중독이었다. 이래 할아버지(노광공)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손자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인 할아버지의 칭찬을 들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혼란스럽고 처처에 전쟁의 소식이요 기근과 지진이 전파를 타고 퍼져 나간다. 당시의 돌아가는 세상도 역시나 어수선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1968년 체코에 쏘련군 개입, 1969년의 아폴로 11호 달착륙, 계속되는 월남전의 비보, 1973년 제4차 중동전쟁등 지구 저쪽의 소식도 잠간이면 메스콤을 타고 우리 귀에 생생하게 전해지는 세상이었다.
특히 1969년, 미국에서 아폴로 11호를 쏘아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다는 뉴스가 온 메스콤을 통하여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을 즈음,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교주 노광공이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1967년)하고 2년여를 경과한 시점, 정말 3년안에 세상의 종말이 오려는지, 혹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할아버지께서 다시 부활하여 재림해 오시려는지...
극도의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던 시기인데 경화록에 의하면 인간이 만일 달에 발을 디디게 된다면 ‘하늘의 여호와께서도 합당히 여기지 않으시고 가만두지 않으시겠지만 내(노광공)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신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화록에 1970년 이후에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말세의 끝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동방교내에서는 인간의 달 착륙은 실패하리라는 것이 대개의 전망이었고 만약 인간이 달에 도착한다면 바벨탑을 쌓았던 인간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고 떠들고 있었는데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아폴로 11호가 지구로 안전하게 귀환했던 날, 나는 또 한번의 심한 자괴감(自壞感)에 빠졌다.
'사상8교회'를 철거 당하도록 그냥 두지 않겠다고 큰 소리 뻥뻥 쳐 대면서 부산시장의 영을 불러 단단히 혼쭐을 내 주었다던 양학식 베드로목사의 호기를 그대로 믿었으나 포크레인이 '사상8교회'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던 날과 같은 자괴감이 나를 엄습하고 있었다.
여기서 경화록이라는것은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무슨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활자화된 경전이 아니다. 그냥 대학노트에 노광공의 설교나 잡설들을 사주(四柱)목사인 정재덕 요나단목사와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기록한 것인데, 기록한 사람만 알 수 있을 정도의 메모형태 필기로 적어놓은 것이다.
주로 정재덕 요나단목사가 초창기부터 기록한것을 중요시하고 있었는데 대학노트로 여러권에 달한다. 어떤날은 이 노트를 가지고 와서 경화록이라고 뒤적거리며 설교하고 어떤날은 저 노트를 가지고 와서 경화록이라고 뒤적거리며 설교하고 경화록 몇권(자기가 기록한 노트의 몇권째라는 뜻)에 이런 예언말씀이 있는데 정확하게 들어맞았다고 큰소리를 치면 신도들은 아멘! 아멘!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는 그런 정도였다.
이것이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무슨 경전인양 전해지고 있는것이다. 기록한 사람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의 메모를 이제 그들 두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없어졌으니 대학노트 경화록의 해석은 난감할 것이다.
정재덕 요나단목사와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서로 경쟁적 동지관계였다. 요나단목사는 자기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일 오래 할아버지(노광공)를 모신 사람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늘 자랑삼아 말했고 베드로목사는 실질적으로 할아버지(노광공)를 제일 오래 모신 사람이 누구냐고 그 말을 반박하듯 이야기하곤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동방교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부산, 경남지방에 매주 순회차 내려와 금, 토, 일을 상주하다시피 하다가 월요일에 모든 지교회의 지성(헌금)을 보고받아 집계해서 서울로 가지고 올라가는 일을 주로 했으니 주(週)의 절반은 지방에 머문 셈이 되고,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서울에 상주하면서 주로 대기처안에 있는 중간간부들과 대기처 신도들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주관하고 있었으니 실질적으로 할아버지(노광공)를 곁에서 제일 오래 모셨다고 하는 말도 틀린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서로 동석한 자리에서 서로 다투거나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인일은 없었다. 나이는 동년배라고 기억되지만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한 끗발 아래라고 보는것이 세칭 동방교내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먼저 동방교에 입교한 정재덕 요나단 목사가 같은 동향인 마산에서 세관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양학식을 동방교에 입교시켰고 인품으로도 요나단목사가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부딛칠만한 일들에는 주로 요나단목사가 선배다운 아량으로 많이 양보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나단목사의 소개를 받고 원래 천주교 신자였던 양학식이 노광공을 처음 만났을때 그는 몇가지의 질문을 준비해 갔는데 이것만 속시원하게 풀어주면 세칭 동방교인 좁은길에 들어오겠다고 결심하고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몇가지의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그 질문내용을 하나 하나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바람에 탄복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세칭 동방교에 입교하기로 하고 노광공의 제자가 되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서로 자기가 기록한 메모노트 경화록이 정통이라고 으시대는 웃지못할 발언들도 기억에 남아있다.
(동방교의 사주(四柱)목사, 좌측이 정재덕 요나단목사, 우측이 양학식 베드로목사)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요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세상, 세상의 소식은 늘 그렇게 요상하고 불안스럽기만 하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라, 이땅은 이제 성경의 예언대로 말세에 접어들었고 곧 불심판이 닥아와 인류를 멸망시키고 선택받은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로 세칭 동방교는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고 불안에 떠는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전도되어 '초량12교회'로 들어왔다. 내가 처음 동방교에 전도받아 입교하던 때와 흡사하다(이단의 추억 #3, 동방교에 입교하다 참조). 이러한 학생신도에 대하여 할아버지(노광공)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신도(구성민)와 아직 그것을 밝히 드러내서 알리지 못하는 신도(신성민)로 구분이 필요했다.
'초량12교회'의 1층 큰방에서 알듯 모를듯한 설교로 호기심을 유발시켜놓고 어느 정도 신심이 인정된다 싶으면 ‘너만 알고 있으라’는 단단한 경고와 함께 할아버지(노광공)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설파하고 2층의 본 성전으로 올려보내는 것이다.
이때 로마서 8장15절의 설명은 필수적이다. ‘아바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라는 말이니 즉, 할아버지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성경해석의 새로운 발견이고 억지주장의 극치요 성경에 숨겨놓은 진리(?)가 되는 것이다. 2층의 본 성전으로 올라가게 되는 학생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되니 '초량12교회' 2층의 본 성전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학생 신도들은 2층 본 성전에 대한 호기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 올라갈 수 있을까?, 2층의 본 성전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학생은 아무도 보지 않을때 2층 실내계단을 살짝 올라가 보고 내려오는 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가 봐야 별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차츰 불어나게 되어 감당이 안되니 아예 교회를 하나 더 만들기로 해서 생긴것이 주학교회였다. 그러니까 주학교회는 '초량12교회'의 학생전용 집회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선화여중, 선화여상, 경남여고, 부산진여상등의 학생들이 100여명 이상 전도되어 들어와서 상당히 북적거렸다. 자연히 학교에서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이비 이단종교에 빠진 학생들이 몰려다니고 학생들 속에 파고들어 새로운 세(勢)를 형성,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신자가 자꾸 생겨나고 세칭 동방교의 신자가 되고나면 곧 멸망할 세상인데 공부가 무슨 소용이랴 하는 자포자기로 학교 성적은 갈수록 떨어지고...
이러한 시기에 복음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원 한명이 주학교회에 전도되어 들어왔다. 본명은 잊었지만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은 '실라'였다. 수줍음이 많아 여성스럽고 복스럽게 생긴 간호원이었는데 그녀가 다시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조무사 한 사람을 전도하여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후 '실라'는 서울의 대기처로 들어갔는데 이후 소식은 알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파독 간호원으로 독일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세칭 동방교의 신자였던 간호원들이 수십명이나 독일로 가서 억척스레 일해서 받은 월급을 수 년동안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고 몽땅 동방교로 송금하는 바람에 가족들에 의해 진정서가 접수되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던 ‘세칭 동방교 파독 간호원 사건’이 터졌는데 그녀들중의 한명이 된 것이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주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서울 용산의 '수원정'으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고 나는 세칭 동방교의 본부격인 용산 '수원정'으로 올라가게 되었을때 나와 인수인계를 한 전도사가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갈렙’인 이봉상씨였다.
수년후 이분도 2대 교주 노영구의 부름을 받고 서울의 대기처로 들어가 충성스럽게 일하다가 세칭 동방교의 허구와 기만을 깨닫고 그만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수도에 정진, 어느 사찰의 주지가 되신 분이다. 이분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기록할 기회가 있을것 같다.
주학교회가 소재했던 거리, 멀리 ‘인창요양병원’
(옛 침례병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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