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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안녕하십니까?
우리 하늘소리 선교회를 사랑해 주시는 많은 여러 목회자님들과 우리 봉사자님들 성도님들에게 평안의 안부를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성령님의 체험에 대한 두가지 방면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우리가 잘 다루지 않는 그 성령님의 임하심과
체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체험하셨던 그 성령님 그리고 제자들이 체험했던 그 성령님에 대한 두 방면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5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5절과 8절만 한번 읽어볼까요?
1장 4절부터 8절까지는 성령님의 침례를 기다리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분부하시는 장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5절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 8절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 그동안 우리는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따르고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위하는
삶을 사시는 것을 마가복음 1장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완전하고도 온전하게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따라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하여 주 예수님의 어떤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제자들을 이끌어가시는 이 생명의
씨에 대한 얘기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따라 사는 삶이 무엇이고 위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계시해 주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노예로 오신 성육신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구주로서 친히 농부가 되시는 씨 뿌리는 분이시며 그리고 하늘의 유전자를 지니신
바로 생명의 씨 그 자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하늘 유전자를 포함한 생명의 씨이신 하나님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뿌리시기 위하여 창세전에
에베소서 1장 4절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자들에게 생명의 씨를 뿌리셔서 그들 안에서 바로 주님 자신 곧 하나님이신 주님 자신이 자라시고 성장하시고 변화되시고
변형되어서 바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들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경작할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한 그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안에 뿌린 생명의 씨이신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모으시는 장면이 마가복음 1장 16절, 17절, 18절 베드로에 대한 말씀인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16 〔제자 넷을 부르시다〔마 4:18-22; 눅 5:1-11〕〕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베드로를 택하심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베드로라는 자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그 심령안 마음 밭으로 흙으로 하나님 자신이 뿌려지기 위하여 먼저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갈릴리 바다에서 모으시는 장면을 우리는 마가복음 1장 16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 첫 번째로 부름을 받은 그 제자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며 12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특별히 베드로를 자신과 함께
십자가로 이끌어 베드로 안에 있는 베드로를 제거하고 바로 우주의 대치자가 되시는 자신을 대치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로 이끌어서 베드로를 완전히 끝내시는 계시의 이러한 설명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는 주님과 함께 베드로를 십자가로 이끌어서 베드로를 끝내주시고 그 이후에는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끝내줌을 침례를 통하여 장사지내어서 모든 것을 제거하시고 끝내주신 주님께서는 또한 베드로
곧 12 제자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부활 안으로 이끄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가복음 1장부터 16장까지의 전체적인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계속적으로 그들을 품에 넣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하셨을 때 그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이 모든 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라는 사람을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들을 어떻게
십자가로 이끌고 이후에는 부활 안으로 이끄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마가복음의 아주 중요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이 복음의 시작으로 서두를 장식하고
그리고 이 마가복음 16장을 통해서 주님의 승천으로 끝을 맺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는 육체 안에 계셨던 하나님께서 드러나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바 되었지만 죽으신 다음에는 바로 신성한
생명을 지니신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찢어지고 쪼개지고 찔려짐을 통하여 바로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어져서 바로
부활을 통하여 그 해방된 신성한 능력을 주입시켜 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일을 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고 40일 후에 일어난 높아지기 위한 그 승천을 하신 후에 주님께서 지금 자신의
영의 몸을 지니신 주님께서 그 영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주입시키고 침투시키고 넣어주시는지를 우리는 이 마가복음과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자세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모이셨을 때 12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너희는 떠나지 말고 너희는 나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4절에 너희는 예루살렘을 절대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왜냐하면 요한은 물속에서 침례를 주었지만 여러분은 며칠이 안 되어 성령님 안의 침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이렇게 친히 권고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성령님에 대한 아주 이 성경의 결론이며 성경의 주제요
내용물이 되는 이 주님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권고하는 장면을
계속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8절에서도 뭐라고 나오냐면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 땅의 맨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성령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얼마나 중요한 계시의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알아야 하늘에 속한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이 계시의 말씀에 이 빛의 비춤을 따라 우리가 그 성령님의
이러한 역사가 왜 일어나는지를 체험적으로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바로 성령님을 더욱더 귀하게
그분을 모실 수가 있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교제의 말씀을 나눕니다.
그래서 성령님 안의 침례는 제자들을 위해 임하시는 바로 영의 직접적인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계속적으로 제자들 위에 주님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한 가지 가만히 성경을 들여다보면 뭔가 이해할 수 없고 뭔가 의혹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의문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데요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에 꼭꼭 문을 닫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영의 몸을 가졌기 때문에 벽을
막 통과를 하죠.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지만 영의 몸을 취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여러분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여러분을 보냅니다.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평안의 인사를 하신 다음에
22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신 후에 그들 안으로 숨 호흡을 불어넣어주십니다.
그분께서 이것을 말씀하시고 그들 위에 숨 이 숨은 호흡이죠.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님을 받으라.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을 받아라.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미 성령님을 받았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숨이 무엇입니까? 이 숨은요 호흡입니다. 창세기 1장 7절에 기록된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사는 영이 되었다. 생명의 숨이 호흡입니다.
이 호흡은 내적인 그 어떤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바로 숨 호흡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관계된 문제가 숨이며 곧 호흡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성령님이 숨으로 표현됐고 호흡으로 간주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나타난 이 숨 곧 호흡은 제자들 안에 침투되어진 생명의 호흡. 생명의 숨으로써 성령님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들은 생명과 관계된 생명의 호흡이기 때문에 바로 사도행전에서 그 바람으로 나타난
성령님의 역사는 또 한 방면의 다른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한 후 40일 뒤에 사도행전 1장 5절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라고
이렇게 부활한 후 40일 뒤에 바로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도록 예루살렘에 머물 것을 그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실제적으로는 10일 정도였었죠. 주님께서 성령님에 대한 일을 마무리하시기 위해서 40일 동안 머무셨을 때 이 말씀을
특별히 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 승천하신 10일 후에 곧 오순절 부활하신 후에 50일째 되는 날 임하실 이 성령님이
임하도록 예루살렘에 머물 것을 제자들에게 강력히 권고하시고 명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사도행전 1장 4절 말씀을 통해서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절대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하시고
2장 2절부터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는 소리가 들렸죠. 강한 바람이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숨 호흡으로 주님께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님을 받아라 라고 얘기한 것과 전혀 다른 방면의
표현으로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그들이 앉아 있던 집 전체를 가득 채웠고 3절에서 불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분배되면서 각 사람위에 내렸고 4절에서는 성령님으로 모두 충일되었고 예 내적인 것은 충만이라면 외적인 표현은 충일이라고 성경은 또 이렇게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것에 따라서 각가지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보면은 40일 뒤에 주님께서 성령님이 그들 위에 임하도록 예루살렘에 머물 것을 명하시고 권고하시고 제자들을 위에
이 사도행전 2장 2절, 3절 4절을 통해서 나타나신 주님 자신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임하심은 생명이 아닌 능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주님께서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숨 호흡이죠.안에 있는 숨 그건 생명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숨을 제자들에게 내쉬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성령님을 받으라 라고 얘기한 것은 생명에 대한 문제고 사도행전 2장 2절,
3절 4절에 이 하늘에서 갑자기 강하고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큰 소리가 들리더니라는 얘기는 능력을 위한 주님 자신의 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내적인 영이 되시는 본질적인 영이 있고 사도행전 2장 2절, 3절 4절에서 계시하고 있는 것처럼
능력을 위한 주님의 봉사 사역을 위한 침례를 위한 외적인 그 영도 임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숨을 내쉬면서 그들에게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라는 이러한 바로
생명과 관계된 문제 내적인 그 어떤 생명과 관계된 문제를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호흡 곧 숨으로 간주되어져서 생명의 호흡으로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는 장면이 있고, 사도행전 2장 2절, 3절 4절에서는 바로 외적인 침례를 위한 능력을 위한 것이죠.
침례를 위한 외적인 그 영으로서 봉사 사역을 행하기 위한 것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위한 충만한 외적인 영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름 부으시는
영의 침례를 통해서 주님 자신의 영이신 그 영께서 능력으로 이 외적으로 충일하게 임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기록하면 완전히 분별되어지고 분리되어져서 성령님의 두 방면이 이렇게 예수님께서 체험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원칙 안에서 체험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하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한 그 말씀이
사도행전 2장 2절 3절, 4절 말씀을 통해서 성취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1절이죠.
오순절이 되자 50일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째 된 날은 높아지시기 위한 승천을 하시고 그리고 10일이 지난 50일째 된 날은 오순절로서
바로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로 지키고 있는 오순절 날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있어서 저희가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 제자들과 무리들 곧 갈릴리에서부터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온 무리들인 바로 120명. 처음에 이 40일째 되는 날에는 500여 문도가 있었는데
주님께서 아버지의 그 약속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절대 떠나지 말라라고 했을 때 이 380명은 어디론가 잠깐 그 자리에 처해
있지 않고 120문도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시고 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약속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120 명의 문도가 바로 자리를 지키고 한마음과 한 뜻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때 그 120명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주님 자신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라고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2:1 〔성령이 임하시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후에 부활하셨는데요.
부활하신 날 바로 그날 그것도 구체적으로 부활하신 그 저녁에 제자들은 이 본질적인 문제인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생명을 위한 호흡, 생명을 위한 숨으로 성령님을 영접 했다라고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숨을 내쉬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님을 받으라.
성령님을 받으라 라는 얘기는 생명을 위한 호흡인 것입니다.생명을 위한 숨으로 성령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50일째 되는날 부활의 날 그날 저녁에는 생명을 위한 주님 자신의 영이신 실질적이고도 본질적인 숨 호흡
을 이렇게 성령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주입됨으로 본질적으로 생명의 본질 면에서 주님과 하나가 된 것을 우리가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면 50일째 되는 날 곧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오순절날
급하고 강한 바람이 세차게 성령님 주님 자신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제자들을 위에 임했다 라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22절에는 숨 호흡으로 나타 나타나시고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절, 4절에서는
강한 바람으로 나타나고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숨과 호흡과 이 강한 바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바람은 외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숨 호흡은 주님 자신의 생명의 본질이 우리의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우리의 영이라는 그릇 안에 주님 자신의 본질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의 본질과 동일화된다 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숨 이 호흡은 본질적인 생명을 위한 것이라면 이 강한 바람은 하나님의 봉사 사역을 위한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 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22절과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 4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두 가지 방면과 두 가지
상징을 이렇게 암시 받을수 있는데, 요한복음 20장 22절에 나타난 숨과 호흡으로 얘들아 성령님을 받으라 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주입받은 것은 주님 자신의 영이신 것이며 그 영은 내적으로 생명을 위한 숨이라는 것이며 생명을 위한 호흡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절, 4절 말씀은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봉사 사역을 행하기 위한 외적으로 충일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그러한 봉사 사역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위한 바람 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것은 뭡니까?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제자들은 이미 생명의 호흡으로 성령님을 받았어요.
그런데 왜 또 성령님이 임하시죠? 생명의 호홉인 성령님을 받았지만 외형적으로 주님과 같은 큰 어떤 경륜적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위한 바로 주님 자신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의 생명의 본질과 같아지기 위해서 내적으로 생명을 위한 숨을 받아들였고, 봉사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
외적으로 능력을 위한 바람으로 나타난 주님 자신의 영을 두 가지 방면을 통해서 제자들이 이렇게 체험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체험하는 방식과 아주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이 두 방면을 통해서 먼저 주님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의 역사를 먼저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 35절에 무슨 말씀이 있냐면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말씀이 마태복음 1장 18절에도 기록되어 있죠.
1:18 〔예수의 나심〔눅 2:1-7〕〕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아 그럼 여러분들이 간혹 가다 이렇게 질문을 하고 의혹을 갖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이 30세까지 사시고 3년 반 동안 또 공생애 봉사 사역의 활동을 재개하셨는데, 나이 30대까지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나요? 하나님으로서 사셨나요 아니면 사람으로서 사셨나요라고 이렇게 뭔가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고
분별치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아주 태어나심을 통한 출생의 때로 부터 나이 30세때까지 하나님으로 사셨을까 아니면 사람으로 사셨을까?
이러한 의문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님으로 인하여 잉태되어진 그 순간부터
성령님에 의하여 잉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출생하셨다라는 것입니다.성령님으로 잉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출생하시고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사람의 몸을 통해서 수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 출생하셔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사람으로 출생하시고 하나님 사람으로 사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으로 잉태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사신 그분은 이렇게 사역하러 나오셨을 때는 이제 공적인 사역
하나님의 이 신성하고도 영원한 경륜적인 이 봉사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성령님이 그분 위에 임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누가복음 3장 21절과 22절에서 기록되어 있어요.
:21 〔세례를 받으시다〔마 3:13-17; 막 1:9-1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래서 이제 온 백성이 침례를 받았을 때 예수님께서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께서 몸의
형태로 비들같이 그분 위에 내리고, 그리고 천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한 음성으로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라고 이렇게 말씀으로 친히 선포하셔서 이 세 분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한 번에 이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성령님으로 잉태 하셨을까요? 누가복음 1장 35절 말씀입니다.
그 성령님으로 잉태하신 것은 본질적인 그 영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과 관계된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과
동질화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본질적인 그 영의 문제이지만 주님께서 나이 30세에 요단강에서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실때 주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이 주님위에 내려오시는 이 장면은 하나님의 신성하고도 영원한 경륜적으로
그분 위에 그 영이 임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잉태를 위한 성령님은 생명의 직접적인 본질적인 방면과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이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그 봉사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경륜적인 일로서
바로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셔서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태어나실 때 성령님으로 잉태되시고 또 한편으로는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으로 함께 침례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관계된 본질적인 것과 사역의 수행을 위한 바로 이 경륜적인 그 두 가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이 일을 통해서 주님께서도 성령님의 두 방면에 대해서 온전히 이 일을 체험하시고 이 체험하신 것을 또 제자들에게
체험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에 잉태될 때 주 성령님께서 마태복음 1장 18절, 18절과 누가복음 1장 35절에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하고 성령님으로 잉태되신 것을 통해서 주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이 되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태어나실 때 성령님에 의하여 성령님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그 영은 주님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과 이 주 예수님의 영이 존재의 본질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성령님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성령님의 신성한 본질이 그때부터 있으셨던 것입니다.
태어나시면서부터 나이 30세 때까지 신성한 본질이 주님의 영 안에 잉태되셨고 또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나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본질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서는 신성한 본질, 그리고 이 마리아를 통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본성 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인 인간, 그래서 주님을 우리는 하나님 사람으로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는 인간의 본질을 받으시고 주 성령님을 통하여 잉태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이신 신성한 본질을 가지고 계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인류 역사 가운데 오직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신성한 본성과
인간의 본성 두 종류의 본성을 취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분만이 구주가 되시고 그분만이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 곧 하나님 사람이신 그분이 인간은 사람의 본질만 갖고 있지만그분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성령님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이 두 가지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곧 신성한 본질과 인간의
본질 곧 신성한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모두 갖고 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주가 될 수가 있는 자격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가 은연 중에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서 온전한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완전한 사람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면 30세 때까지 사람으로 사신 것도 아니고 또 온전한 하나님으로 사신 것도 아니고
온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사람으로 생을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셨지만 하나님의 경륜의 봉사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서는 또 하나님의 그 특별한 어떤 경륜적인 하나님의 영을
소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셨을 때 주 성령님께서 예수님 머리 위에 임하셔서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누가복음 3장 21절과 22절에 기록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21 〔세례를 받으시다〔마 3:13-17; 막 1:9-1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왜 주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어져서 주님 자신이 그 존재의 본질이 되게한 문제가 왜 필요할까요?
그것은 절대적으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30년 동안 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 곧 하나님 사람으로서
이 땅에 사셨고 그리고 30세 후에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봉사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일을 하실때 바로
그 사역을 위해서 그분은 본질적인 생존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따라 모든 자들을 이끌기 위한 그 경륜적인 일을
행하기 위해서 자신 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또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이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영의 두 가지 방면이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방면을 예수님께서 친히
태어나실 때 성령님에 의하여 잉태하시고 공생애 시작 때에 성령님이 그분 위에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셔서 경륜적으로 주님 위에 그 영이 임한 문제를 통해서 바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방식의 원칙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고 계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성령님으로 잉태하셔서 본질적인 성령님을 취하셨고,
그리고 또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이 그분 위에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경륜적인 영이 필요했기 때문에 경륜적인 영을 취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일을 행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질적인 영의 성령님으로 잉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본질이신 본질적인 생명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본질적인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셨고, 그리고 경륜적인 봉사 사역을 위해서 경륜적인 성령님을 받은 것이
봉사 사역을 시작할 때 침례자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을 때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이 본질적인 성령님과 경륜적인 성령님을 내려주신다는 것이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본질적인 그 영을 받게 하시는 장면이 얘들아 숨을 내쉬면서 너희는 성령님을 받아라. 분명히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아라.그들이 그 숨 주님께서 내어쉰 그 숨은 본질적인 성령 예 그렇습니다.
생존의 문제가 걸린 생명과 생존에 관한 직접적인 관련된 문제인 바로 이 본질적인 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봉사 사역을 시작할 때 바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이 그분위에 임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절 4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적인 봉사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 움직이기 위한
능력의 강한 바람처럼 역사하시는 그러한 경륜적인 성령님을 모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사도행전은 그 경륜적인 성령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영을 받는 것은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경륜적인 영을 받은것은
바로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절 4절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성령님을 모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본질적인 영 바로 주님의 잉태를 위한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성령님의 신성한 본질이 주님의
영 안에 계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부활의 날 바로 그날 저녁에 얘들아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인 영을 제자들이 받게 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이 영을 받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생존에 대한 문제 영적인 생명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제자들의 영적인 존재를 위한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 본질적인 존재 생명의 존재 바로 생명의 문제 생존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신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았을 때
그 제자들은 신성한 예수님이 지니셨던 신성한 본성과 본질을 받았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제자들이 이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면서 얘들아 너희는 성령님을 받아라 라는 이 본질적인 성령님을 받는 것은
영적인 생존을 위한 영적인 생명에 대한 문제죠. 영적인 생존을 위한 생명에 대한 생존을 위한 방면에서 영을 받은 후에는
그들이 또 연속적으로 또 하나의 체험과 경험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그 신약 경륜을 이루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경륜적인 영을 받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면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얘들아 숨을 내쉬면서 너희는 성령님을 받아라 성령을 받으면 됐지
또 왜 부활의 날 그날 저녁에 사도행전 2장 1절, 2절,3, 4절을 통해서 50일 후에 받은 성령님과 이 제자들이 50일 전에 부활의
날에 주 예수님께로부터 친히 숨을 내쉬며 호흡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는 이 성령님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본질인 본질적인 성령님을 받았어야만 했고 그 후에 제자들은
경륜적으로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 나타난 경륜적인 그 성령님을 또한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먼저는 본질적인
영입 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봉사 사역을 주 예수님처럼 똑같이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행하기 위하여 바로 경륜적인
영을 받는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는 경륜적인 영을 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본질적인 영인 신성한
본질이시며 이 본질적인 영을 통하여 영적인 생존을 위한 신성한 본질과 하나 되어 생명에 대한 문제 면에서 정말
그분의 생존의 문제였던 그분이 성령님으로 잉태되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이 되시고, 사람으로서 이 마리아 몸에
수태되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사람 으로써 사신 것처럼 인간에게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삶의
모습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영적인 존재와 그 생명 곧 생존을 위해 이 본질적인 성령님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사도행전 1장에서는 그 본질적인 성령님을 제자들이 받았기 때문에 그 제자들은 이미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살고 있었던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살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요한복음 20장 22절전에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이끌어지는
삶을 체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는 그 예수님을 쫓았던 제자들, 제자들 대표자가 베드로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자가 베드로죠. 예 주님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 베드로 곧 12 제자들은 자신들의
그 영적인 생존을 위한 그들의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살아있지 못했기 때문에 천연적인 어떤 관념을 통해서 천연적인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 곧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생존을 위한 그들의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살아있지 못한 베드로였기 때문에 타락한 본성 천연적인 관념 안에서
이 옛 피조물과 옛 사람 안에서의 육적인 존재가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계속적으로 마가복음 10장 32절, 33절, 34절을
통해서 자신의 그 죽음과 부활을 첫 번째 계시하시고 두 번째로 또 계시하시고 세 번째 마지막으로 계시함에도 불구하고
그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이 사도 요한은 계속 주님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계실 때 한 사람은 우편에 한 사람은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땅에 속한 헛된 지위에 대한 그러한 탐욕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야고보와 사도 요한의 모습은 12 제자들의 다름 아닌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었고
제자들이 그런 모습이었고, 오늘날 교회 안의 성도들이 바로 누가 세상에서 가장 으뜸되느냐 누가 가장 큰 자인가를
겨루며 그것을 가지기 위하여 이 세상에 헛된 것을 구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본성을 지닌 육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마가복음 14장 66절과 72절을 통해서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하는 이 사건을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그 베드로는 천연적인 존재 안에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그 이유는 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 바로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영적인 존재 안에서
생명을 가지고 영적인 생존을 위한 방면에서 그 본질적인 성령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존재 안에서 주님과 같은
생명의 본질을 가지고 살아야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누가 좌편 우편이 되는지를 이렇게 욕망을 가지고 다투는 삶을 살지
않을 텐데 이 본질적인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천연적인 존재 안에 있었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던 베드로
육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었던 베드로는 계속 이 세상에 속한 그런 헛된 욕망을 구하고 있었고 세 번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사단의 도구가 되어서 주님 그리 하지 마옵소서 죽다니요. 그런 일이 주님께 있어서는 안 되죠라고 이렇게 엉뚱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부활한 그날 저녁에 바로 그 영적인 존재의 근원인 주님 자신이 가지고
계셨던 본질적인 영 신성한 성령님의 신성한 본질 곧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신성한 본질인 주 예수님의 숨을 이렇게
너희는 성령을 받아라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영적인 존재인 주님 자신의 신성한 본질인 그 영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사도행전 2장 1절 그 전까지 이미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영적인 존재를 소유하기 위해서 본질적인 성령을
받았고, 생존을 위해서 본질적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비록 경륜적인 영을 받지는 못하고 있을지라도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살고 있던 제자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살고 있던 자들 50일째 되는 날 주님께서 주님 자신의 영이신 경륜적인 영을 부어주셔서 자신이
행하셨던 그러한 봉사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적인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그 경륜적인 성령님을 부어주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사도행전 1장에서는 비록 경륜적으로 임하는 성령님을 받지는 못했지만,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50일전에 영적인 생존을 위한 영적 존재 안에서 주님 자신의 숨, 주님 자신의 호흡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살아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살아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영적인 존재 안에서 산 자들이었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의 봉사 사역을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륜적으로 임하는 성령님을 모셔야 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 경륜적으로
임하는 성령님을 이 부활의 첫날 부활 날 저녁에는 바로 본질적인 영을 주님의 숨에 의하여 너희가 성령님이 받으라라고
해서 받았지만 50일 째 되는 오순절 임하시는 성령님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버지가 약속한 그 성령님을 너희가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라고 하시고 50일째 된 날 그 경륜적으로 임하는 성령님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말씀을 하여 주신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제자들의 영적인 생존을 위한 본질적인 영은 요한복음 20장 22절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숨을 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님을 받아라.그때 본질적인 영을 체험했고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절, 4절을 통해서
50일 후에는 그들의 영적 존재를 위한 본질적인 영을 가지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존재 안에서 그들은 영적으로 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이루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봉사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시기 위한
경륜적인 성령님을 통하여 그 일을 예수님 처럼 똑같이 하나 되어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경륜적으로 그들 위에 임하는
경륜적인 성령님이 반드시 필요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두방면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부활의 첫날에 주님께서 얘들아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라고 성령님을 부어주셨죠. 그것은 본질적인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50일째 되는 날 오순절 날에 이 일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절, 4절 말씀 통해서
그 영은 경륜적인 그 성령님은 믿는 이들의 체험을 통하여 이제 완전히 완성되어진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이 있기 전에는 영적인 생존을 위한 본질적인 영을 체험할 수가 없었어요.
바로 부활의 날 바로 그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영적인 몸을 취하신 그분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라고
숨 호흡을 불어넣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생존을 위한 본질적인 성령님을 체험하여서 이제 그들이 존재 안에서 영적으로
되었지만 경륜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경륜적으로 봉사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경륜적인 성령님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순절 날 이 일을 이루셔서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그 하나님의 영이신 주님 자신의 영이신 보헤사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의 체험을 위하여 완전히 완성되어진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바로 예수님의 체험은 우리의 체험이고 우리의 체험은 이미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심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인
그 영을 취하신 것을 볼 수 있고 또 성령님 안에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경륜적인 영이 주님 위에 임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그 성령님 주님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과 경륜적인 성령님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주님을 이렇게 모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본질적으로 성령님을 받았습니까?우리가 거듭났을 때 받았나요? 많은 사람들은 거듭났을 때 받았다라고
외형적으로 보편적으로 이렇게 생각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지 얼마 안되지만 분명히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을지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또는 동시발생적으로 우리가 본질적인 영과 경륜적인 영을 받았을것입니다라고
보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바로 이 본질적인 성령님과 경륜적인 성령님은 엄격한 의미에서 바로 2천년전에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님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제자들 안에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있었고 이 베드로가 대표자가 되어서 베드로는 12 제자들의 대표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너희는 성령을 받아라 했을 때 사실은 그때
하나님의 관점 우리의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때 제자들이 부활의 첫날 바로 그날 저녁에 영적인
몸을 취하신 주님께서 오셔서 숨을 내쉬면서 얘들아 성령님 받으라 했을 때 본질적인 성령님을 모두가 받았다라는 것입니다.
제자들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속 나타나셔서
그 일을 행하셔야 되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일을 행하시지 않은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인들, 유대인들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길 원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유대인 가운데 믿는 자들은 사도행전 2장 2절 3절, 4절을 통해서 경륜적인 성령님을 받게 하셨고 이방인들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그 믿는 자들은 사도행전 10장 44절, 45절, 46절을 통해서
경륜적으로 그 영을 이렇게 받게 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0:44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다〕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②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 믿는 자들, 하나님께서 창세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자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경륜적으로 성령님을 받게 하셨고 이방인들 가운데서는 사도행전 10장 44절 45절 46 통해서
경륜적인 그 영을 베드로를 통해서 받게 하는 장면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바로 천국 열쇠 두 개를 받은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여는 것을 우린 천국 열쇠라고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님을 받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받는다 라고 볼수 있는데 예를 들자면 어떤 부모가 있다
칩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저 자식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 은연중이던 알게 하든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하나 선물로
사줬다고 말하지 않고 나중에 선물을 주기 위하여서 부모가 집을 샀다 칩시다. 또는 당사자가 집을 샀어요.
그러고 나서 한 수 년이 지나서 좋은 반려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칩시다.
그러면 집을 산 것은 전에 일이지만 그들이 예전에 산 집에서 사는 것은 후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받는 방면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원칙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의 대표자인 제자들 그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베드로 12제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대표하고 있고 12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자가 바로 베드로라는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께서 요한복음 20장 22절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 위해 숨을 내쉬고 성령님 안에서 침례를 주기 위하여
부활의 날 저녁 때에 찾아오셔서 영의 몸을 취하신 그분이 본질적인 성령님이 영적인 생존을 위한 방면에서 영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고, 그 다음에 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고,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 된 이것은 단 한 번의 영이 되시고 믿는 자들에게 영 안에
침례를 주신 그 사건을 통해서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절 4절은 경륜적인 영을 부어주신 것과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는 본질적인 영을 주님 자신의 몸의 지체들이 된 자들로 주님께서 영을 내어쉬신 것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20장 22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적으로 주님께서는 다시
영을 얘들아 너는 성령을 받으라 또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얘들아 너희는 성령 받으라 또는 나 개인에게 찾아오셔서
얘 너는 성령을 받아라 라고 이렇게 주님이 호흡하시면서 숨을 내쉬면서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내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났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경륜안에 포함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주님께서 몸 안으로 내어쉰 영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못 박히시고 장사 지내고 부활하신 후에 부활하신 날 주 예수님께서는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바로 자신의 몸의 지체들이 된 제자들을 자신의 몸으로 간주하셨기 때문에 바로 그 제자들 안으로
성령님을 본질적으로 불어넣으시기 위하여 숨을 내쉬면서 너희는 성령님을 받아라 라고 얘기를 이렇게 하고 암시하고
계시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50일째 된 날, 50일 후 오순절 날이죠.
50일 후 곧 오순절 날에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에 일부가 된 먼저는 유대인들 가운데 믿는자들을 성령님 안으로 침례를
주신 것 볼 수 있고, 그 뒤에 사도행전 10장 44절, 46절 고넬료 집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된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 된 이방인들을 바로 이 고넬료라는 집 안에서 그 영 안으로 침례를 주신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열쇠의 두 개를 하나는 유대인 중에 믿는자들을 위해서 하나는 이방인들 중에 믿는 자들을 위해서
사용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몸을 위한 그 영의 완성은 완전히 성취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본질적인 영을 부어주신 주님께서는 또한 이방인에게 개체별로
또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그리고 나중에 이방인들에게 베드로를 통해서 먼저 이렇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몸의 지체들이 된 그 주님의 몸의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두의 그 영의 부어 주심을 통해서 완전히 그 영의 완성은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 된 자들로서 본질적인 영과 경륜적인 영을 이렇게 요한복음 20장 22절과
사도행전 2장 1절, 2절, 3절, 4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완전히 영의 완성이 성취된 것을 통하여 주님의 지체가 된
우리의 몸과 하나로 연결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과 우리의 영이 연결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우리의 분깃이되고 우리또한 그분의 몫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영이 그분의 분깃이 되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본질적으로 숨으로 표현된 그영을 몸안으로 내쉬신것 곧 얘들아 성령님을 받으라라는 것을 통하여
주님 자신의 영이신 그 영을 우리의 몸 안으로 내심으로 말미암아 숨을 통하여 호흡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영적인 생존을 위한 방면에서 영을 소유하게 하시고 경륜적으로 주님께서 몸을 그 안에 침례해 준 것에
또 이러한 방식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이 본질적인 영과 경륜적인 영을 통해서 하나는 제자들에게 얘들아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하나는 또 사도행전 2장 2절에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성령님으로 모두 충일하게 된
이 본질적인 성령님과 경륜적인 성령님 이 두 개의 제자들의 체험 안에서 성령님의 두 방면으로 나타나진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 영은 나누어진 영이 아니라 한 영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성경은 계속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영에 두 방면이 있습니다. 체험하는 면에서 두 방면이 있지만 한 방면은 본질을 위한 것이고 한 방면은
경륜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한 영 안에서 본질을 위한 것과 경륜을 위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의 첫 번째 방면은 먼저 본질적인 성령으로서 본질적이며 두 번째 방면은 경륜적인 성령으로서
경륜적인 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성령님의 두 방면이 이와 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적인 영과 경륜적인 영이신 주님 자신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는 본질적인 영에 대한 얘기와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경륜적인 영의 노선을
얘기하고 있는데요. 이 경륜적인 영을 받기 위해서는 이 본질적인 영적인 생존을 위한 방면에서 영을 소유받는 일이
먼저 선제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본질적인 영을 먼저 받게 하시기 위해서 이 본질적인 영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사도행전 6장 3절에보면 일곱 집사를 세우는 일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이 말씀은 주님 자신의 영이신 본질적인 영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곧 영적인 생존을 위한 방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본질과 하나되어 정말 하나님이시면서 사람, 하나님 사람으로서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그분의 생존의 문제 신성한 본질로 잉태되어져서 그분의 존재를 나타내는 신성한 본질을
나타내는 바로 이 주님의 신성한 본질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그 지혜가 그들의 지혜가 주님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초대교회를 건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이 일이 바로 본질적인 영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님과 지혜가 가득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라는 얘기는 어떤 하나님의 경륜
주님의 봉사 사역과 같은 봉사 사역을 수행하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어떤 본질적인 어떤 그러한 영적인 생존을 위한 방면에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바로
본질적인 영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 사도행전 6장 3절에 이 말씀은 지혜와 인내를 겸한 생활을 요하기 때문에
바로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인내를 요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영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봉사를 위하여 이 온전한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능력의 영이 아닌 생명의 영으로 가득 찬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능력의 영으로 충만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 경륜 봉사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것이 능력의 영으로 충일한 바깥으로 넘친다는 얘기죠. 능력의 영으로 충만되어진
그 충만은 이 충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영으로 충만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생존을 위한 것 이 때문에 지혜나 이러한 인내나 지혜는
내적인 충만함으로 내재되어서 이 생활을 위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시키기 위한 생활을 위한 본질적인 영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이 본질적인 영인 것입니다. 6장 3절 말씀은 바로 본질적인 영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6장 5절에서는 스데반이 믿음과 성령님이 가득한 사람이었다라는 것을 6장 5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스테반이라는 사람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가득한 사람은 영의 본질적인 방면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스테반이 순교하는 장면이 6장 8절부터 쭉 이렇게 나오고 있는데요.
스테반이 돌에 맞을 때 그는 본질적인 영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라는 말씀이 나오는 데요 여기서 성령님으로 충만하였다는 것은
내적으로 충만한 주님 자신의 영의 충만합입니다.
이 스테반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이 영의 충만은 능력이 아닙니다.생명에 대한 문제예요. 본질적인 영의 충만입니다.
영적인 생존을 위한 방면에서 바로 그 스테반이 영을 받았기 때문에 충만하다는 것입니다.내적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는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이것은 경륜적인 성령님일까요?
아니면 본질적인 방면에서의 성령님을 모셨을까요이것 또한 본질적인 성령님을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52절 에서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님이 충만하니라.여기에서의 기쁨과 성령님이 충만하다는
이런 내적인 충만함에 대한 것은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하고 생명을 나타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능력이 아닌 생명을 위한 본질적인 성령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이런 본질적인 영에 대한 문제가 있고 반면에 또한 이 본질적인 영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경륜적인
영에 대한 얘기가 기록돼 있는데 사도행전 1장 5절에 대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물속에 침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서 성령님 안에 침례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충일하게 되는 외적인 충일함에 대한 경륜적인 영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8절에서 너희는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라는 능력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 이르기까지 내 증인들이 될 것이다라는 이것은 예수님께서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을 때 주님 위에 성령님이 임하신 것처럼 그때부터 봉사 사역을 합당하게 수행하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바로 우리
위에 제자들 위에 임한 영은 곧 우리 교회 안에 성도들 위에 임하는 영은 경륜적인 영에 대한 방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라는 이 충만하게 되었다 라는 것은 외적으로 충일하게 넘쳤는데내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는 충만함 외적으로 보여졌을 때는
충일함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가득 차서 넘치고 넘치는 장면을 내적으로는 충만함, 외적으로는 충일함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인데 성령님의 충만함
곧 성령님의 충일함을 외적으로 받았다는 얘기는 그 제자들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경륜적으로 그 영으로 충일하게 되었다 충만하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7절과 18절에서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라는
이 영의 부어짐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뭡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부활의 날 그날 저녁에 그 집안에 꽁꽁 숨어 무서워서 두려움에 떨고 숨어 있었던
제자들 앞에 영적인 몸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면서 얘들아 성령을 받으라 라는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제자들 안으로 호흡한 그 숨쉼으로 말미암아 호흡된 그 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영의 부어짐으로써 바로
경륜적인 방면에 경륜적인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부어짐은 언제 왔습니까?
하나님의 영의 부어짐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을 때 하늘로부터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질적인 이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호흡 생명과 관계된 호흡된 영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왔지만 하나님의 그 경륜적인 영의 부어짐은 부활후 40일째 되는날 승천 곧 높여짐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질적인 영은 영적인 존재와 우리의 영적인 생존을 위하여 제자들 속으로 호흡된 숨이 들어오게 된 호흡된 영의
본질적인 방면이라면 바로 이 경륜적인 방면은 제자들의 사역 곧 주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일을 위한 능력으로 그들을 위에
부어진 영의 경륜적인 방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에서 성령님의 경륜적인 방면이 두 번 언급되고 있는데요.4장 8절에서 한번 기록하고 있고요.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라는 이 충만은 그때 베드로가 성령님으로 충만했던 것은 외적인 충일함에 대한 얘기인 거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했다. 성령님으로 충일했다라는 얘기는 베드로가 주님 자신의 주님의 사역을 위한
그 주님 자신의 영의 경륜적인 충만함이 외형적으로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충일함이 있었다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4장 31절에서도 경륜적인 방면이 또 한 번 언급되고 있는데요.그들이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그들 모두가
성령님으로 충일되어 4장 31절에서도 똑같은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이것은 그 영의 경륜적인 외형적으로 바깥으로 드러나는 충일함이 있었다 곧 충만함이 있었다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 17절에서 이 경륜적인 영의 충만함을 표현한 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이 사도바울 선생님의
얘기인 것입니다.사도바울 선생님이 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임하심을 통하여 마치 주님의 본질적인 어떤 성령님을
이렇게 소유하는 것처럼 그러한 일을 체험한 뒤에 그 후에 또 경륜적인 충만을 받기 위하여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다소에
있는 사울에게 심부름 보내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17절에서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곧 이게 바깥으로 드러나게 하신다. 권능과 능력을 가진 자가 되게 하신다 라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그 사도 바울 선생님에게 오기 전에 사울은 이미 어디선가 그 특별히 다메섹 도상의 그 어떤 때에 본질적인
영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은연 중에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바로 이 사울은 주님을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오죠.
그때 본질적인 영에 참여했다는 것을 우리가 은연중에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9장 17절에서 아나니아는 그 사도바울이 경륜적인 영에 참여하여서 주님의 그 봉사 사역에 반복적으로
연속적으로 참여해서 또 하나의 주님과 같은 자로 일하게 하시기 위하여 바로 누구죠?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하여 안수하시게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 9절에서 바울 선생님이 성령님으로 충만했다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것이 외형적으로 성령님이 총만했다 라는 것은
바깥으로 흘러넘쳤다는 얘기죠. 이 역시 영의 경륜적인 방면이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마치 전편과 후편 이렇게 연속적으로 묵상하고 상고함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두 방면을
통해서 예수님이 체험하신 것을 제자들이 똑같이 체험하고 그리고 이 본질적인 방면을 통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는
주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가 소유해서 신성한 본질을 가진 동일한 자가 되고 똑같이 그 사역 안에서 그 봉사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륜적인 이 성령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의 생명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따르며 위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체험은 곧 예수님의 체험이었고 예수님의 체험이 선제적으로 먼저 나타난 다음에 제자들을
요한복음 20장 22절을 통해서 본질적인 성령님을 얘들아 성령님을 너희가 받아라라고 얘기하시고 또
사도행전 2장 1절과 4절을 통해서 경륜적인 성령님을 받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성령님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그 영은 주님의 그 존재의 본질인 하나님의 영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 그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본질이 되었다 라는
것과 그리고 이 주님의 존재의 본질이 됨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신성한 본질이 주님께 있었다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신성한 본질을 지니신 그분임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주 예수님께서 체험하신 이것이 우리들의 체험 안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의 원칙 안에서 이루어져서
사도행전을 통해서 이 본질적인 영의 노선과 경륜적인 영의 노선을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성경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암시하고 계시하고 있는 영에 대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두 가지 방면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모든 교제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