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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명절 이후니까 가정에 대한 내용들을 좀 몇 가지 오늘 예화 중에 다루게 될 텐데요. 이제 이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 있는 분들은 잘 들으셔도 좋을 것 같고요. 또 새로운 가족을 앞두고 있는 우리 성도들도 도움이 되는 예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특징일까요? 아니면 전 세계적인 걸까요? 우리나라일까요? 전 세계적입니다. 우리나라가 좀 유독 심한 것 같긴 하지만 전 세계적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남남이었잖아요. 그렇죠 애초에 남남이었는데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여자 이렇게 나이가 전혀 다른 다른 세대의 두 여인이 함께 한 남자 아들과 남편을 매개체로 같이 이렇게 고부 간의 갈등이 고부 간의 사이가 된다는 것 자체가 결코 당연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위스 심리학자 폴 토르니라고 하는 사람이 이 비밀이라는 책에서 이 거부간의 갈등에 대한 내용을 다뤘는데 어떤 한 가정의 예입니다. 갓 결혼한 젊은 맞벌이 부부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상황입니다. 머릿속에 상상을 해보세요. 시어머니가 아들 내외가 이제 맞벌이니까 출근을 하고 난 뒤에 집에 홀로 남아서 가만히 생각을 하는데 직장에 나가서 힘쓰고 애쓰고 또 또 돌아오면 가정일을 돌봐야 할 며느리가 너무 이렇게 안타까운 거예요. 마음이 좀 이렇게 그래서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켜둔 세탁기에 이제 물건을 세탁물을 꺼내서 잘 말리고 잘 말린 뒤에 이제 잘 개가지고 하나하나 곱게 며느리의 방 옷장에 가지런히 넣어놓았습니다.
이 일을 하는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이제 마음이 나름대로 퇴근 후에 옷장을 열어보고 뿌듯해하면서 기뻐할 며느리를 상상하면서 시어머니는 나름 그렇게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거 여러분들 지금 여기까지 들었을 때 돌아온 며느리의 반응은 어떨 것 같으세요?
며느리의 입장이 되게 강하시군요. 저는 이 예화를 읽으면서 약간 처음엔 이해가 안 됐는데 역시 여성교들은 잘 아시네요. 시어머니의 예상과 너무 다르게 며느리가 질색을 하는 거예요. 왜 어머니가 내 방에 마음대로 들락거리고 내 옷장을 마음대로 열어서 그렇게 정리를 해놨느냐 며느리가 생각지도 않은 반응을 하니까 이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나름 자기는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막 이렇게 해가지고 며느리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했는데 시어머니도 마음이 불쾌해졌습니다.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며느리가 야속하고 그리고 며느리는 자기 방과 자기 옷장을 침범한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이후에 이 관계는 좀 안 좋아졌겠죠 그렇죠? 이 사건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요?
먼저는 시어머니의 선의에서부터 시작된 거예요. 그렇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 일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믿거나 해코지하려고 이 행동을 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근데 도대체 그냥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돕기 위해서 나름 자기 나름대로 그 일을 한 건데 이렇게 지금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겁니다.
이 심리학자 폴 투르니는 이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며느리에게 있어서 자기의 방과 자기 옷장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인 단순한 공간으로 보면 안 됩니다. 시어머니와 한 지붕에서 살아야 하는 며느리의 입장에 있어서는 이 방 그리고 자기 옷장은 자기의 존재 자체로 다뤄질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같은 공간에 계속 사니까 자기만의 공간이 없잖아요. 그쵸? 근데 이제 자기 방과 자기 옷장은 그 내 공간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식이 있나 봐요.
여러분들 아마 잘 이해가 되시네요. 벌써 그러니까 며느리는 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야 조금 뭔가 이렇게 긴장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유일한 공간이고 자기 옷장이 자기가 혼자 유일하게 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인데 이 공간이 침범당했다고 하는 감정을 갖는다는 거죠. 이 며느리도 그러니까 며느리 입장에서 볼 때 시어머니가 한 행동은 선의였지만 그게 선의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침범하는 행동으로 느껴져서 언짢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조금 며느리 입장에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네 우리 권사님은 여기 심리학자가 거의 맞아요. 정답입니다. 거의 이걸 읽으셨어요? 저는 약간 제 남자적인 입장에서는 약간 이해가 안 되는데 이 심리학자가 하는 말이 뭐냐면 그냥 빨래를 널어놓고 개는 것까지 하고 그냥 거실에 이렇게 놔뒀으면 며느리가 고마워했을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며느리도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까 피곤하잖아요. 근데 자기 공간에 대한 침범이 그게 이제 이 사건의 결말이 물론 이제 어떤 분들은 자기 속옷 손대는 것 자체도 싫어하는 분들이 있으니까 이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 심리학자가 말한 그런 결정입니다.
근데 여러분 지금 제가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예를 들어서 지금 시어머니 되시는 분들은 좀 불편할 수도 있는데 지금 이게 지금 며느리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약간 이런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흔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그 차원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 사람을 대할 때가 있어요.
근데 그게 내가 그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와도 연결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다 알려고 하고 그리고 시식권권 간섭하려고 하고 특히 이제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이걸 한번 잘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상대방이 이게 자유 의지를 가진 한 인격체인데 한 인격체로 온전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그래서 이게 어쩌면 잘못하면 사랑으로 표현을 했는데 속박이고 억압이고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폴 투르니는 사랑이라고 하는 정의를 이렇게 했어요. 상대가 홀로 간직하거나 지키고 싶어 하는 시간과 공간 혹은 비밀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존중해 준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게 지금 사랑과 사람과의 관계를 지금 이야기하는데 피조물과 피조물의 관계가 서로에 대한 이런 서로 존중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면 창조주와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떻겠느냐라고 하는 걸 지금 말씀드리려고 약간 서두에 가정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한번 여러분들도 적용점을 삼아보면 좋을 것 같아요. 사복음서의 마지막 요한복음 21장에 교회의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은 이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밝혀주고 있는 사도행전 1장과 이게 연결되는 말씀이거든요.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단락에서는 이런 내용을 전합니다.
베드로가 순교할 것을 예고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세요. 근데 베드로가 평상시에 제자들 가운데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요한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이제 이렇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요한은 그러면 어떻게 될 건가요라고 이제 물어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요한복음 21장 22절에 보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내가 무슨 상관이냐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한의 앞길을 어떻게 인도하시든 베드로 니가 그거에 대해서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죠.
오늘 사도행전 1장에서도 약간 비슷한 내용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요. 당시에 로마가 자기 나라를 점령해가지고 통치하는 시대다 보니까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해방을 그들은 너무나도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리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까지 인식을 했는데 이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해방을 해줄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 묻는 거예요. 예수님 그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자기들이 생각할 때 지금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때가 언제입니까라고 하는 걸 여쭈는 거예요.
근데 여기에서 여쭈다고 하는 헬러의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제자들이 이 질문을 한 번만 한 게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질문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몇 번 안 나오지만 제자들이 그냥 때가 되면 때만 되면 예수님한테 묻는 겁니다.
예수님 언제 우리나라 도대체 해방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일제 시대라고 생각하면 그 키를 갖고 있는 어떤 분이 계시다면 언제 우리나라 도대체 독립합니까라고 궁금하니까 맨날 물어볼 만하잖아요. 그렇죠 마치 제자들의 모습이 그와 같았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을 두셨으니 너희는 알 바 아니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때와 시기라고 하는 말이 우리 말로는 비슷한 시간적인 개념으로 보이지만 여러분들 많이 들어본 크로노스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 여기서 때 그리고 시기로 이렇게 번역을 해놨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 또는 어떤 특별한 어떠한 사건 을 나타내는 카이로스 특별히 카이로스는 성경적으로 주님의 재림 종말의 때를 특징적으로 더 설명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독립적인 시기 그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앞서서 예수님은 주의 재림을 뜻하는 종말을 포함하여 모든 역사의 때와 시기 그것은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그건 누구의 주권 하에 있는 거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아는 것은 너희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 일을 우리가 언제예요? 언제 빨리 빨리 안 해 주십니까? 막 뭔가 우리가 우리의 시기로 막 그거를 끌어당기려고 할 때가 있잖아요. 여러분 근데 그것이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요. 그거는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하나님을 주관하려고 하는 잘못된 우리의 모습들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사야 46장 3절 하반절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가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 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지었은 즉 내가 업을 것이오.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아멘,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품고 우리를 업어주시고 우리와 동행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적인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가끔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가 온전히 깨닫지 못할 때가 있어요. 만약에 여러분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지금 여러분들과 매일 동행한다고 생각을 해보면 여러분 어떠실 것 같으세요? 오늘 하루 여러분들의 삶에 하루 종일 여러분들 옆에 하나님이 이렇게 뒷짐지고 쫓아다니면서 여러분들 식사할 때 식사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여러분들의 직장 생활을, 또 여러분들의 삶에 여러분들의 어떤 가족과의 대화를 다 이렇게 쳐다보고 계세요. 상상하면 처음에는 물론 행복할 것 같아요. 너무 막 든든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우리의 삶에 상황들을 보면 여러분 친부모라도 성인 된 자녀 옆에서 아무리 사랑해도 하루 종일 쫓아다니면서 계속 쫓아다니면 걔네들이 뭐라 그러겠어요?
시어머니가 아까 전에 아무리 며느리의 빨래를 빨아주고 청소를 해주고, 그래도 그가 자기 뜻대로 하면 관객은 그게 오히려 틀어주는 요소가 되는 것처럼 만약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형체를 가지고 우리를 일구석 육추석 우리를 간섭하신다면, 우리가 조금만 이상한 마음 가져도, 야 이놈아 우리가 조금 연약하면 야 이놈아 막 이렇게 혼내기만 하신다면 간섭하신다면 아마 우리는 1분 1초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함께하시면서도 우리 자유 의지에 우리의 삶을 맡겨놓으셨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그렇게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의 미래에 궁금증으로 안다는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말씀드렸죠.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내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의 독립에만 집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 땅끝까지 증인이 되어라.
여러분 성숙한 그리스도인은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 생각으로 내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막 국한할 때가 있어요. 솔직히 애닳잖아요. 막 당장 뭔가 해결돼야 될 것 같고 당장 뭔가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막 그렇게 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야외를 가거나 그럴 때 보통 기도 제목 가운데 날씨를 위한 기도 제목을 가질 때가 있어요. 근데 가끔 날씨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도 이게 맞는 기도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날 비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니시잖아요. 그쵸 중요한 건 전적으로 그건 하나님이 주관하실 사항이고 우리는 그 상황에서 허락하시는 그 내용 안에서 잘 준비하면 되는 거예요.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안에 거하면 되는 겁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 우리 자녀들에게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열심히 해라고 우리가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배우자를 위한 기도 저도 7살 때부터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했는데요. 어머니가 디테일하게 하래요.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디테일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 내용이 어디 갔는지를 몰라가지고 제가 지금 비교를 해야 되는데 비교를 아직 못하는데 아무튼 그 기도도 물론 우리가 중요한 기도다라고 말은 할 수 있는데요. 중요한 건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을 약간 넘어서는 어떤 기도를 할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그 과정 속에서 인도하실 텐데 그냥 내가 원하는 내 뜻대로 뭔가를 이루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기도하고 또 구하고 또 그거를 소망하고 또 이루어지지 않으면 막 불평하고 그러세요.
근데 여러분 특별히 사람에게 관련된 한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팅이 완료된 그런 보석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나 원석을 주시는 분이세요.
배우자도 마찬가지고요. 자녀들도 마찬가지고 친구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기도한 대로 만약에 그런 완벽한 배우자 내가 기도한 대로 완벽한 자녀, 기도한 대로 완벽한 내 옆에 있는 동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죠 근데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울퉁불퉁한 원석 같아서 가끔 너무 힘드시죠 근데 여러분 그 원석은요.
하나님의 고유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가운데 주신 거예요. 그 원석은 어떻게 하면 이제 보석이 되는 겁니까? 같이 다듬어야 돼요. 같이 서로 그 원석이 보석이 되어가는 과정을 밟아가라고 하나님이 관계를 허락하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 과정이 굉장히 큰 행복이에요. 처음부터 큰 보석을 갖다 주면 물론 좋죠. 좋겠죠. 근데 그 기쁨하고 내가 원석을 갖다 놓고 그걸 막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진짜 보석이 그 안에 딱 발견됐을 때 그 기쁨은 비교할 수가 없을 겁니다.
오늘 가정에 대한 또 하나의 이해와 어떤 한 주부의 간증입니다. 이 주부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댁이 아주 소문난 기독교 가정 그래서 시부모는 아들을 위해서 독실한 신앙을 가진 이제 며느리가 들어오기를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이제 드디어 며느리감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는데 교회의 문턱을 한 번도 넘어서 본 적이 없는 불신자예요. 하필이면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애타게 기도했는데 하필이면 우리 불신자는 그런데 도무지 자식의 마음을 빼앗 돌릴 수가 없으니까 결국은 이제 결혼을 시킵니다.
근데 그 결혼을 시키는 과정에서 시부모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믿지 않는 너를 내 아들이 배우자로 선택한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다. 믿지 않는 며느리가 들어온다는 것은 우리 가정에 어쩌면 큰 실망이다. 근데 그 사실을 너는 이해를 못할 거야. 하지만 내 아들이 너를 믿음으로 선택한 이상 너는 우리 가정의 기도의 응답인 줄 믿는다. 앞으로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되어서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구나.
이 말을 들은 며느리가 그다음 날부터 교회를 다녔을까요? 이 며느리는 여전히 교회를 처음에는 한두 번 시부모님을 위해서 다녔을지 모르겠지만 교회를 주일이 돼도 나가지 않습니다. 집에서는 집에서 쉬는 한이 있어도 교회를 나가지 않는 거예요.
그때 이 시부모님들이 이제 어떻게 해야 이 며느리가 교회를 가게 될까요? 1번 매일 주일마다 찾아가서 손을 잡고 나간다. 2번 여러분들 뭐 한번 말해보세요.
뭘 어떻게 해야 돼요?
솔직히 이 답을 잘 모르겠죠. 물론 이 지금 예화에 나와 있는 간증도 어쩌면 답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도 아마 여러분들 자녀들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사귀는 과정이 불편할 수도 있어요.
근데 이 시부모님들은 이 며느리를 늘 딸처럼 여기고 사랑하며 대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요. 며느리가 처음에 들었던 말이 뭔지 알잖아요. 그러니까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그렇게 자기를 위해 지극정성을 들여서 사랑하고 늘 이렇게 섬겨주는 모습들이 뭔지를 알기 때문에 늘 미안한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늘 있는 중에 이 며느리가 외출하고 귀가하는 길에 동네에 특별새벽기도회라고 하는 현수막을 보게 되었고, 그 현수막을 보고 그냥 마음이 잠이 깨가지고 그냥 우연히 나갔다가 그날 얘야 왜 이제 왔니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다는 거예요. 물론 이거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며느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했다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이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간증하는 게 뭐냐면 바로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어 그러니까 솔직히 내 마음에는 안 들어 나는 믿음의 며느리가 왔으면 좋겠는데 내 아들이 너를 택했어. 그리고 우리는 기도했잖아 지금까지 그러니까 너는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응답이야라고 믿은 거예요.
그러니까 원석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거죠. 그냥 보물로 들어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리고 나서 그 원석이 보석이 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 그를 위해서 헌신하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본인이 됐겠죠.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뜻대로 뭔가 처음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라고 하는 분명한 믿음 안에서 그들이 행한 그 작은 행동들이 모여져서 결국에는 그 며느리가 그 가정에 맡기신 원서 이 되었고 보석이 되었다는 예화입니다.
며느리의 삶과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녀들에 대한 기도 제목도 참 우리 많잖아요. 그렇죠 제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작년 이맘때쯤 해서 우리 권사님들이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해야 되지 않냐 막 이렇게 한동안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을 던졌어요. 저도 그래서 기도 제목으로 이제 가지고 같이 기도하면서 또 나름 이렇게 뭔가를 해보려고도 했는데 참 쉽지 않았습니다.
근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조금 이렇게 요즘 지켜볼 때 몇몇 분들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우리 지금 우리 성경이도 요즘 감사해요. 청년으로서 요즘 새벽과 수요일 저녁을 깨우는데 제가 막 도전이 돼가지고 요즘 힘이 납니다.
또 우람이가 저리 저 자리에 앉아가지고 주일날 예배드리는 거 물론 아직 신앙이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요즘 재범이도 가끔 새벽에 이렇게 나와요. 물론 아직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신앙에 뭔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서 답답하고 또 아직 지금 교회에 나오고 있어도 또 우리 자녀가 신앙적으로 부족함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여러분들의 마음도 있을 겁니다.
근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원석들이라고 생각을 하시고 우리가 그 자녀들을 하나하나 내가 그 원석을 보석으로 같이 만들어가야 할 대상이라고 하는 거를 기억한다면 여러분들이 포기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 같아요. 저와 여러분들이 포기하지만 않으면 하나님이 분명히 계획하시고 인도하심 속에 여러분들의 자녀가 또 우리 공동체 가운데 연약한 이들이 장기 결석자들이 또 우리가 품고 있는 119의 대상들이 주님 앞에서 온전히 회복되고 돌아오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며느리는 자발적으로 교회의 문턱을 넘어섰죠.
여러분 어쩌면 이 가정 금방 예화로 들었던 이 가정이야말로 그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그 아들에게 있어서는 이 며느리가 땅끝이었던 겁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땅끝이었던 거죠. 여러분들에게도 지금 땅끝이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땅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데 맨날 그냥 우리는 너무 먼 곳까지 가야 된다는 그 생각 하에서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어라고 그냥 자포자기할 때가 많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 창립 7주년을 앞두고 우리 옆에 땅끝이 있거든요. 여러분들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여러분들이 지금 품고 있는 119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누구 가족 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 교회의 지금 동력자 가운데 요즘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장기 결석하고 있는 동력자들이 될 수도 있어요. 그들이 바로 땅끝일 수 있습니다.
우리 이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가 알 바 아니오 괜히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어떤 영역까지 왜 당장 이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느냐고 답답해하는 거기에 너무 붙들린 바 되지 말고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보자고 저는 요즘 막 이렇게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같이 여러분들이 예배드리는 이 모습 속에서 뭔가 이렇게 요즘 기대와 소망이 막 이렇게 뭉글뭉글 일어남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그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그 소망이 같이 모아지고 모아지면 마치 눈사람이 조그마한 눈덩이가 모아져서 큰 눈사람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분명히 이루실 일을 우리는 기대하고 소망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과 또 자유로우심을, 우리가 마음대로, 내 생각,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그것을 상관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벗지 않고, 또 내 자녀들, 내 남편, 내가 옆에 있는 사람들도 내 뜻으로 주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시간 시간 물으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우리 각 가정과 우리 공동체 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