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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誤讀을 오독悟讀하기
―김금용의 『물의 시간이 온다』를 중심으로
이영숙(시인ㆍ문학평론가)
물론 세계가 질서정연한 것도 아니지만, 어쩌면 해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세계가 혼돈으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세계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우리는 세계를 유비로 풀거나,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거나, 전문가의 견해나 여론을 참고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등의 다양한 행위 중 일부를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세계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견지에서 주체들의 역량만큼의 주관으로 분할되거나, 지성의 역량만큼의 객관을 담보하기도 한다. 지식의 총량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은 세계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찼다는 역설의 반증이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 내적 진실 사이에서 인간은 또 얼마나 서성거리게 되던가. 김금용이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오독의 세계로 돌진하는 흰 방울새의 울음
지휘자의 곡 해석이 오케스트라의 연주 결과를 좌우하는 것을 보면 지휘는 주관의 영역인 듯하고, 연주에 설득당해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을 보면 지휘는 객관의 영역인 듯도 하다. 작곡자의 의도와 곡에 대한 이해 정도를 능가하는 어떤 첨예한 교감을 지휘자는 연주자들을 통해 실현하고 이를 관객에게 전달함으로써 작곡자와 연주자와 관객을 곡의 새로운 창조 과정에 동참시킨다. 베토벤의 <운명>은 수 세기를 거쳐오면서 수없이 재창조된 셈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독誤讀을 오독悟讀한다는 측면에서 시인은 작곡자와 지휘자와 연주자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고 상정해 볼 수도 있겠다.
웃을 때도 눈물이 나요
웃는 내 모습이 반가워서
배랑 허리랑 아프도록 웃어요
죽지 않을 만큼 실없이 자꾸 웃어요
엄마 바다를 헤엄쳐 나올 때
양수를 너무 마셨기 때문일까요
엄마의 소금기 많은 짠 눈물이
열 달이나 내 안에서 자라
탯줄을 타고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제일 먼저 쏟아낸 눈물바람 때문에
웃을 때도 찝찔한 눈물이 새 나오는 걸까요
엄마는 울지 않으려고 웃고
잊으려고 웃고
숨을 쉬려고
웃는 일만 찾아 길을 걸었다네요
삶이 오독이란 걸
돌아가실 때도 나를 낳으실 때도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난 엄마처럼 웃을 때도 눈물이 나요
탯줄에 감겨 있을 때부터 어쩜
눈물을 배운 탓일까요
―「웃음에 대한 오독」 전문
웃음은 기쁘거나 즐거울 때, 또는 우스울 때 표정과 소리로 표현된다. 긍정적인 감정의 발로이고 순수와 천진과 아름다움의 친척이며 달의 앞면으로, 여유와 자유와 행복 곧 빛의 표상이다. 그런데 생의 전면에 가득한 어떤 웃음이 “울지 않으려고 웃고/ 잊으려고 웃고/ 숨을 쉬려고/ 웃는” 일종의 가면이었다면, 그 웃음은 울음의 동의어였을 뿐만 아니라 눈물의 자녀이기도 하다. 눈물을 웃음으로 ‘오독’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눈물은 “삶이 오독이란 걸” 깨달은 자의 생존 전략이거나 방어 기제가 된다. 그리하여 웃음이 아니라 모태에서 “배운” 눈물이 ‘나’에게 유전되었다. “웃는 내 모습이 반가워서” “웃을 때도 눈물이 나”는 이유는 삶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 “삶이 오독”이라는 진실 때문이다. 김금용은 “엄마”가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않았”던 이 진실을 유전 받아 오독되는 세계의 면면을 고쳐 쓰고 있다.
할매 콧구멍은 양쪽으로 벌어지고
인중은 짧고 턱도 밭아서
보는 이들마다 탄식을 했다
복도 없지,
내 인중을 좀 잘라 줄까나,
닭처럼 복을 발로 차게 생겼네
동네사람들 염려와는 반대로
눈만 뜨면 남의 밭이든 잡풀 뽑아주고
남의 닭과 강아지 먹이부터 챙겨주더니
오늘 동네사람들 모여들어
혼자 사는 할매 백 세 잔치를 열어주네
잔주름이 얼굴에 골을 쌓고
치아는 자연산 서너 개만 남았지만
하늘 가까운 산자락 밟고
땅 냄새 맡기 좋게 납작 엎드려 사니
절로 자연인이고 구도자라
뭘 비교하며, 뭘 부러워할 것인가
반짝이는 할매 눈빛 보소
사람농사는 상처투성이였지만
꿈은 갓 피어난 진달래여서
매년 봄을 기다리며 잠 못 이루는 걸
―「독거할매」 부분
대체로 현실 세계가 외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진실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김금용은 그 이면을 헤집어 숨겨진 진실을 집요하게 찾아낸다. “닭처럼 복을 발로 차게 생”긴 외모를 지녔을뿐더러 “사람농사”엔 실패한 ‘독거할매’는 현재적 관점에서 사회적 최하위 계층에 속하며, 나이까지 “백 세”가 된 노인이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혀 주목의 대상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잔주름이 얼굴에 골을 쌓고/ 치아는 자연산 서너 개만 남”은 그녀가 “꿈은 갓 피어난 진달래여서/ 매년 봄을 기다리며 잠 못 이루는 걸” 시인은 놓치지 않는다. “눈만 뜨면 남의 밭이든 잡풀 뽑아주고/ 남의 닭과 강아지 먹이부터 챙겨주”는 일은 비루해서가 아니라 “절로 자연인이고 구도자”였던 그녀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이 진실을 오독誤讀하여 사실의 딱지를 붙이는 일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바람조차 논스톱으로 내달리는키잘쿰 사막 한가운데서 자고새가 곡예를 펼친다 달리는 차량을 노려보다가 날갯죽지를 펴 위기를 벗어난다 끓어 넘치는 아스팔트 녹아내린구멍 속으로 겁 없이 머리를 박는 자고새 흔들리는 트럭에서 떨어지는 옥수수씨, 목화씨, 몇 알 야속하게 흩어진 밀가루를 쪼는 한 줌 목숨, 경건하다”(「키잘쿰사막의 자고새」)에서 ‘자고새’는 “곡예를 펼”치는 게 아니다. 기차가 달려오는 레일에 눕거나, 절벽을 향해 자동차로 질주하며 누가 오래 버티는가 하는 치킨게임은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 승리했을 때의 한 줌 자부심과 목숨을 같은 층위에 두는 게 인간의 무모함이라면, ‘자고새’는 차량들이 “논스톱으로 내달리는” 아스팔트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자신의 “한 줌 목숨”을 구한다. 이를 “경건하다”로 오독悟讀하는 시인은 과연 오독誤讀의 세계로 “돌진하는 흰 방울새”(「평형에 대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경계를 허무는 평형의 시학
검은 넥타이, 검은 옷을 걸친 무리가 자지러지는 꽹과리 소리에 맞춰 팔다리를 들썩거린다 풀어내지 못한 한이 몸 밖을 빠져나오는지 상여 나가는
부름 소리와 종소리에 셔츠 단추가 풀어진다 붉은 녹 더께로 낀 펌프 물이 솟구친다 강 건너가는 저녁 햇살이 붉은 그림자를 떨군다
언어가 지워진, 곡소리만으로도 어둠을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인지, 강을 건널 수 있는지, 단어를 잊어버린 치매 할머니의 반벙어리 무음만으로도
문이 열리고 신내림 받듯 저 어둠의 파도를 농지거리할 수 있는 것인지,
문지방이 사라져서 새는 날아와 창에 부딪히고 길 떠나는 당신은 헤어지는 방법을 잊어 내 방안에 짐을 내리고 의미 사라진 곡소리에 귀를 세워
수저를 두들긴다 흰 국화꽃이 향불을 빨아먹는다
―「경계에 걸렸다」 전문
한편, 경계 짓기도 진실을 가리는 통상적인 오독誤讀의 한 유형이다. 예를 들어, 울타리라는 기표는 내 집 개가 다른 집 마당을 함부로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뿐 아니라 외부인을 향해 내 집을 출입할 때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기의를 내포한다. 이를 확장하면, 생활과 문화 속 무수한 경계들은 배려와 금지의 이중주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금지 쪽이 강화되면서 울타리 밖의 모든 대상을 우리는 배타적으로 타자화하게 되었다. 이웃이나 공동체 개념이란 측면에서 편리하고 안락한 아파트를 선망하는 현대인의 기호는 그러므로 일정부분 오독된 것이다. 김금용이 대상에 덧씌워진 오독誤讀을 지우고 허무는 오독悟讀의 방식은 이 시에서도 계속된다.
생명체라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은 삶과의 대표적인 경계 지점에 있다. 산 자는 남고 죽은 자는 필연적으로 떠나는 게 동서고금의 순리지만, 산 자도 죽은 자도 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죽음은 비현실이 된다. 이 시에서 장례 현장이 현실적 공간과 환상적 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문객들(“검은 넥타이, 검은 옷을 걸친 무리”)이 “꽹과리 소리에 맞춰 팔다리를 들썩거”릴 때, “상여 나가는 부름 소리와 종소리”가 있고 “강 건너가는 저녁 햇살이 붉은 그림자를 떨”구는 것은 실상 동 시간대의 일이 아니다. “풀어내지 못한 한이 몸 밖을 빠져나오는”가 하면, “셔츠 단추가 풀어”지기도 한다. “문지방이 사라져서 새는 날아와 창에 부딪히”며, “길 떠나는 당신은 헤어지는 방법을 잊어 내 방안에 짐을 내”린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보내지 않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떠나지 않음으로써 상식적인 이 생사 유별의 엄연한 경계는 의미 없어진다.
검은 레깅스 귀퉁이를 잘라냈어요
가위질 소리가 침묵을 깨웠죠
귀만 날카롭게 삼각형으로 불어나는 긴 정적
소름 돋았어요
살갗마다 뿔을 달고 오글거리는 실핏줄이
춥고 시린 청보라빛 꽃잎을 피워냈어요
뺨과 목줄기, 팔다리 사이로 빛무더기가 흘렀어요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어둠은 빛을 품고, 빛은 어둠을 안고 날개를 폈어요
날개 냄새가 시큼해요
땀으로 번뜩이는 등줄기와 전라로 뛰는 무용수
옷 하나 벗었을 뿐인데
조여드는 무용복을 가위로 잘라냈을 뿐인데
무장한 외투에 묶였던 꽃씨가
나신으로 뛰는 머리칼마다 참제비고깔꽃이 피네요
프랑스 혁명의 고깔모자가 함성을 지르네요
꽃향기가 거친 입김을 따라 쏟아지네요
야생의 살냄새가 진동하네요
겁 없이 피어나네요
고깔모자가 달려나가네요
―「달리는 고깔모자」 전문
시적 화자가 무용수 자신인지 관객인지 좀체 드러나지 않는 이 시는, “검은 레깅스 귀퉁이를 잘라”내는 주체가 시 밖의 시인이며 동시에 시 속의 무용수와 관객이기도 하다는 혐의가 짙다. 시 속에서 이들은 혼재하며(“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빛과 어둠(“어둠은 빛을 품고, 빛은 어둠을 안고 날개를 폈어요”)의 경계 역시 그렇다. 혁명의 기미는 “무장한 외투”와 동의어인 “조여드는 무용복”을 “가위로 잘라”내자 발생한다. “머리칼마다 참제비고깔이 피”어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참제비고깔꽃’인가. 이는 봉건제도를 전복하고자 민중이 일으킨 “프랑스 혁명”에서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게 된 “고깔모자”의 유비로 사용하기 위한 장치이자 상상력이다. 이로 인해 무용수도, 관객도, 시인도 혁명의 동력을 얻는다. “꽃향기가 거친 입김을 따라 쏟아지”고, “야생의 살냄새가 진동하”면서 정신의 자유와 몸의 자유는 “겁 없이 피어”난다. “버거운 내 안의 나를/ 수선화 한 송이가/ 얼음꽃이 되어” “찌르”는 걸 “파괴라고 해야 하나/ 혁명이라고 해야 하나”(「신화가 되라고 이르네」)라고 누가 묻는다면 준비해둔 답이기도 하다. 혁명이다.
지배적 역학관계가 필요해
머리로 하는 게 아니지
나비가 찔레꽃 향에 취해 손을 잡을 때
따뜻한 혈류가 옮겨갈 때 종속이 시작되는 거지
사랑에 지배받고 싶은 거지
쉽게 결판나는 숫자 세상은 싫어
계산으론 탈출구가 뻔해서 지루해
나만의 색, 나만의 빛깔이 없거든
낯선 곳을 향해 달리는 사랑엔 계산이 없지
흰 방울새는 온 숲을 뒤흔들며 구애를 외치지
숲속 아무도 귀를 막지 않고 시끄러운 외침을 참아주지
간절함이 땅겨서겠지
직진하는 자의 눈빛이 숲을 흔들어서겠지
평생 한 번 내지르는 용기가 그리워서겠지
뒤돌아 모른 척 해봐도 흔들리는 걸음은 금새 알아채니깐
프로베니우스는 숫자를 내밀며 공식대로
세상 진리를 터득해냈지만,
주식투자와 부동산이 고단한 삶을 견딘다고 하지만
배를 비워야 머리가 맑아진다는 말씀이 맞는 거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픈 사랑의 속성은
주어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하는 개미보다
돌진하는 흰 방울새 울음이 더 간절한 것이지
―「평형에 대한 생각」 전문
초현실주의자의 강령이 시, 사랑, 혁명이라고 했던가. 혁명이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피의 투쟁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은 현실 세계의 모순을 극복하고 정화하기 위한 지극히 시적인 사랑이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는 “숫자”로 “세상 진리를 터득”했다고 믿으며 “주식투자와 부동산”에 매몰되기 일쑤인 일상에 기거한다. 그러므로 시적인 사랑을 “파괴라고 해야 하나/ 혁명이라고 해야 하나”라고 다시 묻는다면 대답해야 하리. 파괴다.
그것의 “지배적 역학관계”는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서 시작되어 “따뜻한 혈류”를 타고 온몸을 휘돌아 곁에 있는 우리에게, “계산이 없”는 “사랑”을 들고 “직진”한다. 현실이 아니라 “사랑에 지배받고” 사랑에 “종속”되는 새로운 “역학관계”를 성립하기 위한 것이다. “주어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하는 개미”가 현실에 “종속”된 존재라면, 현실이라는 수직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돌진하는 흰 방울새”는 생동하는 “사랑”이다. 생의 기미다. 그것은 세계를 적시며 흐르는 “평형”의 물이다.
물의 시간 말의 시간
숨소리로 온다
빛으로 온다
색으로 온다
푸른 그림자까지 길게 데리고 온다
빈 몸으로 헐벗고 섰던 들판
감자밭 긴 고랑마다 빛이 고인다
밟을 적마다 붉은 흙물이 올라온다
태아가 용트림을 시작하는지
까만 봉지를 찢고 기지개를 켠다
아크릴 물감을 꺼낸다
연겨자색 붓을 들어
촉촉한 복숭아빛 향내를 그린다
대청마루 밑 감자알을 꺼내온다
호미와 곡괭이를 굽은 밭고랑에 내건다
바람이 선수를 치며 들썩거린다
오늘은 빛이 길다
물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물의 시간이 온다」 전문
사물은 물을 뱉어내지만, 생명체는 물을 삼킨다. 흙은 살아있다. “빈 몸으로 헐벗고 섰던 들판”을 적시므로, 물은 “숨소리”다. “감자밭 긴 고랑마다 빛이 고”이므로, 물은 “빛”이다. “밟을 적마다 붉은 흙물이 올라”오므로, 물은 “색”이다. 물줄기가 “길게” 흐르고, “감자밭”이 짙게 우거질 것이므로 “푸른 그림자”는 물의 현재이고 물의 미래이기도 하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가 김금용 시의 현재와 미래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물의 시간”은 “말의 시간”과 겹쳐진다.
물 좀 줘요
입술이 말라가요
물의 힘을 잊었어요
―「물의 힘」 부분
내 죄는 게으르다는 것
발을 옥죄는 구두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동굴에 갇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빙빙 도는 구름에 머리를 박을 뿐
―「게으른 말」 부분
이 두 편의 시가 가진 유사성은 결여다. “물”과 “말”이 부족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다만 전자는 ‘물의 힘’을 강력하게 신뢰하는 어조이고, 후자는 ‘말의 힘’을 갖지 못한 화자 자신을 자책하는 어조라는 차이점이 있다. 「물의 힘」에 맞서 후자의 시 제목이 「말의 힘」이었으면 이 역시 ‘말의 힘’을 강력하게 신뢰하는 어조가 될 수도 있었겠다. “물의 힘을 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물의 힘’이 부각되듯, “동굴에 갇힌 말을 꺼내지 못”함으로써 도리어 ‘말의 힘’이 부각되는 방식으로. 따라서 「물의 시간이 온다」라는 기표는 ‘말의 시간이 온다’라는 기의를 거느리며 김금용 시의 현재와 미래를 현저하게 드러내는 표제작이 되었다.
귀 닫고
입 닫고
장대 높이 거꾸로 매달린 빨래
아픔은
당분간 보류
햇살이 어깨를 다독여 줄 때까지
늘어진 모양새를 잡아줄 때까지
옥상 맞바람에 부대끼며
침묵에 기대거라
말을 아낄 때다
 ̄「젖은 빨래」 전문
동일한 존재의 층위가 달라진다는 것은 ‘젖은 빨래’가 말라 옷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 “빨래”는 “귀 닫고/ 입 닫”아 내면부터 다스리며 “장대 높이 거꾸로 매달린”다. “아픔”도 “당분간 보류”시키는 자발적 능동이다. 이에 더해 “햇살”과 “바람”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는 자발적 수동을 행할 때 내면과 외면이 경계 없이 넘나들며 ‘젖은 빨래’는 마르기 위한 최적의 상태가 된다. “침묵에 기대”는 이 활달한 시간이 내면에 침잠할 때 “동굴에 갇힌 말”(「게으른 말」)은 해방의 기미를 띠고 존재의 풍요를 향해 비로소 발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빨래가 다 말랐다는 사실은 말을 회복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너, ‘젖은 빨래’들아, 지금은 “말을 아낄 때다”.
메타시로도 읽히는 「젖은 빨래」에 의하면, 아래 시는 말의 해방과 관련이 있다.
여름 한낮
까맣게 탄 내 그림자 아래
눈을 뜨는
흰 토끼풀꽃들
그래,
내가 마고 할미다
 ̄「포착」 전문
먼저, “내 그림자 아래” “흰 토끼풀꽃들”이 있는 풍경은 어딘지 익숙하다. 경계 짓기를 근대의 기수로 삼은 인간은 천지 사물을 인간의 발아래에 두는 장대한 플랜을 기획하였고, 현재도 착착 진행 중이다. 그 과정에서 사물의 본질은 오독되고 진실은 훼손되었다. 이에 발맞춰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화한 다수의 일반 대중은 흔히 “흰 토끼풀꽃들”을 “내 그림자 아래”에 두고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과 대상이 이분법적으로 대치하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대상은 비인격화되고 격은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 순간 김금용식 오독悟讀에 의해 반전이 일어난다. “그래,/ 내가 마고할미다”. 그러나 이 선언은 누구로부터 나오는 목소리인가.
문학예술의 언어는 당위성에 대한 이의제기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명료하게 지시하고 설명한다고 생각했던 말의 기능은 실상 실재의 수많은 부분 중 내가 이해하는 부분만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말의 실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불구에 가깝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본분이란 말의 본성을 되살리고, “동굴에 갇힌” 시인 자신과 시적 대상들의 목소리를 해방시키는 데 있다. 인간이 만든 숱한 경계를 허물고 지우려는 노력도 그중 하나다. 사물이 스스로 말할 수 없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말로 표현되는 세계의 실체는 여전히 반쪽짜리일 것이다.
풀꽃이 직접 말하는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시인은 사유와 상상력의 지평을 넓혔다. “마고할미”라는 한국적 창조신의 신화적 세계가 “흰토끼풀꽃들”의 현재에 현현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 내가 마고할미다”라는 목소리가 “흰 토끼풀꽃들”의 것이 아니라면, 이 시는 김금용의 시가 아닌 것이 된다. 그는 오독을 오독하는 시인이 아니던가.
-《문학저널》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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