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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동만특위 반민생단 투쟁
1. 북간도에서의 공산주의 전파
2. 조선공산당의 만주총국 설립과 항일투쟁
3.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중국공산당가입과 항일투쟁
4. 반민생단 투쟁
반민생단 투쟁20)은 북간도 지역에 세워진 상위의 공산당조직인 동만특위 내에서 1932년 10월에 시작되어 1936년 봄까지 계속되어 중국공산당에 의해서 조선공산당원들 500여명이 민생단 첩자로 몰려 억울하게 학살당한 대사건이다.
일제는 친일파들에 의해 세워진 민생단과 간도협조회를 통하여 동만특위에 밀정을 잠입시키거나 거짓 문서와 루머를 통하여 중공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원을 이간질하여 와해시키는 공작을
벌였고 동만특위의 중공공산당 한족(漢族)간부들은 진위를 구별하지 않고 수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학살과 도망과 변절로 몰아갔다.
민생단의 설립과 해산
일제는 세계적인 경제공항과 식민지 경영의 실패를 만주 침략을 통해 만회하기 위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의 침략으로 삼중의 고난에21) 처한 재만 조선인들은 중공공산당에 속속 가입하여 “홍5월투쟁”과 “길돈폭동”, “춘황”투쟁과 추수투쟁으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동만주의 조선인들은 민족을 보존하고 혁명을 성취하려는 열정으로 항일유격대를 만들고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였다. 1932년부터 만주국의 대토벌에 맞서 싸웠던 항일유격대는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발전하였고 동북인민혁명군은 1936년에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하여 1940년 초까지 일제와 만주국을 상대로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민생단은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 침략을 기획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 일본제국주의 관료들이 친일파 조선인들을 앞장세워서 만든 친일단체로 용정에 본부를 두었다. 일제는 1931년 9월에 “갑자구락부”의 이사 조병상과 ❮매일신보❯ 부이사장 박석윤을 북간도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간도주재 일본총영사관의 지시아래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 김택현 등을 모아서 1932년 2월 15일에 일본육군 포병대좌였던 박두영을 단장으로 하여 “민생단”을 출범하였다. 민생단은 처음에 ‘조선인들의 생존권 확보’와 ‘조선인들의 자치’를 주장하여 동만조선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군이 항일투쟁을 하는 조선인들을 토벌하는 것을 변호하며 중공공산당이 지도하는 항일투쟁단체들을 “비적집단”이라고 매도하였다. 더 나가서는 일본군의 토벌을 간도지방의 치안유지와 양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것으로 정당화하였다. 민생단은 조선인자치의 깃발을 걸고 일제의 만주침략에 적극 협조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의 눈에 벗어나 증오의 대상이 되어 핍박과 배척을 당하게 만들었다.
중공동만특위는 1931년 9월 30일에 통고(通告)로 “일본 영도 밑의 이른바 조선인자치운동을 반대하고 통치계급들이 민족감정에 쐐기를 박아 이간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모든 주구단체들의 기편과 협잡을 반대하여야 한다”고 호소하였다.22)
1932년 3월 1일 다시 중공동만특위는 민생단은 “일본제국주의의 지휘 밑에 …일본 및 중국 군경들을 방조하여 한민족(韓民族)들을 체포하고 또한 한민족들을 투항하게끔 한다. 이는 완전히 중한민족의 연합전선을 분열시키고 중한민족혁명운동을 파괴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단체라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중한민족은 무기를 들고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모든 제국주의를 때려 부수자.”고 호소하였다.23)
같은 날에 중공왕청현위도 “격문”을 발표하여 일본제국주의가 민생단 등 주구조직들을 지시하여 “중한노고대중들의 연합전선을 파괴하고 압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중들을 착취하려함”을 폭로하고 단결하여 강도 일본제국주의를 때려잡자고 부르짖었다.24)
1932년 “춘황투쟁”가운데 각지의 당조직들에서는 민생단을 타격하는 투쟁을 중요한 과업으로 삼았다. 연길현 구수하, 상의향, 팔도구, 옹성라자, 로두구, 동불사, 소영자, 왕우구 등지의 조선인대중들은 민생단 간부들을 엄격히 징벌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 지역마다 민생단 가입을 취소하고 떠나는 자가 급격히 증가하여 민생단은 존폐 위기에 놓였다. 그리고 일제가 세운 괴뢰만주국의 국세가 굳건하여졌고 민생단이 내세우는 “조선인 자치”도 더 이상 일본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민생단은 1932년 7월 14일에 해산을 선포하였다.
반민생단 투쟁의 시작과 끝
반민생단 투쟁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민생단이 와해되고 난 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 투쟁은 동만지역의 당 조직과 혁명대열 및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민생단❯조직을 숙청한다는 목적으로
일어났고 무려 3년 반 정도나 지속되었다.
동만 조선인공산당원들을 얼어붙게 만든 반민생단 투쟁은 1932년 10월에 “송영감사건”에서 시작되었다.25) “송영감”은 당시 중공 연길현 로두구구위 문서였다. 같은 해 8월 초에 “송영감”은 로두구의 일본군 헌병분견대에 체포되었다가 1주일 후에 돌아와서 헌병대 유치장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하였다. 이 사건은 중공로두구 구위의 의심을 샀다. 그리하여 그는 로두구구위 문서로 돌아가지 못하고 연길농민협회가 발행하는 ❮농민투쟁보❯ 인쇄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10월 16일 연길현 세린하부근에서 활동하던 연길현항일유격대가 로두구 일본군 헌병분주소 헌병 상등병과 통역 주모 등 3명이 응암산(일명 매바위산)에서 지형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출격하여 일본군 상등병을 사살하고 통역 조모를 포로로 잡았다. 주모는 심문을 받을 때 “송영감”이 일본군헌병대에서 파견한 밀정이라고 자백하였다. 중공연길현위에서는 즉시 “송영감”을 체포하여 고문을 하였다. 악형을 견디지 못한 그가 자신이 “민생단”이며 20여 명의 민생단원이 당내와 유격대 안에 있다고 자백하자 중공동만특위는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모두를 총살하였다.
민생단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중공팔도구구위, 옹성자라구위, 의란구구위로 퍼졌다. 팔도구의 한 유격대원은 아무런 이유 없이 민생단원으로 체포되자 죽음을 면할 길이 없음을 알고 달아나면서 총을 나무에 걸어 놓고 “나는 민생단원이 아니다. 나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 싸우련다.”는 쪽지를 남겼다. 얼마 후 그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죽었다.26)
반민생단 투쟁의 불길이 화룡현으로 번졌다.
1933년 3월,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인 김성도가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 가서 청산위원회를 설립하고 평강구농민협의회 책임자인 이화춘을 체포하고 심사도 없이 “민생단분자”로 몰아 총살하였다. 이때부터 화룡항일유격근거지에서 2~3개월 사이에 “민생단분자”로 몰려 살해된 사람이 수십 명에 달하였다.27)
당시 중공동만특위는 고달픈 투쟁 상황과 좌경사상의 영향으로 민생단의 침투에 대하여 너무 과대하게 평가하였다. 1933년 5월에 중공동만특위 기관지인 ❮양도전선❯은 서기인 동장영이 쓴 “민생단의 역할, 토대 및 민생단을 반대할 데 대한 당의 과업”이라는 글을 실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와 만주의 자산계급들이 민생단이라는 주구단체를 조직하였다. … 형형색색의 한국민족주의자와 파쟁주의자(그들은 공산주의 가면구를 쓴 민족주의자들이다.)가 …모두 이 주구 민생단조직에 모여들어 민생단의 간부로 되었다. 때문에 민생단 주구단체를 반대하는 투쟁은 우리 당의 당면한 각항 과업에서 가장 중심으로 되는 과업이다. 이 과업은 동만당의 과업 일뿐만 아니라 전 만주 당조직의 과업으로 되었다.”고 강조하였다.28)
6월 초에 중공길동군 상무위원인 반경우와 양파가 중공만주성위 대표단을 구성하여 중공동만특위소재지에 와서 동장영을 회견하였다. 그들은 동장영에게 중공중앙의 “1.26”지시서한29)과 “1.26”지시서한을 지지하는 중공만주성위의 결의를 전달하였다. 이는 당의 극좌노선을 배제하는 새로운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이해하고 동만특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민생단투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서기인 동장영과 중공왕청현위는 오히려 제1차 확대회의에서 지시서한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며 정세를 분석하면서 왕청현위 서기 이용국과 군사부장 김명균을 “민생단분자”로 낙인 찍었다. 왕청현위 제1차 확대회의 후 동만당과 당원들 속에서 제1차 “반민생단투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이용국은 총살당하고 김명균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망쳐서 만주국에 위장 투항을 하였다. 그 후 학교에서 일하면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7월, 계속해서 반경우는 중공동만특위 동장영과 함께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에 가서 훈춘 당, 단 간부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중공중앙의 “1.26”지시서한과 “1.26”지시서한을 지지하는 중공만주성위의 결의를 전달하고 중공훈춘현위에서 소비에트정권을 건립한 것은 좌경로선이며 민생단의 음모라고 하였다. 그는 중공훈춘현 서기 서광을 일본 특무, 훈춘유격총대 제2대대 정위인 박두남을 “파쟁분자”이며 “민생단분자”라고 의심하고 출당을 선포하고 유격대 정위 직무를 철소하며 총을 회수하였다. 그리하여 박두남이 반경우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사건 발생 후, 중공동만특위는 이상묵을 훈춘에 파견하여 “반혁명숙청운동”으로 단번에 60여 명의 간부들을 모아 한 사람을 제하고 모두 총살하였다. 중공훈춘현위 선전부장이었던 김규봉도 “민생단 핵심분자”로 몰리어 1934년 봄에 총살을 당하였다.
그리고 지주나 부농 출신, 글 쓸 줄 아는 지식인, 과거에 민족주의 독립운동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사람, 조선공산당 계파에 속했던 사람, 투쟁 중에 오류를 범한 사람, 유격구 생활에 불평을 하는 사람, 밥 먹을 때에 밥알을 떨어뜨린 사람들을 모두 “민생단분자”로 몰아 100여 명을 숙청하고 총살하였다.30)
1934년 1월 7일, 공청단만주성위는 유격구와 유격대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반혁명민생단분자 200여 명을 색출하여 그 두목 12명을 총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934년 9월, 중공동만특위는 제1차 확대회의를 열고 투쟁의 예봉을 조선공산당에 참가하였던 보통당원과 대중들에게 돌렸으며 특별히 당의 각급 지도 간부들에게 돌렸다.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김성도는 “파벌투쟁수령”이라고 지적을 당하고 직무를 해임 당하였다. “민생단 두목”으로 지목당한 그는 손가락을 깨물어 “나는 민생단이 아니다.”라는 혈서를 썼으나 끝내 총살을 당하였다.
중공동만특위 제1차 확대회의 후 반민생단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으며 투쟁의 대상과 범위가 광범위해졌다. 10월 7일 중공동만특위는 민생단이 연길현 한 개 현에만 해도 1,200명 내지 1,500명이 있다고 보고하는데 이는 당시 민생단투쟁이 얼마나 과장되고 가공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중공왕청현위 서기였던 이용국이 총살된 후, 서기직무를 이어받은 김권일, 왕쳥현항일유격대 대장 양성룡은31) 중공화룡현위 서기 김일환, 유격대 정위 차용덕, 중공훈춘현위 서기 최창복, 선전부장 김규봉, 공청단훈춘현위 서기 정필국, 연길현 유격대 대장 박동근, 정위 박길등이 민생단분자로 몰려서 총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투쟁은 계속되었고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1934년 10월에 이르러 민생단자 분자로 몰려 사형을 당한 사람이 수백 명이 넘었고 동만지역의 당 조직과 항일유격대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32)
일제와 만주군의 끊임없는 토벌로 인하여 항일유격근거지는 엄청난 파괴를 당하며 한편으로 경제봉쇄로 식량난에 봉착하여 중공동만지역의 당내와 군대내 그리고 유격지 가족들 가운데 서 대대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일본 제국주의는 1934년 9월 투항자, 변절자, 귀순자를 모아 연길헌병분대의 특무외곽조직인 “간도협조회”를 세웠다. 간도협조회는 특무를 항일유격지에 잠입시켜 가짜 편지, 요언(謠言)을 날조하는 등 수단으로 당과 군대 내부의 혼란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동만특위의 간부들은 간도협조회의 음모와 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민생단이 당에 대거 투입되었다고 확신하며 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10월 1일 중공만주성위가 동만지역의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중공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반민생단투쟁 가운데 “서로 불신하는 경향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중공만주성위 또한 반민생단투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므로 민생단투쟁을 장기적이고 무자비하며 복잡한 계급투쟁으로 보며 “동만당과 인민혁명군은 일체 역량을 동원하여 대중 속에 들어가 심입된 계급투쟁을 확대하여 반민생단투쟁을 광대한 대중들의 운동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는 그릇된 지시를 내려 보냈다.33)
그릇된 지시를 받은 중공동만특위 임시집행위원회 서기 왕중산은 10월 1일자 중공만주성위 편지를 받은 후, 11월 5일 동만특위 특별회의를 열었다. 그는 회의에 의도적으로 조선인 간부 이상묵과 주진을 참가시키지 않았다. 회의 후 반민생단투쟁이 다시 고조되었다. 회의에서 포치(布置)한 투쟁은 사전에 당과 공청단현위 및 구위의 3분의 2이상이 민생단이며 당과 공청단 기관은 수량 면에서 10분의 6~7은 민생단이라는 틀을 짜놓고 당내와 군대내 그리고 대중 가운데서 전면적인 반민생단투쟁을 전개하였다. 심지어는 화룡현 대중가운데 10분의 9, 군대가운데 10분의 6~7이 민생단분자 라고 하면서 투쟁의 폭풍을 일으켰다.34)
1935년 초에 간도협조회는 첩자를 보내 한영호가 식량구입을 위해 부대를 떠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한영호사건”을 조작하였다. 한영호는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제1퇀 3연 연장 박춘과 독립사 사장 주진 등을 민생단분자로 지목하였다. 곧 이어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이상묵도 연루되었다. 주진과 이상묵이 도망치자 이 사건은 중공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어 주진의 수하에 있던 30여 명의 간부들이 민생단분자로 몰려 총살을 당하게 되였고 동북인민혁명군의 패장이상의 간부가 80여 명이나 총살을 당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민생단분자로 숙청된 사람이 400여 명에 달하여 근거지내에서 공포에 휩쓸린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고 귀순하였다.35)
1935년 3월, 간도협조회는 사람을 파견하여 회장인 김동한의 이름으로 이송일에게 쓴 가짜 편지를 왕청현 자피거우 유격구 안에 던지게 하였다. 이 가짜 편지로 인하여 반민생단투쟁 가운데 냉혹하기로 소문이 난 이송일도 민생단분자로 몰려서 총살을 당하였다.36)
동만지역 당과 유격근거지, 군에서 3년 가까이 진행된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당시 중공만주성위를 포함한 당 조직 내에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1934년 12월에 부임한 중공만주성위 서기 양광화는 민생단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보고 중공하얼빈시위 서기 위증민을 중공만주성위 전권대표로 파견하여 해결을 모색하도록 하였고 중공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는 일련의 지시들을 보냈다.
그러나 1935년 2월에 중공만주성위 길동순시원 오평은 동만특위에 편지를 보내어 동만특위가 중앙과 성당위와 반대되는 노선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유격구 내 10분의 6,7이 민생단이라는 것은 과장이며 만약에 그렇다면 인민혁명군이 진작 일본에게 멸망당했을 것이며 유격구의 대중들과 인민혁명군 안에는 단지 소수의 민생단분자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37)
위증민은 1935년 1월 중순에 연길현 삼도만 장지영에서 중공동만특위 지도자들을 만난 후, 2월 27일 왕청현 하마탕 대황위에서 중공동만특위와 공청단 동만특위의 제1차 연석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위증민, 왕덕태, 이학충 등 20여명이 회의에 참여하였는데 반수 이상이 조선인 간부들이었다. 위증민은 회의에서 중공동만특위 임시집행위원회의 사업보고를 듣고 중앙정치노선의 집행과 적들과의 투쟁 상황 및 금후의 투쟁과업에 관한 결의와 반민생투쟁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으며 동만특위에서 직접 지도, 관리하는 숙반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38)
연석회의는 반민생단투쟁에 관한 결의에서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였다. 하나는 (고위직 민생단 첩자였던) 수령과 하층대중 간에 분별없이 일률적으로 가혹한 형벌을 하고 총살해 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위직 민생단 첩자였던) 수령과 대중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자복하도록 (엄중한 형벌로) 위협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는 잘못을 시정하고 명확한 사실 확인 절차를 밟아 재판해야 하며 민생단 수령의 기만, 위협을 받아 민생단에 가입한 대중들에 대하여 분별할 것을 요구하였다.
3월 21일 중공동만특위는 왕청현 요영구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의 정위연석회의를 열었다. 위증민, 독립사 정위 왕덕태, 독립사 정치주 주임 이학충 및 제1퇀 정위 임수산 등 도합 11명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는 반민생단투쟁에 문제에 관련하여 “먼저 주요 지도기관의 민생단분자들을 숙청하고 점차적으로 민생단 간부와 각성하지 못한 민생단을 숙청해야 한다. 그러나 책략과 방법 면에서 대황위회의에서 채택한 ‘반민생단투쟁에 관한 결의’대로 처리하여야 하며 협박하여 공술하게 하고 또한 그것을 믿는 그릇된 작법을 금지하고 민생단의 기층 분자를 구별하여 정치교양의 방법을 실시하여야 한다.”39) 라고 지적하였다.
위증민도 역시 반민생단투쟁의 허구성과 민족 차별과 계급투쟁의 핵심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오직 과열처리와 과잉처벌 방법만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얼마 후 위증민은 소련에 가서 코민테른 제7차 대표대회가 열리는 기회에 코민테른주재 중국공산당대표단에게 ‘반민생단투쟁’문제를 포함한 동만지구의 항일투쟁문제를 구두와 서면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위증민이 소련으로 간 사이에 중공동만지구 당 조직에서는 반민생단투쟁을 계속하여 “민생단의 특위와 각 현위 성원” 25명을 체포하였다. 중공왕청현위 서기 겸 중공동만특위 숙반위원회 주석 및 선전부장인 이송일, 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독립퇀 퇀장 윤창범, 제2퇀 정위 김락천, 원 제3퇀 퇀장 이남규, 원 공청단 동만특위 서기 김창연 등이었다. 이들은 체포된 후 바로 총살당하였다.40) 동만지구 반민생단투쟁은 1936년 초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그러나 동만항일유격근거지가 해체되고 인민혁명군 제2군이 이동함에 따라 그리고 소련에 갔던 위증민이 돌아옴으로서 동만지역의 반민생단투쟁은 종말에 이르렀다.
소련에서 돌아온 위증민은 3월 초 안도현 미혼진에 있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의 주둔지에 도착하여 중공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지도간부회의를 열고 군대와 당의 건설사업에 관계되는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지도간부회의는 반민생단투쟁 문제를 토론하고 실제정황에 비추어 사실근거가 없는 고문에 근거한 공술에 의하여 민생단분자로 몰려 마안산에 감금되어 있는 100여 명의 동지들을 석방하고 그들을 다시 군대에 편입시켰다. 회의는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35년에 소집했던 확대회의의 결의대로 사업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제출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미 투쟁이 끝났음을 알렸다.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에 의하면 민생단분자로 몰려 사형당한 사람이 500여 명이나 되며 그 가운데서 현급 이상의 간부가 40여 명이나 된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실제적 증거가 있는 민생단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일제와 만주국의 끊임없는 토벌과 반민생단투쟁으로 동만지구 당조직은 엄중한 손실을 입었다. 1933년 중공동만특위 산하에 5개 현위, 24개 구 당위, 100개의 당지부에 1,403명의 당원이 있었는데 1936년에 와서는 중공동만특위는 이름뿐이고 산하에 현위가 없어졌으며 단지 남, 북 두 개 특별사업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는 4개 구 당위, 12개 당지부에 248명의 당원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20세기 30년대 초 전 동북에서 중국공산당 조직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동만지역 당조직은 마비상태에 빠져 동북혁명군 제2군에는 정치간부와 군사간부가 모자라는 위기가 나타났다.
6부로 계속됨
2022.7.8.새벽에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 주
21) 조선인의 뒤를 따라와서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고 생각하는 중국 관료와 군벌과 중국인들의 핍박, 일제 군경의 핍박, 친일파들의 회유와 핍박으로 1930년대 재만 조선인 특별히 북간도 조선인들은 다른 지역의 조선인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다.
22)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138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23) 양소전, 차철구 외 3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401, 40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24)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304쪽, 연변인민출판사, 2011
25) 황용국 외 다수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3 봉화⌟, 167쪽, 민족출판사, 1989
26)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141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27)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306쪽, 연변인민출판사, 2011
28)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141, 14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29) 1.26 지시서한은 국제공산당주재 중공대표단에서 중공중앙의 명의로 “만주의 각급 당부 및 전체 당원들에게 1933년 1월 26일에 보낸 서한이다. 만주의 상황과 우리 당의 임무를 논함 이란 지시는 좌경노선의 착오를 비판하고 적색지역과 백색지역의 대립상태를 극복하고 항일유격근거지와 적통치지역의 인민들 간의 상호관계를 강화하였으며 우수한 간부들을 적 통치지역에 파견하여 군중을 모으는 사업을 전개하여 항일유격근거지의 영향을 확대하고 광범한 군중들로부터 여러 면의 지원을 받으며 관문주의 착오를 숙청하여 항일유격대와 각 항일부대간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서 항일 유격대와 기타 항일부대가 항일통일전선을 폭넓게 결성하며 연합작전을 벌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홍5월투쟁”과 “길돈폭동”처럼 폭력으로 단숨에 혁명에 도달하려고 하는 극좌노선을 버리라는 지시였다.
30)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145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1) 유격대원들의 항의로 양성룡은 총살은 면하였으나 직위해제를 당하였다.
32)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148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3)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309쪽, 연변인민출판사, 2011
34)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150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5)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151, 15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6)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15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7)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311쪽, 연변인민출판사, 2011
38)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311, 312쪽, 연변인민출판사, 2011
39)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312쪽, 연변인민출판사, 2011
40)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155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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