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몇 마리 때문에 가려워서 잠을 설치긴 했습니다. 같이 잠을 자던 이탈리아 친구가 모기약을 뿌리고 나서 좀 잠잠해졌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버물리가 효과를 보였습니다. 이제 모기 걱정하며 걷게 되었습니다. 호수는 물고기 때문에 모기 유충이 조절되겠지만 물고기가 없는 논에서 모기들이 더 극성일 것입니다.
로폴로 (Roppolo)에서 산티아 (Santhià)를 거쳐 산 제르마노 베르첼리세(San Germano Vercellese)까지 21km를 걷는 날입니다. 62km의 캄미노 디 오로파(Il cammino di Oropa)와 겹치는 길입니다. 로폴로 순례자 숙소 (Casa del Movimento Lento)의 주인이 설계했다는 길입니다. 캄미노 오로파는 해발 183m의 산티아(Santhià) 기차 역을 출발하여 해발 1159m의 오로파(Oropa) 성지까지 역방향으로 갑니다. 세라 빙퇴석 언덕을 종주하는 완만한 오르막 코스입니다. 편안하게 숲 속을 3-4일간 걷습니다. 길표지, 안내책자, 크레덴시알, 완주증이 완벽하게 갖춰진 코스입니다. 오로파 성지(Santuario di Oropa)에는 연간 80만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찾습니다. 수도원과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이 있습니다. 케이블 카를 타면 해발 2400m의 몬테 카미노(Monte Camino)까지 갈 수 있습니다. 알프스 몬테 로사의 산줄기입니다. 비아 프란치제나와는 역방향입니다.
비아 프란치제나(파란 색)과 캄미노 디 오로파 (Il cammino di Oropa)
로폴로 마을 이름 로폴로(Roppolo)의 유래는 세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아폴로 신전을 의미하는 아폴리니스(Apollinis), 농지를 뜻하는 독일어 롭툴(Roptul), 마지막으로 피에몬테 지방 방언으로 요새를 뜻하는 로콜(rocol)입니다. 이중 롭툴(Roptul)은 독일 작슨의 오토1세가 만든 토지 문서와 그로부터 수십 년 뒤의 비아 프란치제나의 경유 마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을 이름에 관한 문서에서 십 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 로폴로 마을 두 언덕 위에 하얀 성과 종탑이 보였습니다. 순례자 숙소 (Casa del Movimento Lento) 앞을 지나 오르막 길에 있습니다. 군사용 방어 시설의 일부인 곳입니다. 성의 건물은 크게 두 채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동쪽 건물에 부속 성당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원래 켈트 족이었던 Vittimuli 들이 살던 곳이었다가 로마군대가 진을 쳤던 자리였습니다. 세라 둔덕이 끝나는 곳으로 사방이 잘 보여 성으로서 전략적인 우위를 가진 곳이었습니다. 13세기에 로마 군 진지 자리에 성을 건설했는데 15세기에 성은 사보이 왕가가 차지했습니다. 성의 소유권을 둘러 싸고 복잡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귀족들 간에 상당한 분규가 있었다고 합니다. 20세기 들어 성을 복원하는 중에 성의 벽체 속에서 발견된 전신 유골이 그런 분규를 뒷받침했습니다. 이 성은 17세기에 프랑스의 위협에 맞서 사보이 왕가의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스페인 카를로스 5 세와 프랑스 국왕 간의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였지만 충분한 방어 시설과 함께 잘 무장되어 있던 터에 프랑스의 공격을 잘 견뎌냈습니다. 이런 분쟁은 나폴레옹의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군사적 가치가 사라지자 성은 19세기에 민간에 매각되어 관광 휴양시설로 바뀌었습니다. 성의 일부는 옛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입니다. 이 성의 부속성당인 산 미켈레 성당(Chiesa di San Michele al Castello)은 12세기부터 있었습니다.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는데 사보이 왕가가 16세기에 다시 지을 때 일부가 보존되어 남아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고 천정은 짙은 청색 바탕에 문양이 깔린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빗방울이 후드득거렸습니다. 급하게 우의를 꺼내 입고 방향을 바꿔 미끄럽지 않을 자동차 길을 택했습니다. 성을 바라보며 자동차 길을 걸었습니다. 왼쪽으로 빙퇴석 언덕은 내려 앉았고 침엽수 활엽수가 섞인 숲이었습니다. 살짝 오르막 길 오른쪽으로 고 카트(go-kart)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작은 모형자동차 경주를 하는 곳으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놀이터였습니다.
언덕을 넘으면 까발리야(Cavaglià) 마을 북쪽 외곽지역입니다. 주택가를 걸어서 마을에 들어가자 산 로꼬 성당(Chiesa di San Rocco) 유적을 만났습니다. 나그네들의 수호성인 산 로꼬에게 헌정된 멋진 붉은 벽돌 건물이었습니다. 원 건물은 16세기에 이곳에 만연했던 역병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미완성 건물이라는 지적에 따라 17세기 초에 완공시켰습니다.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744년 역병이 만연하자 건물을 손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회 소속 건축가들이 바빌론 스타일을 건물에 도입하고 건축에 필요한 재정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입구 쪽의 아름다운 구조물도 지역 귀족이 주선했습니다. 그 후 건물은 방치와 복원을 되풀이했습니다. 나그네 눈에 아름다운 건물도 주민들에게는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둥근 아치가 특징인 바빌론 양식은 고대 에트루리아(Etruria) 인들에 의해 로마로 전수된 동양문명의 일부였습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 유럽 역사의 근본은 그리스-로마라고들 하지만 그 이전의 역사가 있었기에 그리스-로마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에트루리아 (Etruria)의 역사입니다. 중동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살던 에트루리아 인들이 기원전 10세기경에 기근을 피해 이탈리아 쪽으로 이동해 온 것입니다. 이들은 중동지역 바빌론에서 이미 왕정체제를 경험한 사람들로 정치적인 식견이 이탈리아 반도의 부족 별로 나누어진 미개인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에 방대한 면적을 다스릴 수 있는 정치체제를 세운 것입니다.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1 세기까지 존속했던 도시국가들이었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했던 다신교 민족이었습니다. 로마제국 멸망 시까지의 에트루리아 정서가 사회 밑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바닥정서가 드러나면서 구체제 즉 부족 국가형태로 사분오열되어 천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로마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벌써 문자와 문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문자를 들고 와서 라틴어의 근간을 제공했고, 그리스 신화를 업어와서 로마화 했습니다. 아랍의 건축 기술로 로마가 거대한 토목 건축물을 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의 경기장, 의상, 예술에까지 이들의 역할이 컸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근거는 오랜 세월의 에트루리아 역사를 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투루리아는 이탈리아였습니다.
카발리아(Cavaglià) 인구 3660명, 해발, 271m. 기원전 9세기 이전에 켈트 족이 정착했습니다. 기원전 2 세기에 로마가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로마제국 이후 귀족들이 차지 했다가 10세기경에 신성로마제국에 복속되었습니다. 이 동네가 비아 프란치제나의 주요 경유지로 정착된 때가 이 무렵이었습니다. 12세기에 자유도시가 되면서 번창하여 주요 종교시설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16세기에 사보이 왕국으로 속하면서 상당간 진통이 있었습니다. 켈트 족에게 또는 로마 군에게 말을 공급하던 마을 기능이 동네 이름으로 되었습니다.
로폴로에서 이곳까지 4km를 걸었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구 시가의 좁은 골목을 걸어 성당 앞 광장(Piazza Parrocchiale)으로 갔습니다. 산 미켈레 성당(San Michele Arcangelo)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성당 터는 카롤링거 시대인 8세기까지 거슬러 가는 역사 오랜 장소입니다. 원래 성당을 철거하고 15세기에 성당을 다시 지었다가 18세기에 또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후기 바로크 또는 신 고전주의 양식으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내부는 로코코 양식의 화려함이 있었습니다. 둥근 돔이 인상적인 성당이었습니다.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돔입니다. 이 돔 천정에서 내려오는 빛은 아름다운 문양을 비추고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제대 바로 앞에는 미카엘 천사 (San Michele Arcangelo)의 조각 상이 있는데 내부에 기계장치가 되어있어서 작동을 시키면 미카엘 천사가 날개를 펴고 발 아래 있는 악마를 칼로 내려치는 동작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곳 파이프 오르간은 제작자의 명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작은 마을이어서 몇 발작 안 갔는데 도시 변두리였습니다. 론돌리노 성 (Castello Rondolino)앞 광장 (Piazza Machieraldo) 을 지나갔습니다. 이 동네 부자였던 론돌리노(Rondolino) 가문이 18세기 초에 지었다는 성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중세 풍으로 건물을 재 단장했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추레한 건물이었습니다. 붉은 성채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상당한 복원 노력을 해야 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관광자원은 많은데 이를 감당할 재정 수입은 부족해서 그냥 놔두었을 것입니다. 이 마키에랄도 광장(Piazza Machieraldo) 근처에 순례자 숙소가 있었습니다.
마을을 벗어나 마을 길을 한참 돌았습니다. 도시에서 500m쯤 떨어진 큰 길가에 아름다운 성당이 묘지 가운데 있었습니다. 묘지 규모에 비해 돔이 유난히 높은 산타 마리아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i Babilone)입니다. 바로크 스타일의 타원형 건물입니다. 13세기부터 있었던 건물을 헐고 17세기에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우아한 모습의 현관은 18세기에 증축한 것입니다. 지붕 위의 돔에는 창이 있습니다. 돔의 꼭대기는 빛을 내는 등이 달린 등대였습니다. 내부 프레스코화는 세월을 타고 퇴락해가는 중입니다.
알프스의 발테아 빙하의 빙퇴석 언덕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입니다. 완전 평지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지형이어서 높지 않은 언덕과 골짜기가 완만하게 이어졌습니다. 길은 구불거리면서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목장, 작은 숲, 밭과 드문드문 있는 농가들을 지나갔습니다. 초원 위에 핀 꽃들이 화사했습니다. 채소, 곡류, 가축 등을 다루는 농장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옥수수 밭, 수수 밭을 지나고 작은 숲을 지나자 앞이 훤했습니다.
비포장 농로를 걸어 들판을 지나 A4번 고속도로 위로 지나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다리 난간에 철망을 쳐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비포장 도로를 지나 토리노-밀라노 노선의 철도 밑으로 지나갔습니다. 철도 용 다리는 연약지반 벌판을 길게 가로질렀습니다. 다리 밑 그늘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로폴로 마을을 출발하여 대략 10km 정도 걸어왔습니다.
이제 알프스 언저리의 세라(Serra) 빙퇴석 언덕은 완전히 끝나고 대 평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캄미노 디 오로파 표지가 비아 프란치제나 길 표지와 함께 선명한 길에 있었습니다. 벼농사가 주 작물인 들판이어서 여름철 모기 퇴치제가 필요한 지역입니다. 파리, 모기, 빈대는 순례길 물컷 3종 세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