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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1-12절. 베드로가 대제사장들에게 설교함
1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s they were speaking to the people, the priests and the captain of the temple guard and the Sadducees came up to them,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Λαλούντων δὲ αὐτῶν πρὸς τὸν λαὸν,
speaking now of them to the people
직역하면 ‘그들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는데’라는 뜻입니다.
‘말할 때’(Λαλούντων)는 현재분사로서(speaking) ‘말하고 있는데’라는 뜻입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ἐπέστησαν αὐτοῖς οἱ ἱερεῖς καὶ ὁ στρατηγὸς τοῦ ἱεροῦ καὶ οἱ Σαδδουκαῖοι,
came upon them, the priests and the captain of the temple and the Sadducees
직역하면 ‘제사장들과 성전 관리자와 사두개인들이 그들에게 왔다’는 뜻입니다.
‘이르러’(ἐπέστησαν)은 부정과거로서(came) 과거에 온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제사장들’이란 24 반차(precincts)를 따라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제사장들을 칭하는 말입니다. (눅 1:23)
‘성전 맡은 자’란 제사장 가문의 지도자 한 사람으로서 성전에서 경비 업무들을 맡아 일하는 레위인들을 지휘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사두개인’은 제사장 가문 사람과 성전 관리를 맡은 유대교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고, 바리새파와 함께 양대 종파를 형성하며,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이었고, 바리새인은 부활과 천사들을 믿었습니다.
사두개파의 우두머리가 산헤드린 공회 의장직을 맡고 있었고, 이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지독하게 미워했던 적들이었습니다(마 16:11-12, 22:23).
2절.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eing greatly disturbed because they were teaching the people and proclaiming in Jesus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διαπονούμενοι διὰ τὸ διδάσκειν αὐτοὺς τὸν λαὸν καὶ καταγγέλλειν ἐν τῷ Ἰησοῦ τὴν ἀνάστασιν τὴν ἐκ νεκρῶν,
being distressed because of the teaching their the people and proclaiming in the Jesus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직역하면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 안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선포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란 뜻입니다.
‘가르치고’(διδάσκειν)와 ‘전함을’(καταγγέλλειν)은 둘 다 부정사형 동사로서(to teach, to proclaim) ‘가르치고 있는 것과 전파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제사장들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직분이었는데(신 18:17, 대하 31:4, 느 8:2, 말 2:7), 서민인 사도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몹시 싫어했습니다.
‘싫어하여’(διαπονούμενοι)는 현재분사로서(being distressed) 몹시 싫어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being greatly disturbed).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행 23:8), 사두개파 사람인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즉 사두개파 사람과 제사장들은 인생이 이 세상으로 끝난다고 주장하고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므로, 이것은 사두개파 사람들의 교리의 뿌리를 도끼로 찍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3절.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laid hands on them and put them in jail until the next day, for it was already evening.
그들을 잡으매--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καὶ ἐπέβαλον αὐτοῖς τὰς χεῖρας καὶ ἔθεντο εἰς τήρησιν εἰς τὴν αὔριον·
And they laid on them the hands and put (them) in jail until the next day
직역하면 ‘그들이 그들에게 손을 댔고, 다음날까지 옥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손을) 댔고’(ἐπέβαλον)는 부정과거로서(they laid) 제사장 등이 두 사도를 체포한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었다’(ἔθεντο)도 부정과거로서(put) 대제사장 등이 두 사도를 투옥시킨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ἦν γὰρ ἑσπέρα ἤδη.
it was for evening already
직역하면 ‘왜냐하면 이미 저녁이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여기 동사(ἦν)는 미완료과거로서(it was) 시간적으로 저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저녁’(ἑσπέρα, evening)이란 저녁 제사(evening sacrifice) 드릴 때를 가리키며 오후 4시경을 가리킵니다.
이때 성전 문이 닫히고, 생사를 갈음하는 재판은 낮 시간 동안에 시행되어야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생전에는 감옥에 갇힌 적이 없었고, 감옥에 갇힌 것은 이번이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당국자들이 권력으로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사도들을 물리적으로 억압하고 투옥시켰지만, 이 복음 진리를 듣고 믿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애굽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할수록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많아진 것과 같습니다. (출 1:12)
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many of those who had heard the message believed; and the number of the men came to be about five thousand.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πολλοὶ δὲ τῶν ἀκουσάντων τὸν λόγον ἐπίστευσαν,
many but of those having heard the word believed
직역하면 ‘그러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이가 믿었다’는 뜻입니다.
‘들은’(ἀκουσάντων)은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heard) 과거에 확실히 들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믿었다’(ἐπίστευσαν)도 부정과거로서(believed) 두 사도를 통해서 복음 전도의 말씀을 많은 사람이 믿었던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καὶ ἐγενήθη ἀριθμὸς τῶν ἀνδρῶν ὡς χιλιάδες πέντε.
and became the number of the men about thousand five
‘되었더라’(ἐγενήθη)는 부정과거로서(became) 과거의 역사적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5절.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On the next day, their rulers and elders and scribes were gathered together in Jerusalem;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Ἐγένετο δὲ ἐπὶ τὴν αὔριον συναχθῆναι αὐτῶν τοὺς ἄρχοντας καὶ τοὺς πρεσβυτέρους καὶ τοὺς γραμματεῖς ἐν Ἰερουσαλήμ,
It came to pass then on the next day were gathered together their the rulers and the elders and the scribes in Jerusalem
‘모였는데’(Ἐγένετο--συναχθῆναι)는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 앞의 단어(Ἐγένετο)는 부정과거로서 ‘되었다’(become)는 뜻이고, 뒤의 단어(συναχθῆναι)는 부정사형 수동태 동사로서(to be gathered together) 두 동사를 합하여 ‘함께 모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유대나라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의 세 구성원들입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관리들’(ἄρχοντας)이란 우두머리들이란 뜻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 가야바와 증경 대제사장 안나스 등을 가리킵니다.
‘장로들’(πρεσβυτέρους)이란 제사장들이나 각 지방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서기관들’(γραμματεῖς)이란 율법 전문가들인데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한 적이 있었고(요 18:13), 안나스의 사위인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여 없애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던 자이고(요 11:49-50),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내어준 자였는데(요 18:28),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악랄하고 비열하고 지극히 세속적인 인간이었다고 합니다(Fararr, the life of Jesus).
이때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나 가말리엘은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Baker)
6절.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Annas the high priest was there, and Caiaphas and John and Alexander, and all who were of high-priestly descent.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καὶ Ἄννας ὁ ἀρχιερεὺς καὶ Καϊάφας καὶ Ἰωάνης καὶ Ἀλέξανδρος, καὶ ὅσοι ἦσαν ἐκ γένους ἀρχιερατικοῦ,
and Annas the high priest and Caiaphas and John and Alexander, and as many as were of family high-priestly
‘참여하여’(ἦσαν)는 미완료과거로서(were) 직역하면 ‘계속 있었다’는 뜻입니다.
‘안나스’는 AD 6-15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했는데, 로마 총독에 의해서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대를 이었는데, 그 후에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어 18-36년까지 재위하면서 예수님을 재판했고,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시무 중에도 원로인 안나스는 대제사장 가문의 최고 수장으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눅 3:2, 요 18:13)
7절.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they had placed them in the center, they began to inquire, "By what power, or in what name, have you done this?"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καὶ στήσαντες αὐτοὺς ἐν τῷ μέσῳ, ἐπυνθάνοντο
and having placed them in the center, they began to inquire
직역하면 ‘그들을 가운데 세우고, 그들은 계속 물었다’는 뜻입니다.
‘세우고’(στή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laced), 확실히 세운 사실을 가리키고, ‘묻되’(ἐπυνθάνοντο)는 미완료과거로서(they began to inquire) 계속 질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Ἐν ποίᾳ δυνάμει ἢ ἐν ποίῳ ὀνόματι, ἐποιήσατε τοῦτο ὑμεῖς;
in what power, or in what name, did this you?
‘행하였느냐’(ἐποιήσατε)는 부정과거로서(did) 과거에 행한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너희가’(ὑμεῖς: you)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란 말은 산헤드린 공회가 허락지 않았는데, 기적을 사도들이 행했다고 정죄하려는 것이고, 기적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적 자체를 비난한 말은 없었습니다(행 4:14).
사실 사두개파는 기적 자체를 부인하는 종파였기 때문에, 앉은뱅이가 나은 기적은 사두개파에 대해서는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사두개파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시비하지 않은 것은 공회원의 구성원들 중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부활을 믿기 때문에, 공회 자체의 분열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행 23:7-8)
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n Peter, filled with the Holy Spirit, said to them, "Rulers and elders of the people,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τότε Πέτρος, πλησθεὶ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εἶπεν πρὸς αὐτούς
Then Peter, having been filled with Spirit Holy, said to them,
직역하면 ‘그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그들에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충만하여’(πλησθεὶς)는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filled)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르되’(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said) 단호하고 확실하게 말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고위 관직자들에게 끌려가서 위기 상황을 만나면, 그때 복음 전도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께서 반박한 말을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이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마 10:19-20)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Ἄρχοντες τοῦ λαοῦ καὶ πρεσβύτεροι,
Rulers of the people and elders ,
‘관리’(Ἄρχοντες)란 단어는 ‘우두머리, 통치자’(chief, ruler)를 가리킵니다.
9절.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f we are on trial today for a benefit done to a sick man, as to how this man has been made well,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εἰ ἡμεῖς σήμερον ἀνακρινόμεθα ἐπὶ εὐεργεσίᾳ ἀνθρώπου ἀσθενοῦς,
if we this day are being examined as to good work [to the] man ailing,
‘질문한다면’(ἀνακρινόμεθα)은 현재 수동태로서(are being examined) ‘우리가 질문을 받고 있다면’(we are being examined)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직역하자면 ‘만일 오늘 병든 사람의 착한 행동에 관해서 우리가 질문을 받고 있다면’이란 뜻입니다.
‘우리가’(ἡμεῖς: we)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위협에 대해서 같이 공격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행한 일이 ‘착한 일’임을 말하면서, 이런 실제적인 증거로써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공격에 대해 변호를 했습니다.
이것은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훌륭한 태도입니다. (Baker)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ἐν τίνι οὗτος σέσωσται,
in what [means] he has been saved
‘구원을 받았느냐고’(σέσωσται)는 현재완료 수동태(he has been saved)이고, 여기 완료는 계속적인 상태(continuing state)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떤 역본에는 ‘치료를 받았느냐고’(has been healed, has been made well)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구원’이라는 말이 육신적인 치료에도 쓰이고, 영적 죄 용서에도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도 육신의 병만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 즉 예수님 이름으로 죄 용서도 받았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치료를 받았다고 반드시 예수 믿고 영적인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 병 치료를 받았으나, 그 후로 예수님을 당국자에게 고발하는 극악한 불신자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let it be known to all of you and to all the people of Israel, that by the name of Jesus Christ the Nazarene, whom you crucified, whom God raised from the dead-- by this name this man stands here before you in good health.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γνωστὸν ἔστω πᾶσιν ὑμῖν καὶ παντὶ τῷ λαῷ Ἰσραὴλ,
known let it be to all of you and to all the people of Israel
직역하면 ‘너희 모두와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알게 하라’는 뜻입니다.
‘알라’(γνωστὸν ἔστω)에서 앞의 단어(γνωστὸν)는 동사에서 나온 형용사이고(known), 뒤의 동사(ἔστω)는 명령형입니다(let it be).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ὅτι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οῦ Ναζωραίου,
that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the Nazarene,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무슨 권세와 이름으로 했느냐’고 물었을 때, 사도들은 솔직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답변했습니다.
재판에서 이런 진실과 솔직함은 좋은 변론의 태도입니다.
재판에서 권위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적당히 타협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려는 것은 더욱 위험한 방법입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관원들에게 적대감을 주어서 자신들의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지라도, 솔직하게 예수의 이름과 권세를 밝힘으로써 재판에서 자신들의 말과 태도가 진실함을 입증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ὃν ὑμεῖς ἐσταυρώσατε,
whom you crucified,
‘십자가에 못 박고’(ἐσταυρώσατε)는 부정과거로서(crucified) 대제사장 등이 예수님을 과거에 십자가에 못 박은 역사적인 확실한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직역하면 ‘그를 바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너희가’(ὑμεῖς)가 강조되어 ‘바로 너희가’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ὃν ὁ Θεὸς ἤγειρεν ἐκ νεκρῶν,
whom the God raised from dead
직역하면 ‘그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뜻입니다.
‘살리신’(ἤγειρεν)은 부정과거로서(raised)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두 가지 사실을 병행해서 전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에서 권력자들을 두려워서 사실을 은폐하지 않고, 성실하게 답변했습니다.
즉 재판하는 당국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성실하게 답변했습니다.
재판에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런 성실한 증언은 유리한 판결을 가져오게 합니다. (Baker)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ἐν τούτῳ οὗτος παρέστηκεν ἐνώπιον ὑμῶν ὑγιής.
in him this has stood before you sound
직역하면 ‘이 사람이 그 안에서 건전해져서 너희 앞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섰느니라’(παρέστηκεν)는 현재완료로서(has stood) 지금까지 현재도 서 있다는 뜻입니다.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This Jesus is the stone rejected by you builders, which has become the cornerstone.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οὗτός ἐστιν ὁ λίθος ὁ ἐξουθενηθεὶς ὑφ’ ὑμῶν τῶν οἰκοδόμων,
This is the stone the having been rejected by you, the builders
직역하면 ‘이는 너희 건축자들에 의해서 거절된 돌이다’는 뜻입니다.
‘버린’(ἐξουθενηθεὶς)은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rejected) 예수님이 과거에 대제사장 등에게 버려졌던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ὁ γενόμενος εἰς κεφαλὴν γωνίας.
which having become into head of corner
직역하면 ‘그것은 모퉁이의 머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되었느니라’(γενό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ecome)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본 절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한 것인데, 예수님께서도 이 시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마 21:42)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집(성전)을 건축하는데, 기초가 되시는 메시아를 기쁨으로 영접해야 할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집의 주춧돌이 되시고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을 거역하고 죽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벧전 2:5).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re is salvation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that has been given among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καὶ οὐκ ἔστιν ἐν ἄλλῳ οὐδενὶ ἡ σωτηρία·
And not there is in other no one the salvation
직역하면 ‘다른 이 안에는 아무에게도 구원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기 동사(ἔστιν)는 현재형입니다(there is).
여기 ‘구원’(σωτηρία, salvation)이란, 근본적으로 믿는 자들을 파멸에서 건져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deliver believers out of destruction and into His safety)을 가리키며, 구출하고 보전하고 구원하는 것(deliverance, preservation, salvation)을 뜻합니다.
’구원‘이란 몇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Strong by Bible Hub.
(1) 원수들의 괴롭힘에서 건져주심(deliverance from the molestation of enemies, 행 7:25), 육체적인 안전과 보호(preservation of physical life), safety, 행 27:34), 영혼의 안전이나 구원(the soul's safety or salvation, 누가 19:9, 벧후 3:15), 메시아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the Messianic salvation, 요 4:22; 행 4:12; 행 13:47; 롬 11:11; 살후 2:13; 딤후 3:15; 히 2:3; 히 6:9; 유 1:3).
(2) 그리스도인이 현 세상에서 누리는 구원의 은총들을 가리킵니다. (salvation as the present possession of all true Christians: 고후 1:6; 고후 7:10)
(3) 세상의 모든 죄악과 질병과 불행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재림 후에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미래에 누릴 모든 은택들과 축복들을 가리킵니다 (future salvation, the sum of benefits and blessings which Christians, redeemed from all earthly ills, will enjoy after the visible return of Christ from heaven in the consummated and eternal kingdom of God: 롬 13:11; 살전 5:9; 히 9:28; 벧전 1:5, 10; 계 12:10).
천하 사람 중에--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οὐδὲ γὰρ ὄνομά ἐστιν ἕτερον ὑπὸ τὸν οὐρανὸν τὸ δεδομένον ἐν ἀνθρώποις
not for name is there other under the heaven the having been given among men
직역하면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 주어진 다른 이름이 천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주신’(δεδομένον)은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given) ‘주어진’이란 뜻이고, ‘있지’(ἐστιν)는 현재형 동사입니다(is there)
<예수님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어떤 도덕적 고행(불교)이나 율법적 선행(유대교)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대리적 속죄로써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골 1:14)
<다른 이름은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가장 높은 이름이고, 예수님의 이름이 가장 능력 있는 이름이고, 예수님의 이름만이 가장 확실한 구원의 근원이고, 예수님의 이름이 가장 친근한 이름이고, 예수님의 이름만이 가장 쉬운 구원의 출처라는 뜻입니다. (Baker)
구원을 받을 만한
ἐν ᾧ δεῖ σωθῆναι ἡμᾶς.
by which it behooves to be saved us
직역하면 ‘그것은(그 이름은) 그것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기에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여기 두 동사(δεῖ σωθῆναι) 중에 앞의 동사는 현재형으로서(it behooves) ‘그것이 마땅하다’는 뜻이고, 뒤의 동사(σωθῆ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수동태 동사입니다(to be saved)
이 예수님의 이름은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병을 고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죄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Halles. System of Christian Ethics).
설교
1.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낫게 했으니 얼마나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 일에 시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유익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손해 보는 사람이 있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편으로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대제사장이나 장로나 서기관 등이 베드로에게 시비를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해명합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9절)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제사장들은 날마다 성전을 들락거리면서, 오랫동안 앉은뱅이 거지를 보았는데도, 자기들은 그 앉은뱅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천한 어부 베드로가 말 한마디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했으니, 대제사장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책임자는 대제사장인데, 천민인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았으니, 대제사장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즉 대제사장들은 명예가 실추되고 권세가 땅에 떨어지고, 천민 베드로는 백성들에게 칭송을 듣고, 권위가 높아진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장들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으니까, 대제사장과 종교 권력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1-3절.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누군가 백성들의 인기를 얻으면, 굉장히 신경을 쓰고, 싫어합니다.
특히 기적적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은 그 파급효과가 대단히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 정치인은 비현실적인 부활과 천국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비현실적인 일은 세상 정치인이 도저히 감당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절. 제사장, 성전을 맡은 자, 사두개인은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기독교에 있어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도는 현실주의자들인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아주 싫은 내용이고, 사두개파의 반대파인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사두개파는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을 주장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즉, 베드로가 부활을 전하는 것과 백성들의 인기로 인해서 바리새인들의 세력이 높아지면, 자기들 제사장들과 사두개파가 세력을 잃게 되기 때문에, 부활의 도 전함을 싫어하고, 못 하게 했던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족속들은 모두 사두개인들이고, 귀족이고 부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고, 귀족의 신분을 누리고, 부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 질서가 변하고, 자기들의 권력이 위협받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부자와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은 기존 질서가 변하는 것을 싫어하는 보수파들이고, 신분이 낮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은 사회질서가 개혁되고,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변혁의 세력이었고, 기존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의 확산을 막으려고 온갖 핍박과 무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처럼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기존의 질서를 든든히 유지하려고 하는데, 신진 기독교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기적적으로 병자를 고치면서 혁신적인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니, 몹시 못 마땅히 여기고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진리 면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세상 마귀의 나라가 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 나라 전도자들인 베드로와 요한이 기존 질서를 파괴한다고 핍박한 것입니다.
7절.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가만히 보니 베드로가 거사를 행할 만한 인물이 못 된 천민이기 때문에, 배후에 어떤 정치적인 세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무슨 권세로, 누구 이름으로> 했냐고 묻습니다.
즉 <누가 시켰느냐>는 말입니다.
현실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제사장들과 사두개파는 베드로의 배후 인물, 정치적인 인물을 찾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뉘 이름으로 하느냐, 배후가 누구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 반사회적인 정치 세력이 누구냐고 심문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전파는 순전히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것인데, 제사장들과 사두개파는 정치적으로 몰고 가려고 하고, 반사회적인 소란죄로 처벌하려고 합니다.
예나 오늘이나 기독교에 대해 정부 당국자들은 반정부적인 내란죄, 기존 질서를 혁명으로 뒤집으려는 혁명 세력으로, 소요죄로 처벌하지, 종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예수님도 로마에 반기를 든 반정치적인 죄목으로 사형 처분을 당했습니다.
요한복음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눅 23:2)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고 물었고, 로마의 통치 이념에 반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3 유대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이 빙 둘러서 심문하고 있는데, 천민인 베드로가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 충만하여 거침없이 설교를 했습니다.
8절.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베드로는 감옥에서 밤새 기도했을 것이고, 기도함으로써 성령 충만해져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권력자들 앞에서 성령님이 담대하게 말하게 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권력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해야 할 때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 충만을 주시고, 성령님이 말할 것을 주십니다.
체험해보신 분들은 압니다.
4. 그래서 마침내 베드로는 최고 통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담대하고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10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산헤드린 공회에는 50일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한 장본인 가야바와 그 제사장 문중이 다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담대하게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셨고, 이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나았소>라고 선포했습니다.
50일 전에는 대제사장 집의 하녀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바로 대제사장들과 최고의 재판관들 앞에서 <당신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는데, 그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소>라고 담대히 지적했습니다.
참으로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 나라 최고 권력자인 대제사장을 정면으로 정죄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는 죄를 지적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4. 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 (롬 10:13)
나면서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면서 베드로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이름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들로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이고, 타협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베리알(마귀)이 일치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15-16.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확장되면, 마귀 권세와 세상 권력자가 싫어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핍박을 이기고,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