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청화 큰스님
우리는 종교철학에 있어서
아주 깊이 기억해 둘 또 위대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누군가 하면 서기 3세기 전에 나온 플로티노스(Plotinus B.C 269-205),
이집트 태생인데 로마에 나와서 많은 사람을 지도한 분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우리 종교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꼭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귀감 삼을 만한 위대한 분입니다.
우리 불교인이사 부처님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도 남지만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일반적인 말씀을 저는 하는 것입니다.
플로티노스 철학은 주로 어떠한 것인가 하면,
여러 가지로 우리가 참으로 주목할 만한 그런 것이 되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 그 일자(一者, nous, the one)라,
한 일(一)자, 놈 자(者)자, 일자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와서 다시 하나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어떠한 것도 하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떠한 것도 하나에서 나와 가지고
다시 하나로 본래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도리야 우리 불교에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도리 아니겠습니까.
플로티노스가 한말 가운데서 중요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영식(靈識)이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일자라는
본래 근본자리로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맑고 맑아지면 드디어는 그때는
하나로 딱 일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이른바 하나라는 근원적인 도리하고 신비적합일(神秘的合一)이라,
그것보고 신비적 합일이라 그래요.
직관적(直觀的) 하나가 된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플로티노스를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 인고 하면,
사실은 플로티노스가 이른바 자기 스스로 모두를
다 독창적으로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Platon B.C 427-347),
플라톤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단 말입니다.
플로티노스 학파를 가리켜서 신플라톤주의 그래요.
신플라톤주의라.......
그런데 사실은 서구 서양철학을,
저는 불교인이라 아직도 제가 철학서를 깊이 연구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어디 가서 말하려고 하니까 그때그때 봐야겠지요.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는 대체로 신플라톤주의를 표방을 했어요.
가사 기독교인(基督敎人)도 위대한 신학자(神學者)가 많이 있습니다.
맨 처음 초기에 4세기경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그분도 위대한 교부(敎父)철학의 완성자인데 그 분도 위대한 분인데
그분 철학에도 플라톤주의가 있습니다.
그분 철학에도 이른바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거기에 상당한 분야를 차지한 단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교로 부터서 기독교로 온전히 개종할 때는
신플라톤주의를 영향을 대단히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세기에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tus Eriugena, A.D 810-877),
이분도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에리우게나 이분도 역시 신플라톤주의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그 뒤에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D 1225-1274),
이분은 신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5세기에 유명한 신비철학자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A.D 1260-1327),
또는 15세기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A.D 1401-1464)
이분은 추기경입니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도 굉장히 위대한 추기경입니다.
이분도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플라톤주의를 한마디로 하면 어떠한 것인가.
제가 주로 말씀하고자하는 것은
신플라톤주의가 의지하는 사상적 핵심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범신론(pantheism)이라.......
우리가 현대를 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不在)라
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잘 모른단 말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잘 모르는 그것이
이른바 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알아야 참다운 세계관 인생관이 되어서
자기도 바르게 지도하고, 또는 가족문제라든가
모든 인간의 갈등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인데,
그 본질적인 문제를 모르면 그때는 역시 똑같이 혼란한 가운데
혼란한 지식정보 가운데 우리가 파묻히고 맙니다.
범신론(汎神論)은 무엇 인고 하면
천지우주, 자연계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다, 이런 사상이란 말입니다.
범신론을 우리 불자님들은 잘 모르는 분들은 잘 외어두십시오.
사상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그러한 하나의 주장이고
진리의 중요한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고,
천지우주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다는 것은
천지우주가 하나님이 아님이 없고,
또는 천지우주가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가 내내 모두가 다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따라서 그 범신론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 범신론입니다.
따라서 범신론을 가지면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계 모두가 다 신이 아님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얼마나 편리한 사상입니까.
그래서 자고로 위대한 분들은 대체로 적고 많고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범신론적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인이사 모두가 다 부처인지라
새삼스럽게 범신론을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인이나, 또는 이슬람 인이나, 그런 분들은
그 중세기에서는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범신론을 긍정한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을 창조했으면 자연이 종말이 있어야겠지요.
종말에는 이른바 최후의 심판도 있어야 되고 누가 구제를 해야겠지요.
모두가 다 똑같이 신이 아님이 없다 그래버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겨를도 없단 말입니다.
중세기 이른바 기독교 철학이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아닙니까.
중세 스콜라 철학이라든가 기독교 제도권의 기독교에서는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께서 한 분 위대한 분을 기억하시라고 제가 말씀드립니다마는
17세기 브르노(Giorda Bruno, 1548-1600),
브르노란 분은 이태리분인데 그 분은 도미니크라는
기독교 수도단체에서 아주 유력한 인물입니다,
그런 단체가 두 가지가 있어요.
한 가지는 도미니크회(Dominican Order)가 있고
하나는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rder)가 있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진지한 수행단체입니다.
될수록 어디에 구속받지 않고
제도권의 기독교에서도 될수록 간섭받지 않고,
아주 순수하게 검소하게 그야말로 청빈하게 수도만 주로 하는
기독교의 자유스러운 단체입니다.
그런데 브르노란 분은 도미니크회의 수사란 말입니다.
수도인 입니다.
수도인 인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15세기에 나온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이 사람이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이 분이 이른바 범신론적 사상을 가지고서
자기가 기독교 추기경인데도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진리를 제약 없이 그만치 아주 자기 소신대로 밝히신 분입니다.
그런데 브루노는 그러한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의
직접 제자는 아니지만 영향을 많이 받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범신론을 신봉하니까
제도권 기독교인으로서 범신론을 신봉하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지동설, 천동설 그래서 기독교사회에서는 천동설이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은 지구의 주변을 돈다는 그런 것이
이른바 제도권 기독교의 하나의 신조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지금 현대같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라는 태양중심설을 누가 밝힌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지동설이라, 그때는 대단히 기독교를 반역하는 사람으로 해서
무거운 이단으로 몰아붙인단 말입니다.
브르노는 그와 같이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 그야말로 대단히 원수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범신론을 숭앙했단 말입니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래가지고서 이른바 그 당시로 말하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천동설,
천동설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거 저런 거로 해서 그분이 로마 교황청에서 반역죄로 해서
체포를 당했어요.
그래가지고 자기 학설을 폐지하라고
교황청으로부터 여러 차례 권유가 있었으나
끝끝내 자기주장을 안 버렸습니다.
7년간이나 옥중에서 살다가 1600년 2월 달인가
로마의 화형장에서 불에 태워져서 화형을 당했어요.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이른바 브르노인데,
그런 소신에 가득찬 분이 있을 정도로
이른바 범신론이라 하는 것은,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참말로 하느님을 옳게 믿는 사람들은 범신론을 신봉하고,
참으로 옳게 믿지 않고서 그냥 제도권의 권위에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이른바 범신론을 따르지 않고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스콜라철학 중세철학에 있어서는
기독교사회에서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우리 불교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我)가 있고 나라는 아집(我執)이 있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니고,
아집이 없어야 비로소 불교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굉장히 허망하단 말입니다.
현재 자기 지위(地位)라든가 자기 명망(名望)이라든가
자기 재산(財産)이라든가 이른바 자아(自我)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자기 소유가 있어야 되고 거기에 따른
모든 것에 자기 권한이 있어야 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허망함을 느낀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我)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我)라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우리가 느끼는 물질은 있다고 보는 것인가.
부처님 사상에는 물질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아닙니까.
모두가 다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유물론자(唯物論者)는 모두가 다 기본적인 것은 물질뿐이다,
그런데서 이루어진 체제가 유물론 아닙니까.
막스엥겔스의 막스주의라든가, 또는 레닌주의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철학도 내내야
이른바 유물주의(唯物主義)란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없다고 그러면 사실은 막스엥겔스라든가
또는 레닌주의라든가 그런 사회주의적인 원칙이
설래야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중공사회(中共社會)도 있지 않습니까.
또는 소비에트가 붕괴가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도 역시 사회주의 사회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 사회가 설려고 하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란 것이 실존적으로 우리가 지각(知覺)하듯이
우리 감각을 통해서 있는 대상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이렇게 이해되어야 물질이 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물질을 부정해 버립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물질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좀 서운하게 생각되시지요.
금쪽같이 아끼는 자기 몸뚱이,
요새 사람들은 유난히도 몸뚱이를 아끼지 않습니까.
손도 그냥 반들반들하고 포동포동하게 잘 가꾸려고 하고
손이 시리지도 않는데 장갑도 끼고
여러 가지로 하여튼 자기 몸뚱이 금쪽같이 아낍니다.
그런 분들한테 당신 몸이 헛것이다.
허망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본래 없는 것이다.
이래 놓으면 굉장히 섭섭할 것입니다.
그러나 섭섭하다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더 높은 행복이나 더 높은 기쁨을 몰라서 그럽니다.
우리 중생들이 마음이 정화가 되어서
우리가 보다 높은 고차원의 세계로 올라갈수록
우리 행복감과 우리 환희심(歡喜心)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주 극도의 최상의 행복이
이른바 극락(極樂) 아닙니까.
극락세계라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니까
극락이라고 그래요.
내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 아무리 말씀을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 같이 보이니까
제가 다시 또 말씀을 드립니다.
나라는 것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본래 이것은 다 빈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봐서 투철하게 보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決定說)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변동할 수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가 하면.......
이 나(我)라는 것은 이것을 우리가 우선 분석적으로 봅시다.
지금 원소, 지수화풍(地水火風) 현대말로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원소가 그때그때 우리 업장에 따라서
잠시간 이 모양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잠시간 모양같이 보이면서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이른바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가화합이라.
지수화풍 사대와 거기에 우리 업장이 달라붙어서 이것이 내 것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그것이 즉 말하자면 나(我)라는 실체란 말입니다.
아무리 아껴봐도, 아무리 소중히 여겨도
나(我)라는 것은 결국은 갈 때는 소식도 없이 제 멋대로 가버립니다.
어느 순간도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나(我)라는 집합체는
그대로 가만히 있지가 않습니다.
찰나, 찰나 순간순간 변화무상하니까
순간순간 변화무상한 것은 변화하여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앞서 내 몸을 구성한 세포 덩어리나,
또 뒤에 다시 신진대사해서 구성된 세포 덩어리나,
똑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어느 때나 언제나 우리 잘 때나 어느 때나
그 신진대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면 그때는 금생의 목숨은 그만 아닙니까.
이렇게 변화해 마지않는 것을
우리 중생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은 사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참말로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허망하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이 살 필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는가.......
참말로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참말로 있는 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진여불성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우리 마음의 심리(心裏)를 파고들어가서
우리가 찾아본다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보다 더 잠재적인 깊은 마음을 아뢰야식이라고 그래요.
아뢰야식(vijnana)이라.
또 아뢰야식은 그러면 근본이 무엇인가 그렇게 들어가서 보면
그때는 여래장(如來藏)이라.
여래장 이것은 부처님이란 뜻 아닙니까.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보면 지금 현재에서
이 제한된 마음이 전부가 아니라 종당에는
부처님이 거기에 꽉 들어있는 거기에 도달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여래장은 바로 법신(法身)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는 진여(眞如)라고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고 말도 하고, 또는 법계(法界)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는 말도 하고,
또는 실제(實際)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淸華 大宗師 『마음의 고향』-

첫댓글 유심 진여 감사합니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청화 큰스님~ 감사합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다.~ ㅎ
감사합니다~
진여불성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한단 말입니다.